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추닷컴에 수년전에 명예의전당에 올라온 글입니다. 지금은 후추닷컴 주인께서 명예의전당의 글을 공개 거부하셔서 구할수없는데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구해서 제가 혼자 가지고 있는 글입니다. 그래서 스크랩과 복사는 금지하게 설정했어요.이점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후추닷컴 주인께서 내리라고 하시면 삭제하겠습니다.
차범근감독님을 만나서 인터뷰형식으로 만든 글이에요. 차범근 감독님에 대해서 궁금하셨든 분들은 참고하세요.
프랑크푸르트가 재정상 어려워서 이적을 할려고할때 독일리그가 최강이라서 머문게 아니고
이태리로 갈려고 맘을 먹으셨나봅니다. 이태리 구단들 다 접촉하시고 결론은
인터밀란이 아니라 ac밀란으로 갈려고 했다네요. 근데 복잡한사정이 있었나봐요.
그래서 레버쿠젠으로 결정했다고 함
Pre-Prologue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 후추 명예의 전당을 쓴다. 지난 815 광복절 특집 '불명예의
전당'을 마치고 명전의 간판을 닫은 지 어느덧 5개월, 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동
안 우리 축구 계는 또 한번 '대표팀 감독' 문제로 한바탕 홍역을 겪었고 결국엔 거스
히딩크란 유럽 축구의 명장 영입으로 자그마한 희망의 불씨를 태워 본다. 바로 이 시
점에서 이번 명전을 장식할 주인공이 바로 다름 아닌 차범근이란 사실이 필자를 사뭇
당혹케 하기도 한다. 우리가 그토록 갈구하던 외국인 지도자… 필자는 차범근을 늘
'외국인 지도자'로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차범근 같은 '외국인 지도자' 싫다고 할
때는 언제고… 아니, '우리 정서를 이해하고 한국 축구 풍토를 얼싸안을 수 있는 지
도자가 필요하다'며 온갖 '허수아비 공개 쇼(Show)"를 펼쳐가며 허모 감독을 선임할
때는 또 언제고… 2년도 채 못되어 이번엔 또 '허정무 갈아 마시기'를 마다하지 않는
그 잘난 우리 축구 계의 '풍토'… 어디 가서 '한국 축구 팬'이라고 말하기가 망설여
진다.
지난 5개월 동안 '마음 고생'을 꽤나 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명전
끝났냐?', '후추도 명전 소재가 바닥났다', '후추가 예전의 참신함을 잃었다'… 후추
인들의 이런 관심 어린 지적의 근원 역시 명전이 '놀고 있기 때문'이란 사실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지난 10월 초에 단행된 개편 준비 작업 즈음에 '명전을 잠시 쉬고
'대박'으로 보답하자'는 후추 주방의 내부 결정, 차범근의 예상 밖의 조기 귀국, 한
국 축구 '총체적 위기' 분위기, 그리고 '후추 = 명전' 등식의 파괴 전략 등의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명전의 재개 시점이 늦어지게 되었다. 그러던 지난 12월 어느 오
후, 차범근의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그를 잠시 만나게 되었다. 평소 말수가 적은 차범
근은 그날 역시 필자와 긴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그날 저녁 필자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무슨 이유였던지 그날 밤 새도록 차범근의 명전이 머리 속에서 구상되었고
새벽에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고민하다간 영영 명전을 다시 시작할 수 없을지
도 모른다. 지르자, 지금!'… 그리곤 다음 날 후추 주방 식구들에게 약속을 했다. 이
번 크리스마스 선물은 차범근의 명전 기사가 될 것이라고…^^ 지난 1년 넘게 명예의
전당을 운영해 오면서, 차범근의 헌액 시점을 놓고 많은 고민을 하기도 했다. '차범
근의 임팩트를 능가할 사람은 누군가? 명전에 있어서 post-차범근은 누군가? 그렇다
면 차범근으로 명전의 피날레를 장식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닌가?'… 두려움이
앞선 기우였다. 차범근이 소개된 후에 그의 명전을 능가할 만한 글을 쓸 자신이 없었
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걱정한다고 해결 될 일
도 아니고, 'Post-차범근 명전' 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다시 시작한다. 비록 후추인 여러분들에게 '아주 특별한 크리스마스
선물'은 되지 못하겠지만 새해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이렇게 필자가 알고 있던 차범근
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차범근의 명전은 2회에 걸쳐 실리게 될 것이다. 어렵
게 다시 시작한 만큼, 필자가 알고 있는 차범근에 대한 많은 것을 후추인들과 공유하
기 위해서 말이다. 단 한가지 미리 약속하고 싶은 부분은 있다. '조카 뻘 되는 측근'
을 믿고 인터뷰에 응했다가 결국은 대한민국 축구 사상 최대의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
차범근에게 또 다른 '조카 뻘 측근'에게 같은 배신감을 느끼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
말이다. 차범근은 '명전의 토픽'이기 이전에 후추의 영감이요, 대한민국의 보물이요,
필자의 영웅이다. 차범근 명전 기사에 대한 그 어떤 아쉬움 또는 실망감을 남길지언
정 이제 겨우 다시 박동하려고 하는 그의 심장에 다시 한번 난도질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언제나 필자의 가슴 속에는 영웅으로 기억되길 원하기 때문이다. 후추는 사
라질 수 있어도 차범근은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Prologue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 것인지… '너무 할말이 많아서 쓸 말이 없다' 란 느낌
을 후추인들은 공감할 수 있을는지? '축구인 차범근'에 대한 필자의 기억을 자극하는
장면이 몇 개 있다. 전봇대만큼 두꺼운 허벅지를 힘차게 움직이며 축구장의 양측면을
무섭게 돌파하던 한국 축구 '부동의 스트라이커' 차범근, '바가지 머리'에 'Minolta'
란 글씨가 새겨진 자주색 프랑크푸르트 유니폼을 입고 서울운동장을 후끈 달구었던
'민간 외교관' 차범근, 검정색 양복 차림에 두 팔을 번쩍 치켜들며 벤치에서 솟아오
르던 일본 요요기 경기장 안의 '차기 대통령' 차범근, 그리고 핸드캐리(Hand Carry)
가방 하나를 들고 황급히 김포공항을 빠져나가던 '민족의 원흉' 차범근… 최순호가
날랐고 이동국이 물이 올랐다고 각종 언론에서 아무리 떠들어 대도 필자는 별 느낌
이 없었다. 허정무 감독이 참신하다는 평을 할 때에도, 외국인 감독이 절실하다고 입
을 모을 때에도 필자는 별 느낌이 없었다. 김흥국이 방송에 나와서 월드컵 홍보가 어
떻고 한국 축구를 사랑하는 마음이 어떻고 해도 필자는 별 느낌이 없었다. 오직 필자
의 '축구 우주' 속엔 차범근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일반 축구 팬들은 필자가 가졌던 '특권'을 누릴 수 없었음도 인정한다. 바로 차범근
의 숨소리를 곁에서 듣고 그의 축구 세상을 곁눈질할 수 있었던 그런 '특권' 말이다.
그 점이 가장 안타깝다. 축구를 사랑하는 이땅의 모든 팬들이 단 5분 만이라도 그와
같은 자리에서 그저 그의 존재를 함께 느낄 수만 있었더라면… 필자는 차범근을 수도
없이 만나봤지만 그를 만날 때 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 이유는 어쩌면 그가 '차
범근'이라서 보다는, 그 만큼 축구로 인해 우여곡절을 많이 겪어야 했던 인물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 인지도 모른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생각일 수도 있지만 필자는 그
를 대할 때 마다 '연민의 정'을 느끼곤 한다. 그는 동정 받기를 거부하고 동정이 필
요도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는 언제나 필자에게 '상처'로 다가온다.
우리나라 국민 중에 차범근만큼 축구를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있을지도 모
르지만 차범근만큼 오랫동안 우리나라 축구와 함께 한 사람 그리고 그 만큼 우리나라
축구를 위해 한 평생을 바친 인물도 드물 것이다. '축구를 위하는 기준이 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꽤 있을 것이다. 그 '기준'은 아마도 그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
이 사실 제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차범근 만큼 축구를 통해 많이 번 사람도 없다'
라는 지적도 나올 법 하다. 차범근 만큼 축구를 위해서 '번만큼 토해낸' 사람도 없다.
'축구선수 차범근은 인정하지만 감독 차범근은…' 이 말도 꽤 들린다. 한 때는 차범
근 감독 대통령으로 뽑자는 말도 있었다. 다음은 뭐? 여기까지 읽고 차범근 광신도의
'마지막 발광'쯤으로 생각이 드는 독자들은 이쯤해서 후추를 나가는 게 좋을 듯 싶
다. 앞으로 약 100여 페이지에 걸쳐서 왜 필자의 생각이 그럴 수 밖에 없는지를 아주
다부지게 설명하게 될 테니, 애당초 차범근이라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들
에겐 심한 '고문'이 될 것이다. 이 글은 차범근을 위한 '마지막 발광'이 아니라 한국
축구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이다. 후회해도 그리워해도 부를 수 없었
던 차범근을 향한 '연가(戀歌)'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스포츠를 사랑하는 이유는 필자 스스로가 바로 스포츠를 통해서 꿈과 희망을
키우며 살아왔던 경험자이기 때문이다. 스포츠란 분야에서 뛰던 선수들을 통해서 미
래를 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포츠 영웅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일을 기약했기
때문이다. 영웅이 없는 유년기는 서글프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우리 모두는 이땅의
새싹들에게 '못할 짓'을 하고야 말았다. 차범근이란 영웅 한명을 그들 곁에서 앗아갔
기 때문이다. 차범근의 명예 회복은 사실 후추의 손으로 해서는 안 된다. 후추로는
너무 약하다. 우리가 그에게 범한 죄악은 이땅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사람들의 힘과
입을 모아서 만천하에 공개적인 사과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언제
나 그렇듯이 우리 모두의 너무 쉽게 잊는 성향 떄문에 그리고 차범근 역시 그들에게
반성의 기회를 주지 않고 있기 때문에 후추의 미약한 힘을 빌어 감히 그 엄청난 일
의 엄두를 내본다.
차범근의 명예의 전당은 이미 오래 전에 예견된 일이었다. 성급한 후추인들은 '차범
근을 명전에 올리지 않고 무슨 진정한 명예의 전당이냐?'고 항의했지만, 차범근이 후
추 명예의 전당의 앞마당에 나타날 날은 그야말로 '시간문제'였다. 아니, 어쩌면 '시
간문제'도 아니었을지 모른다. 후추가 존재하는 이유 역시 '차범근의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필자는 이미 여러 차례 공식 인터뷰 상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필자가
후추를 구상하고 준비하던 시절, 당시 중국 심천에 있던 차범근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후추의 탄생은 영원히 지연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를 중국에서 만났던 날, 필자는 그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한참 손 아래 후배가 제대로 사과 또는 위
로할 입장도 못 되었다. 당시 '무기력' 이란 말을 사전에서 뒤져봤더라면 아마도 필
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을 것이다. 중국의 한 작은 도시에서 시골 농부처럼 검게
탄 얼굴로, 여전히 축구 트레이닝 복은 입은 채, 말도 통하지 않는 중국 선수들을 독
려하며 지도하던 차범근을 위해서 할 수 있었던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여기 오니
까 마음이 더 편해.."란 말을 듣는 순간 위안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가슴 한구석이 저
려왔다. 불과 1년 전 대한민국 전역을 '차범근 전염병'으로 앓게 했던 그 장본인이
어느덧 그토록 고요하고 머나먼 이국 땅에서 손짓, 발짓 다 해가며 변함없이 '차범근
축구'를 전파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사람이 왜 여기서 이러고 있
어야 하나…?' 하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후추 개편에 맞추어 차범근의 명전 기사를 준비하기 위해 작년 8월 말 필자는 독일을
극비리(?)에 방문했다. 후추를 계속 지켜봐 왔던 후추인들은 대충 짐작했겠지만, 필
자의 성격 상 설기현 선수를 방문하기 위한 목적 하나 만으로 그 머나 먼 유럽행 비
행기에 오를 리가 없었다. 당시 2년 가까이 고국을 떠나 야인 생활을 하고 있던 차범
근의 독일 생활, 말로만 듣던 독일에서의 차범근의 명성, 그리고 그와 함께 80년대
독일 분데스리가를 화려하게 수 놓았던 휄첸바인, 그라보스키, 니켈.. 등을 만나기
위해서 말이다. 3박4일 동안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머무르며 그가 묵고 있던 집,
그가 애지중지하던 자동차, 그가 부상 당했을 때 치료 받던 재활원, 그리고 그의 아
침식사까지… 모조리 전부 비디오 카메라에 담아왔다. 4시간 가까이 진행 되었던 차
범근과의 동영상 '노컷 인터뷰' 까지 말이다. 어쩌면 대한민국에선 유일하게 최근 차
범근과의 동영상 인터뷰를 확보했던 후추였지만, 그 자료를 쉽게 공개할 수가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크고 작은 언론 단체에서 "같이 터뜨리자"란 제의가 쏟아졌지만, 필
자를 믿고 그 어떤 거리낌도 없이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그의 인터뷰를 '장
사 속'으로 공개할 순 없었다. '논란'과 '자극', '노출'과 '제휴' 만이 살아 남는다
는 인터넷 업계에 종사하는 필자의 이런 속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과연 몇 명이
나 될까?
차범근은 이제 새로운 출발을 꿈꾸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홀로 외롭게 지켜온 차범
근 축구 교실의 제2의 도약을 꿈꾸며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아이들 가치는 일
은 내 천성인가봐… 걔들이랑 공 찰 때가 제일 좋아.."란 말을 들으며 그런 그에게
자그마한 힘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쓸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가 우리 축
구를 위해, 그리고 우리 축구 팬들을 위해 외로운 등대처럼 묵묵히 존재해 주었던 것
처럼, 이제 두 번 다시 차범근을 우리 곁에서 떠나보내지 않을 것을 약속하면서 차범
근의 이름을 외쳐본다. 필자의 아주 소박한 소망 하나로 후추 명예의 전당 제26호 헌
액자로 차범근을 불러낸다. '사람들이 단 5분 만이라도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
다면 그에 대한 많은 편견과 오해가 사라질텐데…' 하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말이
다. 후추인들이 이 글을 통해서 차범근의 참 모습을 단 5분 만이라도 함께 느낄 수
있다면 더 이상의 욕심은 없다. 미진하나마 이젠 우리가 그에게 돌려줄 차례가 왔으
므로, 부족하나마 이젠 우리가 그를 보호해 줄 때가 왔으므로, 늦게나마 이제는 그에
대한 진실이 밝혀질 때가 왔으므로…
'후추의 영감 (Inspiration) 차범근' - 99년 5월 중국
후추를 떠 올리는 많은 독자들은 으레 후추 '명예의 전당'을 연상하곤 한다. 반가운
일이기도 하지만 편집진 입장에선 씁쓸한 사실이기도 하다. '명예의 전당'이 너무 커
버렸다는 사실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명.전 이상으로 심혈을 기울여 기획하고 진행하
고 있는 다른 코너들에 대한 미안함 마저 들기도 한다. 그런 '명예의 전당' 이란 코
너를 구상하기 위해 1999년 3월, 필자는 경기도 모처의 한 콘도 방에서 후추의 다른
파트너들과 함께 '명전 후보 명단'을 작성해 나갔다. 명전의 기본 취지와 철학을 모
두가 공감한 후, "자, 그럼 누구부터 할까?"하는 질문에 참석자 모두의 입에선 한 이
름 밖에 나오지 않았다. 차범근이었다. 명전에게 차범근은 분명 피해갈 수 없는 선택
이었다.
지금 소개되는 이 글은 필자가 작년 5월, 당시 소재지였던 홍콩에서 쓴 글이다. 어느
토요일 오후, 우연히 알게 된 차범근 감독의 중국 연락처로 전화를 하게 되었다. 그
리고 즉석에서 다음날 약속이 잡히게 되었다. 97년도 월드컵 예선 당시, 온 세상을
뜨겁게 달구었던 98 월드컵 대표팀의 지도자와 대표팀 후원사의 직원 입장에서 그와
의 첫 만남을 가진 후, 돌이킬 수 없는 희로애락의 시간과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사
이에 둔 세월이었지만, 그들은 필자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날 차범근과 그의 가족
들과 함께 보낸 반나절은… 필자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바로 후추라는 '모험'을 걸 수 있는 용기와 신념을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그날 밤을 꼬박 새워가며 이 글을 마치게 된 데에는 이국 땅에서
그와 나눈 교감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복받침이 필자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간직 되길 바랬기 때문이다. 지금도 가끔씩 읽어보는 필자 마음 속의 '명전 제1호 기
사'를 후추인들에게 공개한다. 지금은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그날 받
았던 그 느낌을 재생하기 힘들 것을 알기 때문이다. (주: 아래 글은 후추 주방장의
입장에서 쓴 글이 아닌 일개 개인의 일기였음을 미리 경고함)
가까이 홍콩에 살고 있으면서도 친분이 있는 차범근을 찾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나
를 괴롭혀 왔다. 용기를 내어 마침내 6개월 만에 그에게 전화를 하고 (부인 오은미씨
와 약속) 중국으로 향하는 기찻길에 올랐다... 위로해주고 싶다는 단 한가지 목적뿐
이었다... 97년 여름, 한창 뜨거운 무더위 속에서 영원한 "라이벌" 일본을 비롯 우즈
벡, 카자흐, 중국... 등 닥치는 대로 속속들이 박살을 내고 우리축구를 통해서 온 국
민의 갈증을 해소 시켜줌은 물론, "차범근을 대통령으로"라는 팻말까지 잠실 구석 구
석에서 눈에 보일 정도로 온 국민의'연인'이 되었던 그가... 어떠한 경위에서건 지금
은 중국의 한 작은 도시에서 "쓸쓸한 이방인 감독" 차범근으로 '몰락'했다는 사실이
당시 '차범근 영웅 만들기' 과정을 지켜 만 보고 있던 '공범'의 한명으로서 그간 충
분히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15미터 전진하는데 1시간 반....."
1999년 5월 29일 토요일. 오후 2시에 중국 심천(Shenzen) 역전에 있는 '샹그리라 호
텔' 커피숍에서 오은미씨와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전날 유선상으로 그가 친절히 가르
쳐준 대로 홍콩 구룡의 헝함(Hung Hom) 역에서 한국의 국철 격인 KCR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는 홍콩 북동부에 위치한 로우(Lo Wu). 중국 경계선과 가장 근접한 마을로서
말 그대로 구름다리 같이 생긴 낡은 다리 하나만 건너면 홍콩과 중국을 넘나들 수 있
는 그런 위치에 있는 홍콩의 마을이었다. 45분 정도 기차로 소요 된다는 오은미씨의
말은 정확했다. '역시 자그마한 것 하나도 예사로 넘기지 않는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다. 급작스럽게 약속이 된 덕분에 중국 출입 비자가 없던 상
태라 걱정을 했었는데 (제아무리 가깝고 중국 소유가 된 홍콩이었지만, 무비자로 홍
콩을 출입하던 한국인은 중국을 오가는데 비자가 필요했다), 그 부분 역시 오씨의
지시대로 심천 도착 후에 긴급 비자 발급 사무실에서 신청하면 그 자리에서 취득할
수 있었다. 홍콩의 로우 역에서 중국으로 놀러 가는(?) 인파에 밀려 출국 심사를 마
치고 "심천"이라는 사인을 따라 걷는 도중 약간은 살벌하고 흥미로운 광경을 목격했
다. 불과 15미터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중국, 그리고 또 한쪽은 홍콩이었다. 소위 홍
콩의 로우 역에는 모든 표지판이 영어와 광동어로 함께 쓰여졌지만, 그 짧은 다리를
건너는 순간, 모든 글씨며 표지판이며 한자로 둔갑, 황당했다. 영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Welcome to China" 정도?? '한문공부 좀 제대로 해둘걸....'
