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도사벽(家徒四壁)
집안이 네 벽 뿐이라는 뜻으로, 집안 형편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家 : 집 가(宀/7)
徒 : 단지, 다만 도(彳/7)
四 : 넉 사(囗/2)
壁 : 벽 벽(土/13)
(유의어)
가도벽립(家徒壁立)
거도사벽(居徒四壁)
상여지빈(相如之貧)
일무소유(一無所有)
(상대어)
가재만관(家財萬貫)
출전 : 한서(漢書)의 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집 안에 있는 것이라고는 네 벽밖에 없다는 뜻으로, 매우 빈궁하다, 너무 가난함을 이르는 말이다. 한나라 때 문인 사마상여(司馬相如)와 탁문군(卓文君)의 고사(故事)에 보인다.
사마상여(司馬相如)는 촉군(蜀郡) 성도(成都) 사람으로, 자는 장경(長卿)이다.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고 격검(擊劍)을 배웠으므로 그 부모는 그를 견자(犬子)라고 불렀다. 사마상여는 공부를 마치자 인상여(藺相如)의 사람됨을 흠모하여 이름을 상여로 바꾸었다.
그는 재물을 바치고 낭(郎)이 되어 효경제(孝景帝)를 섬겨 무기상시(武騎常侍)가 되었으나, 이 벼슬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온 사마상여는 집안도 가난하고 직업으로 삼을 만한 일거리가 없어 평소 사이가 좋았던 임공(臨邛)의 현령, 왕길(王吉)에게 가서 몸을 의탁했다. 이때 그곳의 대부호 탁왕손(卓王孫)이 연회를 열었는데 사마상여도 현령과 함께 참석했다. 사마상여는 거문고를 연주했다.
당시 탁왕손에게는 과부가 된 지 얼마 안 된 딸 문군(文君)이 있었는데, 음악을 아주 좋아했다. 그래서 사마상여는 현령과 짜고서 거문고로 꾀어 내려고 한 것이다. 상여가 임공에 가는데 거마가 따르고 용모와 자태가 우아하고 세련미가 넘쳤다. 상여가 탁씨 집에서 술을 마시며 거문고를 탈 때 문군은 문틈으로 그를 엿보다가 마음이 끌려 반하였지만 자신이 상대가 되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是時卓王孫有女文君新寡, 好音. 故相如繆與令相重, 而以琴心挑之. 相如之臨邛, 從車騎, 雍容間雅甚都. 及飮卓氏. 弄琴, 文君竊從戶窺之, 心悅而好之, 恐不得當也.
연회가 끝나자 상여는 사람을 시켜서 문군의 시종에게 후한 선물을 주어 자기 마음을 전하도록 했다. 문군은 그날 밤에 상여에게로 도망쳐 나왔다. 상여는 곧바로 그녀와 함께 성도로 돌아왔는데 그의 집은 네 벽만이 서 있을 뿐이었다.
旣罷, 相如乃使人重賜文君侍者通殷勤. 文君夜亡奔相如, 相如乃與馳歸成都. 家居徒四壁立.
탁왕손은 대노(大怒)하여 말했다. "딸은 아주 쓸모가 없다. 차마 죽이지는 못하지만 재산을 한 푼도 나눠 주지 않겠다." 사람들 중에는 탁왕손의 마음을 돌려 보려는 자도 있었지만 탁왕손은 끝내 듣지 않았다.
卓王孫大怒曰, 女至不材, 我不忍殺, 不分一錢也. 人或謂王孫, 王孫終不聽.
집이 찢어지게 가난했으므로 문군과 사마상여는 친정 동네인 임공으로 가서 술집을 차려 생계를 꾸렸다. 탁왕손은 부끄러워 문밖출입을 하지 않다가 어쩔 수 없이 문군에게 노복 100명, 100만 전(錢)의 돈, 시집갈 때 주려고 준비했던 살림을 나누어 주었다.
문군은 사마상여와 성도로 돌아가 밭과 집을 사서 부유하게 지냈다. 후에 무제(武帝)가 사마상여의 자허부(子虛賦)를 읽고 크게 기뻐하며 그를 도성으로 불러들여 벼슬을 내렸는데, 이때부터 사마상여는 자신의 문학 재능을 마음껏 펼치게 된다.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과 반고(班固)가 지은 한서(漢書) 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에 나오는데, 사마상여의 집이 네 벽만 달랑 있었다는 말에서 유래하여 가도사벽(家徒四壁)은 집안이 빈한한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한서(漢書) 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에는 가도사벽립(家徒四壁立)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 속담의 '서 발 막대기 휘둘러도 거칠 것이 없다'와 같은 뜻이다.
이야기를 이어보자. 얼마 후 효왕이 죽고 무제(武帝)가 등극하자 상여의 집안에 볕이 들기 시작했다. 그는 궁핍한 가운데서도 학문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아 틈틈이 시(詩)와 부(賦)를 짓곤 했다. 그렇게 습작처럼 지은 자허부(子虛賦)가 무제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무제(武帝)는 그 글을 읽고 몹시 흡족해 하며 "나는 어찌하여 그 사람과 같은 시대에 살지 못하는가"라며 애석해 했다.
