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에 “쉬운 엄마”와 아버지를 추억하는 것은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설날 동요를 부르며 흥분으로 잠 못 이룬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수십 년이 지났다. 탄핵 건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며 서성거림에도 햐얀 눈이 만드는 순백의 세상을 보노라니 절로 동심이 일어나 까치 노래를 부르며 마음이 꿈에도 그리운 고향 우담마을로 달려간다.
우리 고향 마을의 이름은 ‘우담’인데 주변 사람들은 ‘신기촌’이라고 불렀다. 전군가도와 호남선이 교차하는 사거리에서 유강리 건너편에 위치한 신작로 아래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인데 예나 지금이나 30가호가 넘지 않으며 모든 개발들이 비켜가고 있는 곳이다. 정확한 기원을 잘 모르지만 어렸을 때 들은 기억으로 전군가도와 만경강둑 공사로 전국에서 모여든 인부들 중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네댓 명이 가마니로 움막을 치고 산 것이 우리 마을의 시작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마을의 시작은 아무리 빨라도 1910년 전후였을 것이다.
우리 집의 우담 마을과의 인연은 1960년 초에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에 이리 역에서 근무를 하셨는데 정전 직후에 부산 초량 기관차사무소로 발령을 받았고 관사에서 사셨다고 하였다. 그러나 5,6년 지난 후 아버지는 다시 발령을 받고 처음 근무처인 이리역 기관차사무소로 돌아오셨다. 기대와 달리 당시 관사에 빈집이 없어 들어가지 못하자 아버지는 잠깐 머물 것으로 생각하고 자전거로 통근할만한 거리에 있는 우담마을에 사글세방을 구하셨다. 그 후 몇 번의 이사를 계획하였지만 어머니의 반대로 못하셨고 소천하실 때 까지 근 60년 동안 장승처럼 마을지기로 사셨다.
아버지는 어린 나에게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배려를 가르쳐주었다. 당시 우리 마을에는 ‘쉬운 엄마’, ‘백수네’, ‘하나님’, ‘빽갱이네’ 등 늘 가난에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기와집 한 채도 없는 마을이었고 마을 앞에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었지만 십여 마지기의 논을 가지고 있는 집은 평화네. 은숙이네, 서분네. 홍새원 뿐이었다. 논을 좀더 많이 가지고 있던 김씨네와 박씨네는 가산이 기울어서 내 초등학교 시절에 논을 이웃 마을 사람들에게 팔고 떠났다. 소유권은 없고 사용권만 있는 강 속에 한두 마지기 논을 가지고 있는 집들이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의 집들이 입에 풀칠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런 마을에서 우리 아버지는 직장에 다니는 유일한 분이었고 천성이 온유하고 겸손하신데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의 시정을 잘 알아서 묵묵히 돌보아 주셨다.
우리가 ‘대부둑’이라고 불렀던 신작로에서 마을로 내려오는 내리받이 길의 끝에 큰 공터가 있었는데 그 곳이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놀이터 한 면 끝으로 백구정 쪽에서 흘러오는 실개천이 지나고 있었고 개천 가까이에 있는 아름드리 큰 플라타너스 나무들과 느티나무 몇 그루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놀이터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길 양쪽에 집들이 늘어서있는데 우측 첫 집은 허물어져 가는 오두막집으로 ‘쉬운’네 집이었고 좌측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지주의 마름으로 일했다고 하는 박씨 할아버지네 탱자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대궐처럼 큰 집이 있었다.
‘쉬운’이는 엄마와 단둘이 살았는데 키가 작고 약하고 행동이 굼떠서 마을 청년들과 어울리지 못하였고 농사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그 어머니는 그런 아들 때문에 속상해 하며 자주 소리를 질렀다. 그 들은 면사무소에서 주는 밀가루를 배급을 받았지만 대문을 열면 바로 마루가 있는 코딱지처럼 작은 마당에 돼지와 닭을 키웠고 강 속에 손바닥만한 논을 가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쉬운 엄마’라고 불렀고 어린 우리들도 덩달아서 그냥 ‘쉬운 엄마’라고 불렀다. ‘쉬운 엄마’는 마을사람들과 툭하면 다투었고 욕을 잘 하였다. 사람들은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하면서 그를 기피하였다. 그의 얼굴은 신문에 나오는 만화 주인공 왈순아지매처럼 양쪽 광대뼈가 툭 튀어나왔고 이마에는 주름살이 깊게 파였는데 얼굴은 검고 주먹만 하였다. 키가 하도 작아서 아이들 속에 있어도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사시사철 치마저고리만 입었는데 항상 땟국이 절어 있었고 머리는 낭자를 하였지만 늘 헝클어져 있어서 때로는 귀신이 산발하고 나타난 듯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놀이터를 지나려면 그 집 앞을 지나가야 하는데 그것이 고역이었다. 돼지 똥과 닭똥이 함께 썩는 냄새가 너무 고약해서 머리가 아팠고 그가 기분 나쁠 때 그 집 앞을 지나가게 될 경우 욕을 먹기가 일쑤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놀이터에 가거나 강 속으로 조개를 잡으러 가거나 대부둑으로 나물을 캐러 가려면 그 집 앞을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그 집 앞을 지나가는 것은 ‘개조심’이라고 적힌 집 앞을 지나가는 것처럼 늘 긴장이 되었다.