홍콩달러로 100불(한화 약 15,000원)을 주고 5일 비자를 받아 나오니 입국 심사대 줄
은 아까 보다 더 길었다. 곡절 끝에 심천역을 거쳐 나오자니 저기 한쪽 모퉁이에 검
은색 스커트와 흰색 자켓을 입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눈에 띄었다. 차범근
의 유일한 친구이자 인생의 동반자, 그리고 그의 매니저 오은미씨가 보였다
한국축구의 대모... 오은미"
오 : "어머..... 맞아 맞아. 이제 정확히 누군지 알겠다. 어제 전화했을 땐 긴가 민
가 했는데. 반가와요 정말. 여기서 또 이렇게 만나다니..." (악수를 청하는 오른손
을 내미시며)
나 : "너무 많이 기다리셨죠?? 죄송해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거 있죠??"
오 : "그래 맞어. 내가 깜빡 했지 뭐에요. 토요일 이 시간은 중국이 워낙 물가가 싸
니까 홍콩에서 떼거지로 몰려 오는 날인데. 그걸 내가 깜빡 했어요."(음냐리...)
원래 약속했던 샹그리라 호켈 커피숍에 가서 점심을 하자 시길래 우선 그리로 향했
다. 차감독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점심은 됐고 커피나 한잔 하자고 하고 호텔로
입장. '음메, 이건 중국이 아녀.' 서울보다 더 화려하고 빠방한 호텔 로비, 그리고
생활한복처럼 현대식으로 개조한 중국 의상 상의에 옆구리 쭈왁 찢어진 치마를 입은
웨이트레스들이 살랑 살랑. '어? 중국 괜찮은데…^^'그때부터 오은미씨와의 쉴 새 없
는 대화는 2-30분간 이어졌다. 중국 처음 도착 후 적응하던 시절 얘기서부터 6학년짜
리 막내둥이("차세찌") 공부 문제, 마치 한 2년 동안 한국 사람 구경 못하다가 작정
하고 수다떨기 시작하는 사람들처럼 끊임없이 떠들어 댔다. 자가용 기사가 호텔 입구
에 파킹하는 걸 보고 차가 왔다며 차감독 소속팀이 비 시즌 중인 요즘 2부 리그 어느
팀과 연습경기가 있는 날이라면서 구경가자고 제의를 하셨고, '그래, 인간 차범근은
초록빛 그라운드에서 만나야 제맛(?)이야...'하는 생각에 심천팀 합숙소 겸 연습구장
으로 출발했다. 만화주인공처럼 귀엽게 생긴 '짱'이라고 불리는 운전기사의 운전 솜
씨는 과연 듣던 대로 중국의 무대뽀 운전의 대표기수급 이었다. 앞에 차 빨리 움직이
라고 껌뻑 거리는 쌍라이트는 어지간한 사람 브레이크 밟는 횟수 보다도 더 많은 것
같았고 차선위반, 신호위반은 아주 극히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이루어졌다. 한 20
분 가량 달려 가면서 차 안에서 역시 오은미씨와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경기장까
지 가는 차 안에서 그리고 약 2시간 가량 계속된 연습경기를 함께 관전하며 나누었
던 이런 저런 대화 내용 중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간단히 요약해 본다...
내가 차범근 감독 부인이 아닌 "자유인" 오은미 였더라면 정말 스포츠 마케팅이나
이벤트 같은 쪽에 관심이 많았을 거다. 차감독 부인이기 때문에 내가 그럴 수가 없
다. 차감독 매니저 일을 내가 직접 하는 이유도 단 한가지 때문이다. 머리가 똑똑하
고 비지니스를 아는 친구들은 스포츠에 문외한이고, 스포츠를 좀 알고 그쪽으로 감
각이 있는 친구들은 완전히 비즈니스 센스가 없다. 그 두 가지를 겸비한 사람이 정말
없다. 난 정말 믿을만한 사람이 없어서 내가 차감독 매니저 한다고 그런다. 그런 사
람이 나오면 난 당장 그만둘 거다. 젊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힘을 합치고 머
리를 짜내면 앞으로 좋은 프로그램들을 만들어서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월드컵을
2002년에 한번 치르고 난후, 차감독은 이미 일본, 한국, 중국... 아랍 제외한 아시
아 축구의 3대 국에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있는 사람이니까 전 아시아를 상대로 하
는 프로그램을 한번 해보고 싶기도 하다.
우리 아들 "두리" 가 고대 신방과에 들어 갔다. 어렸을 때는 공부 하는걸 그리도
싫어 하더니 이제는 좀 철이 드나 보다. 축구 선수들의 비참한 말년을 우리 두리만
큼 현장에서 생생히 본 애가 없다. 비로서 그게 피부로 와 닿기 시작하나 보다. 예전
에 한국을 대표하던 아빠 친구 아저씨들은 지금 완전히 백수 건달 내지는 아마추어
축구장 방황하고 있는 "축구 원로"가 되어 버렸다. 심심하면 집으로 전화나 한번씩
한다. 이게 축구 선수들의 현실이다. '공부하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라는 걸 우리 두
리는 직접 봤다. 두리는 축구기자를 시키고 싶다. 두리만큼 실기나 간접경험이 국내
외적으로 풍부한 애가 없을 거 같기에, 운동 끝나면 그쪽으로 본인도 하고 싶어하고
나도 바란다. 우리나라 스포츠 스타는 정말 구단에서 거저 주고 부려먹는 거나 마찬
가지다. 연예인만큼 벌어 들이고 저금할 수 있는 상품인데도 1/5 아니 1/10도 챙기지
못하는 형편이다. 안타깝다. 구단과 계약할 때 광고비 받는 거 구단이랑 나눠먹는 건
절대 빼라고 일러 주곤 한다. 그걸 구단과 나눠 먹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을 것
이다. 그걸 왜 구단에게 주느냐 말이다. 이런 쪽으로도 맘만 먹으면 돈 벌고 할 일이
너무 많다.
중국의 축구 열기나 수준은 무섭다. 지금은 최영일이 혼자 중국 리그에서 뛰고 있
고 그나마 통하는 수준이다. 중국 축구 얕보고 작년엔 한국에서 봉고 트럭 2-3대에
달하는 선수들이 입단 테스트 받으러 왔다가 다 되돌아 갔다. 최근엔 조정현, 오주
표...이런 애들도 왔다가 짐 싸서 그냥 갔다. 이젠 최영일이 수준, 국가대표급 아니
면 중국에서도 안 통한다. 왜냐하면 중국의 외국선수 TO는 3명인데 그들로 인해 승부
가 결정 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안 통하는
애들이 와서 되겠냐?? 지금은 거의 브라질, 아프리카에서 주전급들만 온다. 우리 팀
에도 리투아니아, 폴란드 대표출신들이 뛴다. 관중들의 열기는 정말 무시무시할 정도
다. 지방경기에도 4만씩 꽉꽉 찬다. 오늘 같은 이런 연습구장 경기에도 지역주민들이
엄청나게 보러 온다. (실제 약 7-8열 정도의 소형 스탠드에는 가족 단위로 빽빽이 앉
아서 2부리그 팀과의 경기를 보고 박수치고 응원하고 있었고 시합 전 유치원생들 그
라운드로 불러다가 선수들과 사진 찍어 주고 사인볼 선물하는 등.... 작은 축구 문
화를 이미 구축해 나가고 있었다.)
중국 축구 협회는 아직도 한국의 10년 전 수준정도로 썩어 있는 것 같다. 여긴 돈
받고 입 닦는 경우가 너무 많으니까. 하지만, 일부 "개혁파" 인사들은 다르다. 우리
팀의 오너는 중국 전국의 2대 보험회사가 구단주인데 하버드 출신의 개혁파이다. 축
구를 통해서 중국을 변화 시키려는 의지가 대단한 사람이고 차감독의 스타일과 정확
히 궁합이 맞는 사람이다. 감독 부임 후 부대시설, 트레이닝룸, 숙소 모두 개조 해서
중국의 보통 수준보다 좋게 개선 시켰고, 시에서도 30만평을 공짜로 내줘서 축구대학
만들자고 적극적으로 나선다. 그 구단주는 차범근의 열렬한 팬이라고 한다. 단장, 코
치 그리고 모든 구단 식구들에게 "정말 위대한 감독이니까 잘 모셔라..."라고 번번히
주의를 준단다. 조선족 통역을 통해서 작전 지시를 하는 차감독이지만, 말이 안 통하
는 중국 심천의 시민들은 어딜 가나 차감독에게 사인을 요청하고 사진을 찍자고 하고
"우리팀이 2부로 떨어져도 절대 떠나지 말아달라"라고 신신당부를 한단다. 부패가 많
이 된 나라지만, 서민들의 본심은 너무나 착하고 여유롭고 순박하다. 축구에 대한 그
리고 팀, 감독에 대한 지지도 일관적이고 변함이 없다. 협회에서도 이미 차감독에게
언급을 한 것 같다. "당신이 월드컵 예선을 통해서 4천만 한민족을 감동 시켰다면,
이걸 한번 상상해 보라. 10억 인구가 당신의 축구로 인해 움직인다면 그건 정말 축구
인으로서 그리고 남자로서 해볼만한 일 아닌가?" 이 말에 차감독은 사실 조금 동요가
되기도 했다. 그림이 그려지는 제안이기 때문이다. 정규리그 10위 권에만 들어 달라
고 협회에서 부탁을 했다. 그럼 명분도 생기고 그 후엔 대표팀 감독 자리 맏길 수 있
다라고 했다.
20년 전 프로레슬러 장영철의 '폭로' 이후로 가장 비판적이고 거리낌없이 공개 되었
던 한국 축구계의 '비리'를 다룬 작년 여름 월간조선 인터뷰가 문득 떠올랐다. 원래
인간 오은미에 대한 선입견은 대충 '설친다', '보통 아니다', '여우다', '돈독 올랐
다', '차범근을 조정하는 리모콘이다' 이정도 였다. 전혀 근거가 없는 평가는 아니라
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위에 나열된 편견은 오은미씨에 대해서 극히 '꼬인' 시각
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일종의 피해의식에 젖어있는 사람들의 그것이라는 느낌이 먼
저 들었다. 그에 대해서 좀 더 긍정적이고 수용하는 시각으로 접근한다면 아마도 이
런 식으로도 그를 평가하지 않았을까 싶다. '적극적이다' '똑똑하다' '헌신적이다'
'환상의 내조다' '돈에 대해선 지극히 합리적이다' 대한민국에서 그녀만큼 '축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여인은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국내 축구계의 내용뿐만 아니라
온 유럽, 남미의 축구까지 손 바닥 위에 올려 놓은 것 같이 상세하고도 해박한 지식
을 가지고 있었다. 소위, 축구의 흐름을 알고 얘기하는 사람이었다. 놀라웠다. 나 역
시 남자지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여자'이기 때문에, '실력
대 실력으로 붙어서 한걸음도 물러나지 않는 여자'이기 때문에 우리 정서 상 그저
'밥맛 없는 여자'로 낙인을 찍어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한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무슨 소리를 듣던 오은미씨에겐 한 가지 목표 밖에 없었
다. 그건 바로 남편 차범근이 오로지 축구에만 전념토록 하게 하는 일이었다.
"한국 축구의 자존심... 차범근
연습구장 군데군데 한문으로 써있는 사인들을 보자니 중국 땅에 온 게 피부에 와 닿
았다. 저기 멀리서 누가 츄리닝 상하의를 입고 "사모님" 하면서 인사하는 모습에 자
세히 들여 다 보니 다름아닌 전 국가대표 골키퍼 코치였던 정성진 코치였다. '순수파'
정성진씨는 작년 여름 차감독이 중국으로 오게 될 때 같이 계약을 맺고 돌아와서 팀
의 훈련을 돕고 있는 소위 "차범근 군단"의 일원이었다. (조병득, 김평석, 김강남
등) 예전부터 일을 같이 해오던 사람을 이곳 중국 땅에서 만나게 되니 둘 다 엄청 반
가워 했다. 친정이 울산인덕에 사투리를 구수하게 써대는 그의 부인과 두 꼬마 놈들
도 볼 수 있었고 그가 시멘트 스탠드 위에 깔아주는 신문지에 오은미씨와 나는 자리
를 잡았다.
약 10여분 간의 팀 미팅을 통해서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선수들과 함께 서서히 고개를
떨구고 그라운드로 걸어 나오는 차범근의 모습이 들어왔다. 멀리서 보기엔 현 국가대
표 축구 팀의 트레이닝복인 푸른색 상하의와 흡사한 그런 UHLSPORT 브랜드의 트레이
닝복 차림에 축구화. 아마도 내 머리 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차범근의 이미지 그대로
모습을 나타냈다. 부인과 함께 얘기를 나누고 있던 총각(?)을 알아보고 구장을 가로
질러 천천히 걸어 오면서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쯤이 되자 그는 이빨이 하얗게
드러나는 그런 함박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잽싸게 그라운드로 뛰어 내
려갔고 그의 첫마디는 "야, 여기서 다 만나고… 홍콩에 있다며? 너무 반갑다 정말"
눈물이 날것만 같았다. 여전히 짧은 머리에 그의 얼굴엔 중국 인민 농부의 Sun Tan이
그을러 있었고 악수를 하며 잡은 그의 손은 생각보다 너무 따뜻하다는 느낌이 들었
다. 차범근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그가 입이 귀에 걸리도록 큰
웃음을 짓는걸 보는 게 워낙 드문 일이다. 그래서 나는 더욱 슬펐다
나 : "감독님, 고생 많으시죠?? 죄송합니다. 가까운데 있으면서도 일찍 찾아 뵙지
못해서요."
차 : "아냐, 아냐. 나 괜찮아. 편해"
경기 후 못한 얘기들을 다시 나누기로 하고 난 스탠드로 올라왔다. 그 후 한 5분 정
도 오여사는 옆에서 계속 무슨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아, 환율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난 정말 한두 마디 외엔 그 말들이 전혀 귀에 들어 오질 않았고 그
저 차감독의 모습만 멍하니 쳐다 보고 있었다. 그리곤 눈가에 맺힌 눈물을 오여사에
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얼굴을 돌렸다.
'저 사람이 지금 왜 이곳에 있나? 불과 18개월 전만 하더라도 잠실벌이 떠나가라고
"차범근"을 외쳐대던 6만 관중의 품안에 있던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주
위에 그에게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할 수 있는 사람수는 조선족 통역을 포함해서
열 손가락 안에 들텐데…' 그리고 자꾸 지금 이곳의 아담하고 조용하고 한가한 기운
이 드는 심천의 연습구장 그리고 잠실벌의 종이 테이프, 써포터즈 Flag, 마이크를 통
해 외쳐대던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 그를 에워싸고 터져대는 기자들의 플래쉬 불빛,
그리고 온 관중석을 뒤덮은 "붉은 물결"이 그윽하던 그림들이 내 머리 속에서 오버
랩 되었다. 온 한반도가 축구 열풍으로 휩싸여 있던 97년 여름/가을 나는 몹시 불안
하고 불쾌했었다. 아무리 우리나라가 월드컵 본선 진출 , 아니 영원한 숙적 일본을
개박살을 내던 흥분의 도가니 속에 있다 하더라도, 그 당시 우리 언론에서 그랬던 것
처럼 특정 감독을 대상으로 그런 식으로 무자비하게 "띄워주는 건" 절대 잘못하는 일
이라고 생각했다. 그 어떠한 훌륭한 감독이 있다 하더라도 선수 그리고 Team 위에 존
재하는 감독이란 있을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필요이상의 인정을 받았고 날마
다 과찬의 연속이었다. 그의 업적이나 역할을 과소평가할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한
인간이 저렇게 급작스럽게 "영웅대접"을 받는 다는 사실이 불안했다. 언제, 얼마나
빨리 곤두박질 칠까...하는 우려 때문에 말이다.
그러한 우려는 불과 1년 반이라는 세월 안에 이미 현실로 나타났고 결국 우리는 우
리 손으로 한 영웅을 추방시켰다. 이미 20년 전에 우리나라 최초로 유럽 하늘에
KOREAN 이라는 문자를 시뻘겋게 물들여 놓고 당시 고국에서 월요일 밤마다 "MBC독일
프로 축구 - 분데스리가전" 을 꾸벅꾸벅 졸면서 시청하며 꿈을 키우고 희망을 심어온
아이들에게 "HERO"란 무엇인가를 카르쳐 준 그 장본인 차범근이 지금 이곳 중국 심천
의 작은 축구장에서 작전 지시를 하고 있었다.
비록 지난 시즌 가까스로 2부 리그 탈락을 모면한 차감독의 심천팀이었지만, 2부 리
그팀을 상대로는 골잔치를 즐기며 손쉽게 요리했다. 골대 뒤로 올려 놓은 펜스를 넘
어 "똥볼슛"들이 수없이 길가로 넘어 갔지만, 관중들, 선수, 그리고 감독 모두가 진
지하고 흥미 넘치게 경기를 치렀다. 경기가 끝나고 골키퍼 마무리 연습을 시키고 있
는 정코치에게 다가 갔다....
나 : "말 안 통한다고 개 굴리 듯 훈련 시키네..?? ^^ "
정 : "어... 아니야.. 요놈은 쓸만해. 주장이고 하기도 잘해."
나 :"언제 홍콩 한번 나와서 쐬주나 한잔 해야죠.나 주말에 심심해서 미칠 경인데.."
정 : "어,그래.연락처 좀줘.우리가 월요일 밤엔 한가하니까.한번 연락하고 나갈게.."
이때 마침 경기 후 사인 받으려고 줄 서있던 중국 꼬마들, 사진 찍자고 서있던 심천
아가씨들의 요구사항을 일일이 들어주고 걸어 오는 차감독을 만났다.
차 : "어때? 재미있었어?? 시시했지??"
나 : "아녜요. 9번하고 13번은 볼 잘 차던데요??"
차 : "애들이 하나라도 배우려고 해..."
나 : "그나저나 요즘 정말 어떠세요?? 괜찮으신 거죠?"
차 : "어..나? 나 괜찮다니까. 정말이야. 중국이 정말 생각보다 나쁘지가 않아. 처음
에 오기 전엔 걱정했는데 와서 좀 살아 보니까 되게 편해. 사람들이 '불필요한 말들'
잘 하기 싫어하고…"
어떠냐는 질문에 괜찮다고 예를 드는 토픽이 차범근의 성격을 그리고 과거 그가 시달
렸던 부분들을 단적으로 대변 해줬다.
나 : "아무래도 서울 보다는 사람들한테 좀 덜 치이시죠??"
차 : "그래, 그거지. 나 정말 편해 여기서. 사람들이 '대국기질'이 있어서 그런지
좀 여유가 있고 착해"
나 : "감독님 우리 사진이나 한 장 박죠? 사모님하고 같이요...."
차 : "그래 그러자..."
"축구, 종교, 그리고 그의 PRIVACY"
워낙 조용하고 무뚝뚝하기로 소문이 난 차감독의 이런 다정한 모습은 아마 내 평생
쉽게 두번 다시 보기는 힘들 거라는 생각을 했다. 금방 옷 갈아 입고 나온다는 말씀
에 오은미씨와 나는 주차장에서 정코치의 꼬맹이들과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차를 타
고 막내 "세찌"가 놀고 있는 친구집으로 향했고 차 안에서는 분데리스리가 시절 얘기
(나 어릴 때 광적으로 좋아하던 보루시아 MG 소속의 '지몬센" 선수, 그리고 현재 영
국 감독 된 캐빈 키건 등), 얼마 전 극적인 로스트 타임에 넣은 두골로 유럽컵을 먹
게 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경기 얘기, 밤에 있을 예정인 북한 대 중국의 올림픽 예
선전 얘기...등으로 금세 시간이 흘렀다.
