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상(실화소설)
내 어린 시절 목포를 지나고 영광을 지나 한참 떨어진 Y면에 피난민촌이 있었다. 한 70여 가구의 피난민들이 옹기종기 판잣집을 지어놓고 그야말로 후줄근하게 살고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Y면사무소에서 그 피난민들에게 옥수수 가루와 밀가루, 우유 가루를 배급으로 나눠 주었다.
쌀이 귀한 그들은 쌀밥을 못 먹었다.
우리 반에 내 짝 김 미자도 피난민 촌 아이였는데, 도시락으로 밥 대신 옥수수 죽이나 옥수수 경단을 사왔다.
맨날 쌀밥만 먹던 나는 쌀밥에 질려서 옥수수 죽이나 옥수수 경단이 하도 먹고 싶어 쌀밥과 바꿔먹기 일쑤였다.
그 시절엔 솔직히 한 달에 한 번씩 옥수수 가루와 밀가루와 우유 가루를 배급받는 판자촌 사람들이 어린 마음에 나는 정말 부러웠다. 옥수수에 소금으로 간을 해서 동글동글하게 경단을 만들어 쪄서 오면 나는 그게 너무 맛있어서 매일 미자랑 도시락을 바꿔 먹었다. 그러고도 성에 안 차서 우리 어머니를 졸라서 미자 네 옥수수 가루와 우리 쌀을 바꿔 미자 네처럼 경단을 만들어 달라고 여러 번 우리 어머니를 귀찮게 조르기도 했다.
나는 그 시절 목포에서 차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Y군에서 결혼하기 직전까지 살았다. 우리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각각 배를 두 척이나 가지고 계신 선주들이라서 현금이 집안에 늘 많았다. 아버지는 돈 세는 것이 귀찮아 항상 돈을 마대자루에 넣고 숫제 세어 보지도 않았다.
우리가 조금씩 빼내서 군것질을 해도 너무 많아서 눈치도 못 챌 정도였다. 농사도 그 동네에서 최고로 많이 짓는 부농이라 머슴을 다섯 명이나 데리고 일을 하고, 집안일을 돕는 아주머니들도 여럿 있었다.
체구는 작고 아담하지만 강단 있고 부지런하고 깔끔하고 일 잘하고 사람들에게 베풀기 좋아하는 우리 어머니는 한 성격하는 아버지에게 시집 와서 아들 여섯에 딸 셋을 낳았는데, 딸 하나는 목에 종기가 나서 돌팔이 의원한테 가서 종기를 째고 오다가 수술 부작용으로 죽었다.
셋째 오빠가 Y경찰서 경찰이어서 우리 가족은 경찰가족으로 불렸다. 그 무렵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드는 백씨 성을 가진 경찰이 한 명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백경사라고 불렀다.
그는 키가 크고 피부가 희며 눈이 서글서글한 미남에 인사성도 꽤 밝고 사교성이 뛰어난 40대 초반의 매너 좋은 사람이었다. 미남에다 매너가 좋았지만, 아내가 아기를 못 낳는 것이 늘 근심이라고 했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상처를 하고 K시에서 홀로 사시는데 우리 어머니와 자신의 아버지를 중매하고 싶다고 드러내놓고 자주 그런 말을 했다.
지나치게 알뜰하고 근면 성실했던 우리 어머니는 평소에 얼굴을 비누로 한 번도 씻는 적이 없던 그런 분이셨다. 그런데백 경사가 자주 와서 자신의 아버지와의 중매 얘기를 하고 난 후부터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논일 밭일을 끝내고 집에 와서 저녁식사를 마친 후면 어김없이 향기 좋은 다이알 비누로 정성스럽게 얼굴과 온 몸을 씻었다. 백 경사가 우리 집에 드나들기 전에는 결코 우리 어머니는 아깝다며 비누를 한 번도 사용하신 적이 없는 그런 분이었다.
내가 저녁 설거지를 하면 우리 어머니는 정성들여 목욕을 하셨다. 목욕이 끝나면 그 시절엔 귀하디귀한 동동 구리무(오늘날 영양크림)를 얼굴과 손등에 조금씩 아껴가며 발랐다. 그러고나면 어김없이 길가 집에 있는 우리 어머니의 작은 봉창 문을 백 경사가 톡톡 두드려대는 것이었다.
그러면 우리 어머니는 반색을 하시면서 일어나 반가운 얼굴로 백 경사에게 문을 열어 주셨다.
미남에다가 유머 감각과 말솜씨까지 좋은 백 경사는 우리 어머니와 족히 두어 시간은 넘길 정도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가곤 했다. 늘 일에 지치고 바쁘고 힘들고 외로운 우리 어머니를 유일하게 웃게 만드는 사람이 바로 백 경사였다.
백 경사가 왔다간 날은 우리 어머니 얼굴에 평소와는 다른 화색이 돌았다. 다이알 비누 향기를 풍기며 백 경사를 반기고 백 경사와 몇 시간씩 얘기를 나누는 우리 어머니가 나는 밉고 싫었다.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는데, 어머니마저 백 경사 아버지에게 시집가버리면 우리 어린 남매들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겠지 하는 불안감 때문에 나는 솔직히 미남 백 경사가 우리 집에 드나드는 것이 영 못 마땅했다.
그래서 백 경사에게 대놓고 ‘아저씨, 다시는 우리 집에 오지 마시오. 지는 아저씨가 겁나게 싫소 잉.’ 하고 냉정한 목소리로 말하면, 사람 좋은 백 경사는 허허허 웃었다.
저녁 목욕이 끝나고 거울을 보며 동동 구리무를 바르는 엄마를 보고 너무 낯 설어서 내가 못 마땅하게 말했다.
[어메, 요즘 다이알 비누로 목욕도 하고 동동 구리무도 바름시롱 전에 안 부리던 멋도 부려쌓고 영 수상허당께.]