당시 촉(蜀)에 양득의(楊得意)란 사람이 구감(狗監)이라는 벼슬을 하고 있었다. 그는 무제에게 "이 글은 고향사람 사마상여가 쓴 것입니다"하였다. 양득의의 말을 들은 무제는 크게 놀라면서 당장 사마상여를 불러오게 하여 벼슬을 내렸다. 이리하여 사마상여에게 출세의 길이 열렸다. 이 때부터 그는 크게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탁왕손을 비롯하여 그의 집안에서는 상여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사람이 살다보면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어느 때 상여에게 여자가 생겨 소실로 들어 앉히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벼슬아치들이 소실을 들이는 것은 흔한 일이었지만 문군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문군은 온몸으로 저항했고 마침내 상여는 문군의 결기에 눌려 취첩을 단념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문군이 백두음(白頭吟)이라는 시를 지어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고 전해온다. 백두음은 두 마음을 품은 남자의 변심에 단호히 결별을 선언함으로써 여자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노래다.
하지만 백두음은 탁문군의 작품으로 보기 어렵다. 한(漢)나라 때 민간에 떠돌던 작자 미상의 노래라는 것이 정설이다. 차라리 문군이 백두음(白頭吟)을 읊어 자신의 심정을 대변했다고 하는 것이 현실성 있는 얘기가 될지 모르겠다.
상여와 문군의 애정사에 이 노래가 끼어 든 것은 아마도 두 사람의 갈등과 화해의 정점을 극적으로 승화시키는데 이 노래가 썩 잘 어울린다고 본 후세 사람들의 가필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중국의 공협현 성내에는 문군공원(文君公園)이 있고 경내에 문군정(文君井)이란 우물이 있다. 문군정은 당시 사마상여와 탁문군이 주점을 차렸을 때 사용하던 우물이었다고 전해온다.
다음은 백두음(白頭吟) 한 대목이다.
聞君有兩意, 故來相訣絶.
듣자니 님께서 두 마음을 지니셨다지요, 이에 찾아뵙고 인연을 끊고자 하나이다.
今日斗酒會, 明旦溝水頭.
오늘 비록 술상 앞에 마주 앉아 있지만, 내일 아침에는 도랑 가에서 헤어지리니.
한(漢)나라 이래 중국의 정통이념으로 군림해온 유교의 가치기준과 시비(是非) 표준(標準)에 반기를 들었던 이단아 이탁오(李卓吾), 그는 '사마상여(司馬相如)를 논한다'라는 글에서 사마상여가 탁문군과 자유로이 결합한 사실을 열렬히 옹호했다. 부모의 허락 없이 집을 뛰쳐나가 자신의 배우자를 선택했던 과부 탁문군에 대해서는 훌륭한 배필을 잘 선택했으며, 세상에서 시집을 잘 가는 방법이라고 두둔했다.
심지어 그는 사마상여와 탁문군의 결합을 아름다운 부부애의 상징으로 숭앙받고 있는 후한(後漢)시대 양홍(梁鴻), 맹광(孟光) 부부에 견주기도 했다. 나아가 주역(周易)의 구절을 인용해 같은 소리에 서로 응하고(同聲相應), 같은 기운에 서로 구하는(同氣相求) 자연스러운 현상으로까지 평가하기도 했다.
일찍이 명말(明末)의 관리이자 문인인 사재항(謝在杭)은 그의 저서 오잡조(五雜俎)에서 이탁오를 '사람으로 거의 요물에 가까운 자(此亦近于人妖者矣)'라고 타매(唾罵)한 바 있었다.
청대(淸代) 고증학의 선구자 고염무(顧炎武)는 '예부터 아무 거리낌없는 소인배로서 감히 성인에게 반기를 든 자로 이지(李贄)보다 더 심한 자는 없었다(自古以來小人之無忌憚而敢於叛聖人者 莫甚於李贄)'고 비난했다.
이런 판국이었으니 사마상여와 탁문군의 애정행각에 대한 이탁오의 평가가 정통 유가로부터 격렬한 비판과 힐난을 들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조선조 광해군 때의 허균(許筠)은 그가 생전에 그토록 아꼈던 부안 명기(名妓) 계랑(桂娘, 일명 매창 梅窓)의 죽음을 슬퍼하여 지은 애도시 애계랑(哀桂娘)에서 반첩여와 탁문군을 끌어들여 애달픈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凄絶班姬扇, 悲凉卓女琴.
처절하구나 반첩여의 부채여, 서글프구나 탁문군의 거문고여.
여기서 반희(班姬)는 후한 성제(成帝)의 후궁이었던 반첩여, 탁녀(卓女)는 탁문군(卓文君)을 가리킨다. 둘 다 당대의 재자가인(才子佳人)으로 남달리 가슴아픈 이력도 가지고 있다. 반첩여의 부채란 버림받은 여인의 불우한 신세를 상징하는 추선(秋扇), 추풍선(秋風扇)을 말한다.
탁문군의 거문고는 문군이 사마상여와 만날 때 상여가 문군을 유혹하기 위해 탔다는 녹기금(綠綺琴)을 일컫는 것이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탁문군의 거문고라기 보다 사마상여의 거문고라야 옳다. 여기서는 가인(佳人)의 허무한 죽음을 아파하면서 그에 견줄만한 인물로 두 여인을 거명했고, 각각의 인물과 인연이 있는 소품으로 부채와 거문고를 등장시켰을 뿐이다.
