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aver.me/GhNC5zJd
니체의 정오(正午)/ 말숨
니체는 정오(正午)의 시간을 사랑했습니다. 낮 12시, 태양이 그 빛과 열기를 최고조로 불뿜는 시간, 정오(正午)를 찬사했던 것입니다. 그 의미와 해석은 무엇일까요? 오늘 그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위대한 정오란, 인간이 자기 행로의 한복판인 동물과 초인의 중간에 서서 저녁으로 향하는 자신의 여로를 자기의 최고의 희망으로서 축복할 시간이다. 그것은 새로운 아침으로 향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때 몰락해 가는 자는 자기 자신을 축복할 것이다. 그는 초인을 향해 건너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인식의 태양은 정오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초인이 살기를 원한다.”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정오가 갖는 최후의 의지가 되게 하라!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98쪽)>
니체의 정오(正午) 이야기에 앞서서 다석 유영모 선생의 ‘새벽’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다석 선생의 삶과 관련해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그이는 새벽 시간에 정좌해서 앉아서 그 자신의 머릿속에서 폭발하는 영감(靈感)을 기록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다석일지>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선생의 저서는 아직 채 밝지 않는 미명(未明)의 새벽 시간에, 그이의 영혼 속에서 폭발하는 ‘하느님의 예지(銳智)’를 기술한 것입니다. 난해(難解)하기 이를 데 없는 그 다석일지를 제대로 읽지는 못했지만, 간헐적으로 읽은 ‘부실한 제자’로서 감히 평가하자면, 다석일지는 곧 새벽의 시간이 빚어낸 ‘하느님의 예지’인 것입니다.
우리 역시 새벽의 시간을 사랑했습니다. 어느 날 새벽 문득 잠이 깨는 날이 되면, 어김없이 옷을 추슬러 입고 길거리로, 들판으로, 얕은 야산으로 ‘새벽 산책’을 나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새벽길을 걷고 또 걸으면서 우리 나름의 ‘하느님의 예지’를 연마(鍊磨)했던 추억이 있습니다. 특히 삶에 좌절하고, 죽음 앞에서 절망해질 때, 우리는 하느님의 예지를 탐구하면서 우리 스스로의 남루한 현실을 이겨내고자 혈투(血鬪)했던 것입니다. 십수년 전 구리 시에서 목회할 때, 교회를 사임해야만 했던 그때에도 ‘장자 못 공원’을 비추던 새벽 길의 샛별을 바라보면서, 어려운 결정을 내린 바 있었습니다. 또 경제적 빚의 굴레에서 몸부림 칠 때, 어찌 해야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을 새벽의 시간이 일깨워주는 ‘하느님의 예지’ 덕분에 돌파했다고 하면, 좀 지나친 과장이겠지요? 아무튼 우리 역시 그 새벽의 시간이 일러주는 ‘하느님의 예지’를 탐구하면서 ‘삶과 죽음’의 노래를 떠듬떠듬 불러제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 그리고 지금은 세상을 떠난 김상민 시인과 함께 <새벽 산책>이라는 제호로 어줍잖은 월간 소책자를 만들던 추억도 있었습니다. 그 <새벽 산책>이 책꽂이 어느 구석에 있을 텐데 ….
그런데 니체는 달랐습니다. 그이는 ‘새벽’이 아니라 ‘정오’의 시간에 주목했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니체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서 다시 다른 사람, 즉 철학자 헤겔의 ‘석양(夕陽)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철학에 관심이 있어서, 헤겔철학의 저술들도 들춰보긴 했습니다만, 솔직히 그다지 큰 관심이나 공감은 되지 않았습니다. 뭐랄까요? 저는 거대한 체계와 서사 구조를 갖고 있는 헤겔철학보다는 개인의 내면에 집중하는 실존주의 철학이 마음에 와 닿았고, 그래서였는지 뭘 잘 모르면서도 왠지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서들을 읽으면서 젊은 날을 보냈습니다. 다만 <헤겔철학과 현대신학>이라는 강의를 들을 때라고 생각되는데, 잠시 잠깐으로 “헤겔 철학을 제대로 공부하면 재미있겠는데” 하는 생각을 잠깐 하기는 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 헤겔이 자주 언급했다는 어록,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석양(夕陽)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날개를 편다”를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이리저리 생각해 보곤 했던 것입니다. 그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바, 철학적 사유는 철저하게 성찰(省察)의 사유(思惟)라는 것입니다. 철학은 미래의 일을 예지(叡智)하는 사유가 아니며, 현실의 사건을 통찰하는 사유가 아니며, 다만 석양의 때에, 그러니 한 낮의 모든 사건과 사연들이 지나간 연후에, 그러니까 석양의 때가 되어서 비로소 그 인식의 지평을 열수 있는 ‘성찰의 사유’라는 것이었습니다. 헤겔에 있어서, 아니 모든 철학자와 사상가들에게 있어서 ‘철학이나 사상은 곧 성찰의 사유’였던 것입니다. 신학적 차원에서 말씀드리면, 헤겔 류의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했던 차원은 한 낮의 모든 사건들이 지나간 후, 석양의 시간이 빚어내 주는 ‘하느님의 성찰’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왠지 니체는 달랐습니다. 그이는 ‘새벽’이 아니고, ‘석양’도 아니며, 한 낮 12시, 정오의 시간에 주목했습니다. 왜였을까요? … 글쎄요. 여러 가지 차원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우리가 이해하는 바를 편안하게 말씀드리면, 니체는 “하느님을 창조해야 했기”(?) 때문에 대낮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 식으로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하느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일을 해야 하는데” 그 일, 그 창조의 일은 한 낮, 정오의 시간에 절정을 이룰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니체는 새벽의 시간이 일깨워주는 신적인 예지 차원이나 석양의 시간이 빚어내 주는 신적인 성찰의 차원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사유(思惟)를 했던 것이며, 그것은 곧 한 낮의 시간에 “하느님을 창조한다”(?)는 식으로 밖에 달리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창조한다”는 이 말이 갖는 오류와 오해와 불편함과 기괴함을 충분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이 말을 사용하는 이유는, 니체가 이야기하고 있는 초인(超人)의 경지는 결국 “하느님을 창조한다”는 차원임을 강렬하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창조한다”는 이 말이 갖는 비(非)언어성, 비(非)논리성, 비(非)합리성, 비(非)영성성조차도 잘 알고는 있지만, 그러나 거꾸로 그렇기 때문에 그 말속에 담겨져 있는 놀라운 신성성(神性性)을 이야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미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한 신(神), 그 신(神)이 반드시 다시 살아나야만 하는데, 그 새로운 하느님은 새벽의 예지(叡智)나 석양의 성찰(省察) 따위로는 어림도 없으며, 오직 ‘정오(正午)의 창조’를 통해서만 부활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니체의 정오(正午)를 ‘그렇게’ 해석하고 싶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