한번 차감독의 서울 집에서 본 적이 있는 막내 "세찌"는 많이 커 있었지만 여전히 장
난기가 넘치는 천진난만한 초등학생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나이키 스우
쉬로 쳐 바른(?) 의상을 보니 '얘가 심상치 않은 나이키 팬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
고 날 보자마자 어떻게 기억을 하고 대뜸 "아저씨, 새로 나온 에어조던 신발 못 구해
요?"했다.^^ 세찌를 태우고 차는 어느덧 심천 외곽에 위치한 골프 연습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그나마 그와 식구들이 즐기는 '가족 행사' 중에 하나가 밤에 연습
장에 가는 일 같았다. 차감독 내외를 비롯해서 세찌는 물론 기사 "짱"까지 다 같이
연습장에서 땀을 흘리곤 한다고 했다. 기사와 함께 같은 연습장에서 스윙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 봐도 어쩌면 왜 그가 국내의 지독하게 권위주의적이고 폐쇄적인 축구인
들이나 '기득권자'들과 융합하기 힘든 지 상상할 수 있었다. 매일 연습장은 철저하
게 나가고 있지만 아직 FIELD는 구경도 못해본 차범근이라고 한다. 기회가 없어서?
자신이 없어서? 아니면 돈이 없어서?? 그의 코칭 스타일과도 흡사하게 치밀하고 차분
한 골프 스윙을 고집하는 차범근을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에게
있어서 골프 스윙은 첫째, 축구를 숨쉬고 축구를 노래하는 그의 일상 생활 중 유일하
게 '다른' 어느 것에 100% 몰두할 수 있게 해주는 도피성 도구 일수도 있을 것이고..
둘째, 아니면 그 조용하고 적막한 골프 연습장에서 그는 또 다른 무슨 축구에 대한
구상을 하고 있는 중 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아마도 후자쪽에 가깝지
않나 싶다. 연습을 하면서 오은미씨는 핸드폰으로 서울에 남아있는 첫째 '하나'와
'두리'에게 전화를 넣었다. 오누이 간에 전화하는 것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두 모녀는 대화를 나누었고 그러던 중 차감독은 스윙 멈추고 부인에게 묻는다.
"한국 축구 예선 오늘 어떻게 되었나 물어봐..." 아마도 후자였던 게 틀림없다.
'짱'과 세찌를 시켜 피자를 사오게 하고 시원하게 뚫린 야외 연습장에서 (중국은 땅
이 넓어서 그런지 연습장도 실제 FIELD처럼 예쁜 조경 작업과 넓은 LAY-OUT으로 꾸며
져 있었다) 그의 식구들과 나는 공도 치고 먹기도 먹고 대화도 하면서 귀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작스레 저쯤에서 들리는 소리 "감독님!!!" 한국과 중국
을 오가는 LPG가스 운송선의 선장("마도로스")이라고 본인을 소개한 한 한국인이 달
려오며 상당히 거리낌 없이 우리들의 대화에 끼어 들길래 양측이 꽤나 친한 사이인가
보다 했더니, 일방적으로 그 선장 친구만 친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사람이 객지
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지 변죽이 좋고 말이 많았는데, 추측하건대 차감독 내외가 싫
어 하진 않는 것 같았지만 죽고 못사는 스타일에 유형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보기
엔 그 친구가 원하는 차감독의 관심을 사기엔 일단 '불 필요한 말'이 너무 많은 스타
일이었다. 그 친구가 조인한 후 그리고 이것저것 들쭉날쭉 골프 스윙하고 있는 사람
들한테 이 질문 저 질문 해대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차감독의 말문은 이미 막힌 거 같
아 보였다. 본인을 축구광이자 '차범근 광신도" 정도로 소개하던 그 사람의 수많은
질문에 차감독은 단답식 대답만 하고 일체 그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
고 '오늘 차감독과의 대화는 이정도로 끝나는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가족과의 시간, 아내와의 대화, 그리고 자식에 대한 절제된 관심... 이런 것들이 차
감독의 PRIVACY 였다. 언뜻 보기엔 너무나 하찮은 PRIVATE LIFE 였지만, 10대 후반부
터 30년 넘게 그를 따라 다니던 스폿라이트를 피할 수 있고 자기 자신을 쉬게 할 수
있었던 곳은 바로 가정뿐이었지 않나 싶다. 그래서 더욱이 그런 그의 가정생활이 그
에겐 '좋은 남편, 자상한 아빠의 점수 따기 식' 가정 생활이 아닌 그만의 "서바이벌
게임"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오은미씨 말대로 '외국에서 오래 살아본 사람들'만 어쩌
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가정의 따듯함과 편안함을 난 감히 동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축구를 위해서라면 죽기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차범근은. 그런 그의 목표
를 달성하기 위해선 독일생활 도중 맥주 맛이 좋기로 유명한 독일의 바 또는 나이트
클럽에서 요즘 우리나라의 일부 젊은 스타플레이어들의 생활처럼 밤새도록 쾌락과 알
코올에 빠져 있을 겨를이 없었을 거고, 그런 것들을 등 지고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해줄 수 있었던 유일한 안식처는 아마도 가정 그리고 교회 뿐이었을 거란 생각
이 든다. 그렇게 살아오길 어느덧 40여년.... 오직 그런 생활에 길들여져 온 차범근
은 자신이 그동안 획득한 부와 명예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선.후배들이나 동료들에게도 그런 본인이 직접 체험하고 '검증된 방법'을 요구해 왔
고 고집해 왔다. 여기서 차범근과 '나머지 축구인 모두'의 근본적인 갈등과 오해는
시작되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쉽게 종결되지 않을 것이다.
연습장에서 집으로 가는 차에 오른 시각이 벌써 저녁 9시반이었다. 불편하지만 않다
면 세찌와 함께 집에서 자고 가라고 오은미씨는 얘기를 한다. 극구 사양을 했다. 그
들만큼 외국 생활을 오래 해 본 나로서는 그런 민폐 끼치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
기 때문이었고,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차감독이 지독하게 소중히 생각하는 그의
PRIVACY 침해를 더 이상 연장 시킨다는 점을 내가 용납할 수 없었다. 기차역으로 향
하는 차 안에서 차감독은 창문에 머리를 기대기도 하고 팔을 뻗어서 옆으로 옮기기도
하고, 피곤한 모습이 역력했다. '이 사람이 사는 법이 이거구나..'하는 생각이 들었
다. 오은미씨가 다시 한번 묻는다. "아니... 내일 무슨 특별한 일이 있어서 오늘밤에
가야 되는 거면 말릴 수 없고, 미안해서 그런 거면 정말 그럴 필요 없는데...." 이번
엔 침묵하고 있던 차감독까지 거든다. "미안해서 그런 거 같은데? 그러지 말고 세찌
하고 오늘 자고 내일 아침 같이 먹고 우리팀 소속 아마추어 애들 가르치는 것도 보러
같이 가고 그러지?" 감동이 밀려왔다. 대한민국만 빼놓고 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전
직 대통령보다도 더 인정을 받고 국위선양을 열심히 해온 차범근의 이 한마디에. 미
안해서 못 자고 간다는 뜻만 충분히 간접적으로 비추고 거절했다.
6월21일부터 휴업중인 중국 프로리그가 재개된다고 한다. 올림픽 대표 선수 차출로
인해 리그 운영이 어려워서 아예 쉬기로 했다는 중국 협회와 프로연맹의 하모니였다.
그전에 차감독과 심천팀은 합숙을 떠난다고 했고, 오여사와 세찌는 방학을 맞아 한국
으로 나간다고 했다. 6월21일 홈경기를 꼭 관전하러 가기로 약속한 후 기차역 앞에서
내렸다. 차에서 두분이 내려서 악수를 하고 "자주 놀러와..."하며 작별을 나누었다.
다시 홍콩행 기차에 몸을 싣고 집에 도착하니 정확히 밤 11시반이다. 12시간동안의
시간을 그들과 함께 한 거 같다. 오늘 밤 나의 느낌을 글로 쓰기가 쉽지 않다. 워낙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기 때문일 것이다.정리를 할 수가 없어서 우선은 Fact 위주
로 글을 쓴다.
단 한가지, 차범근은 중국에서 더 Happy 해 보였다. "언젠가는 한국이 다시 차범근을
찾지 않겠냐...?"던 부인 오은미씨의 말대로, 그때까지의 재충전을 위해서라면 이상
적인 나라가 중국인 거 같았다. 떠나기 전 나의 유일한 목표는 달성을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를 위로해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자가용 기사 굴리며 넉넉하게
대접 받고 살고 있는걸 봐서가 아니다. 서울에서도 그는 그 정도는 누리고 살던 사람
이었다. 하지만, 그는 심적으로 굉장히 편안한 모습이었다. 98년 여름 네덜란드전을
마치고 '바람난 부인 짐 싸들고 처가집으로 쫓겨 나듯' 김포공항 빠져 나오던 그때
그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런 기억들은 아마도 그의 가슴속 어디선가는 아직
도 꿈틀거리고 있으리라 상상된다. 하지만, 그의 그 깊숙한 심정까지 파헤치려고 드
는 무모한 기자나 친구가 있다면 그건 오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죽는날까지 우리는
차범근의 그 모든 것을 들여 다 볼 수 없을 것이다. 그의 가족이 되기 전까진. 얻은
것이 있다면 내가 위로를 받았다. 그를 생각하면 불편하고 괴로웠던 내 심정을 오히
려 위로받고 왔다. 그의 곁에 오은미씨와 가족들이 있는 한 절대 차범근의 '축구 불
꽃'은 꺼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을 얻고 왔다. 그와 함께 있었던 중국에서의 반나
절... 내가 그와 같은 한국인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끝
차범근의 중국 생활은 그랬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축구, 가정 그리고 종교… 외
엔 아무 것도 그의 시간과 관심을 사지 못했다. 작년 가을, 필자는 어느 스포츠 신문
의 기사를 읽으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차범근 중국 팀에서 불명예 퇴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팀 관계자들과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필자의 두 눈으로 직접 보고 확
인하고 왔는데 '불명예 퇴진'이라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하이텔의 스포츠 게
시판에서 그 기사를 쓴 송모씨와 필자가 소위 말 하는 '통신상 싸움질'까지 해가며
진상을 규명하려고 들었다. 필자의 격앙된 어조와 감정 섞인 필체가 상대방을 무시
할 수 있었다는 점에 대해선 후회스러운 일이었지만, 근본적으로 필자는 그 기사를
믿을 수가 없었다. 일련의 사건이 전개되던 동안 줄곧 필자는 차감독님 측과 전화를
하며 중국 심천의 분위기를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감독의 퇴진 소식을 접한 한 심
천의 시민이 어느 빌딩에서 '투신 자살'을 하려고 한다는 얘기서부터 선수들과 팀
관계자들과의 눈물의 미팅, 구단주의 재고 요구… '불명예'란 말이라곤 도저히 납득
이 갈 수 없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또 한번의 오보를 통해 차감독의 명예
에 먹칠을 하려는 사람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결국 또 다른 스포츠지가 중국으로 가
서 구단주와 단장과의 면담을 통해 진실이 밝혀지게 되었고, 차감독은 다시 한번
'그를 못 살게 만드는' 일부 국내 언론들에게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심천 어느 구석을 가더라도 그곳의 시민들은 차범근을 공경의 대상으로 접근했다. 숫
기 없는 어느 중국 꼬마 녀석 하나도 차범근의 모습을 보고 놀라움에 아버지 곁으로
도망갔고 곧 이어 그 꼬마의 아버지는 정식으로 차범근의 사인을 받으러 조심스레 다
가왔다. 해외에 진출해 있는 우리나라의 스타들, 하나 같이 하는 소리는 '외국에 나
와 있으니 정신적으로 너무 편하다. 팬들이고 기자들이고 괴롭히는 일이 없어서 좋
다.' 그런 해외 생활의 가장 큰 수해자가 바로 차범근이 아닐까? 독도가 일본 땅이
라고 우기는 날엔 온갖 언론과 시민 단체가 단합해서 공식 사과를 요구하고 나서지만,
만약 독일이나 중국이 '차범근은 우리 것이요'라고 그러는 날엔 우리 민족의 반응은
과연 어떨까? 독도에 대해서 우리 모두가 목에 힘줄 세우듯 차범근에 대해서도 그럴
수 있을 지가 의문이다. 아니, 그럴 자격이 있는지 부터가 궁금해 진다. 우리의 보물
을 우리 손으로 지키지 못 한다면 아니 우리의 보물을 남들이 더 잘 지켜주고 보호
해 준다는 게 과연 무슨 뜻인지.. 안타깝고 애처로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차범근에 대한 기억 1 - co-sprayed by chef & roby10
차범근에 대한 명전이라면 '축구 선수' 차범근에 대해 과연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
하여 어디에서 끝을 내야 하는지… 엄두가 나질 않았다. 후추의 주류 독자층인 20대
스포츠 팬들에게 차범근이란 이름 석자는 과연 어떤 의미로 다가갈 것인가? 그들이
차범근에 대해 알고 있는 건 과연 어느 정도이며 얼마를 알려줘야 하는지? 암담했다.
요즘 스포츠 팬들이 필자에게 "차범근이 정말 그렇게 축구 잘 했나요?"하고 질문 한
다면… 그저, 막막할 뿐이다. K-League 보다 이태리 Serie-A에 더 관심이 많은 요즘
축구 팬들에게 '당시 차범근은 지금의 바티스투타 정도의 실력과 입지를 누리고 있었
다'라고 답한다면 feel이 올까나? 차범근의 명전은 '축구 선수 차범근' 또는 '생활인
차범근' 이렇게 뚜렷하게 구분을 해서 특정 주제에만 전념해야겠다는 다짐도 한때 했
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후추가 아는 만큼은 전부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먼저 '축구 선수 차범근'에 대한 소개를 할까 한다. 그가 '세계적인 스타 차
범근'이 되기 전까지의 축구 이야기를 말이다.
'차범근이 과연 얼마나 잘했냐?'는 질문에 답하는 일처럼 고통스럽고 막막한 '도전'
이 없겠지만 이렇게나마 하나씩 풀어나가 보려고 한다.
1970년대 아시아 축구판도는 전통의 강호 한국을 필두로 장신 스트라이커 크라파이와
테크닉이 좋은 몽예몽이 이끄는 버마 (현 미얀마), 그리고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유
럽식 축구를 구사했던 이란, 짐 메케이와 롱드로우인의 명수 리챠드가 버틴 호주, 여
기에 늘 우리 한국이 껄끄럽게 생각했던 이스라엘 등이 4강 내지는 5강 체제를 유지
했다고 볼 수 있다. 68년 멕시코 올림픽 득점왕 가마모토가 이끌던 일본은 비록 멕
시코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내는 쾌거를 이룩했다고는 하지만 결코 당시 한국의 상
대는 분명 아니었다(버마는 70년대 중반부터 쇠락 한다).
72년 경신고를 졸업하고 고려대에 입학한 차범근은 사상 최연소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되는 영예를 누리게 되면서 그 해 5월 방콕에서 벌어진 제5회 아시아 축구선수권
대회에 이세연, 이회택, 김호, 박수덕, 박이천, 변호영 등 기라성같은 대선배들과 함
께 출전한다.
한국은 결승에서 그 이름도 유명한 GK '헤자지'와 파르빈, 베자디, 아디비 등 초 아
시아급 선수들이 버틴 이란에게 2대1로 패하며 비록 준우승에 머물긴 했지만, 차범근
개인에게 있어서는 화려한 국가대표 데뷔전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의 소득을 올린 대
회라고 볼 수 있다. 국가대표 초년병시절 차범근은 대표팀 연습 시에 바람 빠진 축구
공에 공기를 넣는 등 대선배들의 잔심부름을 도맡아 했던 막내둥이 였지만, 플레이만
큼은 처음부터 막내가 아니었다. 당시로는 비교적 장신에 속하는 178센티의 신장에
폭발적인 스피드를 바탕으로 한 측면돌파와 정확한 센타링은 기존의 국내 선수들과
는 분명 한 차원 다른 플레이였고, 어시스트능력 또한 탁월했다. 혹자는 '대한민국
뻥축구의 원조는 차범근이다'라고도 하지만, 차범근이 보여준 '뻥축구'는 당시 이땅
의 국민들의 눈에는 '삼바 축구', '토탈 사커'이상의 '신기'였다. 대표팀에 발탁된
차범근의 기량은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변모해 나갔고, 대표팀 코칭스탭은 물
론 선배들도 차범근의 성실한 자세와 뛰어난 기량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차
범근이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 축구의 독보적 스타로 군림했던 이회택은 자신의 아성
에 정면으로 도전한 차범근이었지만 라이벌 의식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후배 차범근
에게 늘 격려와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차범근은 고려대학 2학년 때인 73년 5월 뮌헨월드컵 아시아 A조 예선 대 이스라엘 전
에서 연장 3분 경에 수비수 김호곤이 강슛한 볼이 크로스바를 맞고 튀어나오자 기가
막힌 발리 슛으로 결승골을 터뜨려 승리의 견인차 역할을 하며 '차범근 시대'의 막을
올린다. 이후부터 차범근은 아시아의 호랑이로 성장해 국내 경기뿐 아니라 수많은 국
제대회에 출전하며 맹활약, 축구팬은 물론 남녀노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온 국민
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한국 스포츠계 최고의 영웅 자리에 오른다. 당시 학교에서든
동네 조기축구에서든 가장 볼을 잘 차는 인물들은 모조리 차범근의 백넘버인 11번을
달았고, 당시 우리축구 대표팀의 패턴이 차범근의 측면돌파에 이은 정확한 센타링을
190센티의 장신 센타포오드 김재한이 헤딩으로 많은 득점을 올리는 것이었는데 ,이것
을 자주 봐온 어린 아이들은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나오는 '종이비행기'란 동요의
가사를 바꿔 '찼다찼다 차범근 센타링 올렸다 떴다떴다 김재한 헤딩슛 골인'이라고
부르고 다닐 정도였다.
차범근은 한국에서 매년 열리는 박 대통령컵, 말레이시아에서 벌어지는 메르데카컵,
태국에서 벌어지는 킹스컵 등 국제대회에 출전해서 유럽과 남미팀들과의 경기에서도
발군의 기량을 발휘해 유럽과 남미의 지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특히 아
시아권에선 폭발적인 스피드의 차범근을 마크하기란 불가능했고 아시아 어디를 가더
라도 축구팬들은 한국의 차범근이 '아시아 넘버원'이란 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
였다. 한국이 78년 5월재팬컵에 출전해 덴마크 출신의 세계적 스타 플레이어 지몬센
이 이끄는 서독의 명문 보루시아 MG와의 경기에서 4대 3으로 패했지만 차범근의 플레
이를 눈여겨본 보루시아 MG의 명감독 우도 라데크에게 경기 후 '한국의 11번은 정말
놀라운 선수다. 저 선수는 서독에 와도 충분이 통할 수 있는 플레이어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 또한 차범근은 78년 박대통령컵에 동행했던 독일 프랑크푸르트팀 1군 코
치 슐테 코치의 관심을 사기도 했었다. 차범근은 이미 이때부터 우리의 몫, 아니 아
시아의 몫이 아니었다.
차범근이 72년 국가대표에 선발되어 79년 서독에 진출하기 전까지 국가대표로 참가했
던 주요대회는 72년 아시아 축구선수권대회를 시작으로, 74년 뮌헨월드컵 예선, 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예선, 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예선, 78년 방콕아시안 게임 등이었
다. 얼마 전 보도된 차범근의 공식 A매치 출장 기록(121경기)을 일일이 파헤칠 순 없
겠지만, 필자의 'Memory Lane'을 조심스레 뒷걸음질 쳐가며 '태극마크의 차범근'이
보여준 가장 인상적인 경기 3개를 replay 해 본다.