▣ 가도사벽(家徒四壁)과 미인 탁문군
2006년 우리나라에서도 방영된 중국 드라마 '봉구황(鳳求凰)'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른다. 봉구황이란 '수컷 봉황새가 암컷 봉황을 찾는다'는 뜻이다. 기원전 2세기경에 중국 전한(前漢) 시대의 팔방미인이자 여류시인(女流詩人)인 탁문군(卓文君)과 당대 제일의 문장가 사마상여(司馬相如)에 대한 사랑 이야기를 극화한 것이다.
서한(西漢)의 쓰촨[四川]성 린충[臨邛]의 거상이자 대부호 탁왕손(卓王孫)에게는 아리따운 딸이 있었다. 이름하여 본명(本名)은 문후(文後)라하며, 출생은 기원전 1세기경으로만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사마상여와 동시대 인물이니 그저 참고하면 될 것 같다.
시와 음률(音律)에 정통하여 문군(文君)이라는 이름으로 후일 알려지는 중국의 팔방미인이 있었다. 일찍이 16세에 출가하였으나 이듬해 남편이 죽어 나이어린 과부가(新寡 신과) 되고 만다. 친정으로 되돌아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며 지내는 딸의 심정을 달래기라도 하듯 탁왕손은 성대한 잔치를 연다.
마치 양나라 효왕(孝王)의 문인으로 가서 있다가 효왕의 서거로 더 이상 양나라에 머무를 수 없었던 사마상여가 고향 쓰촨성(四川省) 청두[成都]에서 린충으로 와 왕길의 집에 머물고 있을 때다. 왕길과 사마상여가 탁왕손의 잔치에 초대되어 사마상여는 멋진 시를 읊는다. 거문고 가락에 따라 흘러나오는 시는 다름 아닌 '봉구황(鳳求凰)'이다.
봉구황(鳳求凰) / 사마상여(司馬相如)
鳳兮鳳兮歸故鄕(봉혜봉혜귀고향)봉이 고향에 돌아 왔구나
翶遊四海求其凰(고유사해구기황)황을 찾아 천하를 날아 다녔구나
時未遇兮無所將(시미우혜무소장)때를 만나지 못해 여태 찾지 못했느냐
何悟今夕升斯堂(하오금석승사당)오늘밤 여기 올지를 어이 알았겠느냐
有艶淑女在閨房(유염숙녀재규방)아름다운 여인은 규방에 계시니
室邇人遐毒我腸(실이인하독아장)방은 가깝고 사람은 멀어 애간장 태우고
何緣交頸爲鴛鴦(하연교경위원앙)어떤 인연이면 그대와 한 쌍 원앙이 되어
胡頡頏兮共翶翔(호힐항혜공고상)함께 저 높은 하늘을 날수 있을까
凰兮凰兮從我捿(황혜황혜종아서)황이여황이여 나를따라 둥지를 틀어다오
得托孶尾永爲妃(득탁자미영위비)꼬리를 비비며 영원한 짝이 되리
交情通體心和諧(교정통체심화해)정나누고 몸이 통하고 마음이 하나 되니
中夜相從知者誰(중야상종지자수)깊은 밤 서로 좋게 지낸들 뉘 아리오
雙翼俱起翻高飛(쌍익구기번고비)두 날개 활짝 펴고 높이 날아 올라서
無感我思使於悲(무감아사사어비)더는 나를 슬프게 하지 마시오
사마상여는 녹기금(綠綺琴; 거문고)을 아주 부드럽게 다루며 자신의 심중에 있던 회포와 함께 탁왕손의 17세의 딸(나이 어린 과부)을 향해 마음에 두고 있던 연모의 정을 담아 연주했다.
세상은 탁문군의 미색을 표현하기를, "문군은 용모가 아름다웠다. 눈썹은 마치 먼 산을 바라보는 것 같았고, 빰은 마치 연꽃과 같았으며, 살과 피부는 부드럽고 윤기가 도는 것이 부용과 같아 열일곱 나이보다 앳되어 보였다(文君姣好 眉色如望遠山 臉際常若蓮花 肌膚柔滑如芙蓉 十七而寡)"고 하였다.
그녀는 중국 미인(美人)의 조건인, 원산미(遠山眉; 먼 산의 구릉을 연상하는 푸른 미인의 눈썹)에다, 연화협(蓮花頰; 연꽃같이 붉은 빰)으로 부끄러움을 감추고 있었으며, 부용부(芙蓉膚; 마치 흰 부용같이 부드러운 피부)의 피부를 소유했다고 해서 중국미인의 표본이라 한다.
본시 심성이 강직하고 어떤 남성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하던 여인이 단지 봉구황의 시와 함께 연주한 거문고 소리에 마음이 열리고 만다. 그녀 속에서 잠자고 있던 뛰어난 글재주와 탁월한 악기 연주 실력이 상여의 연주와 시의 구절이 가슴을 열게 해주는 역할을 한 것이리라.
밤은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그녀도 사마상여의 의중을 알아챈다. 결국 둘은 서로의 마음을 알아내고 첫눈에 반하고 만다. 둘은 수없는 날들을 지나온 연인들처럼 뜨거워지고 만다. 결국 그날 밤 상여의 집이 있는 성도로 둘은 도망치고 만다.