[이년아, 뭣이 수상허당가? 그람 종일 땡볕에 일허고 더러운 문지를 게안허게 씻쳐내야 헐 것 아녀? 도대체 머시 수상허다고 자꼬 그래쌓는다냐?]
내 말에 어머니는 약간 짜증을 냈다.
[어메가 자꼬 백 경사 아저씨랑 말허고 그라면 어메가 요즘 다이알 비누로 몸을 씻고 멋낸다고 큰 오빠헌티 나가 다 말해불랑게 알아서 하더라고 잉.]
[에라이, 삯바가지 없는 년아. 나가 느그들을 두고 시집을 가것냐? 가더라도 저 불쌍한 막둥이는 데불고 갈팅게 암것도 걱정허덜덜 말랑게. 가지도 안 허지만... 이년아, 너는 내 마음 모른다.]
우리 어머니는 그 많은 농사일을 하면서도 항상 집안을 참기름 바른 것처럼 반들반들 윤기 나게 가꾸고 관리했다. 깔끔하고 부지런하고 살림 잘 살기로 소문난 우리 어머니는 면단위가 알아주는 아주 훌륭한 요리솜씨의 소유자였다.
무생채 나물을 하나 해도 무 써는 손이 안 보일 정도로 칼질하는 손놀림이 예술이었고, 무채를 머리카락처럼 가늘게 썰어서 생채 나물을 매콤하면서 새콤달콤하게 만들어놓으면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모내기 때나 벼나 보리를 추수 할 때 동네 사람들을 놉을 하면 한 집에 한 사람을 놉 하면 그 가족 전체가 와서 하루 종일 쌀밥과 고깃국을 배불리 먹었다.
커다란 놋그릇 밥공기에 가마솥에서 고슬고슬하게 금방 지은 밥을 그릇 높이보다 밥그릇 위로 올라온 밥 높이가 더 높도록 밥을 꾹꾹 눌러 넉넉하게 퍼 담아 주었다.
[말자야, 넘에 일하면서 보리밥 먹으려고 일하는 거 아닝께로 넘을 놉 해서 쓸 때는 보리쌀은 한 개도 섞지 말고 쌀로만 밥을 먹고도 남을 정도로 겁나게 많이 해서 넉넉하게 퍼주도록 해라 잉. 접시에는 물기가 돌면 안 되니 뽀송뽀송하게 마른 행주로 물기를 잘 닦아서 반찬을 정갈하게 담아라 잉. 머리카락이 음식에서 나오면 기분 팍 상해부러서 입맛떨어징께로 음식 장만할 때는 머리 수건을 꼭 쓰고 맹글도록 해라 잉.]
동네 사람들을 놉 할 때 우리 어머니는 내게 당부하고 지시하는 것도 무지하게 많으셨다. 그 당시는 그것이 잔소리 같아서 짜증나고 듣기 싫었는데, 살면서 보니까 우리 어머니가 평소에 내게 들려주셨던 말들이 하나도 틀리는 게 없었다.
나도 우리 어머니 솜씨를 닮아서 음식 잘한다고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출장요리를 요청할 정도다. 여러 종류의 김치, 각종 나물무침, 각종 찌개, 상추겉절이, 멸치볶음, 간장게장, 홍어회무침, 기타 등등...우리 집 음식을 한 번 먹어본 사람들은 자꾸만 무슨 음식이든지 해달라고 해서 귀찮을 때가 많다.
동네 할매들은 눈만 뜨면 우리 집에 와서 살다시피하며 하루 종일 먹고 누워 쉬다가 가는 쉼터가 돼 버렸다.
내가 컨디션이 좋고 기분이 좋을 때는 문제가 안 되는데, 내 몸이 아프고 쉬고 싶은 데도 할매들이 눈치 없이 아픈 사람에게 밥을 얻어먹고 가시려고 할 때는 내 마음이 참으로 힘들다. 나도 기계가 아니고 사람인데 평생 장사를 해서 골병이 들었는지 요즘은 건강이 예전 같지 않다.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다. 날씨가 궂은 날엔 신경통이 심하다.
나는 내가 젊어서 과부가 되어 혼자 힘들게 남매를 키워보기 전에는 우리 어머니의 마음을 백분의 일도 몰랐는데, 이제 생각해보니 일찍 과부가 되어 힘들고 외로웠을 우리 어머니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아버지 잃고 홀로 된 우리 어머니는 큰 아들을 제일 의지했고, 의지하면서도 어려워했다.
내가 큰 오빠한테 뭔가를 일러바친다고 하면 우리 어머니는 질겁을 했다.
내가 저녁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때 아닌 뻐꾹새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문간방에 있는 노총각 머슴 장씨 방문이 조용히 열리더니 머슴 정씨가 소리도 없이 대문을 열고 살금살금 빠져 나갔다.
아무래도 요즘 우리 집 머슴이 연애를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꽃발을 들고 담 너머를 내다보니 나보다 두어 살 어린 봉우리가 우리 집 머슴 장씨 손을 잡고 어디론가 쏜살같이 내빼고 있었다.
[오매, 조것들 봐야. 어디서 연애질을 하고 있어. 나한티 딱 걸려부럿어.]
나는 크나큰 비밀을 혼자 손에 거머쥔 사람처럼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 가까이서 사는 봉우리 네는 사는 게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그 집에는 여러 종류의 짐승들을 키우고 있었는데, 돼지도 소도 개도 새끼들을 쑥쑥 잘 낳아 가정경제에 상당한 보탬이 되고 있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봉우리 네를 ‘짐승 이 잘 되는 집’이라고 했다.
학교 문 앞에도 못 가봐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착하고 순박한 봉우리는 나보다 나이도 두어 살 어린 것이 우리 집 머슴하고 한창 연애 중이었다.
