참과 거짓(2)-거짓 선지자
말씀:마태복음 7:15-20
요절:마태복음 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우리는 지난 주 두 문 곧 좁은 문과 넓은 문을 통해서 어느 문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진짜 문인지 배웠습니다. 오늘은 양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나아오지만 우리를 멸망으로 인도하는 거짓 선지자에 대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오늘날은 짝퉁이 판을 치는 시대입니다. 특히 명품일수록 짝퉁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명품은 갖고 싶지만 돈이 없어 싼 맛에 짝퉁을 삽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옷이나 가방이 짝퉁인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선지자를 따라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생명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짝퉁이 판치는 이 시대 거짓 선지자도 판을 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어떤 자가 거짓 선지자이며, 어떻게 그들을 구분할 수 있는지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거짓 선지자를 삼가고 생명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복된 인생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5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하셨습니다. 선지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곧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엉터리로 분별하고 엉터리로 가르쳐서, 멸망 길로 인도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이 끼칠 구체적인 손상이나 가르침에 대한 특징 등은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만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삼가라”하신 것을 볼 때 우리가 현재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를 분별한다는 것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내가 거짓 선지자다’하고 이마에 써 붙이고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외관상 참 선지자인 것처럼 철저히 위장하고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15b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거짓 선지자의 특징을 이렇게 묘사하셨습니다.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거짓 선지자들은 얼핏 보면 참 선지자 같습니다. 그들은 전통적인 말을 하고, 외관상 성경적인 경건을 보여주기 때문에 참 선지자와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다가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절대로 본색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짓 선지자들은 어떤 자를 말할까요? 구약의 배경뿐만 아니라 산상수훈의 내용 흐름을 통해서 볼 때 그들은 좁은 문, 좁은 길을 통해서 생명에 이르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는 자들입니다. 도리어 넓은 문, 넓은 길을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평강이 없는데도 ‘평강하다, 평강하다’ 외치는 자들입니다. 예레미야서와 에스겔서 등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하나님 백성다움을 잃어버리고 살 때, 이방인의 침략을 통해 그들을 징계하셨습니다. 이 때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은 참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전파하라고 하신 말씀을 그대로 백성들에게 전파했습니다. 백성들의 죄악을 지적하며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메시지를 전파하였습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한 순간에도 ‘평강하다, 평강하다’며 평강만을 외쳤습니다. 예레미야 6:14절에 보면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하찮게 여기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는 의미임)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고 했고, 또 예레미야 8:11절에 보면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고 했습니다. 또한 에스겔 13장에도 보면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고 했습니다(겔 13:10, 16). 그들은 결코 하나님 백성답게 살지 못하는 죄를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 곧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과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평강만을 역설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이니까 만사형통할 것이다’, ‘만약 전쟁이 나더라도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실 것이다’하며,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하도록 돕지 않았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모든 환란에서 건져 주신다고만 말했습니다. 그들은 듣기에 좋은 말만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을 행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뻔뻔하였습니다. 예레미야 8:12절에 보면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는 믿지 않는 이방인들에게나 임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으로 인해 백성들의 신앙은 피상적이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죄악을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회개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습관적이고 형식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며 넓은 문, 넓은 길 곧 멸망의 길로 갔습니다. 이처럼 거짓 선지자들은 양의 탈을 쓰고 나오지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입니다. 겉으로는 정통적인 말을 하고 성경적인 경건의 모습을 보여 주지만 백성들을 생명의 길인 좁은 문, 좁은 길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멸망의 길인 넓은 문, 넓은 길로 인도합니다.
신약 성경에도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에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15절에 보면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교회사에도 교회 안에 많은 거짓 교사들이 난무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거짓 선지자들이 난무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복음을 너무 피상적으로 전합니다. 예수님만 믿으면 만사형통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 진리를 신중한 의미로서 사용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믿기만 하면 된다는 피상적 의미로 사용합니다. 이들은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기보다, 긍정적인 메시지만 선포하려 합니다. 축복을 난발합니다. 교인들도 죄를 지적하면 싫어하고 축복을 많이 해줘야 좋아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많지만 도덕성은 떨어지고, 한국 교회 전체가 지탄을 받기도 합니다. 하나님 백성답게 살지 않으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하나님 백성답게 살지 않으면서 회개할 줄도 모르고, 오히려 얼마나 당당하고 뻔뻔한지 모릅니다. 짝퉁은 비싼 값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품에 비해 아주 싼 값에 살 수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값진 은혜의 복음을 값싼 은혜로 만들어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그저 주셨으나, 그 은혜는 예수님의 보혈의 피를 다 쏟으신 후에야 마련된 은혜였습니다. 그 은혜는 결코 싸구려처럼 짓밟고, 마음대로 해도 좋은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까닭은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눅 1:75)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빌 2:12).
거짓 선지자들은 겉으로 볼 때 가르침은 제대로 합니다. 그래서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가 거짓 선지자들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다고 하십니까? 16-20절에 보면 그의 열매로 그를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어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우리는 열매로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열매는 속일 수 없습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습니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17). 결코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18). 우리는 사람의 언행의 열매로부터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3:10-12절에 보면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 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말과 행동은 그 사람 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짓 선지자들을 쉽고 빠르게 분별하지는 못하더라도 결국 그 열매를 볼 때 알 수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처음 얼마 동안은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가르쳐 주신대로 사는 것처럼 가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그 가장됨이 다 나타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의 품은 뜻은 그의 행위 속에서 드러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말을 조심한다 할지라도 말은 그 사람의 정체를 폭로시킵니다(마 12:33-37; 눅 6:45).
우리가 겉으로 볼 때는 좋은 나무와 못된 나무를 잘 구분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두 나무는 외관상으로는 비슷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열매가 맺힐 때 보면 분명하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좋은 나무, 못된 나무는 그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좋은 나무에는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고, 못된 나무에는 나쁜 열매가 맺힙니다. 열매가 나무의 좋고 나쁨을 결정해 줍니다. 거짓 선지자도 나름대로의 열매를 맺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 열매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아닙니다. 곧 성경에서 말하는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좀 더 좁게 말한다면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시는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나쁜 나무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심령의 가난, 애통, 온유, 의에 주리고 목마름, 긍휼히 여김, 마음의 청결, 화평케 함, 의를 위하여 핍박 받음 등의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의를 맺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에서는 결코 이런 열매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반면에 좋은 나무는 개인에게 있어서나 그가 속한 공동체에서나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가르쳐 주신 그런 열매를 맺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한 동안은 도덕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참 선지자인지, 거짓 선지자인지는 시간이 흐르면서 열매로 드러나게 됩니다. 참 선지자는 산상수훈에서 가르쳐 주신 제자의 도를 쫓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가르치지만 그렇게 살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좁은 문, 좁은 길로 가지 않고 넓은 문, 넓은 길로 갑니다. 백성들까지 멸망의 길인 넓은 문, 넓은 길로 가도록 합니다. 결국 그들은 믿음을 무너뜨리고(딤후 2:18), 분쟁과 훼방을 조장하고(딤전 6:4-5; 딤후 2:23),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게 해서(딤후 2:16) 하나님의 백성들을 노략질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거짓 선지자를 잘 분별하고 삼가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를 어떻게 한다고 하십니까? 19절에 보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거짓 선지자에 대한 주님의 준엄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열매 맺지 아니하는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우리가 이 주님의 경고의 말씀을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거짓 선지자를 잘 분별하고 삼가며,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사람을 복된 삶을 사는 자들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