그러나 상여의 집이 얼마나 가난한지 그녀의 입에서 '가도사벽(家徒四壁; 집이 단지 4벽 뿐)'이라는 말로 그 상황을 표현했다. 그러나 이들은 백년가약을 맺고 탁문군의 집에서 타고 온 수레를 팔아 술집을 차려 생계를 꾸리기로 결정한다(文君夜亡奔相如 相如馬馳歸成都 家徒四壁立).
이단아(異端兒) 이탁오(李卓吾)는 '同聲相應 同氣相求(동기상응 동기상구)'라고, 주역(周易)의 구절을 인용. 이들의 결합을 부부애의 상징으로 까지 표현하며 옹호하였다.
▣ 사마상여의 아내 탁문군
史記 卷一百一十七. 司馬相如列傳
(사기 권117. 사마상여열전)
지독하게 가난하다는 말로 '가도사벽(家徒四壁)' 또는 '가도벽립(家徒壁立)'을 같이 쓰기도 한다. 한자풀이에서 家(집 가), 徒(단지, 다만 도), 四(넉 사), 壁(벽 벽), 立(설 립)으로 풀이하는데 徒가 여기서는 무리가 되지 않고, '단지'나 '다만'의 뜻이 함유되는 부사가 된다는 점이 특이 하다고 본다.
사마상여는 자(字)는 장경(長卿)이며 쓰촨성의 청두에 처음 살면서 재물을 관가에 바쳐 시종관이 된다. 한의 초기 경제(景帝)는 문학에 큰 관심이 없어 사마상여가 뜻을 펼치지 못한다. 하지만 한나라와 이웃한 경제의 아우 양(梁)나라의 효왕(孝王)은 경제와 달리 문학을 좋아했기에 양나라에서 온 추양(鄒陽), 매승(枚乘), 엄기(嚴忌)와 같은 문인들을 따라 사마상여도 양나라로 넘어간다.
그러나 아쉽게도 효왕이 오래 살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아 상여가 갈 곳을 잃고 다시 한나라로 넘어와서 갈등 속에서 지내며 가난한 삶을 살아야 했다. 가난 속에서 어여쁜 여인을 아내로 맞은 상여의 심정은 아마 지금 한국 젊은 남성들 가슴과 다를 것이 없을 것 같다.
아리따운 새색시를 들여와 술을 빚어 연명을 하고 살 때 장인은 딸이 고생하는 것을 보고 다시 집으로 들어오게 하려 했으나 두 사람의 굳건한 결심은 변치 않았다. 아내가 술을 빚어 팔 때 상여는 같이 나가 설거지를 도와가며 오순도순 청춘을 불사른다. 둘은 시와 음악에 흥취해서 정답게 살아간다.
그들에게 하늘이 감동을 하셨는지 무제(武帝)가 등극한다. 무제는 문학을 즐기기로 유명하다. 하루는 사마상여가 지은 '자허부(子虛賦)'를 읽어 내려간다. 자허(子虛)의 초(楚)나라 이야기와 오유(烏有)의 제(齊)나라 대화를 통해 각기 초(楚)나라와 제나라의 입장에서 자기 나라의 물산(物産)과 산천의 웅대함을 뽐내며 과시하고 있는데, 이는 각자의 나라의 명예와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당시 지식인층인 사대부들의 자만심과 자부심의 표현이기도 한 얘기들이다.
그러나 작품의 끝부분에 신분에 걸맞지 않는 지나친 사치는 옳지 못하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통치계층의 사치를 풍자하고 있는 것 또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의 얘기들을 본 한무제(漢武帝)는 깊이 감동한다. 그리고 사마상여를 부른다. 사마상여는 시종관(侍從官)이 됐다. 그 뒤로 사마상여는 사부(辭賦)를 지어 바쳐, 동방삭(東方朔)과 매고(枚皐), 엄조(嚴助) 등과 함께 무제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수사(修辭)방식은 남달라 육조문학(六朝文學)에 끼친 영향이 지대한 것으로 나온다.
남자는 배가 부르고 명예가 오르면 새로운 여자를 넘보게 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사마상여도 무릉(武陵)의 딸을 첩으로 삼겠다고 했다. 우리의 이조시대 같으면 찍소리도 할 수 없었겠지만 탁문군은 달랐다. 변심한 남성 옆에 자신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내용의 '백두음(白頭吟)'을 지어 남편에게 건네고 옷단장을 하고 나서려니 상여가 두 번 다시는 못된 생각을 하지 않겠노라며 다짐을 한다.
본시 건강하다고 할 수 없었던 상여는 후일 병이 들어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남편이 병사하자 탁문군은 뇌문(誄文; 조문)을 손수 짓는다. 사마상여가 살아생전 겪어온 역사를 하나하나 빠짐없이 다 나열하여 공과 덕으로 문장을 세분하여 영전에 바친다.
정조관념이 투철한 여인은 여성의 정조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진다. 남성도 마찬가지여야 된다는 것이다. 불결한 남성과 어찌 같이 한 이불을 덮고 살 수 있다는 것인가? 몸이 불결하다는 것은 영혼이 죄를 짓고 난 것인데 그 영혼과 같이 말을 섞는 그 자체도 문제가 되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길어야 2년 징역형에 불과했던 간통죄마저 형법에서 지워버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인륜의 역사(役事)를 더 온전히 할 수 있는 방침도 뚜렷하게 성립되지 못한 상태에서 법 밖으로 성윤리가 퇴출된 상태다. '그저 알아서 하라'는 답 같지도 않은 판단에 의해 사회가 흔들리고 있는 중이다. 여성이 불리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중국 고전에서도 남녀관계는 오직 선남선녀(善男善女)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고 있는 중이다. 아무리 가난해도 세상은 자신의 영혼을 다해 바치면 틀림없이 영화가 온다는 거다.