일 년 후.
어느 날 아침 온 동네와 온 나라를 발칵 뒤집는 크나큰 사건이 우리 건너동네에서 터졌다.
초등학생들(그 땐 국민 학교라고 불렀다)이 아침에 학교에 가려면 꽤 먼 길을 걸어서 가는데, 큰 방죽 하나를 지나서 학교에 가야 했다. 방죽은 농사 짓는 데 있어 가뭄이 들 때는 방죽에 비축해둔 물이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초등학생 서너 명이 참새처럼 재잘대며 아침 일찍 학교에 가고 있는데, 방죽에 아기 시신이 둥둥 떠오른 것이다.
기절초풍한 아이들은 걸음아 날 살려라 학교로 뛰어가서 담임 선생님께 방금 전에 본 충격적인 사실을 알렸다.
선생님은 바로 경찰서에 신고를 했다.
경찰들이 대거 방죽으로 출동을 했다.
출생한지 2개월 밖에 안 된 남자 아기 시신을 방죽에서 건져 올린 경찰은 인근에 사는 모든 처녀들과 젊은 과부들을 전부 경찰서로 불러 한 사람 한 사람 조사를 했다.
죽은 아기가 2개월밖에 안 되었으니 아기를 출산한 산모는 분명 지금쯤 젖이 불어서 젖이 흐를 것이라는 데 초점을 두고 수사방향을 좁혀 나가자, 젖이 퉁퉁 불어서 젖이 흘러내려 앞섶이 촉촉이 젖은 봉우리가 최종 범인으로 지목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혐의가 없으므로 돌려보내고 봉우리만 남게 되었다.
취조를 담당한 40대 초반의 대머리 형사와 단 둘이 취조실에 남게 된 봉우리는 공포에 질려 사시나무 떨 듯 달달달 떨었다.
[앗따, 복날 개새끼 떠는 거 맨치로 고로코롬 떨덜 말고, 이름?]
[봉우리]
[안 들려, 크게.]
[봉, 우, 리!]
[장난치지 말고! 다시 이름?]
[봉우리.]
[산봉우리 같은 거 말고 사람 이름 말해보랑게. ...다시 이름?]
[봉우리.]
그제서야 조서를 쓰던 취조 형사가 고개를 들고 빤히 봉우리를 바라봤다.
[아그야, 너 시방 나하고 농담 따묵기 허자는 것이여, 뭣이여? 내가 이름 대라고 몇 번이나 신사적으루다 말했는디 아까부터 자꼬 나으 신경을 고로코롬 살살 긁어불믄 나가 쪼께 열 받것어, 안 받것어?]
[진짜 지 이름이 봉우리 맞는디라.]
[누가 이름을 고로코롬 숭허게 지어부럿어야?]
[울 어메가 고로코롬 지었지라.]
[허 참, 이쁜 가시네 이름을 겁나게 숭허게 봉우리가 뭐이당가? 봉우리는 너 몸에 달린 두 개의 봉우리면 충분하제. 안 그냐? 그란디, 불쌍헌 애기는 머땀시 방죽에 홀라당 던져부럿당가?]
[아저씨, 지는 절대적으루다 모르는 일이랑께요. 자고 일나봉께 애기가 없어져부러서 지도 지금까지 애기를 찾고 있던 중이었당께요.]
[거짓말 허덜덜 말고 솔직허게 야그혀보더라고. 애기 아부지는 누구여? 뭣허는 놈이여?]
[말자네 집 머슴이어라.]
[말자 네가 누구관디?]
[거시기 그 경찰가족 있지라우. 말자네 셋째 오빠가 경찰이랑께요.]
[그려? 그건 그렇다 쳐불고, 애기 아부지, 그러니께 그 머슴놈도 공범이제?]
[공, 공범이 뭐다요?]
[너 학교 어디까지 댕겼어?]
[지는 핵교 문 앞에도 못 가봤구만이라.]
[오매오매, 으째야 쓰까? 이 까막눈을 으째야 쓰까? 그러니께 공범이 머인가 허면, 애기를 너랑 함께 방죽에 쳐넣어 디지게 한 범인이라 그 소리여. 그 머슴 놈도 공범이제?]
[절대 아니어라. 자고 인나보니께 애기가 감쪽같이 없어져부러서 지도 간이 콩알만해져부럿당께요. 사실은 지도 겁나게 찾아 헤매는 중이었지라.]
[아그야, 여그는 거짓말허는 데가 아니랑께! 모든 정황이나 증거가 산봉우린지 산마룬지 너가 범인이라고 허는디, 너만 아니라고 오리발 팍팍 내밀어불믄 나가 열 받아 불것어? 안 받아 불것어?]
[오매오매, 미치고 환장하것네. 이 일을 으째야 쓰까. 버선 모가지맨치로 확 까뒤집어 보여줄 수도 읎고...진짜 지는 범인이 아니랑께요. 지발 쪼께 믿어주씨오 잉.]
[자, 이제 조서 끝내야 쓰것다. 성은 봉씨에, 이름은 우리고...아그야, 너 봉씨냐?]
[아닌디라. 박씬디라. 박, 봉우리.]
[크하하하. 박봉우리는 걍 봉우리보다 더 요상허네 잉. 그란디 고것을 으째 시방 야그허냐?]
[아저씨가 맨첨부텀 지 이름만 냅다 물어봤지 성은 뭐냐고 안 물어보셨응께 그라지라.]
[앗따, 참말로 깝깝시럽구마 잉. 이름을 물어보면 당연히 성까지 붙여서 말을 혀야제. 아, 안 그냐, 아그야?]
[글씨요...]
[글씨고 머시고간에 박, 봉우리 넌 태어난지 2개월밖에 안 된 애기를 방죽에 던져 디지게 한 살인범이야. 이제 이것으로 조사는 끝나부럿어.]