- Retro: "The best of Chaboom 1"
(1976년 9월11일 제 6회 박 대통령컵 국제 축구대회 대 말레이시아 전 - 서울운동장)
아시아 최고의 수비수 소친원이 이끄는 말레이시아와 첫 경기에 맞붙은 한국대표1진
화랑은 초반부터 적극적인 공격을 펼쳤으나, 이날 따라 선수들의 미스가 속출했으며
특히 수비수들의 호흡이 전혀 맞지 않는 등 불안한 모습을 보이더니 결국 연속해서
수비수들의 엉성한 플레이로 엉겹결에 3골을 허용한다. 후반전에 전열을 가다듬은 화
랑은 차범근이 슛한 골이 골대 맞고 튀어나오자 이공을 미드필더 박상인이 골대 안으
로 밀어넣어 추격의 발판을 마련하는 듯 했다. 하지만, 곧바로 말레이시아의 목타르
다하리에게 중거리슛을 허용해 스코어는 4대 1로 벌어지며 패색이 짙어진다. 말레이
시아가 무서운 강팀은 아니라고 하지만 축구경기에서 3골차란 결코 쉽사리 따라붙을
수 있는 스코어가 아니었다. 남은 시간은 7분. 그러나 '기적'은, 그리고 '차범근의
전설'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어느덧 까까머리 신참에서 대표팀 대들보로 성장한 라이트윙 차범근이 수비수들을 멋
지게 제치고 강슛한 볼이 골네트를 가르면서 추격에 불을 지피더니 4분 후 또다시 차
범근이 두 번째 골을 터뜨려 한 순간에 서울 운동장에 모인 관중들과 시내 다방 안에
서 텔레비젼을 시청하던 축구팬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고 간다. 그리고 2분 후 종
료1분전 중간 지역에서 볼을 차단한 차범근이 단독으로 치고 들어가 천금과 같은 동
점골을 터뜨리며 4대4동점을 만들어낸다. 차범근은 그래서 '차범근'이었다. 스탠드를
꽉 메운 관중들은 물론 한국팀 벤치 또한 흥분을 감추질 못했으며 반면에 다잡은 승
리를 한 순간에 놓쳐버린 말레이시아 선수단 전원은 망연자실 했다. 이 '동화 같은
엔딩 (ending)'을 발판으로 화랑은 승승장구하며 결승까지 진출, 한국대표 2진 충무
를 3대0으로 제압한 브라질의 상파울로 선발팀과 공동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수 많은
축구 팬들의 뇌리 속에 강렬하게 자리잡고 있는 차범근의 모습은 바로 이 '대 말련
전' 한 경기로 충분했다. 또한 이 게임은 아직까지도 한국축구사의 가장 흥분된 순간
으로 기억되고 있다. 사실 이 대회직전 차범근은 약간의 소용돌이에 휩싸였었다. 76
년 고려대를 졸업한 차범근은 신탁은행에 적을 두게 되는데 신탁은행과 서울은행이
통합되면서 당시 감독이던 민병대씨가 자동차보험으로 옮기며 차범근도 동시에 자동
차보험으로 이적하려다 문제가 발생 졸지에 무적선수가 되고 만다. 이때 축구선수가
적이 없으면 경기장에서 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당시 축구협회 회장 김윤하씨가
차범근을 축구협회소속으로 등록시켜서 박 대통령컵 대회에 출전 시켰던 것이었다.
- Retro: "The best of Chaboom 2"
(1977년 3월20일'78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 대 이스라엘전 -서울운동장)
당시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은 먼저 1,2,3,4조로 나누어 각 조1위 팀을 가려낸 뒤
오세아니아 지역대표등 5개팀이 홈앤드 어웨이로 승패를 가려 가장 성적이 좋은 팀
하나가 아시아 대표로 월드컵에 진출하는 방식이었다. 한국은 일본, 그리고 항시 우
리에게 껄끄러운 상대였던 강호 이스라엘과 같은 조에 속했다. 한 달 전인 2월 이스
라엘 텔아비브에서 열린 어웨이 경기에서 김진국이 강슛한 볼이 크로스바를 맡고 골
라인 안으로 들어갔으나 선심이 골인으로 인정치 않아 결국 무승부로 경기를 끝냈는
데, 이스라엘 매스컴에서 조차 김진국이 슛한 볼은 골인이 분명하다고까지 보도된 바
있고 한국의 오완건 단장은 부당한 오심을 FIFA에 제소하는 등 강력한 항의를 했지
만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이스라엘과의 서울 홈 경기는 한달 전의 분풀이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당시 한국의 감독은 최정민씨였고 코치는 김정남씨였다. 당시 멤버는 GK 1번 김황호
DF 3번 김호곤, 8번 조영증, 12번 최종덕, 5번 황재만, 6번 박성화 MF 4번 조광래,
9번 이영무, 17번 박상인, 18번 김성남, FW 15번 허정무, 14번 김진국, 11번 차범근,
7번 신현호등이었다.
1차전과 마찬가지로 초반부터 적극공세를 펼친 한국은 전반 20분이 지날 무렵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11번 차범근이 수비수 두 명을 가볍게 제치며 강슛을 성공시켜 3만
여 관중들의 함성을 쏟아낸다. 전반을 성공리에 끝낸 한국은 후반 GK 김황호가 '충분
히 잡을 수도 있는 볼'을 골로 허용해 1대1동점이 된다. 그러나 한국은 후반 3분 여
를 남기고 오른쪽에서 최종덕이 가까운 포스트쪽으로 이동하는 차범근을 향해 롱드로
우인 한 볼을 차범근이 헤딩패스로 가운데 밀어넣자 달려들던 17번 박상인이 골대 정
면에서 강력한 오른발 슛으로 골네트를 가른다. 승기를 잡은 한국은 1분 뒤 다시 차
범근이 센타서클 중앙에서 한 사람을 제치고 오른쪽 풀백인 자신의 고려대학 2년 후
배 12번 최종덕에게 연결하자 최종덕은 볼을 한두 번 툭툭 치고 가다 골대와의 거리
30여 미터 전방에서 그대로 중거리 슛을 성공시켜 서울운동장을 꽉 메운 3만 여명의
관중들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한다. 최종덕은 이후 '중거리슛의 명수'란 별명까지 얻
게 되고 결국 한국은 강호 이스라엘을 3대1로 물리친다. 이 시합에서 역시 차범근은
혼자서 3골을 모두 직,간접적으로 기여하며 그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78년 방콕 아시안 게임 결승전이자 사상 첫 국대 남북대결인 대 북한전을 0-0 무승부
로 마친 화랑(전 국대) 선수들 중 유일하게 차범근만이 현지에서 직접 독일 행 비행
기에 오르게 된다. 차범근의 독일 진출은 스위스에 본사를 둔 '바두즈'사의 독일 대
변인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서독에 도착한 차범근은 여우종 재 서독 한인회 회장의
환대를 받으며 다음날 분데스리가 최하위팀인 다름슈타트와 월봉 1만마르크(260만원)
에 6개월 단기 계약을 맺고 보쿰을 상대로 데뷔전을 갖는다. 다름슈타트의 부크발트
감독의 극찬은 독일 지역 신문을 비롯 국내 언론은 대서특필, 차범근의 '탈 아시아
시대'를 예고했건만, 당시 공군 현역병이었던 차범근의 신분 문제로 급거 귀국하게
된다. 도무지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하며 궁금해 할 후추인들을 위해 차범근
의 입대 배경 및 거취 문제를 간단히 요약해 본다. 76년 10월에 입대했던 차범근은
공군이 타군에 비해 복무 기간이 길었던 부분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공군팀 전력 강
화 특별 케이스'로 선정되어 타 군과 동일한 복무기간 후 '총장 권한으로 조기 제대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서면으로 받아 놓았던 상태라서 78년 12월이면 제대할 수 있다
는 걸 알고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그의 독일 진출은 12월에 진행 되었던 것이었다.
그런 '공군팀 특별 케이스 입대 1기'가 바로 차범근이었고 2기가 장기문, 황재만과
같은 당시 국가대표 급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당시 그의 독일 진출을 놓고 워낙 '시
끄러웠기 때문에' 공군의 그런 약속이 무산되었던 것이었다. 차범근의 독일 체류는
이렇게 해서 11일 만에 마감된다.
- Retro: "The best of Chaboom 3"
차범근은 그 다음해인 1979년 5월31일 공군에서 만기 제대 한 후 6월22일 다시 서독
으로 출국을 하게 되는데 대한축구협회에서는 떠나는 축구영웅 차범근을 위해 서울
운동장에서 성대한 고별경기를 열어준다. 3만 여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차범근의 고
별전은 차범근의 모교 고려대학OB와 연세대학OB의 라이벌전으로 치러졌다.
당시 고려대OB에는 차범근을 비롯해 선배인 황재만, 이차만, 고재욱, 그리고 후배인
박성화, 최종덕, 김성남, 김강남등이 출전했고 연세대OB역시도 김호곤, 박종원, 홍성
호, 허정무, 조광래 등 양팀 다 정말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출전했다.
결과는 박성화가 맹활약한 고려대 OB의 승리로 끝났지만, 경기를 마친 후 차범근은
고려대와 연세대 양교 응원단장과 함께 서울운동장 트랙을 한바퀴 돌면서 자신을 보
러 온 3만 여 관중들에게 손을 흔들면서 마지막 인사를 했고 운동장을 꽉 메운 수많
은 축구팬들은 환호와 박수 그리고 눈물로써 차범근을 배웅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
던 필자 역시 떠나가는 차범근의 모습을 TV로 지켜보며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영웅
을 잃는 슬픔'에 한없이 눈물을 흘렸었다.
'꺼지지 않는 차범근의 독일 신화…"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당시 유럽 최강이었던 헝가리를 누르고 첫 월드컵을 제패
하며 축구 강국으로 발돋움한 서독은, 그 무드가 이어지면서 1963년 국민들의 절대적
인 지지 속에 분데스리가를 창립한다. 차범근이 진출할 당시 분데스리가는 유럽 최강
의 리그였으며 세계적 선수들이 가장 뛰어보고 싶어하는 무대이기도 했다. 분데스리
가를 거치면 유럽 시장 어디든 갈 수 있었을 정도로 분데스리가의 위상은 실제로 대
단했다.
국내에서는 1977년경부터 MBC 문화방송에서 매주 월요일밤 10시 30분에 이철원 아나
운서와 주영광 선생의 구수한 해설로 서독 분데스리가를 방송해 주었기에 축구 팬들
은 그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 높은지를 대략 조금은 알 수 있었고, 골수 축구팬 이라
면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는 세계적 선수들의 이름 한두 명 정도는 다들 알고 있었다.
그 당시 분데스리가에서 뛰고있던 유명선수들은 다음과 같다. 바이에른 뮌헨의 폴 브
라이트너, 헤네스, 칼하인츠 루메니게, 융한스. 함부르크 SV의 케빈키건, 마가트, 후
루베쉬, 만프레도 칼츠. 도르트문트의 아브람직. 카이져스 라우테른의 브리겔. 샬케
04의 피셔. FC쾰른의 슈마커, 쿨만, 리트바르스키, 슈투트가르트의 한스뮐러, 쌍둥이
푀르스터 형제, 보루시아 MG의 마테우스 등이었다. 정말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
는 유명한 선수들이었다.
이러한 선수들이 즐비해 있었기에 차범근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성공을 섣불리 점칠
수 없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오쿠데라가 이미 차범근이 서독에 진출하기 2년
전인 77년에 FC쾰른에 입단해 있었다.
1978년 6월22일, 두 번째로 독일에 도착한 차범근은 몇 차례의 역경과 시련을 겪어야
만 했다. 처음에 입단했던 다름슈타트가, 잠시 고국에 다녀온다고 해놓고 기한 내에
차범근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계약위반을 들고나왔으며, 다른 팀에서도 차범근
에 대한 교섭이 전혀 없었다. 차범근은 3-4주 정도 호텔에서 머무르면서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봉착하게 된다. 대변인이었던 여우종씨와 함께 당시 다름슈타트 감
독이던 부흐만 감독을 슈트트가르트로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 다음날 (현 샬케 04 매
니저인) 루디 앗싸워가 공격수를 찾다가 부흐만에게 전화, 차범근에 대해서 알아본
것이 계기가 되어서 다음날 3일간의 브레멘 테스트가 성사되었다.
3일간의 테스트 도중 차범근은 연습경기에 출전하게 되는데 이 때 자신의 실력을 유
감없이 발휘해 지역 신문에 호평을 받게 된다. 브레멘의 매니저 루디 앗싸워가 브레
멘과의 계약을 요청해서 브레멘 크레스트 호텔에서 차범근의 협상은 시작된다. 5시간
에 거쳐 진행된 협상 중 프랑크푸르트 구단 측의 슐테로 부터 급하게 연락을 받는다.
78년 박스컵 당시 차범근을 활약상을 직접 보고 관심을 가지고 있던 슐테는 신문에
난 소식을 보고 차범근에게 '브레멘과 사인하지 말고 프랑크푸르트로 내려오라'는 요
구를 한다. 가능하다면 프랑크푸르트 측에서 계약을 하고 싶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당시 상황으로 봐선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브레멘 측은 사실 '헐값'에 차범근을 사인
하려는 움직임이었고 슐테의 연락을 받은 차범근은 곧 바로 본에 위치한 여우종 씨의
집에서 1박을 한 후, 다음날 새벽 프랑크푸르트로 내려간다. 10분 간의 입단 테스트
후 차범근은 분데스리가의 명문 프랑크푸르트와 연봉 25만 마르크(7천 8백만원)와 다
름슈타트에 이적료 20만 마르크를 지불해준다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게 된다. 차범근
이 입단한 프랑크푸르트는 FC쾰른, 함부르크SV, 카이져스라우테른과 함께 63년 분데
스리가가 창설될 때 같이 출발했던 역사 깊은 명문팀이었다. 이 팀에는 74년 뮌헨월
드컵 우승의 주역 그라보스키와 휄첸바인 그리고 세계 최고의 중앙 수비수중 한 명
인 오스트리아의 '전기철조망' 브르노 페차이가 핵심을 이루었으며, 이외에도 동독에
서 망명한 금발의 나흐트바이와 서독대표출신 니켈, 노이베르거 등을 보유한 중상위
팀이었다. 당시 프랑크푸르트에는 페차이와 스위스 국가대표 출신 엘스너까지 2명의
외국인 선수가 있었는데 차범근을 영입하기 위해서 엘스너를 트레이드하기도 했다.
(편집자 주: 차범근의 독일 진출 배경을 쓰기 위해서 수 많은 자료와 서적을 뒤적이
며 연구했다. 그 중 85년 축구원로들에 의해 공동집필 된 '한국 축구 100년 사' 중
의 차범근 독일 진출 이야기를 인용해서 후추 명전의 일부를 작성하기도 했는데 보기
좋게 낭패를 보았다. 가급적 차범근에 대해서 가장 정확한 FACT를 전달하려고 했던
후추의 기본 취지를 살려 원고 작성 후 차범근 감독의 확인 작업에서 여기저기서 빨
간 줄이 그어진 것이다. 여러 명의 축구 원로들이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축구 전문
서적에서도 차범근에 대한 오보가 전달된다면 과연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차범근에 대
한 정보는 어디서 구한다는 말인가…?)
입단과 동시에 차범근은 한국대표 시절에 달아온 백넘버 11번을 달고 당당히 프랑크
푸르트의 주전 스트라이커로 기용되면서 특유의 폭발적인 스피드를 이용한 돌파로 분
데스리가의 '차붐 돌풍'을 예고 한다. 특히 미드필더인 주장 그라보스키와 휄첸바인,
그리고 콤비를 이룬 니켈의 자로 잰 듯한 정확한 패스를 받아 많은 골을 터뜨려 데뷔
첫해인 79-80시즌 34게임중 31게임에 출장해 12골을 기록, 득점 랭킹 7위에 오르며
서독 축구계 뿐 아니라 전 유럽을 뒤흔들어 놓으면서 '갈색 폭격기'라고 불리우기
시작한다.
그 이듬해인 80년에 키커지에서는 차범근을 신년 첫 호의 표지인물로 내세웠고, 프랑
스의 메이어지는 차범근을 '80년대 가장 위대한 선수'로 선정했으며, 또한 차범근은
독일의 슈테른지가 선정한 '세계 4대 상승인물'에 테레사 수녀와 함께 선정되는 등
세계적 선수로 올라서게 된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UEFA컵 결승 2차전 대 보르시아MG
와의 경기에서 결정적 어시스트로 프랑크프르트가 1대0으로 승리하는데 공헌하며
UEFA컵 우승의 주역이 된다. 이 대회에서 3골을 기록한 차범근을 두고 서독의 유명
한 스포츠 전문가인 티터 큐어튼은 '차범근이 서독 국적이었다면 대표팀 공격문제가
완전 해결됐을 것'이라고까지 말했을 정도였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본다. 80년대 초반 세계 축구의 메인스테이지(Main stage)는 지
금 우리 축구 팬들에게 익숙한 이태리의 'Serie-A' 또는 스페인의 '프리메라 리가'
양대산맥 체제도 아닌 분데스리가 독주 체제였다. 물론 당시엔 유럽 시장과 남미 시
장이 지금보다 더 확연히 구분되던 시절이었지만 유럽 최고의 축구 시장, 즉 유럽에
서 볼 제일 잘 찬다는 선수들이 한결같이 몰려들던 분데스리가의 위상을 짐작조차
할 수 있을까? 베컴, 지단, 피구에 열광하는 요즘의 축구 팬들에게 당시의 차범근의
'무게'를 상상해 보라는 요구 자체가 과연 가능한 일인지 생각해 본다. 지금처럼 한
국 축구의 세계적 위상이 곤두박질 치고 있을 즈음, 과연 한국 국적을 가진 축구 선
수 한명이 세계 최고 수준의 무대 최정상의 자리에 버젓이 서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
지는 이야기인가…
분데스리가 진출 1년 만에 세계적 스타로 발돋움한 차범근은 80년 6월 프랑크푸르트
의 일원으로 한국을 방문했는데, 도착한 날 각 신문사와 방송사 사진기자들은 차범근
이 비행기 트랩에서 딸 하나양을 안고 내려오는 모습부터 촬영 하는 등 지금의 박찬호
가 귀국할 때 이상으로 김포공항을 뜨겁게 달구었다. 또한 화랑과 프랑크푸르트의 경
기 중계방송이 있던 날 차범근의 아버지인 차금동선생과 어머니인 채규순씨를 텔레비
젼 중계석까지 모셔서 인터뷰를 하는등 매스컴에서도 최고의 환대를 베풀었다. 프랑
크푸르트는 한국대표 화랑과 세 차례, 그리고 할렐루야팀과 한차례의 경기를 치루면
서 4연승을 했는데 화랑 시절의 짧은 스포츠형 머리스타일에서 바가지 머리스타일로
바뀐 차범근은 매 게임 절친한 후배이자 화랑의 주전 스토퍼 홍성호의 끈질긴 대인마
크와 심한 허벅지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네 차례의 경기 중 총 3골을 터뜨리는
등 놀랄 만큼 성장한 모습을 팬들에게 보여주었다.
또한 차범근을 보러 운동장에 운집한 국내 축구 팬들 중 과반수는 프랑크푸르트를 응
원하며 차범근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면서 격려했다. 한가지 아쉬웠던 것은 국
내 축구팬들이 너무나 보고 싶어했던 콧수염의 그라보스키와 세계적 수비수인 브루노
페차이가 사정상 내한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차범근의 명성에 자극을 받은 국내 몇몇 선수들이 80년 초반부터 분데스리가에 조심
스럽게 노크를 하기 시작하는데 연세대 출신의 박종원이 카이져스라우테른에 진출 하
지만 기량부족으로 도중하차 하고 박상인(뒤스부르크), 김진국(2부리그 보름즈), 김
민혜 등이 뒤이어 1부리그와 2부리그에 각각 문을 두드리긴하나 역시 분데스리가의
높은 벽을 실감하게 된다. 그나마 유일하게 허정무만이 80년 7월 네덜란드의 명문
PSV 아인트호벤 필립스에 진출하게 된다.