진실로 참신한 미녀는 정조관념이 투철하다. 어설픈 아름다움을 지닌 이들은 거짓이 포함될 수 있어 뒤집기를 자유자재로 한다는 것이다. 여인들은 거울 속에서 아름답다고 말 할 수 있다면 자신의 마음도 그러한지 스스로 확인해보는 것이 올바르지 않을까? 관상으로 볼 때 이목구비(耳目口鼻)의 완성판은 그 마음도 온전하다고 했다. 그래서 마음이 온전하면 자태도 바꾼다고 했다.
▶️ 家(집 가, 여자 고)는 ❶회의문자로 宊(가)와 동자(同字)이고, 姑(시어미 고)와 통한다. 갓머리(宀; 집, 집 안)部와 안에서 돼지(豕)를 기른다는 뜻을 합(合)하여 집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家자는 '집'이나 '가족'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家자는 宀(집 면)자와 豕(돼지 시)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예로부터 소나 돼지와 같은 가축은 집안의 귀중한 재산이었다. 그러니 도둑이 훔쳐가지 못하도록 곁에 두는 것이 가장 안전했을 것이다. 그래서 고대 중국에서는 돼지우리를 반지하에 두고 그 위로는 사람이 함께 사는 특이한 구조의 집을 지었었다. 아직도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고집하는 중국의 일부 소수민족은 집안에 돼지를 기르고 있다. 家자는 그러한 가옥의 형태가 반영된 글자이다. 그래서 家(가)는 (1)일부 한자어 명사(名詞) 다음에 붙어 그 방면의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나 또는 어떤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란 뜻을 나타내는 말 (2)어떤 일에 능하거나 또는 지식이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란 뜻을 나타내는 말 (3)어떤 것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 (4)성 다음에 붙어, 그 집안을 나타내는 말 (5)호적상, 한 가(家)로 등록된 친족의 단체 등의 뜻으로 ①집 ②자기(自己) 집 ③가족(家族) ④집안 ⑤문벌(門閥) ⑥지체(사회적 신분이나 지위) ⑦조정 ⑧도성(都城) ⑨전문가 ⑩정통한 사람 ⑪용한이 ⑫학자(學者) ⑬학파(學派) ⑭남편(男便) ⑮아내 ⑯마나님(나이가 많은 부인을 높여 이르는 말) ⑰살림살이 ⑱집을 장만하여 살다 그리고 ⓐ여자(女子)(고)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집 당(堂), 집 우(宇), 집 택(宅), 집 실(室), 집 궁(宮) 등이 있다. 용례로는 부부를 기초로 하여 한 가정을 이루는 사람들을 가족(家族), 한 가족으로서의 집안을 가정(家庭), 집안 살림에 관한 일을 가사(家事), 집에서 나가 돌아오지 않음을 가출(家出), 대대로 전하여 내려오는 집안의 보물을 가보(家寶), 집안 식구를 가구(家口), 남에게 대하여 자기 아버지를 이르는 말을 가친(家親), 남에게 자기 아들을 이르는 말을 가아(家兒), 집안 살림의 수입과 지출의 상태를 가계(家計), 한 집안 사람을 가인(家人), 사람이 들어가 살기 위하여 지은 집을 가옥(家屋), 집안이나 문중을 가문(家門), 집안의 어른을 가장(家長), 집안 어른이 그 자녀들에게 주는 교훈을 가훈(家訓), 오랜 세월에 걸쳐 사람에게 길들여져 집에서 기르는 짐승을 가축(家畜), 집안 살림에 관한 일을 가사(家事), 한 집안의 대대로 이어 온 계통을 가계(家系),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된다는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집집마다 또는 모든 집을 일컫는 말을 가가호호(家家戶戶), 빈한한 집안이라서 아무것도 없고 네 벽만 서 있다는 뜻으로 살림이 심히 구차함을 이르는 말을 가도벽립(家徒壁立), 집안이 네 벽 뿐이라는 뜻으로 집안 형편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이르는 말을 가도사벽(家徒四壁), 석은 한 항아리고 담은 두 항아리의 뜻으로 집에 조금도 없다는 말로 집에 재물의 여유가 조금도 없음을 이르는 말을 가무담석(家無擔石), 한 집안에 주인이 둘이 있을 수 없다는 뜻으로 군신의 다름을 이르는 말을 가무이주(家無二主), 집에서 먹는 평소의 식사라는 뜻으로 일상사나 당연지사를 이르는 말을 가상다반(家常茶飯), 타국이나 타향에 살 때는 고향 가족의 편지가 더없이 반갑고 그 소식의 값이 황금 만 냥보다 더 소중하다는 말을 가서만금(家書萬金), 집집마다 알려주어 알아듣게 한다는 뜻으로 누구나 다 아는 것을 이르는 말을 가유호효(家喩戶曉), 집의 닭을 미워하고 들의 물오리를 사랑한다는 뜻으로 일상 흔한 것을 피하고 새로운 것 진기한 것을 존중함을 비유하는 말을 가계야목(家鷄野鶩), 집의 닭을 미워하고 들의 꿩을 사랑한다는 뜻으로 아내를 소박하고 첩을 좋아함 또는 흔한 것을 멀리하고 언제나 새롭고 진귀한 것을 중히 여김을 이르는 말을 가계야치(家鷄野雉), 집집마다 살림이 부족함이 없이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해 살기 좋음을 이르는 말을 가급인족(家給人足), 집안이 가난하여 혼백이 땅에 떨어진다는 뜻으로 집안이 가난하여 뜻을 얻지 못하고 실의에 빠짐을 이르는 말을 가빈낙탁(家貧落魄), 집이 가난하고 부모가 늙었을 때는 마음에 들지 않은 벼슬자리라도 얻어서 어버이를 봉양해야 한다는 말을 가빈친로(家貧親老) 등에 쓰인다.