[오매오매, 아저씨! 지가 울 애기를 방죽에 던져 넣는 거 보셨능게라? 으째 사람이 사람 말을 못 믿고 그런다요 잉?]
[앗따, 요 가시네 말 허는 거 좀 보소 잉. 모든 정황과 상황이 너가 범인이라고 지목혀불고, 사건의 심증과 물증 또한 너가 범인이라고 딱 지목혀부는디 꼭 봐야 아능가? 이젠 다 끝났응게 더 이상 해골 아프게 질게 말 허덜덜 말더라고 잉.]
[오매오매, 환~장하것네! 아저씨, 애기는 지가 낳은 거 맞는디라. 지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지 애기를 머땀시 방죽에다 디지라고 던져 넣어 불것소 잉?]
[이제서야 시인을 하는구마 잉. 아그야, 너 멫 살 묵었제?]
[열 다섯 묵었지라.]
[열 다섯이라고라? 나도 너맨한 딸이 둘이나 있는디 우리 둘째 딸도 열 다섯 묵었어. 이제 중학생이여 중학생. 중학생이 애기를 낳는 거이는 애기가 애기를 낳아분거다 이 말이제. 고것은 자랑이 아이고 겁나게 부끄러운 일이제. 그랑께, 애기를 살해할 이유가 충분해불제, 안 그냐?]
[애기가 애기를 낳았다고혀서 다 디지게 하는 건 아니지라. 나가 머슴 아재를 좋아허는 것과 좋아허는 사람 애기를 낳은 것이 머땀시 부끄럽것소 잉. 우~들은 결혼하기로 야물게 약속꺼정 했당게요. 아저씨, 참말로 지는 애기를 안 죽였소 . 쪼께 믿어주씨오 잉.]
[야그 끝났다니께. 박, 봉우리, 넌 애기를 살해한 범인이여, 범인.]
[절대 아니랑께요!]
봉우리가 소리를 빽 질렀다.
[조용히 혀라 잉!]
취조 형사가 눈에 힘을 주고 이를 앙다물면서 겁주는 얼굴로 말했다.
봉우리가 아무리 아기를 죽인 범인이 아니라고 팔짝팔짝 뛰며 울고불고 매달리며 말을 해봐도 아무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봉우리가 두 달 전에 낳은 아기가 왜 방죽에 빠져 죽어 있는지 봉우리 본인도 모르는 일이라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2개월밖에 안 된 봉우리 아기가 방죽에 빠져 죽은 사건은 세상 천지에 봉우리 어머니 한 사람만 알고 있는 일이었다.
시어머니와 한 밭에서 김을 매면서도 하루 종일 말 한 마디 안 섞을 정도로 독하고 야멸찬 봉우리 어머니는 봉우리가 말자네 머슴하고 바람난 게 자존심 상해서 K시에 있는 봉우리 작은 아버지에게 일찌감치 봉우리를 보내버렸다.
봉우리 작은 아버지는 직업 군인이었다. 봉우리가 가정부처럼 작은 아버지네 가사 일을 도우며 하루하루 지내다가 복대를 여러 겹 두른 배가 서서히 불러 오면서 어느 날 배가 아프다고 봉우리가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그래서 봉우리를 데리고 병원에 갔더니 봉우리가 출산을 하려고 그러는 것이라고 했다.
봉우리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는 기절초풍을 했다.
소녀가 아기를 낳다니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었다. 일단 봉우리는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았다.
동네 소문이 나고 어린 봉우리가 시집을 못 갈까봐 딸자식의 장래를 위해 두 달 후 봉우리 어머니가 몰래 아기를 훔쳐 학교 옆 방죽에 빠뜨린 것이다.
하늘만 아는 이 사건을 형사들도 경찰들도 결코 알 수 없었다. 결국 봉우리는 영유아 살해 죄목으로 목포 교도소로 이송되었다.
말자의 셋째 오빠가 봉우리 어머니를 찾아가 만났다.
[아짐, 원하시면 아직 나이도 어린 봉우리를 빼내줄 수도 있으니 말씀해보시오.]
[절대로 빼낼 생각 허덜덜 마시고 감옥에서 푹 썩어불게 걍 냅두시오 잉.]
봉우리 어머니가 한사코 딸을 감옥에서 썩히라고 하는 바람에 봉우리는 목포 교도소에서 한 삼 년 푹 썩고 있었다.
봉우리가 목포 교도소에서 한 일 년 썩고 있을 때, 우리 이웃에서 또 대형 사건이 한 건 터졌다. 이웃에 청상과부의 외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결혼하자마자 꽃같이 어여쁜 신부를 남겨두고 영장이 나와서 군 입대를 했다.
결혼 후 시어머니가 아들 부부의 잠자리를 그렇게 방해하더니만, 아들이 군대 가고 나니 구박이 이만저만 심한 것이 아니었다. 갓 시집온 착하고 얌전한 며느리는 늘 숨어서 혼자 울곤 했다.
온갖 구박을 받으면서도 신랑도 없는 집에서 시어머니를 깎듯하게 모시며 살고 있어서 동네 사람들은 그 며느리를 다 칭찬했다.
어느 여름 날 그 청상과부의 아들이 첫 휴가를 나왔다.
며느리는 속으로 너무 반가웠지만,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저녁 식사 후 며느리는 설거지를 하고 시어머니는 첫 휴가나온 아들에게 그 동안 며느리가 자신에게 못되게 굴었다고 있는 말 없는 말 다 지어내어 아들에게 고자질을 했다.
어머니의 말만 듣고 외아들은 사실 확인도 안 하고 마침 설거지가 끝나서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부엌에서 나오는 아내의 머리채를 잡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
아내는 머리채를 남편에게 잡힌 채 짐승처럼 끌려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시어머니는 고소해서 죽겠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다음 날 그 순박하고 착한 며느리는 바닷가 갯벌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는데, 두 눈알이 뽑히고 자신의 긴 머래 채에 목이 친친 감긴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살인범으로 아들이 잡혔다.