1981년, 그 누구보다도 화려했지만 역경이 끊이지 않았던 차범근의 축구 인생에 어쩌
면 가장 큰 '시련의 시절'이 찾아온다. 이미 분데스리가에서 세계적 공격수로 인정
받은 차범근이 팀 내에서도 1억이 넘는 고액 연봉자가 되자 이때부터 동료들의 텃세
가 시작되는데, 특히 자존심이 상한 브로노 페차이(얼마 전 고국 오스트리아에서 친
선 아이스하키 경기 중 심장마비로 사망)가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렸고, 분데스리가
의 타팀 수비수들 역시 정상적인 수비로는 차범근 마크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후
부터는 고의적 파울이 시작되었다. 급기야는 80-81시즌에 바이엘 레버쿠젠과의 경기
에서 겔스돌프의 잔인한 반칙으로 인해 차범근은 척추뼈에 금이 가는 중상을 입고 선
수생활 최대의 위기에 직면한다. 프랑크푸르트 팀 단장인 악셀샨더씨는 매 경기 후
기자들에게 '경기를 마친 후 라카룸에서 차범근의 몸을 한번 봐라. 마치 2차 세계대
전에 참전했던 모습이다'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차범근의 고난은 그라운드 밖에서도
이어진다. 국내 언론에서는 갑작스럽게 몰아 닥친 '차붐 돌풍'으로 인해 그의 일거
수 일투족에 주목했지만 그라운드 복귀와 재기에만 전념하던 차범근의 '비 협조적
태도'에 반기를 들다 못해 '폭발' 직전까지 가게 된다. 우리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소위 '차범근 죽이기'는 이미 20년 전에 시작된 셈이다.
여기서 필자는 지난 8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방문 시 차범근의 손 지갑 안에 아직까지
도 고이 간직되고 있던 한 통의 편지에 대해 얘기하려고 한다. 얼마 전 '월드컵 조직
위 홈페이지 사건'으로 부당하게 옷을 벗은 최창신 전 사무총장(당시 서울 신문 기자)
이 81년 차범근에게 보낸 편지이다. 당시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렸던 '월드베스트
올스타전'에 출전을 앞두고 있던 차범근은 P모 씨를 비롯한 국내 기자단 4명의 '초대
치 않은' 독일 방문을 받게 된다. PSV 아인트호벤에서 뛰던 허정무 전 대표팀 감독의
초청으로 유럽에 도착한 기자단은 바르셀로나 올스타 경기에 대한 소식을 듣고 차범
근에게 자신들에게 스페인 행 비행기 표와 체제비를 요구한다. 아주 좋게 얘기하자
면 "차선수, 그래도 당신이 국민들 덕분에 이 자리까지 와서 이렇게 컸는데 고국에
있는 그들에게 바르셀로나 올스타 전 경기 소식을 열려 주고 싶으니 가능하면 우리
취재비랑 체제비 좀 대 주쇼…" 이런 식의 요구였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어이,
차범근이… 니가 누구 덕분에 이렇게 국민스타가 되고 떼돈을 벌게 됐는데 이젠 우리
한테도 좀 협조해야지.." 당시 기자단의 정확한 접근 방식은 후추인의 상상에 맡긴다.
이에 대한 차범근의 반응은 단호했다. "당신들 비행기 표랑 체제비 끊어줄 정도로 돈
을 벌지도 못 했지만 설사 벌었다고 해도 그렇게는 돈을 쓸 수가 없다." 차범근의 이
한 마디로 그에 대한 국내 언론의 '융단 폭격'은 시작된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차
범근의 말을 들어본다. "독일에서 멀쩡히 게임을 뛰고 있는데 경기에도 안 나갔고 벤
치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야. '감독과 불화', '미국 코스모스로 간다', '홍
콩으로 간다…' 뭐, 이런 악성 루머나 퍼뜨리고 말이야." 당시 차범근에 대한 공격
은 독일 신문에서도 한몫을 했다. 81 시즌 골이 터지지 않자 '고연봉 선수'에 대한
시기로 인해 동료 선수 페차이와의 갈등 등, 한마디로 차범근이 경험했던 '최악의
나날들' 이었다. 차범근은 회상한다. "내가 죽는 수 밖에 없더라고… 내가 죽어줘야
해결이 되겠더라고… 마누라는 정신병원에 갈 뻔 하고, 근데 내가 죽질 않으니… 첫
골이 터지고 나니까 독일 신문은 그런 공격이 서서히 사라지고 차차 회복이 되었지만,
금방 죽길 원했던 국내 언론은 내가 3년, 4년까지 살아 남으니까 그때서야 서서히 수
그러 들더라고.. 그때는 정말 힘들었지… 당시 서독을 방문해서 내 생활을 보고 서
독 팬들의 반응을 두 눈으로 보고 갔던 최창신 기자는 국내 언론에서 별의 별 얘기를
다 해대니까 대체 이게 어찌 된 영문인가 해서 그 편지를 보낸 거고 얼마 전(98년)
보다도 훨씬 더 언론의 공격이 심했던 그때 진짜 힘들었는데 (창신이 형의) 그 편지
한 통이 정말 많은 힘이 되었지… 그 무렵 교통부 장관 하시던 정부 고위 관계자가
독일에 와서 내 생활을 다 보고 경기도 보고 가셨는데 그 뒤로 청와대에 계시는 분
이 신문사 데스크들을 불러서 '내가 다 보고 왔는데 그런 식으로 기사를 쓰면 되느
냐?'라고 질타를 해서 신문사 데스크들도 다 바뀌고 그랬다고 그러더라고…" 필자가
직접 본 최창신 전 사무총장의 낡고 낡은 편지에는 그런 말이 쓰여져 있었다. "자네
에 대해 그 어떤 소문과 말이 나돌아도 난 자네를 믿네…" 그 한마디의 격려는 이날
까지도 차범근의 지갑 속에, 아니 그의 가슴 속에 묻혀져 있다.
80-81 시즌에는 부상에 따른 그 후유증으로 28게임에 출장 8골을 기록하는데 그쳤으
나, 그 이듬해인 81-82 시즌에는 31게임에 출장해서 11골을 기록 하는 등 득점 랭킹
10위에 오르며 차범근의 건재를 과시했다. 82-83 시즌에 들어 더욱 완숙한 기량을 선
보인 차범근은 15골을 터뜨리며 팀내 최다득점선수가 됐으나 재정난에 허덕이는 프랑
크푸르트와의 재계약에 실패한다. 그는 79-83년까지 프랑크푸르트에서 뛰면서 1백 22
게임에 출전해 46골을 기록했다. 프랑크푸르트를 떠난 차범근에게 같은 분데스리가팀
인 슈투트가르트와 뉘렌베르크, 이태리의 나폴리, AC밀란 등의 많은 팀에서 스카웃
제의가 왔으나 차범근은 83년 7월 이적료 1백 35만 마르크(4억 5백만원)에 연봉 52만
6천마르크(1억 5천만원)라는 파격적인 금액을 받고 바이엘 레버쿠젠으로 전격 이적한
다. 레버쿠젠은 차범근과 '악연'이 있는 겔스돌프가 소속된 팀이다. 레베쿠전은 이미
분데스리가 베테랑이 된 차범근에게 그 무엇보다도 리더쉽을 요구하고, 그는 이적 하
자마자 팀에 쉽게 적응하면서 하위팀에서 맴돌던 레버쿠젠의 공격선봉으로 나서 팀을
분데스리가 7위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83-84, 85-86 시즌에는 두 차례나 전 게임(34
게임)에 출전하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특히 85-86 시즌에 시즌 최다득점인 17골을
터뜨려 분데스리가 득점랭킹 4위에 오르며 다시 한번 세계적 스트라이커로써 인정 받
는다. 반면에 차범근이 빠진 프랑크푸르트는 중하위권으로 떨어진다. 85년 바이엘
레버쿠젠 선수들 체력검사에서 차범근은 같은 팀 소속 19세의 선수들보다 월등한 체
력을 갖고 있다고 진단 받는 등 레버쿠젠에서도 변함없이 절제된 생활과 아울러 철
저한 체력관리를 해나간다.
86년은 차범근에게 있어서는 잊을 수 없는 한해가 된다. 2월20일 A급 코치자격증(모
든 아마추어팀을 지도할 수 있는 자격)을 취득 했고, 그렇게도 꿈에 그리던 월드컵
무대에도 서게 된다. 한국대표는 86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 마지막 경
기에서 숙적 일본에 2연승하며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진출을 확정 짓는데 본선을 앞
두고 축구협회는 서독에 나가있는 차범근을 불러들이며 한국축구 사상 최강의 멤버
를 구성한다. 사실 차범근의 월드컵 대표팀 합류는 많은 우여곡절을 거치며 이루어졌
다. 차범근의 대표팀 합류에 찬반양론이 갈렸기 때문이다. 우선 반대하는 측은 차범
근이 대표팀에 들어오면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차범근에게 쏠리게 되어 기존 선수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뿐더러 위화감을 조성해 팀웍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서울대 축구감독이자 축구 해설위원인 박경호씨는 '차범근이 합류해도 대표팀 전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반면에 한양대 교수이자 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당시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던 최은택씨와 88대표팀의 박종환감독
은 '세계적 공격수인 차범근을 반드시 합류시켜야 한국이 16강에 들 수 있다'고 강력
하게 의견을 제시했다. 특히 최은택씨는 축구해설을 할 때도 국내 전문가들중에 분데
스리가에서 활약하는 차범근 소식을 가장 자세하고 정확하게 전해주었고, '차범근 같
은 세계적 선수가 월드컵에 나가질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늘 얘기
한 바 있는 축구인이었다. 이외에도 이회택감독, 김재한감독 등도 차범근 합류에 강
력히 찬성했고 조광래, 허정무 등 노장선수들도 차범근을 불러와야 된다는 의견을 낸다.
이 문제로 수개월을 끈 끝에 결국 대표팀 감독인 김정남씨는 차범근 합류를 축구협회
에 공식적으로 요청해 멕시코 월드컵 한달 전인 4월 차범근은 드디어 대표팀에 합류한
다. 차범근이 소속되어 있는 바이엘 레버쿠젠에서도 구단사상 처음으로 월드컵에 출
전하게 되는 선수인 차범근을 위해 분데스리가에서 명성이 자자한 유명한 맛사지사인
레버쿠젠 팀 닥터 죨렉씨를 한국대표팀에 파견한다. 드디어 차범근은 월드컵 개막 한
달 전 대표팀의 미국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전지훈련 때 합류하게 되는데 김정남 감독
은 8년 만에 대표팀에 복귀한 차범근에게 백넘버 11번의 유니폼을 건넨다. 그동안 대
표팀에서 11번을 달고 뛰었던 변병주는 대신 19번 유니폼으로 바꿔 입게 된다. 차범
근은 월드컵 본선에서 후배인 최순호와 김종부를 투톱 파트너로 맞이하며 대 아르헨
티나전, 대 불가리아전, 대 이탈리아전에서 고국을 위해 헌신한다. 당시 나이 32세
의 차범근은 온 국민이 기대한 골을 기록하지는 못했으나 3게임모두 줄기찬 기동력과
노련한 경기운영으로 여러 차례 결정적인 찬스를 만들어 냈다. 비록 한국이 1무 2패
로 예선탈락은 했지만 86년 멕시코 월드컵은 차범근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뜻깊은 대
회였으며 그 어느 때 보다도 한국축구의 가능성을 충분히 확인한 대회라고 볼 수 있다.
87-88시즌부터 차범근은 센타포드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로 전환하며 25게임에 출장 4
골을 기록한다. 88년에는 '킥 AIDS88세계 올스타'로 선정되어 베켄바워, 미셀 플라티
니, 케빈 키건, 조지 베스트 등 전설의 수퍼스타들과 함께 친선경기에도 참가할 기회
를 잡게 되지만, 개인 사정 상 출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88년 4월 15일 대 카이져스
라우테른과의 경기에서 300게임 출장기록을 세운다. 또한 차범근이 이끄는 레버쿠젠
은 같은 해(88년) 구단 사상 처음으로 UEFA컵 결승에 올라 1차전 어웨이 경기에서 스
페인의 강호 에스파뇰에게 3대0으로 완패해 우승전망이 매우 어두웠으나, 2차전 홈
경기에서 레버쿠젠이 에스파뇰에 2대0으로 리드하고 있는 상황에서 차범근이 기적과
같은 3번째 골을 성공시켜 레버쿠젠이 3대0으로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수훈을 세운다.
결국은 승부차기에서 레버쿠젠에 4대2로 승리, 구단사상 처음으로 UEFA컵을 차지한
다. 이로써 차범근은 80년 프랑크푸르트시절 UEFA컵 우승을 경험한 후 다시 한번 우
승의 축배를 들게 되는데, 한 선수가 두 팀에서 UEFA컵 우승을 경험한 것은 차범근
이 처음이었다.
그 후 차범근은 88-89 시즌에 29게임에 출전해 3골을 기록을 하며 89년 6월 19일 은
퇴할 때 까지 분데스리가 통산 308게임에 출장해 98골을 터뜨렸는데 이 기록은 분데
스리가에 진출한 외국인 선수 사상 최고의 기록이다. 이 전까지 외국인 선수 최다득
점자는 덴마크가 낳은 세계적 스타플레이어인 보루시아MG의 알란 시몬센이 71년-78년
까지 기록했던 76골이 최다였으나,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진출 6년 6개월째 이미 81골
을 터뜨려 알란 시몬센의 기록을 깨고 이후 새로운 금자탑을 세운 것이다. 은퇴 후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팀을 지도할 수 있는 축구교사 자격증인 '푸스 발레러'를 취득
하고 그 해 11월 10일 고국의 품으로 금의환향했다.
차범근이 10년 동안 변함없이 세계 무대 분데스리가에서 세계적 선수로서 명성을 떨
치며 서독 국민들과 축구팬에게 절대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요
인은 피나는 훈련과 함께 술,담배,도박은 물론 오로지 축구와 가족 그리고 신앙 이
외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않는 구도자적인 생활을 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간혹 교민
들 사이에서 '대인관계가 안 좋다', '너무 이기적이다'라는 등의 비난도 받았으나 차
범근은 이에 개의치 않고 오로지 축구만을 생각했기에 최정상의 자리까지 간 것이라
고 볼 수 있다. 차범근의 '처세술'과 '대인관계'그리고 그의 '입'은 오로지 축구장에
서만 존재했다. 그는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축구 하나로 평가 받길 원했다. '남들에
게 잘 하고 대인관계 좋게 하는 일'은 한국에서도 할 수 있었다. 그가 독일에 온 목
적은 단 한가지, 분데스리가에서의 성공이었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괴로움
을 무릅쓰고 포기해야만 해야 하는 것이 많았다. 마늘이 잔뜩 들어간 음식을 먹고 난
후 독일 선수들이 노골적으로 표명한 이질감을 없애고 '그들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그 후론 한국 음식을 거의 끊다시피 했다. 흔치 않은 한국 음식을 고집하다간 경기력
에 까지 지장을 주겠다는 판단도 있었을 것이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승리는 축구장
안에서의 승리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그의 집념을 보고 질타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지
만, 입장을 바꿔서 볼 때, 어느 외국 용병 선수가 한국에 와서 김치찌개 보기를 무슨
'돼지 꿀꿀이 죽'보듯 꺼려하며 하루가 멀다 하고 스테이크 대령하라고 요구한다면
우리들의 반응은 불 보듯 뻔하다. '미친x, 여기가 어디라고…'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활약상과 그 의미를 짧은 지면을 통해서 설명한다는 일은 어쩌면 그 시대를 직접 체
험해 보지 않고서는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꺼지지 않는 차
범근의 독일 신화'는 필자가 독일을 방문했을 때 읽었던 어느 독일 시인의 시집에 쓰
여진 한 귀절로 요약된다고 믿는다..
'차붐!
나는 너를 낳아준 너의 어머니와 너의 조국 코리아를 향해 경의를 표한다…
별책부록 - ‘차붐 엑기스’
53년 5월 21일생. 차금동씨와 채규순씨의 3남 1녀 중 막내. 평범한 농가.
중학교 때 (하키 명문 영도중)필드하키 선수. 경신 중학교로 전학하면서 축구 시작.
(김기봉 교사가 경신중의 장운수 코치에게 소개)
경신고 1년, 무릎 부상으로 공백(대 동북고 전, 왼쪽 무릎)
경신고 2년, 베스트 멤버. 가을의 부산 MBC 대회 최우수 선수. 대통령 금배 전국 고
교대회 득점상.
경신고 3년, 청소년 대표.
치열한 스카우트 전쟁(연대, 경희대 등) 끝에 고려대 진학
고대 1년(72년) 국가대표. 100m 11초 04의 총알 스피드. 부동의 오른 날개.
72년 한국일보 선정 최우수 신인상.
73년 5월28일 뮌헨월드컵 아시아 A조 예선 대 이스라엘전에서 연장 후반 4분 결승골.
76년 신탁은행 입단.
76년 신탁은행과 서울은행 통합, 당시 감독이던 민병대씨가 자동차보험으로 옮기며
스카웃 소용돌이.
76년 10월 공군 입대.
77년 1월 7일 3시, 3년간의 연애 끝에 오은미씨와 결혼.
78년 12월 25일, 서독으로 가 다름슈타트에 입단. 대 보쿰전으로 분데스리가 데뷔,
병역 문제로 79년 1월 5일 귀국.
79년 9월 22일 서독으로 다시 출국. 다름슈타트가 2부리그로 떨어지며 프랑크푸르트
와 7월 16일 연봉 25만 마르크(7천8백) 계약.
79~80시즌. 31게임, 12골. 득점 7위
80년 5월 21일, UEFA컵 결승전 대 보루시아 전에서 어시스트(1-0 승). 12월 스페인
바르셀로나 개최 “슈맨스타 11” (월드 올스타) 선정
80년 10월, 40만마르크(약 1억 2천) 재계약.
80~81 시즌. 28게임 출장 8골(레버쿠젠 전 부상)
81~82 시즌. 31게임 11골, 득점 10위.
82~83 시즌. 32 게임 득점 15골, 팀 최다.
83년 7월, 레버쿠젠으로 이적. 이적료 백35만 마르크(4억 5백만원), 연봉 52만 6천
마르크(1억 5천).
83~84 시즌. 34게임 12골. 팀 7위 진출.
84년 프랑크푸르트시절, 교외 늪지를 구입하는 과정에서 부동산 사기 사건에 휘말려
집을 차압 당함. 그 때 대우에서 법정 보증금을 내는 등 도움.
85년 11월 9일,대보루시아MG 전.분데스리가 200회 출장.(218게임 중18게임만 빠진것).
85~86 시즌 34게임 17골, 득점 4위.
85년 오른쪽 발목인대 이완. 수술.
86년 2월 20일, A급 코치 자격 획득(모든 아마추어 팀 지도자격 ? 분데스리가 7년 이
상 뛴 선수들에 한해서 B급 자격증 부여, 3일 후 바로 A급 자격증 공부 자격 부여).
86년 4월... 멕시코 월드컵 참여하는 차범근 감독 위해 바이에른 레버쿠젠에서 의사
2명, 비서 1명 특별 배치, 관리 지시.
87~88 시즌 공격형 링커 전환. 25게임 4골.
88년 3월, 킥AIDS88 세계 올스타 선발(대 일본리그 선발팀) 경기 초청되었지만 출전
거절. (베켄바워, 플라티니, 케빈 키건, 네스킨스, 조지 베스트, 파울로 로시, 에우
제비오 등. 출전)
88년 UEFA컵 우승 마지막 동점 골.
88~89시즌 29게임 3골.