▶️ 徒(무리 도)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두인변(彳; 걷다, 자축거리다)部와 止(지; 발자국의 모양)를 합(合)하여 이루어진 책받침(辶=辵; 쉬엄쉬엄 가다)部에 음(音)을 나타내는 土(토; 땅, 흙)를 더한 글자이다. 수레 따위를 타지 않고 걸어가는 일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徒자는 '무리'나 '제자'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徒자는 彳(조금 걸을 척)자와 走(달릴 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갑골문에 나온 徒자를 보면 土(흙 토)자와 止(발 지)자만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土자 주위로는 점을 찍어 흙먼지가 날리는 모습을 표현했다. 이것은 발을 내디디며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금문에서는 여기에 彳자가 더해지면서 '길을 걷다'라는 뜻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래서 徒자의 본래 의미는 '걷다'나 '보행'이었다. 그러나 후에 같은 길을 함께 걸어간다는 의미가 파생되면서 '무리'나 '제자'를 뜻하게 되었다. 그래서 徒(도)는 (1)사람 무리의 뜻을 나타내는 말 (2)도형(徒刑) 등의 뜻으로 ①무리(모여서 뭉친 한 동아리), 동아리(같은 뜻을 가지고 모여서 한패를 이룬 무리) ②동류(同類) ③제자(弟子), 문하생(門下生) ④종(從), 하인(下人) ⑤일꾼, 인부(人夫) ⑥보졸(步卒), 보병(步兵) ⑦맨손, 맨발 ⑧죄수(罪囚), 갇힌 사람 ⑨형벌(刑罰), 징역(懲役), 고된 노동을 시키는 형벌(刑罰) ⑩헛되이, 보람없이 ⑪홀로 ⑫다만, 단지(但只) ⑬곁, 옆 ⑭걸어다니다, 보행하다 ⑮헛되다, 보람없다 ⑯따르는 이가 없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떼 부(部), 무리 휘(彙), 무리 대(隊), 무리 훈(暈), 무리 조(曹), 무리 등(等), 무리 군(群), 무리 중(衆), 무리 배(輩), 무리 류(類), 무리 당(黨), 어지러울 방(龐)이다. 용례로는 타지 아니하고 걸어감을 도보(徒步), 보람없이 애씀이나 헛되이 수고함을 도로(徒勞), 도보로 가는 길을 도로(徒路), 떼를 지은 무리나 불순한 사람들의 무리를 도당(徒黨), 헛되이 씀을 도소(徒消), 무익한 행위 또는 소용없는 짓을 도위(徒爲), 걸어서 감을 도행(徒行), 도보로 물을 건넘을 도섭(徒涉), 도보로 운반함을 도운(徒運), 함께 어울려 같은 짓을 하는 패 또는 무리를 도배(徒輩), 유명무실한 법을 도법(徒法),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고 한갓 먹기만 함을 도식(徒食), 아무 보람없이 양육함을 도양(徒養), 힘들이지 아니하고 취함을 도취(徒取), 쓸데없는 토론을 도론(徒論), 헛된 말이나 보람없는 말을 도언(徒言), 기약 없는 목숨 또는 아무 소용이 되지 아니하는 목숨을 도명(徒命), 무익한 죽음을 도사(徒死), 한갓 착하기만 하고 주변성이 없음을 도선(徒善), 화장하지 아니한 있는 그대로의 얼굴을 도안(徒顔), 사람의 무리를 도중(徒衆),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을 문도(門徒),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신도(信徒), 종교를 믿는 사람이나 그 무리를 교도(敎徒), 학생의 무리나 학문을 닦는 사람을 학도(學徒), 간사한 무리를 간도(奸徒), 목에 칼을 쓴 죄인을 겸도(鉗徒), 의를 주창하는 무리를 의도(義徒), 반란을 꾀하거나 거기에 참여한 무리를 반도(叛徒), 폭동을 일으켜 치안을 문란시키는 무리를 폭도(暴徒), 같이 한 패를 이룬 무리를 붕도(朋徒), 헛되이 수고만 하고 공을 들인 보람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도로무공(徒勞無功), 애만 쓰고 이로움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도로무익(徒勞無益), 공연히 말만 많이 하고 아무 보람이 없음 또는 부질없이 보람없는 말을 늘어놓음을 이르는 말을 도비순설(徒費脣舌), 마음과 힘을 기울여 애를 쓰나 아무런 보람이 없음이나 부질없이 일에 애를 씀을 이르는 말을 도비심력(徒費心力), 빈한한 집안이라서 아무것도 없고 네 벽만 서 있다는 뜻으로 살림이 심히 구차함을 이르는 말을 가도벽립(家徒壁立), 집안이 네 벽 뿐이라는 뜻으로 집안 형편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이르는 말을 가도사벽(家徒四壁), 하는 일 없이 헛되이 먹기만 함 또는 게으르거나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무위도식(無爲徒食), 똥도 핥을 놈이라는 뜻으로 남에게 아첨하여 부끄러운 짓도 꺼려하지 않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상분지도(嘗糞之徒), 술을 좋아하여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고양주도(高陽酒徒), 부랑자의 무리를 일컫는 말을 부랑지도(浮浪之徒), 머리를 박박 깎은 무리라는 뜻으로 승려를 홀대하여 이르는 말을 원로지도(圓顱之徒), 소인의 무리를 일컫는 말을 연작지도(燕雀之徒), 여색을 특별히 좋아하는 무리를 일컫는 말을 호색지도(好色之徒),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고 놀고먹음을 이르는 말을 유수도식(遊手徒食) 등에 쓰인다.