경찰에 연행돼간 후 그는 솔직하게 범행을 시인했다고 한다.
지혜롭지 못한 어머니 때문에 며느리도 처참하게 죽고 외아들도 결국 감옥에 갇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동네 사람들은 그 일을 석 달 열흘간이나 떠들다가 곧 조용해졌다.
우리 어머니는 큰 올케하고 자주 트러블이 있었다.
큰 올케는 내성적이고 꽁한 성격이어서 화나면 석 달 열흘 말을 한 마디도 안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 당시는 흔한 일이었지만, 우리 막내 동생과 큰 올케 언니의 둘째 딸이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다.
우리 막내 동생이 어머니 품에서 젖을 빨고 있으면, 큰 올케의 둘째 딸도 큰 올케의 품에서 유유자적 발장난을 해가며 젖을 빨았다.
우리 어머니는 큰 올케하고 좀 잘 지내보려고 내 막내 동생은 안 업어주셔도 틈만 나면 큰 올케의 둘째 딸은 포대기로 업어 주었다. 그러면 우리 막내는 눈에 불이 들어와서 질투가 나서 못 견디었다.
우리 막내는 여섯 살, 올케 둘째 딸은 다섯 살 때의 일이다.
눈에 힘을 주고 우리 어머니 등에 업혀 있는 큰 올케의 둘째 딸을 향해 우리 막내가 으르렁거리며 욕을 했다.
[야이, C볼 년아, 우리 어메 등거리에 머땀시 업혀 있어야? 넌 느거메 있잖여? 존말로 헐 때 아 언능 울 어메 등거리에서 내려오더라고 잉.]
[야이, C볼 놈아, 느거메만 된당가? 울 한머니도 된다니께. 나가 안 내려가불믄 으츠케 할 건디?]
큰 올케의 둘째 딸도 만만치 않았다.
약간 굵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우리 막내 동생 말에 욕을 하며 천천히 따박따박 대거리를 했다.
그러면 우리 막내 동생은 속에 천불이 나서 죽겠다는 듯 팔딱팔딱 뛰었다.
[아, 어메~! 이 가시네 언능 내려불고 나 좀 업어달랑게.]
[울 막둥이가 겁나게 부애낫능갑다. 막둥아, 넌 이따가 업어줄팅게 누나헌티 언능 가봐라 잉.]
우리 어머니가 달래도 막내 동생은 입이 댓발이나 나와서 발로 마당을 툭툭 차며 나한테 와서 큰 올케의 딸이 느자구 없는 년이라고 욕을 해댔다.
우리 어머니가 큰 올케 마음을 얻어 보려고 노력하는 바람에 내 막내 동생은 주로 내가 업어 주었다. 우리 어머니가 큰 올케하고 좀 잘 지내보려고 나름 많은 노력을 했으나, 큰 올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성마른 우리 어머니는 그 일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 그토록 정성들여 매일매일 다이알 비누로 몸을 씻어대더니 백 경사 아버지에게 시집도 못 가보고 그만 고혈압으로 쓰러져 돌아가셨다.
나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아버지도 몇 년 전에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언니는 시집가고 없고 어린 동생도 있는데 정말 눈앞이 캄캄했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어두운 절망감을 느꼈다.
그 때 언젠가 한 번 백 경사를 따라 우리 집에 온 적이 있던 아담한 체구에 눈이 오목해서 성깔 있어 보이던 경찰관 고 경사가 나를 찾아 왔다.
설거지가 끝난 직후라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고 경사를 따라 나갔다. 그는 논바닥에 보리를 베어 단으로 묶어 크게 낟가리를 쌓아놓고 비가 올까봐 비닐로 덮어둔 그 옆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아무도 없는 들판 은밀한 보리 낟가리 뒤에서 고 경사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내 손을 잡고 나를 위로했다.
[말자야, 많이 힘들지? 나도 우리 어머니를 일찍 여의어서 너 심정 누구보다 잘 알아. 힘내고 열심히 살아. 응?]
[고맙구만이라.]
나는 진짜 고 경사가 내 마음을 잘 알고 위로해준다고 생각하니 진심으로 고 경사가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고 경사는 남매를 낳아서 피난민촌에서 살고 있었다.
유부남인 고 경사가 부드럽고 은근한 목소리로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말자야, 나를 친 오빠라고 생각하고 앞으로 어려운 일 있으면 내게 상담하고, 나를 의지하도록 해. 알았지?]
[지는 오빠가 셋이나 있구만이라.]
[하나 더 있어서 나쁠 거 없잖아. 그렇지?]
[......]
[말자야, 넌 올해 몇 살이지?]
[열 일곱이구만이라.]
[진짜 꽃봉오리 같은 나이네. 두서너 살만 더 먹었어도 좋았으련만. 너 나한테 시집오면 이 오빠가 잘 해 줄텐데...]
[아저씬 아짐도 있고, 아그들도 있음스롱 으째 그런 말씸을 하신당가요?]
[다들 부인 두셋씩 두고 살아. 그거 흉 아냐. 시간을 줄 테니 생각 좀 해봐 말자야. 난 말자 네가 참 좋다.]
고 경사가 내 손등을 자신의 얼굴에 비비며 말했다.
나는 속으로 ‘이놈 도둑놈이구나’ 생각하며 고 경사의 손을 홱 뿌리치고 집을 향하여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을 쳤다.
그 후로는 고 경사가 찾아와도 일체 만나주지 않았다.
심뽀가 시커먼 도둑놈 같은 고 경사 나부랭이들은 다 잊어버리고 오로지 동생 건사하고 집안일과 논일 밭일 하는 데만 내 정신을 몰두했다.