88년 4월 15일 대 카이저스라우테른 경기, 300게임 출장.
89년 은퇴. 통산 308게임 98골.
89년 쾰른 대 축구지도자 코스 졸업 - 1급 지도자 자격증 획득.(프로팀 포함 모든 팀
지도 자격)
시즌 소속 출장 골 비고
78-79 다름슈타트 1 0
79-80 프랑크푸르트 31 12 득점 7위.UEFA컵 결승전 결승골 어시스트
80-81 28 8
81-82 31 11 득점 10위
82-83 32 15 팀 최다 득점.
11시간의 비행 중 6시간이 지났다. 첫 2시간은 신문을 보고 밥 먹고 나머지 3시간
반 가량은 수면제를 먹고 잠을 좀 잤지만 '아직도 멀었다' 란 생각을 떨칠 수가 없
다. (중략)
담배가 땡긴다. 지금은 어디쯤 날아가고 있을까? 카자흐 어디쯤 인가? 차범근 감독
과 그의 가족들을 만나려니 가슴이 설렌다. 그의 명전 취재란 생각이 더 가슴 뛰고
부담스럽게 한다.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명전을 1년 반 만에 하게 된다. 잘 도와주
실 지 걱정이다. 기현이 도 걱정이다. 마음이 무거운 trip이다…"
어느덧 비행기 안에서 이 메모를 끌적인 게 반년 전의 일이 되어 버렸다. 2년 가까
운 세월을 중국과 독일에서 보내고 있었던 차범근 감독의 근황을 살피기 위해서, 그
리고 후추 개편과 함께 소개 될 차범근 명전의 인터뷰를 따기 위해서 독일행 비행기
를 탔던 필자의 당시 느낌은 상당히 불편했고 불안했다. '과연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 글 역시 차범근이란 이름 석자를 악용해서 후추의 명성을 높이기
위한 꼼수로 받아들여지면 어쩌나?', '차감독은 어디까지를 내게 얘기할 것인가..?'
그의 이름 값만큼이나 부담스러웠던 방문이었다.
1999년 12월26일, 지금으로부터 약 1년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중국 심천 팀의
감독직 재계약을 고사하고 차감독이 한국에 일시 귀국했던 적이 있었다. 단 이틀 동
안의 방문이었다. 차감독, 그의 부인 그리고 막내 아들을 데리고 서울에 들어온 첫날
밤 필자는 그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다음날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떠나야 하는
데 국제면허 취득하는 절차가 어떻게 되냐는 질문과 함께 오랜 만에 반가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7시 반, 필자는 그의 동부이촌동 아파트로 향했고 이른
아침부터 그를 필자의 차에 태우고 강서운전면허 시험장으로 달렸다. 그날 정오에 공
항 라운지에서 나머지 식구들과 합류하기로 약속하고 말이다. 차범근과 함께 등촌동
의 면허시험장을 들어선 순간, 시간이 이른 탓에 그리 많지 않았던 장내 시민들이 하
나 둘씩 그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아빠 손을 붙잡고 따라온 어린 아이에서부터 아주
머니들 그리고 시험장 직원들까지… 그 누구도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고개를 끄덕이
며 인사를 먼저 청하지 않았던 사람이 없었다. 필자는 그때 처음 '국민 XX' 이란 표현
의 의미를 피부로 경험했다. 왜 요즘은 '국민가수 XXX ', '국민시인 XXX' 란 수식어가
생소하지 않지 않나? 하지만, 필자는 그때 비로소 차범근이 왜 차범근인지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반가움, 정겨움, 미안함, 놀라움, 존경심.. 이런 것들이 그날
아침 면허시험장 안에 있었던 사람들이 눈빛에서 모두 배어 나왔다. 담당부서의 부서
장 쯤으로 되어 보이시는 직원 분의 배려 하에 생각보다 일찍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선 면허시험장 여직원들의 수줍은 사인 요청이 끊이질 않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인 요청을 친절하고 정감 넘치게 응해 주던 차범근의 모습을 지켜보며…
'이 사람이 오늘 오후 독일로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렇게들 좋아하는데…'하는
생각이 필자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일을 마치고 주차장으로 향하는 순간, 무언가를
까먹은 듯, 그는 황급히 시험장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아 참, 그 친구한테 인사를
못 했네…"하며 처음 국제면허 취득 절차를 반갑고 친절하고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던
여직원에게 그는 달려갔다. "신경 써 주신 덕분에 일 잘 마치고 돌아갑니다. 고마워
요…" 여직원은 차범근의 그 말 한마디에 할말을 잃은 듯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차범근은 그렇게 사는 사람이었다. 차 안에 두고 나온 차범근의 명함판 사진을 꺼내
오기 위해서 필자가 그의 허락 하에 열어보았던 Hand-Carry 손가방 안에는 손때 묻
은 성경책 한 권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낡은 성경책 안에는 부인과 단둘이 찍은
'사진관 사진'이 한 장 있었다. 축구를 제외한 그의 인생은 그 브리프 케이스(Brief
Case) 안에 모두 들어있었다. 성경 그리고 그의 가족…
그렇게 차감독을 독일로 떠나 보내고 9개월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난 8월, 필자는
차범근의 인터뷰도 인터뷰였지만 '독일에서의 차범근'을 목격하고 싶었다. '축구를
하는 유럽 어느 나라에서도 '차붐'이라고 하면 누구든지 다 안다'고 할 정도로 유명
했다고 하던데, 필자는 '내 귀로' 확인을 해야만 했다. 장시간의 비행을 끝내고 프랑
트푸르트 공항에 내려서 입국 심사대에 오른 필자에게 상당히 거북하고 무뚝뚝한 표
정으로 심사대에 앉아 이리 저리 필자의 외모와 여권을 차례로 살펴보던 독일 출입국
직원의 한마디…" 독일엔 뭣하러 왔습니까?" 피곤에 지친 필자는 가장 형식적이고도
무리 없는 답변인 "비즈니스 목적으로 왔습니다."라고 대답하려다가 순간적으로 마음
을 바꿔 먹었다. "나, 차붐 만나러 왔소이다." 그 친구의 외모로 봐서 '차붐 세대'는
아닌 것 같아 보였지만 프랑크푸르트까지 가서 초장부터 '깨갱'하고 싶지 않은 한국
인의 자존심을 걸고 내 뱉었던 대답이었다. "차붐?? 정말입니까?? 그가 지금 프랑크
푸르트에 있나요? 그를 잘 압니까? 그가 지금 독일에서 뭐하고 있습니까?…" 차붐도
좋고 한국인의 자존심도 좋았지만 필자는 곧바로 '아뿔싸'를 외쳤다. 한시가 급하게
공항 밖으로 튀어나가서 담배 한 개피를 물어야만 했던 필자의 야무진 생리적 욕구
는 그 악의 없는 대답 한마디로 점점 멀어져만 갔다. '언제 내가 무뚝뚝한 표정 지었
었냐?' 식으로 환히 웃으며 "꼭 그에게 안부 전해 주십시오."라던 그의 말을 뒤로 하
며 필자는 짐을 찾으러 가면서 생각했다. '독일에서 차붐 얘기 잘못 꺼냈다가 약속
시간 늦기 딱 좋겠다.' 하지만,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짐 나오기를 기다리며 필자
의 입가에 자연스레 지어졌던 그 미소는 그 어떤 외교관이나 정부 관계자가 국민들에
게 줄 수 없었던 그런 소중한 의미의 미소였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짐을 찾아 공항 대합실로 나와서 한두 번 두리번거렸더니 저기 멀리서 독일의 '후추
게릴라' 차두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선 오은미씨도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차감독은 필자가 도착한 모습을 본 후에서야 저 뒤편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공항의 수 많은 한국인들의 시선을 피해 구석 자리에서 필자를 기다리고 있던 차범근
이었음을 금새 눈치 챌 수 있었다. 주위 시선의 중심에 서는 걸 그토록 기피하는 차
감독이 직접 공항까지 나온 사실이 고마웠다. '독일에서는 그랜저만큼 흔하다'던 차
감독의 애마 벤츠 자가용을 타고 그의 집으로 달렸다. 날이 춥고 공기가 좋지 않았던
중국에서의 생활 탓에 폐에 문제가 생겼던 부인 오은미씨의 수술과 간병 차 독일로
갔던 차범근이었지만, 부인의 회복 과정이 당초 예상보다 훨씬 좋았고 이 세상 어디
보다도 독일에서의 생활이 몸에 익숙해 있던 차범근 가족에겐 독일에서의 휴식이 그
무엇보다도 훌륭한 처방책이었고 부인의 쾌유는 그런 '특효약'의 결과였는지도 모른
다. 폐의 일부를 도려 내야만 했던 쉽지 않은 수술을 받은 부인의 병상 기간 동안 차
감독은 하루도 빼지 않고 기도와 함께 옆자리를 지켰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는 한마디를 더했다. "이 사람 병은… 마음의 병이었을 거야. 98년에 '그 엄청난 일'
을 당하고도 결코 쓰러지지 않고 중국에 가서 우리 모두를 위해 정말 열심히… 열심
히 살다가 한계에 도달한 거지. 더 이상은 버틸 힘이 남아있지 않았던 거지… 다 나
때문에 생긴 병인데 내가 옆에서 지켜 주지 않으면 어떡해? 평생을 내 옆에서 날 지
켜준 사람을 이젠 내가 다른 일 모두 접고 이 사람을 위해서 시간을 보내라는 하나님
의 지시였다고 생각해…"
조용하고 공기 좋고 평화스러운 프랑크푸르트 주택가의 한 집을 빌려서 생활하고 있
던 차감독 가족은 독일에서 보냈던 8-9개월이 너무 좋았다고 얘기했다. 독일인들처럼
그를 잘 알아보고 그를 아끼는 외국인들이 없었지만, 또 그들처럼 그를 '그냥 내버려
둘 줄 아는' 사람들도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차범근 가족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
이 바로 이 '그냥 내버려 둘 줄 아는 배려' 였는지도 모른다. 독일에서의 차범근의
일상은 극히 단순하고 평화로웠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장남 차두리 군이 근처 슈
퍼에 가서 갓 구운 빵을 사오는 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부엌에 위치한 식탁에 4식
구가 (장녀 차하나 양은 당시 레베쿠젠에서 인턴 사원으로 재직 중) 둘러 않아 후레
쉬한 빵과 각종 햄, 그리고 구수한 커피로 아침 식사를 대신했다. '한식 생각은 잘
안 드시냐?'는 필자의 질문에 마치 '너, 애가 왜 그러니…?'하며 심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필자를 쳐다보시던 차씨 부부가 생각난다. ^^ 외국 생활을 성공적으로 하
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현지 '식생활 적응'이란 설명을 적지 않게 했던
그에게 그런 어리석은 질문을 던졌으니 말이다. 그것도 그들만큼 객지 생활을 오래
했다는 필자의 입에서 나온 질문이었으니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
다. 차감독과 그의 가족들은 어디를 가더라도 한국 식당을 잘 안 찾는다고 했다. 오
히려 그 지역의 '맛 있는 토속 음식'을 찾아 다니며 먹으면 먹었지 말이다. 실제 필
자가 독일에서 머무른 몇일 동안 차감독의 집에선 쌀과 김치는 '구경'도 할 수가 없
었다. 필자가 외국 생활을 하며 가끔 방문했던 외국인 가족의 식단을 연상케 할 정
도였다. 어줍잖게 식생활 만큼은 '골수 된장파'로 굳어버린 필자의 '쌀 탐닉'은 결
국 차두리 군과의 프랑크푸르트 '시내 구경'을 빙자한 한 한국 음식점에서 비로소 이
루어졌다. 독일 도착 3일 째 되던 날 말이다.
차범근 가족의 철저한 '로마에선 로마법을…' 식의 식생활 중 또 한가지 필자의 두
눈을 튀어나오게 했던 부분은 그들이 먹는 '음식의 양'이었다. 평소 운동 선수들과
식사도 자주 하고 술도 자주 하는 편이라 어느 정도 운동 하는 사람들의 '그릇 사이
즈'를 알았던 필자였지만… 아~ 차씨 가족은 참으로 음식을 맛있게 많이 드셨다. 파
스타, 빵, 야채 등으로 가득 채워진 한 접시를 애퍼타이저로 후다닥 끝내시고 A4 용
지 만한 사이즈의 스테이크를 또 하나 후다닥, 그리고 나서 후식으로 아이스크림 한
통과 에스프레소 커피 한잔, 저녁 식사 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또 배가 좀 출출
한 시간이 되자 저녁 식사 때 먹고 남겨둔 파스타를 먹기 위해 3부자(차범근, 두리,
세찌)가 일대 쟁탈전을 펼친다. 할말이 없었다. 평소 신중하고 말수 적기로 유명한
차감독이 식사 테이블에서 만큼은 나름의 재치와 귀여운(?) 모습도 살짝 보여주시곤
했다. 남은 음식을 차지하기 위해서 장남과 나누는 대화 수준은 거의 희극의 한 장면
이었다. "야, 차두리… 니가 그것까지 먹으면 어떡하냐~? 야, 차두리 너 빵 몇 개째
야?…" J 그런 웃음과 사랑이 오가는 행복한 한 가정의 식사 테이블… 차범근이 가장
소중하고 감사하게 생각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그의 식생활에서 필자를
놀라게 한 대목은 바로 하늘이 두쪽이 나도 거르지 않는 식사 전 차범근의 '감사 기
도'였다. 매 끼니마다 가족들끼리 교대로 돌아가며 '감사 기도'를 드리는 모습… 단
순한 "하나님, 땡큐!' 차원을 뛰어넘어 5분 가까운 시간 동안 가족들 한명 한명과 측
근들의 신상에 대한 기도를 나지막한 목소리로 올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바르게
살려고' 발버둥치는 한 가족의 처절한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차범근을 욕하고 비
난했던 사람들의 일상에서도 이렇게까지 마음 속의 믿음을 몸으로 실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기도 많이 한다고 다 착한 사람이냐? 조
폭들도 주말엔 교회 가더라..'하며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런 발상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몸보단 입이 앞서는 사람들이란 사실도 이젠 안다.
차범근이 독일에 있는 동안 그가 유일하게 즐겼던 '외부 생활'은 바로 골프였을 것
이다. 앞서 그의 중국 생활에서도 잠시 언급을 했었지만, 비교적 저렴하고 단순한
절차 만으로 골프 라운딩을 할 수 있는 독일에서 그는 골프에 흠뻑 빠져 있는 모습
을 볼 수 있었다. 독일 도착 이틀째 되던 날 필자는 차감독, 오은미씨와 함께 프랑크
푸르트에서 약 1시간 가량 떨어진 지역의 골프장에 갈 기회가 있었다. 직접 그와 라
운딩을 돌기 위해서가 아니라 차감독이 오래 전에 약속되어 있었던 지역단체 친선 골
프 대회에 차범근을 비롯한 전직 분데스리가 출신 축구 선수들 몇 명이 '우정 출연'
형식으로 초빙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사 역할'을 하기 위해서 였다. (덕분에 그 유명
한 독일의 아우토반을 벤츠로 밟아볼 기회도 주어졌지만^^) 참 신선하고도 건전한 발
상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국내 축구 전문가들이 흔히들 방송에 나와서 떠드는 '그 나
라의 축구 문화'는 단순히 인프라 구축, 관전 문화 개선, 저변 확대.. 뭐 이런 거창
한 단어들로 만들어지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지역 출신 축구 선수들이 은퇴하고 나서
도 그들을 아끼고 사랑해 주는 그런 '작은 관심'에서 비롯되어 그 무엇보다도 생명력
있는 '문화 유적'으로 존속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차감독을 골프장에 내려주고 막내아들의 편입 서류 문제로 레베쿠젠 시청에 볼일이
있는 오은미씨를 태워 1시간 가량을 아우토반에서 달렸다. 그녀가 시청에서 볼일을
보는 동안 필자는 마침 차범근의 '제2의 독일'인 레베쿠젠 출신의 한 축구 에이전트
를 만나 '레베쿠젠 시절'의 차범근에 대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아울러 레베쿠젠 팀의 경기장 구석구석까지 구경하며 설명을 들을 기회도 얻을 수 있
었다. 레베쿠젠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일개 에이전트가 경기장 내 구단 프런트 직
원들 대부분과 친구처럼 지내며 서로의 편의를 제공해 주는 모습을 보며 또 한번 독
일이란 나라의 '축구 문화'를 엿 볼 수 있었다. 에이전트의 존재 자체를 원천 봉쇄하
고 있는 대부분의 국내 프로 스포츠 현실과 비교해 보면 참으로 보기 좋고 따뜻한 광
경이었다. 구경을 하는 동안 구단 또는 경기장 측의 살벌한 감시도 경계도 없었다.
마침 보조 구장에서 훈련에 돌입하려고 하던 당시 레베쿠젠 팀의 크리스토프 다움 감
독을 비롯, 축구 전문지의 우도 편집장, 주변에서 선수들의 훈련 모습을 구경하던
시민들에게 까지 필자를 소개하고 인사를 나눌 수 있던 '국경을 뛰어넘는 축구 공감
대'는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물론 필자가 차범근의 측근이란 사실이 그들의 환대에
상당 부분 영향을 끼쳤겠지만 말이다. ^^
무엇보다도 필자의 관심의 대상이었던 '레베쿠젠 경기장 내의 차범근의 대형 사진'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원래 경기장 지하에 위치한 프레스 룸에 그 동안 레베쿠젠 팀을
빛냈던 선수들의 실물 사이즈 사진을 걸어놓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차범근의
사진 역시 그곳을 장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필자가 방문 했을 때에는 레베쿠
젠 팀의 새로운 스펀서가 선정되어 스펀서 혜택의 일환으로 그들의 로고가 선수들의
사진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경기장 내부에 위치한 '레베쿠젠 박물관' 안에는
레베쿠젠 팀 창단 이래 처음으로 우승했던 UEFA Cup을 들고 환호하는 차범근의 사진
이 박물관을 빛내주고 있었다. 레베쿠젠 구단 내에서 차지하고 있는 차범근의 '무게'
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었다. 차범근의 독일 체류 기간 동안 비자(Visa) 관련
서류에서부터 유로 2000 참관 지원, 차범근 축구 교실 지원까지… 그가 팀을 떠난
지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향한 그들의 애정은 한결 같았다. 자
비로 해외 연수 떠나는 국내 코치들의 그림자가 유난히도 길게 느껴졌다.
레베쿠젠 구경을 마치고 차감독의 골프 대회 장소로 다시 돌아왔을 즈음, 이미 대회
참가자들은 모두 라운딩을 마치고 야외 테이블에 마련된 단촐한 '리셉션' 장소에서
그 유명한 독일 맥주를 한잔 씩 나누고 있었다. 그곳 골프장엔 고급 안주가 있는 '클
럽하우스'도 없었고 곱게 차려 입은 '캐디'도 없었고, 철저한 회원제로 운영되는 '그
늘집' 문화도 없었다. 그저 현역에서 은퇴한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부담
없이 골프를 즐기고 이야기를 나누는 현장이었다. 그 '뒷풀이' 자리에서 함께 라운딩
을 돌았던 지역 주민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웃음을 나누던 차범근의 모습이 보였다.