▶️ 四(넉 사)는 ❶지사문자로 亖(사)는 고자(古字), 罒(사)는 동자(同字)이다. 아주 옛날엔 수를 나타낼 때 가로 장대 네 개의 모양으로 썼으나 三(삼)과 혼동되기 쉬우므로 전국시대 무렵부터 四(사)를 빌어 쓰게 되었다. 四(사)는 코에서 숨이 나오는 모양을 본뜬 것이었으나 그 뜻으로는 나중에 呬(희)로 나타내고, 四(사)는 오로지 수의 넷을 표시하는데 쓴다. ❷상형문자로 四자는 숫자 '넷'을 뜻하는 글자이다. 그런데 四자의 갑골문을 보면 긴 막대기 4개를 그린 亖(넉 사)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갑골문에서는 막대기 4개를 나열해 숫자 4를 뜻했던 것이다. 그러나 亖자가 숫자 三(석 삼)자와 자주 혼동되었기 때문에 금문에서는 '숨 쉬다'라는 뜻으로 쓰였던 四자를 숫자 '사'로 쓰기 시작했다. 四자는 사람의 콧구멍을 그린 것으로 본래는 '숨쉬다'라는 뜻으로 쓰였었지만, 숫자 4로 가차(假借)되면서 후에 여기에 口(입 구)자를 더한 呬(쉴 희)자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四(사)는 ①넉, 넷 ②네 번 ③사방(四方)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네 사람을 사인(四人), 네 곱절을 사배(四倍), 넷으로 가르거나 갈라짐을 사분(四分), 사방의 경계를 사경(四境), 사방의 둘레를 사위(四圍), 사방을 돌아보아도 친척이 없다는 뜻으로 의지할 만한 사람이 도무지 없다는 말을 사고무친(四顧無親), 사방에서 들리는 초나라의 노래라는 뜻으로 적에게 둘러싸인 상태나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고립 상태에 빠짐을 이르는 말을 사면초가(四面楚歌), 주위에 사람이 없어 쓸쓸함을 일컫는 말을 사고무인(四顧無人), 길이 사방 팔방으로 통해 있음이나 길이 여러 군데로 막힘 없이 통함을 일컫는 말을 사통팔달(四通八達), 이리저리 여러 곳으로 길이 통한다는 뜻으로 길이나 교통망이나 통신망 등이 사방으로 막힘없이 통함을 일컫는 말을 사통오달(四通五達), 사면이 봄바람이라는 뜻으로 언제 어떠한 경우라도 좋은 낯으로만 남을 대함을 이르는 말을 사면춘풍(四面春風), 사해란 곧 온 천하를 가리키는 말로 천하의 뭇사람들은 모두 동포요 형제라는 뜻을 이르는 말을 사해형제(四海兄弟), 네 갈래 다섯 갈래로 나눠지고 찢어진다는 뜻으로 이리저리 갈기갈기 찢어짐 또는 천하가 심히 어지러움 또는 질서 없이 몇 갈래로 뿔뿔이 헤어지거나 떨어짐을 일컫는 말을 사분오열(四分五裂), 네 가지 괴로움과 여덟 가지 괴로움이라는 뜻으로 인생에 있어 반드시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온갖 괴로움을 이르는 말을 사고팔고(四苦八苦), 사철의 어느 때나 늘 봄과 같음으로 늘 잘 지냄을 비유하여 일컫는 말을 사시장춘(四時長春), 사주의 간지로 되는 여덟 글자 또는 피치 못할 타고난 운수를 이르는 말을 사주팔자(四柱八字), 천하의 풍파가 진정되어 태평함을 이르는 말을 사해정밀(四海靜謐), 갓마흔에 첫 버선이라는 뜻으로 뒤늦게 비로소 일을 해 봄을 이르는 말을 사십초말(四十初襪), 404 가지 병이라는 뜻으로 인간이 걸리는 모든 질병을 이르는 말을 사백사병(四百四病), 네 마리 새의 이별이라는 뜻으로 모자의 이별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사조지별(四鳥之別), 천하를 제 집으로 만든다는 뜻으로 천하를 떠돌아 다녀서 일정한 주거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사해위가(四海爲家), 사궁 중의 첫머리라는 뜻으로 늙어서 아내가 없는 홀아비를 이르는 말을 사궁지수(四窮之首), 사방의 지세가 견고하고 험한 자연의 요새로 되어 있는 땅을 이르는 말을 사색지지(四塞之地), 사방으로 흩어져 서로 따로따로 떨어짐 또는 그렇게 떼어놓음을 일컫는 말을 사산분리(四散分離), 어떤 주창에 응하여 모든 사람이 함께 행동함을 이르는 말을 사방향응(四方響應) 등에 쓰인다.