저녁 설거지를 끝낸 후 목욕을 하고 막 잠자리를 펴려는데, 건너 마을로 시집 간 내 친구 점례가 찾아왔다. 나는 반갑게 점례를 맞이했다. 점례는 누구에게 맞았는지 두 눈두덩이 시퍼렇게 멍들고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점례야, 이 가시네야, 서방은 어쩌고 왔다냐? 그라고 니 낯바닥이 으째 이런다냐 잉?]
나는 점례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호들갑스럽게 물었다.
점례는 대답대신 빨리 방으로 들어가자고 손짓만 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친한 친구 점례에게 미숫가루를 한 그릇 타주며 내가 재차 물어보자, 맛있게 미숫가루 한 그릇을 웟샷으로 마시고 난 점례가 두 번째 서방에게 쫓겨난 얘기를 했다.
[알고봉께로 창식이 그 C볼 놈이 우리 서방하고 칭구였당께.우연히 우리 서방을 만나 술 마시는 자리에서 ‘나가 니 마느레를 벌써 먹어치워부럿어’ 요로코롬 씨부려서 울 서방한테 디지게 얻어맞고 쫓겨났당께. 당장 오갈 데가 읎어서 시방 너한테 와부럿어.]
점례의 눈두덩이 왜 시퍼렇게 부었나 했더니 서방한테 맞아서 그런 것이었다.
[참말로 오지게도 맞아부럿다 잉. 창식이 그 염병할 놈은 아구창이나 쳐닫고 있을 것이제, 뭐단디 넘으 가정은 깨부수고 지랄 염병을 떤디야.]
[참말로 창식이 그 넘 느자구 없는 새끼랑게. 집에 가면 울 아부지헌티 맞아 디질 거인디 으째야 쓰까나?]
[창식이 그 넘이랑은 뭐땀시 찢어져부럿어?]
[창식이 그 넘이 바람나서 나를 쫓아냈당께. C볼 놈! ...오매오매, 저것이 머시당가? 살구랑 보리똥이구마 잉. 웬것이랑가?]
윗목에 바구니에 담아둔 살구랑 보리수 열매를 보고 점례 두 눈이 화등잔만해지며 탄성을 질렀다.
[아까 점심묵고 낮잠시간에 우리 집 머슴이 뒤란에서 따다 주길래 씻어 놨어야.]
[히히히. 꿀잠을 포기하고 요런 거 따다주는 거 봉께로 머슴이 겁나게 널 좋아하능갑다 잉?]
[큰일 날 소리 허덜덜 마랑께. 울 호랭이 오빠들 알면 디지게 맞고 쫓겨난당께.]
[머슴은 머 사람 아니당가? 지금이 뭔 조선시댄 줄 아능가? 그 때도 주인아씨와 머슴의 사랑 야그가 있었다고 하등만 잉.]
점례가 바구니를 끌어다 며칠 굶은 사람처럼 살구를 맛있게 집어 먹으며 말했다.
[울 오빠들 알면 풍기문란죄와 괘씸죄로 머슴 다리몽뎅이 분질러져야.]
[고것은 뭔 소리당가? 쪼께 쉽게 말해보더라고 잉.]
[고런 게 있당께. 그란디 가시네가 뭔 살구를 고로코롬 허천나게 쳐묵는디야.]
[살구가 겁나게 땡겨부러. 나한텐 꿀맛이랑께.]
[너 원래 살구 이런 거 겁나게 싫어했잖여?]
[글시 요상허게 오늘은 겁나게 땡긴다 잉.]
[점례 니가 겁나게 배가 고픈가보다 잉.]
결국 윗목에 씻어둔 살구 한 바구니와 보리수 열매 한 대접을 점례 혼자서 게 눈 감추듯 다 먹어치웠다.
[그란디 말자야, 나 시방 배고파 디져불것다. 짐치해서 싸게싸게 밥좀주랑께.]
[살구 한 바구니랑 보리똥 한 대접 다 먹어 치우고 또 밥을 달라고라? 밥도 안 쳐묵고 쫓겨났능가?]
[밥 쳐묵을 시간이 어츠케 있것능가? 전쟁이 터져부럿는디...]
[쪼께 지둘려 잉. 언능 밥채려 올랑게.]
나는 급히 부엌으로 가서 작은 차상에 열무김치와 고추장을 차려다 점례에게 내밀었다. 점례는 사흘 굶은 사람처럼 양푼에다 고추장과 열무김치를 다 쏟아붓고 게걸스럽게 비벼먹기 시작했다.
[가시네! 한 사흘 굶은 사람 맨치로 허천나게도 쳐묵는다.]
[고맙다 말자야. 정말 만나다. 꿀맛이랑께.]
[아무도 안 뺏어 묵응께 찬찬허게 꼭꼭 씹어 묵어라 잉. 그라고 밥 묵고 게안허게 씻고 오늘은 여그서 자고 가야.]
[요로코롬 잘해준께 고맙다 말자야.]
[점례 너도 지지리도 복도 읍서야. 창식이 넘한테 버림받아불고 둘째 서방한테도 버림받아불고 울 점례 불쌍해서 으째야 쓰까?]
[히히히. 쥐구녕에도 볓들날 있다니께 난 암시랑토 안허당께. 세상에 남자가 그 C볼 넘들 밖에 없능 것도 아니고 잉.]
[우리 점례는 초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이라 이담에 큰 복 받을 거이다 잉. 암튼 니는 성격 한 번 좋당께.]
[큰 복은 언감생심 바래지도 않어야. 걍 하루 세 끼 배부르게 밥만 잘 묵어도 난 괜찮해야. 암튼 가진 게 없응께로 성격이라도 좋아야제. 안 그냐?]
[사람 팔자는 귀신도 모른다고 허니께 점례 넌 이담에 분명히 잘 묵고 살 거이다 잉.]