하루는 그 집 앞을 지나가는데 ‘쉬운 엄마’가 대문 앞에서 나를 보고 손짓을 하였다. 나는 그가 나를 잡으려고 하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우와! 소리를 지르며 달음박질하였다. 누가 보면 그가 나를 붙잡아 때리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었다. 두 집 정도를 지나서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니 아버지가 자전거에서 내려 그에게 인사를 하고 계셨다. 아버지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머리를 끄떡이고 다시 인사를 하신 후에 자전거를 끌고 내 쪽으로 오셨다.
“아주머니가 니가 소리 지르며 도망을 쳤다고 하시는구나.”
“붙잡고 때릴까봐 무서워서…요.”
“아주머니가 그러실 분이 아니다.”
“애들이 다 무서워해요.”
“다음부터 만나면 먼저 인사를 드려라. 인사하는 아이를 싫어할 사람은 세상에 없다.”
“예 에? 냄새가 나고 욕도 잘하고 막 큰 소리를 지르는 …”
“아주머니가 가난해서 그런 거고.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고. 외모를 보고 사람을 함부로 무시하면 안 된다.”
아버지는 집에 도착할 때 까지 아주머니가 혼자 병약한 외아들을 데리고 사느라 고생하며 얼마나 힘들게 사시는지를 말씀해주셨다. 아버지는 실제로 ‘쉬운 엄마’의 어려운 생활을 동정하며 그의 모든 수고를 존경하였고 진실로 그의 행복과 평안을 빌고 계셨던 것이다.
아버지 때문에 처음에는 그 집 앞을 지나갈 때 멀찍이 서서 그가 있는지 없는지를 관망하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아버지 말대로 그 어른이 나를 때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꾸벅 인사를 하며 다니기 시작하였다. 참으로 묘하게도 인사를 하면서부터 그에 대한 두려움이 차츰 사라졌고 호기심이 생겨서 컴컴한 굴속 같은 그 집의 부엌에도 들어갔다. 비록 어머니 심부름으로 이었지만.
어쨌든 인사를 하면서 혐오감이 사라졌고 편안한 마음으로 인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새해 첫날, 설날에 용기를 내어 그 분 댁에 들려서 세배를 하게 되었다. 그는 세배하러 들어가자 몹시 반가워하였다. 그리고 덕담을 하며 당시 10환짜리 동전을 세뱃돈으로 주셨다. 당시 10환은 1원이었다. 그 1원이 내가 세상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은 세뱃돈이었다. 나는 그 1원 때문에 너무 기뻐서 날마다 설날이고 날마다 그 분에게 가서 세배하고 세뱃돈 1원을 받는 상상을 하였다. 1원이 가지고 있는 것이 너무 뿌듯한 나머지 빨간색 골덴 바지 주머니에 넣고 며칠을 주물거리고 다녔다.
세배와 인사는 ‘쉬운 엄마’가 나를 대하는 태도를 더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고 나는 그 집 앞을 지나며 언제라도 다정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할 마음을 품게 되었다.
해마다 설날이 오면 외롭고 힘들게 살았던 ‘쉬운 엄마’를 생각한다. 아무런 편견 없이 그를 대하며 진심으로 격려하며 그 모자의 행복과 평안을 빌어주던 아버지 그리고 나의 인사를 받고 수줍게 웃으시던 ‘쉬운 엄마’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덕분에 네팔에서, 미얀마에서 남인도에서 수많은 ‘쉬운 엄마’를 만나며 나는 아버지처럼 아무런 선입관도 편견도 없이 그들과 어울려 춤추고 노래하였다.
그도 떠나고 아버지도 가셨지만 나는 아직 그 분들의 기억과 눈동자 속에 있고 그 분들은 나와 함께 세상을 따스하게 바라보신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드리고 새로 사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노래를 따라 동화의 나라로 들어간다.
2025년 1월 29일 수요일 인시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