▶️ 壁(벽 벽)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흙 토(土; 흙)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막다의 뜻을 나타내는 글자 辟(벽)으로 이루어졌다. 흙을 쌓아 올려 안과 밖을 구별하여 막다, 전(轉)하여 집의 벽을 가리킨다. ❷회의문자로 壁자는 '벽'이나 '낭떠러지', '성의 외곽'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壁자는 土(흙 토)자 辟(피할 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辟자는 죄수나 하인을 그린 것으로 '피하다'나 '벗어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담벼락은 외부로 하여금 내부를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 壁자에 쓰인 辟자는 그러한 의미가 담긴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壁자는 흙을 쌓아 외부의 시선을 피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壁자가 항상 흙으로 만들어진 것만을 뜻하진 않는다. 담벼락처럼 큰 낭떠러지도 壁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적벽대전(赤壁大戰)으로 유명한 중국 허베이성의 적벽산(赤壁山)이 바로 그러하다. 그래서 壁(벽)은 (1)바람벽 (2)벽성(壁星) 등의 뜻으로 ①벽, 담 ②진터 ③군루(軍壘) ④나성(羅城: 성의 외곽) ⑤별의 이름 ⑥낭떠러지 ⑦진지를 굳게 지키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여러 사람에게 알리는 기사를 적어 벽이나 게시판에 붙이는 종이를 벽보(壁報), 벽에 색칠을 하는 일을 벽채(壁彩), 벽에 바르는 흙을 벽토(壁土), 방안의 벽에다 아궁이를 내고 굴뚝에 벽 속으로 통하게 한 난로를 벽로(壁爐), 벽에 쓰거나 써 붙이는 글을 벽서(壁書), 바람벽을 뚫어 작은 문을 내고 그 안에 물건을 넣게 된 곳을 벽장(壁欌),건물이나 무덤 따위의 벽에 그린 그림을 벽화(壁畫), 벽에 바르는 종이를 벽지(壁紙), 담과 벽을 아울러 이르는 말을 장벽(墻壁), 칸막이로 가리어 막은 벽을 장벽(障壁), 벽과 같이 깎아지른 듯한 물가의 해안 절벽을 안벽(岸壁), 깎아지른 듯이 험하게 솟은 바위를 암벽(巖壁), 성의 담벼락을 성벽(城壁), 외부로부터 쳐들어오는 것을 막는 담벼락을 방벽(防壁), 가파르고 급한 낭떠러지를 절벽(絶壁), 빈한한 집안이라서 아무것도 없고 네 벽만 서 있다는 뜻으로 살림이 심히 구차함을 이르는 말을 가도벽립(家徒壁立), 집안이 네 벽 뿐이라는 뜻으로 집안 형편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이르는 말을 가도사벽(家徒四壁), 뚫어진 창과 헐린 담벼락이라는 뜻으로 무너져 가는 가난한 집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풍창파벽(風窓破壁), 쇠로 된 성과 철로 만든 벽이라는 뜻으로 방비가 매우 견고한 성 또는 사물이 대단히 견고하여 치기 어려움을 이르는 말을 금성철벽(金城鐵壁), 벽을 향하고 아홉 해라는 뜻으로 한 가지 일에 오랫동안 온 힘을 쏟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면벽구년(面壁九年), 선종의 개조 달마 대사가 승산 소림굴에서 벽을 향하여 참선하기를 9년 동안 하여 도를 깨달았다는 옛일을 일컫는 말을 구년면벽(九年面壁), 성벽을 견고히 지키고 들의 작물을 거두거나 가옥을 철거하여 쳐들어오는 적에게 양식이나 쉴 곳의 편의를 주지 아니한다는 뜻으로 우세한 적에 대한 작전 수단을 이르는 말을 견벽청야(堅壁淸野), 얼굴을 벽에 대고 도를 닦는 것을 이르는 말을 면벽수도(面壁修道), 벽을 깨고 날아갔다는 뜻으로 평범한 사람이 갑자기 출세함을 이르는 말을 파벽비거(破壁飛去), 벽에 가득히 걸거나 붙인 글씨와 그림을 일컫는 말을 만벽서화(滿壁書畫), 벽을 향(向)하고 앉아 마음을 가다듬어 참선 수행하는 일을 일컫는 말을 면벽참선(面壁參禪), 매우 견고함을 일컫는 말을 금산철벽(金山鐵壁), 하얗게 꾸민 벽과 깁으로 바른 창이라는 뜻으로 미인이 거처하는 곳을 이르는 말을 분벽사창(粉壁紗窓), 굳건한 벽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뜻으로 안전한 곳에 들어앉아서 남의 침범으로부터 몸을 지킴을 이르는 말을 견벽불출(堅壁不出) 벽면과 천장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무덤을 일컫는 말을 벽화고분(壁畵古墳)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