[히히히히, 겁나게 고맙다 가시네야.]
내가 해주는 축복의 말에 점례는 너무 좋아하며 내 손을 뜨겁게 움켜잡았다.
점례가 두 번째 서방에게 소박맞아 온 지 얼마 안 되어 점례 어머니가 Y면 피난민촌 이북 출신 더벅머리 노총각 유 성호에게 서둘러 시집을 보내 버렸다. 점례는 시집가서 팔삭동이 첫 딸을 낳았다. 그 다음 해에는 아들을 또 낳았다. 점례는 연달아 아들과 딸을 순풍순풍 잘 낳아주니 목수 유 성호가 너무 좋아서 입이 귀에 걸렸다.
사람들이 착하고 성격 좋은 점례에게 축복의 말을 많이 해줘서 그런지는 몰라도 암튼 점례는 목수 유 성호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에 딸 둘을 낳아 잘 살고 있다. 유 성호는 심지가 굳세고 부지런해서 몇 년 안 가 목수일로 번 돈으로 집도 손수 설계하고 손수 잘 지어서 지금은 부자로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결혼에 두 번 실패하고도 노총각에게 시집가서 잘 살고 있는 점례를 보며 사람들은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고 했다.
부잣집 딸이었고, 일 잘하고 부지런한 나는 동네 사람들이 다 부잣집에 시집가서 다복하게 잘 살 거라고 했다.
나는 1973년, 내 나이 스물 넷 에 결혼을 했다. 처음엔 신랑이 제3차 베트남전쟁 참전용사인 줄 모르고 결혼을 했다.
베트남 정부가 전투부대의 파병을 요청해 와서 한국 정부는 1965년 7월 2일 ‘6.25 전쟁 당시의 우방의 파병에 보답한다’는 명분으로 파병을 결정하고 육군 2개 연대 규모의 ‘청룡부대’를 각각 편성하였다.
청룡부대는 그 해 10월 9일 베트남에 도착하여 나트랑에 주둔하였다. 그리고 ‘맹호부대’는 10월 22일 서울에서 환송식을 갖고 11월 20일 퀴논에 도착하며 여기에 주월 한국군 사령부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한국군 전투부대가 대거 베트남에 파견되고 또 그 활약상이 내외에 알려져 국위를 높이 선양하게 되자, 점차 한국군 증파의 필요성이 인정되었으며, 1966년 2월 22일에는 험프리 미국 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다시 한국군 1개 연대와 1개 사단, 그리고 이를 지원하는 지원부대의 증파를 요청받게 되었다.
이에 국회 본회의는 여야 간의 많은 논란 끝에 3월 20일 증파동의안을 가결하였다. 같은 해 4월 16일 먼저 ‘혜산진부대’가 퀴논에 상륙하여 ‘맹호부대’와 합류, 1개 전투사단을 편성하였으며, ‘백마부대’는 그 해 8월 15일 제 1진이 나트랑에 상륙함으로써 주 베트남 국군의 수효는 군단급 규모로 증가되었고, 미국 다음 가는 규모의 파병국이 되었다.
1차, 2차, 3차로 파병할 때 우리 신랑은 군대에서 차출되어
‘맹호부대’에 편성되었고, 10월 22일 서울에서 환송식을 갖고 11월 20일 퀴논에 도착했다.
우리 신랑은 총알이 비 오듯이 쏟아지는 월남전에서 목숨 걸고 싸웠다고 한다. 1971년 11월 6일 한국과 베트남 정부는 각각 서울과 사이공(지금의 호치민)에서 동시 발표된 공동성명을 통해 1971년 12월부터 주 베트남 한국군 가운데 1만 명을 단계적으로 철수시킨다고 밝혔다.
그리하여 1972년 9월 청룡부대 일부 병력의 개선을 필두로 단계적 제 1차 철수가 시작되었다. 이어 1973년 1월 24일의 베트남 휴전협정조인에 즈음하여 주 베트남 한국군의 제 2차 철수가 발표되었다. 이 계획에 따라 1973년 1월 말부터 3월 말까지 2개월 사이에 주 베트남 한국군은 철수를 완료했으며, 주 베트남 한국군 사령부도 3월 14일 철수하였다.
(월남전 파병 자료 수집 네이버 백과사전)
‘맹호부대’ 소속이었던 우리 신랑도 월남전에서 천신만고 끝에 죽지 않고 1973년에 살아 돌아와서 그 해에 나하고 결혼을 한 것이다. 그 때 중매쟁이가 우리 신랑을 소개하기를 부잣집 아들에 아주 성실하고 참한 총각이라고 중매를 해서 오빠들이 이씨 성을 가진 그 총각에게 나를 시집보낸 것이다.
신랑은 피부가 백옥같이 희고 키와 몸매는 아담하고 인물이 참 좋았다. 14년 동안 그 신랑과 살면서 지켜봤지만 행동됨됨이가 참으로 얌전하고 목소리는 항상 조용조용하고 천상 양반이었다.
밤늦게 들어와서 장사로 고단한 내가 곤하게 자고 있으면 분식 재료 구입하러 새벽시장 나가면서 혹시라도 내가 깰까봐 도둑고양이처럼 발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소리도 없이 나갈 정도로 나에 대한 배려심이 좋았다. 아이들에게도 짜증내거나 큰 소리 한 번 치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월남전 고엽제 후유증이 결혼생활 14년 내내 우리 신랑을 괴롭혔다.
한 달에 두세 번씩 도끼로 머리를 쪼개는 듯한 통증이 오면 속은 메스꺼워 금방 토할 것 같고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며 아무 것도 안 보인다고 하며 식음을 전폐한 채 사흘 동안 죽은 듯이 누워 있다가 일어났다.