현역 시절 그와 함께 분데스리가를 빛내던 니켈, 피셔, 휄첸바인 등의 모습도 보였
다. 결례인 줄 알았지만 필자는 그들에게 카메라를 들이 밀었다. 차범근에 대한 기억
을 되살려 한 마디씩만 해 달라는, 철 없지만 필요했던 요구와 함께 말이다. 청춘을
같이 하고 현재까지 가족들끼리 하루가 멀다 하고 왕래하는 '인생 친구'들에게 새삼
스레 차범근의 활약상에 대해 얘기해달라는 부탁만큼 유치하고 부적절한 요구가 없었
지만, 차범근의 현역 활약상을 직접 보지 못한 국내 축구 팬이 필자 만이 아니란 사
실이 그런 실례를 범하게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옛 동료들과 함께 어울려 있는 차범근은 참으로 편해 보였다. 그리고 한편으로 많이
안타까웠다. '왜 우리는 저들처럼 차범근을 가질 수 없을까..? 과연 국내 축구 관계
자, 동료, 원로 중 몇 명이나 차범근의 얼굴에서 저토록 평화로운 표정을 자아내게
할 수 있을까? ' 하는 생각에 말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차범근은 줄곧 골프 얘기
였다. 마치 어린 아이가 처음으로 '바나나 킥'을 때리고 난 후의 모습처럼 어느 홀에
서 몇 야드가 나갔다는 그의 천진난만한 코멘트는 필자의 마음 역시 흐믓하게 만들었
다. '축구 말고도 이 사람이 빠질 수 있는 스포츠가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독일 방문 3일 째, 필자는 차감독의 장남 차두리 군과 프랑크푸르트 중심에 있는
'스포렉 (SPOREC)'이란 재활원을 방문했다. 현역시절 차범근을 비롯한 수 많은 유
럽의 축구 선수들이 각종 부상을 치료하고 재활하기 위해 찾았던 그 유명한 '재활
전문 센터'였다. 마침 그곳에서 재활 중이던 차두리군의 안내로 디터 에리히 재활원
장, 그리고 유럽 최고의 재활 권위자 라인하트 게벨 부원장과 짧으나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미 오래 전에 국내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한다는 스포츠 재활 클리닉에
서 'OK 판명'을 받았다가 발이 잘 낫지 않아서 결국 '스포렉'의 문을 두드린 차두리
군은 이미 그곳에서도 '물건'이 되어있었다. 붙임성 있고 유창한 독어로 재활원에서
함께 치료를 받던 분데스리가 선수들, 아이스하키 선수들과 호형호제하고 있었다. 2
층으로 된 재활센터에는 국내 어느 헬스클럽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단순한' 기구들
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주로 매트 위에 누워서 재활 운동을 하고 있었다. '저 러닝
머신과 자전거는 한국에도 많이 있는 건데.. 뭘, 어떻게 치료하길래 죄다 이곳을 찾
는가?'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필자의 궁금증은 10여분 간의 관찰을 통해서 금
세 풀릴 수 있었다. 30여년 전통의 노하우를 통해 스포츠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근
육 요건을 제대로 파악하고 각 기구들의 장, 단점을 파악해서 실질적으로 운동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훈련 방법을 채택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주 살벌하고 전문
적인 방법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물리 치료사들과 함께 어울려서 뒹굴고 웃고 농담
하고… 깔깔거리면서 뒹굴다 보면 어느덧 오전 시간 2-3 시간이 후딱 지나가 버렸다
'스포렉'의 비결은 아마도 그것인지도 모른다. 막연하고 따분하고 지루하기 십상인
재활 기간을 최대한으로 재미있게 만들어주는 환경이 바로 '스포렉'이 주는 최대의
장점인지도 모른다.
'스포렉'을 거쳐간 수백명의 스타들의 사진들이 내부 복도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필
자가 아는 축구 선수들은 모조리 한 구석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 중에도 눈에 띄는
사진이 한 장 있었다. 'Korea'라고 쓰여진 티셔츠를 입고 실내 자전거를 타던 황선홍
의 사진이었다. 십자인대가 두 번이나 찢어져서 고생을 했던 황선홍의 무릎도 그곳
'스포렉'에서 고쳐졌다. 당시 차범근의 주선으로 '스포렉'을 찾았던 황선홍은 그곳의
의료진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기고 떠난 듯 싶었다. 황선홍 이후로도 김병지, 김은
중, 고정운 등과 같은 대표급 선수들이 그곳을 방문했지만, 스포렉의 게벨 부원장에
게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는 바로 황선홍이었다고 한다. '워낙 부상의 정도가 심했지
만 너무도 잘 참고 견뎌주고 결국 재기에까지 성공했기 때문에…'가 그의 이유였다.
'스포렉'이 입소문을 통해 국내 선수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이미 2-3년 전부터
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엔 이미 (당시) 광양고 3학년에 재학 중이던 한 축구 선수가
자비를 털어서 5주 간의 고된 재활 훈련을 받고 있었다. 덕분에 필자는 어린(?) 친
구 두 명과 함께 프랑크푸르트 시내에 위치한 한국식당에서 간만에 포식을 할 수도
있었지만 말이다. 독일에 머무르는 동안 '그 나라의 축구 문화'란 말이 자꾸 머리
속에 떠올랐다. '독일 축구의 저력' 그리고 '분데스리가의 중추'는 '월드컵 3회 우
승'도 '카이저' 베켄바워도 아니었다. 정부 차원에서부터 시작하여 시골 동네클럽
축구선수에 이르기까지, 바로 축구를 위한 범 국민적 관심과 사랑 그리고 배려가
한데 어울러져 거대한 축구 문화를 형성하고 그 문화에서 베어 나오는 힘이 바로
'독일 축구의 뼈대'였다.
독일에서의 마지막 밤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던 필자는 그때까지 정식 후추 인터뷰에
구체적인 승낙을 하지 않고 계시던 차감독을 붙잡고 '물귀신 작전'에 들어갔다. 그가
그토록 소중히 아끼는 프라이버시였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차감독이 필자와의 인
터뷰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아니, 넌…. 그 동안 얘기 안
들은 게 뭐 있니?? 다 알면서 뭘 또 물어…?" '필자는 들었지만 후추인은 못 들었다'
는 궁색한 이유로 그를 소파에 앉혔다. 부인 오은미씨는 부엌에서 또 뭘 만드시는지
'죽이는 냄새'로 필자의 굶주린 배를 자극했고 차두리 군은 객원 카메라 맨으로 지
정, 비디오 카메라를 돌리게 했다.
독일을 떠나기 2주일 전부터 그의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고 공식 인터뷰 질문만 100개
가 넘었다. 준비해 간 질문 리스트를 먼저 보여드렸다. '평소에 삼촌처럼 따르던 필
자가 다 아는 얘기를 공식 인터뷰화 하기 위해서 허비한(?) 시간이 이 만큼이니 협조
해 달라'는 무언의 압력(^^)과 함께 말이다. 후추 스탭의 노고에 감탄하며 차범근의
말문은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아마츄어 차범근
후추:축구 처음 시작하신 건 어떻게…? 중학교 때죠?
차범근:중학교 때 시작을 했지. 근데 거기 체육 선생님이 김기봉 체육선생님이라고
있었어. 그 사람이… 그 사람이… 그 사람도 이제 경희대 나와가지고 축구를 할려고
들어왔다가, 아마 전라도 사람이니까 김… 김병삼인지 뭐 교장이 그래, 저… 경성고
등학교로 갔지, 그래서 나중에 중학교 때 우리가 다 고등학교에서 안 받는다 그래 가
지고, 전부 정종덕씨가 잠시 트레이너 였었는데 건국대학교에, 우리를 데리고 경성으
로 다 가가지고 난~리가 나가지고, 나는 붙들려왔지 다시. 장선생님한테 인제 붙들
려 왔는데, 그 김기봉 선생님이 그러니까 인제 전학을 시켜준거야. 그때 누구를 통해
서였냐면… 그때도 고등학교…. 했는데 그때 학교를 고만두면서, 누구를 소개시켜줬
냐면 장운수 선생님을 시켜준거야.
후추:그러니까 장운수 선생님이 감독님 축구 하는 거 보고 pick up 했다는 보도는,
이거는 아니네요?
차범근:그건 아니고, 김기봉 선생님이 도와줘서 그렇게 했지. 근데 이제 가니까 중학
교에는 축구부… 입학을, 8천원. 그때 돈으로 8천원. 땅 파서 갖고 간 돈이야 진짜.
8천원을 인제 아부지가 해 가지고 찾아갔지 이제 장 선생님을… 뭐, 오죽했겠어? 그
래 가지구 인제, 장선생님이 나를 결정적으로 한 거는, 이제 축구를 3학년 때부터 본
격적으로 학교에서 처음 시작을 했는데, 훈련이야 이제 같이 했었지 중학교에서. 그
래 가지구 정식으로 입학이 된 거는 3학년 때부터 입학이 된 거야. 6개월이 그러니까
나는 공중에 떴지. 학교를 영등포에서 공부를 하다가. 그래 가지구 축구도 이제 그때
부터, 축구는 뭐 다니면서 했는데 인제 뭐 그 중간은 알거 없구… 그래 가지구 그렇
게 된 거지. 그래서 대회가 가을에 한 대회가 있었어. 그 가을, 무슨 그 중앙대학교
부속, 중앙대학교에서 하는, 그 무슨 총장있었지? 여자총장님. 그 사람이 하는 대회
에 우리가 2부로 출전을 해 가지고, 그때 우리가 준우승을 했는데 시작할 때 보다는
가을 때 그 때 굉장히 잘했어. 그래서 이제 다 안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등록자체를
3학년들이, 하나만, 그 잘 하는 애 하나만 고등학교에서 받겠다고 그래서 우리는 아
예 2학년으로 등록을 했어. 근데, 겨울에 인제 입학을, 이제 우리가 다 절루 인제 그
러니까 우리는 경성으로, 그때 그러다 3학년때부터 누가 왔냐면 정종덕씨, 건국대학
교가 인제 그 사람은 경신의 주 저거는 아니었는데 하여튼 전학을 와 가지고 고등학
교에서 졸업을 해서 장선생님이 인제 말하자면 은사지, 근데 많이 어려움을 경신에서
당한 게 많이 그런게 있는가봐. 그래가지구 글루 가면서 다 데리구 가는데 나두 이
제 데리구 갔지 글루. 어차피 우리는 2학년으로 등록을 했으니까…
후추;그분 아니었으면 그것두 안됐겠네요 그럼.
차범근:아니지, 그래가지구, 그분이 그래두 1년을 가르쳤지 나를. 우리는 따라서 글
루 갔고, 입학도 거기 다 했어. 시험도 다 보고. 나는 시험은 저기 가서 봤어 경성에.
그때 이제 축구부 처음 만들 때니까 경성고등학교가. 지금 있는지 모르겠어.
후추:있어요.
차범근:그때 거기에 인제 또 누가 글루 왔냐면 김기봉 체육 선생님이 글루 왔다고.
인연이 그렇게 돼. 그러니까 나는 어차피 축구를, 장선생님을 모를 때니까 거기에 미
련도 없구, 안 받는다 그랬으니까. 글루 가서 이제 3학년으로 가서, 아 그 학교 인제
고등학교로 입학을 할려고 간거지. 왜 그러냐면 여기는 2학년으로 다시, 아니 3학년
을 더 다녀야 되니까. 근데 그때 청소년… 9횐가 아시아 청소년 대회가 한국에서 했
었다고.
후추:아, 일본 전에? 일본 대회 처음 나가신거 아녜요, 청소년.
차범근:방콕.
후추:방콕인가?
차범근:응, 방콕대회. 근데, 그 전전이 어디냐면, 2년 전, 고거 2년 전이 서울이었다
고. 김… 인권씨가 그때 잘할 때 크라우춘이 감독이었고, 그때, 아… 저기다. 그때
청소년이 아니고, 필리핀 청소년 대회 때 김진국 뭐, 김호곤. 아마 김호곤도 그때 다
했을 거야. 강병찬 뭐, 강철 뭐 이런 사람들 할 때, 시간이 없더라구 그러니까 합숙
을 하고 뭐. 근데 또 경신 고등학교에 그 이하연교장 선생님이 계셨다고, 경신고등학
교는 이하연 교장선생님, 손갑영 서무과장님, 장문수 선생님이 트리오야. 축구를 참
좋아하시고, 이하연 교장선생님, 연대 나오셨는데. 장선생님은 경희대 나오시고, 송
갑영… 하여튼 세 분이 참~ 그 서로 우애도 좋으시고, 또 축구부를 상당히 그 아껴주
셨던 분들이야. 한 분은 재정이고 한 분은 교장, 한 분은 감독이니까. 그러니까 죽어
도 안 놓겠다 그래가지고 입학이 다 됐는데, 시험은 안 봤어. 여기도 합격을 시켰어
임의로. 그래서 나만, 딴 사람은 다 가도 좋은데, 나는 안 된다고 그래가지고 이하
연 교장선생님하고 장선생님이 마지막까지. 안되가지구 나는 학교다니다가 언제갔냐
면 입학 다 되고 늦게늦게 몇 개월 지난다음에 다시 경신으로 붙들려왔지. 그래서
들어왔는데 겨울에 이제 들어왔다가 그냥 나를 잡아 죽일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무서워서 도망갔지. 그래서 가출. 1주일동안 가출했었어 그때. 그랬다가 아부지한테
다시 붙들려가지구 장선생님 손에 붙들려갔지.
후추:고등학교때 송갑영 사무국장님이 나중에 97년도에…
차범근;아니, 사무국장이 아니구 서무과장.
후추:서무과장 어… 맞다. 알마타에서 그 가족들 만나신 거 맞아요?
차범근:맞어. 그 아들이라고 그러더라. 아들하고 엄마.
후추:근데 왜 거기 가셨대요?
차범근:그 선교사로 와 있더라구 아들이.
후추:아~
차범근:응, 근데, 참 좋으신 분들이었어. 우리 이하연 교장선생님도 그렇고, 그 송갑
영 선생님은 참 사람이 인자하시고 그리고 그 인제, 잘은 모르지만 교회 오래 그 저
거 해서 사랑이 많으셨어. 그래서 인제… 그때 고등학교 2학년땐가? 운동은 많이 하
고 제대로 먹진 못하고 막 그러니까 인제 쓰러졌지. 그래서 병원에 실려갔는데 영양
실조라고 이제 판정이 됐지. 그래가지구 인제 나를 자기 집으로 데리구 가가지구, 그
사모님… 그땐 몰랐지 이제, 그게 보신탕이더라구.
후추:먹고 나니까 아셨어요?
차범근:아~니 인제, 나중에 보니까… 보신탕. 그냥 계속 한번에 많이 못먹으니까는
쪼금씩, 밤중에도 내가 찾으면은 한 다섯 번인가를 먹었던 거 같애. 그래서 이틀인가
삼일을 거기서 그렇게 하구 회복을 하구, 나와서 이제 시합을 나갔지. 그래서, 그리
구 인제 틈틈이 이렇게 찾아 주구 용돈도 주구, 또 장선생님이 인제 그, 침두 그래
서 그… 또 다른 사람이지. 침 놓는 사람은.
후추:기사엔 장감독님이라고 돼 있던데? 장선생님이라고…
차범근:장선생님은 있고, 또 있었어. 침 놓는 선생님이 계셨는데.
후추:학교에?
차범근:응, 금침을… 그래가지구 인제 장선생님이, 허리 다쳐 가지구 내가 한 6개월
이가 7개월… 그리구 나서 전학 그때 전학사건 이후에 한 7개월을 또 쉬었지. 그래서
축구를 이제 못하는가부다 그랬는데 인제 그 금침 맞구.. 뭐, 어떻게 금침을 맞아서
그랬는지 어쨌든 나았어. 그리구 2학년 때 이제 바로 청소년 대회 1년 만에 대표 돼
가지구…
후추:처음 청소년 대회 나가신 게, 71년도요.
차범근:71년도.
후추:그죠? 그게 동경대회 아니었어요? 태국이었어요?
차범근:아, 맞구나. 동경이 처음이다. 71년 동경, 72년 방콕. 거기서 대표선수가 바
로 됐으니까.
후추:고등학교 때 꿈은 파일럿이었어요?
차범근:그렇지 나는 이제, 그때는 그게 어렵지가 않은게 뭐냐면, 삼군사관학교 체육
대회가 있어 가지구 럭비하고 축구를 스카우트 해갔어. 그러면은 그 선배들을 미리
인제 차출해 가지구 공부도 가르치고 뭐 해가지고, 선배들 중에 우리 선배들이 비행
기 타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 마지막까지 내 고등학교 때도 그 제일… 김진국 선배
바로 위에, 한 사람 있었는데 김상호 선배라고, 그 사람도 우리 경신이고, 조덕구,
다 뭐… 또 있어. 또 한 사람은 백혈병으로 죽고, 한 네다섯 사람 돼. 그때 또 우리
집이 바로 수원전투비행장 밑에 있잖아. 그래서 인제 뭐… 워낙 차, 자동차 이런걸
좋아하고, 하늘에 떠 다니는 거야 뭐 말할 것도 없지. 그러다 보니까 이제 어, 그런
거 한 번 나중에 파일럿이 한 번 돼 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후추:축구 이렇게 오래 하실 줄은 생각도 안 하셨어요?
차범근:그렇지, 그때만 해도 인제 애들 때니까 비행기가 이렇게 집앞에 날라다니고…
신기하잖아? 근데다가 고등학교를 가보니까 실제로 아 비행기 타고 있고, 축구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게 2학년 땐가 결정을 해야 하더라고,
거기 가는 거를. 이제 청소년 대회, 청소년대표가 되고 이제 거기를 갈려면 미리 인
제 그걸 내야 돼.
후추:신청서요?
차범근:응, 신청을 해야 돼.그러니까, 이제 장선생님도 그렇고 운동을 하는게 좋겠다.
후추:고대는, 고대는 어떻게 가시게 되신 거예요?
차범근:고대?
후추:그때 이차만 감독이 차 앞에서 배째라 그러고 쓰러지고, 난리가 났었다면서요?
차범근:아, 그거는 나 때 그런 게 아니고 저기 때 그랬지. 박종원이. 박종원이 때 전
술적으로 그렇게 한거지 전술적으로.
후추:그럼 감독님 가실 때는 그런 난리나 스캔들 같은 거는 없었나요?
차범근:나는 그렇게 할 고대에서 철통같이 그렇게 해서 따른 데서 손을 쓸 수가 없
게 그렇게 됐었지 근데, 원래는 나는 연대에 가기로 돼 있는 거야.
후추:근데 왜 고대? 황재만 선배 따라서 고대 간 걸로 돼있던데.
차범근:아니, 황재만 선배도 선배지만, 나는 이하연 교장 선생님 때문에, 그 인제 정
확히 그래서 고대로 간거야 사실은. 그래서, 우리 경신 나온 선배들이 고대, 가서 다
죽어 가지구 고댈 한 사람두 안 보냈어. 연대 갔는데 연대간 선배들이 다 죽었어. 한
번도 안 됐다고. 근데 교장 선생님은 연대야. 연대 다~ 이제 그 체육위원회 연대 거
뭐라 그러지? 연대 체육위원회 거기 있잖아, 동문들 다 얘기돼서 뭐 장학금, 뭐 다
이거 뭐 문제 없고… 이렇게 인제 다 된거야. 그래서 인제 교장 선생님이 그렇게 얘
기했으면 아 연대지. 거기다 청소년을 일본에서 했잖아. 그때 코뼈가 부러졌는데 연
대 선배들이 다 나와서 그거 병원, 거기서 치료해주고, 어디 가서 이거 치료 받았는
데, 세브란스 가서 세 번 받았는데.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 가지구 세브란스 병원에
가서, 왜?
후추:연대로 갈 몸이라서?