결혼생활 14년 내내 우리 신랑은 고엽제 후유증으로 그런 지옥 같은 생활을 반복했다. 겪는 본인도 괴롭고 지켜보는 가족들도 참 괴로운 일이었다.
중매쟁이의 말과는 반대로 신랑은 참 가난했다. 가진 것은 X알 두 쪽 뿐이란 옛말이 딱 맞았다. 돈이 없어 병원에 가지도 못하고 이것저것 민간요법에 의지하며 신랑은 죽었다 살았다를 반복하다가 딱 14년 살고 어느 날 자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다.
초등하교 저학년 남매 둘을 덩그라니 남겨두고 신랑이 그렇게 죽어버리니 정말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하늘이 캄캄했다. 형제들은 내가 짐이 될까봐 일찍 과부가 된 나를 모두 외면했다.
내 안부를 묻거나 아이들의 근황을 묻는 전화 한 통화 없었다.
나는 두문불출한 채 몇 달을 울다가 어린 남매를 굶겨 죽일 수 없어 장삿길에 뛰어 들었다. 하루 두 시간 쪽잠을 자며 안 해 본 장사 없이 다 해봤다. 면도날로 도라지를 까면서 졸다가 손가락도 수도 없이 베였다.
겨울에 장사를 하다가 동상이 여러 번 걸려 발톱이 빠졌다 났다를 반복하는 바람에 아직도 내 발톱은 모양이 이상하고 발도 겨울만 되면 동상 끼가 재발하여 근질근질하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 몇 번인가 자살을 결심했었으나, 고아가 되어 고생할 어린 아이들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버티어 냈다.
정부의 고엽제 피해자 가족 생활지원 대책이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 발표되었는데, 우리는 돈이 없어 신랑이 병원에 다닌 기록이 없다고 그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실제로 월남전에 다녀온 고엽제 피해자라 해도 증거 자료가 되는 병원 기록물이 남아 있어야 고엽제 피해자로 인정해준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병원기록이 없었으므로 정부로부터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했다. 그 혜택이라도 받았으면 빈손으로 어린 남매를 키우느라 그토록 죽을 고생을 안 했을 텐데 생각하면 속이 상한다.
살면서 가슴 아픈 기억이 몇 가지 있는데, 우리 딸이 아기였을 때 뜨거운 고구마 가마솥에 머리부터 떨어져 머리가 덴 것과 초등학교 2학 년 때 우리 부부는 분식집을 운영하느라 바쁠 때 혼자 집에 갔다가 강도를 만나 강도가 휘두른 칼에 우리 딸이 옆구리를 다쳐 피를 많이 흘려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기억과 아들이 사춘기를 맞이하여 많이 힘들어 할 때 좋은 상담자가 돼주지 못했던 게 생각이 날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꽃처럼 예쁜 딸에게도 충분하게 잘 해주지 못했던 게 늘 가슴 아프다.
언제나 예쁜 몸매를 간직한 나를 보고 재혼하라고 권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나는 우리 아이들 마음 고생시킬까봐 항상 그 유혹과 싸워 이겨냈다.
몸과 마음이 지치고 힘들 때면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이란 노래를 부르며 내 지친 육신과 내 외로운 마음을 달래곤 한다.
아이들 잘 되라고 또 내 마음 편하자고 절이나 무속인들 찾아다니며 헛되이 낭비한 돈도 많다. 돌아보면 다 쓸데없는 짓을 한 것 같다. 그 모든 것이 바람을 잡으려는 헛된 행동들이었다.
올케의 둘째딸에게 엄마 사랑을 빼앗기고 늘 사랑에 목말라 징징거리는 것을 내가 업어서 키운 막내 남동생은 고생고생한 끝에 교수가 되었다.
가끔 엄마 역할을 한 내게 감사와 위로의 편지를 보내주는데 필체와 문장이 가히 예술이다.
읽고 또 읽어도 감동이고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내가 고생한 것을 알아주는 그 자체가 참으로 고맙고 위로가 된다. 내가 힘들고 마음이 어려울 때면 그 남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도 하고 상담도 한다.
그 동생은 항상 내게 친절하고 인생의 길잡이 같은 역할을 해주고 도인 같은 말을 해준다.
그 동생의 말을 한참 듣고 있으면 불같이 노했던 마음도 바람처럼 공허했던 마음도 자식들 때문에 속상하고 서운했던 마음도 차분하게 위로가 된다.
생각할수록 참 고마운 동생이다. 지금까지 두서없이 내가 살아온 생애와 내 이웃들의 삶을 회상해봤다.
점례가 피난민촌 유 성호에게 시집간 후 목포 교도소에 있던 봉우리도 3년 만에 출소를 했다.
출소한 지 두 달 만에 봉우리 어머니가 봉우리를 한 씨네 머슴에게 시집을 보내 버렸다. 절대로 머슴에게는 시집 안 보낸다고 그토록 큰소리치더니 결국 우리 집 머슴이 아닌 다른 집 머슴에게 시집을 보낸 것이다.
한 씨네 머슴 최 씨는 체구가 아담하고 강단이 있었다.
봉우리는 한 씨네 머슴 최 씨에게 시집가서 아들 딸 낳고 몇 년 조용히 잘 살다가 한 씨가 갑자기 무슨 병이 있었던지 죽는 바람에 구멍가게를 하나 장만해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살고 있다고 한다.
그 당시 우리 집 머슴살이를 하던 그 사람들은 세월이 흐른 후에 다 부자가 되어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와 기쁘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씁쓸한 것도 사실이다.
봉우리도 내 친한 친구 점례도 팔자 따라 나름 잘 살고들 있다고 한다. 가끔은 그 친구들이 그리울 때도 있다. 어쨌거나 나는 그 누구도 의지하지 않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내고 있다. 내가 낳은 아이들 안 아프고 건강하게 잘 사는 것을 만족으로 여기며 하루하루 감사하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