차범근:그럼. 그리구 숙소에 가 가지구 회식하면 고기도 먹고 … 다 하구 ^^ 근데 이
제 장선생님이 나를 얼로 보내려고 했냐면 나를 경희대로 보내려고, 경희대에 누가
있냐면 최영근 교수가 있었는데 둘이 참 가깝고 둘이 이북에서 넘어오신 분이고 그리
고 나를 인제 갖고 싶어하고 그래서 달라고… 아마 서로 약속이 됐던가봐. 근데 이
제 그냥 너 글루 가라 그러면 말이 안되니까, 고대 있고 연대 있는데. 그리구 교장
선생님이 글루 그렇게 가라는데 모 그렇겐 안되잖아. 그래서 모라고 얘기 했냐하면…
그래가지구, 참 내가 정신적으로 많이 시달렸어. 그래서 한동안 내가 장선생님을 나
중에도 그니까… 내가 그 선생님으로서 어떤 그런 거를 내가 잃었지. 왜 그러냐면
분명히 우리들한테는 거길 안 보내겠다고 그랬거든. 고 다음에 바로 우리 하나 선배
가 폐암으로 아니, 폐… 결핵으로 대학이 다 됐다가 결핵이 판정이 났는데, 치료해
주면 되잖아, 근데 짤렀어, 입학 다 돼 가지구, 저… 그니까 뭐야. 시험 날짜가 다
돼 가지구 짤러 버렸어. 그 사람이 나중에 사고친 사람 아냐, ‘경신 고등학교 살인
사건’에. 지금 뭐 행방불명이 됐는데, 뭐 죽었다고도 하고 어떻게 뭐 갔다는 말도
있는데, 그래서 더더욱 인제 고대 연대는 안 보내겠다. 그럼 어디야, 근데 교장 선
생님은 그러면은… 나는 이제… 가만있어, 양호실로 불러. 막 설명하고 2-30분 고대
그러니까 경희대를 가라 이거야. 그럼 또 이제 교장 선생님은 나중에 교장실로 또
딱 불러 가지구 다 얘기됐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연대루. 연대는 또 내가 원하는 데
고, 또 아 가래니까, 교장선생님이 가래는데 뭐. 얘기할 거 있나. 근데 문제는 이제
장선생님이 이제 아마 이렇게 서로 약속이 돼 있었는지 난리가 났어. 그래서 결국은
학교를 졸업 임박해 가지고, 학교를 내가 가지를 못했어, 그랬더니 퇴학을 시키겠다
고 막 그래가지구 또 뭘 증명 떼어 가지구 학교를 보내고,
후추:근데 고대는 갑자기 어디서 튀어 나온 거에요?
차범근:아 그래서, 그렇게 하다 보니까, 내가 경희대는 가기가 싫고, 아 고대하고
연대가 있는데, 연대가 내가 1지망이고, 고대는 생각도 안 났지… 고대는 아예 포기
상태, 왜? 길이 없으니까… 근데 이제 재만이형한테 한 번 전화가 왔어. 그 이제 우
리 수원 고향사람이고, 그래가지구 내가 이제 그때 너무 이제 막 시달리다 보니까, 그
럼 교장선생님도 아니고 여기도 아니고 그냥 일루 튀어야 되겠다. 그래서 인제…
후추:도피하신 거네요?
차범근:근데 마침 전화가 왔길래 아휴, 그럼 나는 고대를 가겠다. 근데 문제는 이제
학교에서 뭐 다 난리가 난거지, 퇴학시키겠다 모 하고 막, 그래서 결국 이제 그렇게
해 가지고 그래서 인제 그 와중에 고대는 인제 앉어서 굴러 들어온 거지 그냥.
후추:그러네, 별 힘도 안들이고…
차범근:그럼. 그때부터는 뭐, 내가 온다 그러면… 워낙 뭐 학교가 막 그렇게 되니까
그래서 인제 세 분이 만나서 결정을 해 주면 되는데 따로 불러 가지구 너는 죽어도 연
대다 너는 경희대다 이러니까 완전 중간에서 짬뽕이 돼가지고… 그 얼마나 내 그 상
처가 컸으면 나중까지 내가 장선생님을 찾아가지도 않았으니까… 근데 재밌는 건 내
바로 위에 홍성호가 연대를 갔다고, 응? 그 아부지가 이렇게 돼서 갔다 그러지만…
그 다음 박종원이는 완전히 고대야. 응? 본인도 고대고. 이제 내가 오늘 숙소도 갔
다 오고,내일 이제 집으로 싸인 받으러 가는 날, 애를 연대로 장선생님이 빼돌렸다고.
후추:그때 그럼 이차만…
차범근:우리보다, 먼저, 새벽에, 내려가서 장선생님하고, 도장을 받고. 왜? 우리랑
가게 돼 있는거야 내일 낮에. 그래서 우리하고 저녁 먹고 내가 인제 숙소에 데려다
주고. 본인도 원하고 집, 아버지도 원하고 문제가 없어 근데, 그 사람의 아버지가 누
구냐면 공화당 지구부장인가 뭐 그래. 그래가지고 뭐 저기… 중앙 무슨 공화당 위원
장이 이제 연대가라고 우겨 가지고 하여튼 이렇게 저렇게 눌러 가지고 하여튼 애를
숙소에서 새벽같이 밤중에 데리고 도장 받아서 애 데리고 날른거야. 그래가지고 차
만형이, 이제 차만형하고 같이 가기로 되어있었지 거기를, 집에를. 나는 이제 다 된
거니까 뭐 그래서 그 후로 나는 스카우트 하는데 나는…
후추:개입을 안 한다?
차범근:스카우트하는데 나는 개입을 할 것도… 빠지고 뭐 우리 후배였으니까 그래서
이제 걔는 연대로 가는데 마지막에 몇 선수를, 다른 애들을 이제 잡기 위해서 못 가
게, 나는 안 내려갔지 부산은. 그래서 고대는 이제 제일 첨에 그렇게 뛴거구…
고대는 완전히 그냥 앉아서…
후추:그때 이제 그 나중에 그러고 연대를 얘네를 보내는 바람에 내가 이제 돌았지.
왜 나때는 그러고 갈 때 못 가게 해놓고 이럴 수 있는거냐 이거지… 그래서 이제 갔
었지 이제 집에를. 누구랑 갔었냐면 홍성호는 이제 나는 후배지만, 같이 다니다가 1
년 꿇어가지고 연대를 갔잖아, 나는 이제 고대고. 그래가지고 참, 정말 그래 이제 따
졌어 이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거냐…. 나때는 그렇게 난리를 난리를 하고 연
대를 다, 다 돼있는데 못가게 그래서 결국엔 나는 고대로 도망간 거 아니냐. 선생님
이 고대 연대는 죽어도 안 보내시겠다 그래 가지고. 그래서 괴로우시니까 인제 나는
그 내막은 모르지 인제. 우리야 인제 젊은 그거에 그냥 뭐, 아 선생님이 나한테 그렇
게 이야기했으니까 나는 그것만 가지고 그냥 막… 그러니까 선생님도 할 이야기가 없
잖아. 소주 갖고 오래 가지고 그냥 소주만 딥따 드시더라고. 그리고 나중에 장선생님
이 한동안이야, 한동안. 그래서 참… 내가 스승으로서 장선생님은 그 존경할 수가 없
다, 이러 이렇게 그래 가지고 그냥 한동안. 뭐 이제 그랬었지… 근데 나중에 이제,
대우 뭐 이렇게 들어가시고 그러면서 이제… 시간도 많이 지났고, 이해도 하고, 다
지난 얘기니까 인제 그렇게 됐었지. 한 동안은 아주… 이건 있을 수 없는 거다, 이건
제자한테 어떻게 그런… 응? 아주 막 상당했었지 그때.
후추:근데 고대 가신 건 후회 안 하시죠?
차범근:잘했지, 연대 갔으면 완전히 뭐…
후추:왜 후회 안 하세요, 고대 가신 건?
차범근:고대는, 고대는 우리처럼… 저 우리, 그거에 맞잖아. 우린 뭐 얄쌍하고 그런
게 아니잖아. 좀 투박하고 촌놈이고 학교 자체가 그러니까. 우린 뭐 고등학교 3학년,
대학교 3학년 때까지도 고무신 신고 다니고 그랬으니까…
후추:그래요?
차범근:그럼…
후추:축제에서 만나실 때도 그러고 나가셨어요?
차범근:그럼~
후추:진짜?
차범근:그럼, 고무신 신고… 목욕하고 뭐...
후추:사모님이 축제 파트너가 원래는 감독님 친구분 파트너였어요?
차범근:아니, 그게 아니고….응응…. 축젠지 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우리 과 친구
가, 이제 나중에 안 사실인데, 저 사람 따라다니면서 죽겠다고 그런 친구가 하나 있
었다고. 나중에 알고 보니까. 조성훈인가 이렇게 유도하고 그런 친구가 있었는데, 그
이제 저 사람을 저렇게 죽기살기로 쫒아 다니는데, 저사람 친구가 뭐 나를 만났으면
좋겠다고 그러니까 이제 그 같은 과니까 걔를 통해서 이렇게, 근데 우리 대표팀 합숙
을 하고 있었으니까 학교에 잘 없었지. 그땐 뭐 주로 합숙을 마니 하니까. 그래서 이
제 약속을 해 놨는데 이제 그 친구가 인제 무슨 일 때문에 부산을 내려갔대.
후추:그 유도하는 친구가요?
차범근:아니아니… 저 사람 친구가…
후추:아, 사모님 친구가~~
차범근:친구가 신청을 한거지, 저사람이 신청을 한 게 아니었거든. 그래서 이제 나야
뭐 모르지 이제, 저 사람이 그렇다 그러니까 이제 그런 줄 아는 거지. 그 주영인가
뭐 그런 친구가 있어. 그 친구 오더니… 뭐, 뭐라 그러는데 하여튼 나중에 알고 보니
까 저 사람이 아니고 그 친구래는거야. 그래 가지고 없으니까 뭐, 너라도 나와라 그
래서 나는 이제 저 사람인 줄 알고 또 점잖게 나가서 그렇게 만났지. 이제는 만난걸,
만나자마자 내가 결혼하자고…
후추:그러셨다면서요?
차범근:어..
후추:얼마나 황당하셨을까?
차범근:뭐 황당하긴 모 좋았겠지 뭐. ^^
후추:저 안암동 로타리에 ‘키 다방’ 이야기 좀 해주세요. ‘키 다방’이요.
차범근:그 키 다방은… 그 고려대학교에…
후추;축구부 아지트에요?
차범근:축구부, 운동부… 운동, 그러니까 야구, 농구, 축구… 하여튼 5개부에 대한…
그 아줌마가 5개부 운동 선수들을 아주 굉장히 잘해줬지.
후추:박희수여사…
차범근:그러니까 해설하시는… 야구해설하시는 이광환!
후추:이광환? LG 감독이었자나요?
차범근:모르겠어… 하여튼 우리 막 드나들 때에는 이광한 감독이 이제 제일 그 아주
머니의 인제, 사랑을 받는 선수였었어. 그러니까 그냥 훤하더라고. 그 사람, 김동광…
또… 럭비만 아니고 하여튼간 야구, 농구, 축구는 하여튼 그 사람이 거의 뭐 먹여 살
렸다고 하면 돼. 거기서 앉아서 뭐 차도 마시고 뭐하고 그렇게 해서 그렇게 인제 거
기를 다녔었지. 특별히 이제 그 거기 가면 다 엄마엄마 그러고 인제 그분을 그렇게
부르고… 재만이형, 나 특히 아주 상당히 이제 잘해주셨고.
후추:기사에도 그렇게 나왔더라구요. 황재만 선배 인터뷰에서… 뺏겼다고, 범근이한
테 뺏겼다고, 그사랑을…
차범근:내가 워낙 또 이제 신인으로 또 이제 그렇게 또 이제…
후추:잘하시니까
차범근:하여튼 뭐 나뿐 아니고 모든 운동선수 들어오는 신입생 선수들이 그러니까 일
단을 가는 데가 거기였어지 그때는. 일단 스카우트해서 들어오면은 선배들이 이제 거
기 다 있었으니까.
후추:동경 청소년 대회에서 만난 김미은이란 학생 기억 나세요?
차범근:그렇지 뭐 세 번인가 만났…거 세 번인가? 두 번인가,한국에 한 번 나왔었고…
후추:대학교 1학년 때죠?
차범근:대학교… 아냐, 고등학교 3학년 때. 2학년 때 청소년을 갔으니까. 2학년 때
우리 청소년 갔는데 그 때 고등학생이 셋이었었어. 나하고 이정국이하고 어… 유영화
라고 있었어. 그래가지구 그 세 선수들이 고등학생이고 나머지는 뭐 은행, 대학교,
우리가 제일 어린 막내였었지. 그래 가지고 인제 뭐 왔다 갔다, 이제 그때는 교포들
이 많이 왔었으니까. 그때 인제 또 무서워 가지구두 뭐 북한 뭐뭐 조총련 이래 가지
고두, 그래서 이제 나, 고등학교 애들은 이제 그… 유영화, 나… 랑은 이제 그, 거
기 고등학교하고 이렇게 거 펜팔 뭐 비슷한 거 이래 갖고 한번, 한국에 그 가족들이
있어 가지고 한번 나갔었어… 만났었어.
후추:어렸을 때… 고등학교 때나 어렸을 때 제일 좋아하는 축구선수 있으셨어요? 그
때부터 베켄바워였어요?
차범근:근데 어렸을 때는 뭐 베켄바워가 우선 공을 깨끗하게 차니까 그래서… 뭐 이
렇게 부딪히거나 뭐 그렇지가 않잖아. 그래서 많이 좋아했지.
후추:그때 인터뷰 하실 때 보면 고등학교 3학년 때나 대학교 1학년 때 항상 우상이
베켄바워 였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었어요…
차범근:나는 그 하는 베켄바워의 그 스타일이 참 마음에 들고… 성격이겠지 그거는.
후추:72년도에 브라질 싼토스 팀 한번 왔었죠… 그때 경기 뛰셨죠?
차범근:뛰었지, 그때 골도 넣고…
후추:그땐 어떠셨어요 소감이? 그때 처음으로 브라질 프로팀…
차범근:펠레. 옛날에는 프로 1부를 만나는거는…
후추:거의 없는 일 아니에요.
차범근:그러니까 꿈 같은 얘기지…그 팀들하고 경기 한다는 거는… 그러니까 미지수
지, 믿어지지가 않는 거지, 우리 실력이 도대체 어느 정도나 되는지…. 공포의 대상
이지 한마디로. 그사람들은 뭐 신기에 가까운 걸로 우리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근데 그때 펠레가 그… 아시아 투언가 그거 하면서 그냥 뭐… 우리 또 한국 있잖아,
그냥 하면 되는데 착 따라다니면서 이렇게 막 붙어 가지고… 그래두 한 골 넣더라고.
내가 첫 골 넣고 아마… 저기, 회택이형인가 골 넣고.
신앙인 차범근
후추:76년도 말레이시아 박스컵, 마지막에 세 골 넣으신거요.
차범근:응~ 76년도?
후:네. 4:1로 지고 있다가. 후반 38분 42분 43분…
차:시간은 모르지 나는…
후:우째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었어요?
차:그러니까 그런 게 이제… 그, 글쎄 인제 뭐 의지, 내 의지로다가 될 수 있는 거는
아니고 그런 게 이제 그 신앙을 갖게 된 그런, 상당히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그런,
아 이 세상에 신의 존재가 있지 않는가 라고 생각했던 게 바로 그런 경우지. 그거는
내가 뭐 하고 싶다고 되는게 아니고 그야말로…. 그냥 첫 골도 때렸는데 맞고 나오
는 거를 박상인이가 넣고, 그 나머지도 그냥 뭐 거 막 다 사람들이 일어서서 나가는
순간에, 때리면 들어가더라고. 돌아서면서 때리면 들어가고… 그러니까 신들렸다고
하는 게 바로 그런 거지 응? 신들렸다 그러는 게.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안에서는
뭐 어떤 성령의 그런 도움이고, 일반 사람들이 얘기하는 거는 신들렸다고 얘기 하는…
그냥 그때는 그 뭐뭐 어떻게 의식적으로 하는, 무의식적으로 하는 일, 골을 넣기 위
해서 막~ 그러다가 그냥 돌아서서 때리면 들어가고 들어가고. 그래서 5분 동안에 세
골이 터진거지, 난리가 났지.
후:77년에 이천석 목사님 기억나시죠.
차:그럼, 77년…
후:12월 24일… 그 전에 이영무씨 작은 아버지가 전도사였어요?
차:지금 목사님이시지.
후:아, 먼저 그럼… 이, 안수기도 때 모 뜨거운 게 이런 왼쪽 무릎으로 확 올라오는
게 느껴 지셨다는 데… 그때 고질병이던 무릎 치유가 안 되어서 애 먹으시다가 그 안
수기도 같이 받으시면서 무릎도 낫고 신앙도 갖게 되시는 결정적인 계기가…
차:아니 올라오는 게 아니고 여기가 배를 막 움켜쥐고, 타는 것처럼 그래가지고 숨
을 못 쉬었지.
후:아 그래요?
차;그럼. 인제 저 사람 옆에서 같이 기도하고… 근데 뭐, 그 성령 뜨겁게 받으면 여
기가 탄대는 거 아냐, 까맣게. 실제적으로 그런 게 이제, 이제 뭐 그런… 그런 역사
가 무슨 그 자체가 모 이렇게 중요한 거는 아니고, 그러면서 그 어떤 사람이 성령을
받으면 우선 그 내면적으로 변화가 생기지. 무슨 인생관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고,
이제 하나님의 어떤 그런 존재를 느끼고, 이제 내가 어떤 존잰지도 알게 되고, 내가
뭐를 앞으로 해야되는 지 알게 되고. 그래서 이제 결국은 그게 이제 어떤 그… 하나님
을 믿게 되면서 이제 내가 내면적으로 생활이 완전히 바뀌기 시작하는, 신앙생활로
바뀌고, 그때 내가 예수를 안 믿었으면 세상 일반 다른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생활
하는 쪽으로 갔을는지 모르지. 근데 그때 인제 내가 신앙을 갖게 되면서 아 하나님이
살아계시구나, 그리고 이제 그 말씀을 읽으면서부터 이제 내가 느끼는 거지. 그 인
제 뭐 하나님이 그렇게 깨닫게 하시니까 내가 느끼는 거지. 아 내가 이제 어떻게 살
아야 되겠으며 우리가 왜 살아야 되는지에 대해서 알, 느끼게 되고 이제 그것 때문
에 기도하고 그 길이 꿈 같은 그야말로 맨날 테레비, 78년도는 열 시 몇 분에 분데스
리가 해 줬잖아. 그 꿈 같은 거를 놓고 기도한지 1년 만에 그게 이제 기도하는 중에
슐테가 왔다 가고, 일본 재팬컵에 가서 내가 그런 인정을 받게 되고, 그러면서 더 그
런 게 확실해지기 시작해서 결국은 독일까지 건너오고, 경기도 우여곡절 속에 그…
그니까 엔트리 접수도 마지막에 하게 돼서 한 경기를 뛰게 되고, 다시 붙들려서 돌아
갔다가 다시 와서도 정말 아주~ 그냥 우연으로 얘기하기에는 너무너무 아주 그냥, 많
은 그런 난제들 가운데서도 길이 열려서 결국엔 프랑크푸르트까지 와서 입단을 하게
되고 그런거야.
후:그러면, 독일은 처음 오시게 된거는 어제도 말씀하셨듯이 그 ‘반두스’인가?
차:그래서 이제, 오게 된거는, 이전부터 꿈이 분데스리가 한 번 갔으면 좋겠다, 이게
꿈이었었지 우리… 막연한 꿈. 근데 70… 예수를 믿으면서, 예수를 믿기 전에는 내가
나를 위해서 축구를 하는거 아냐. 근데 예수를 믿고 나서는 내가 사는 그런 목적이
나를 위해서가 아니지,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거지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
한 생명을 줬고 예수를 통해서. 또 예수 믿는 사람이 나중에 가는거 보면 하늘나라고
우리는 이땅에서 하나님이 그러니까 우리를 이땅에 살게 하시고 복을 주신 거니까 그
거를 우리는 그 하나님을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내야 되는 게 우리 피조물이 해야 될
그런 일이지. 그런 가운데 사명이라고 하면 지금까지는 나를 위해 축구를 했지만 지
금부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가 축구를 해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라
고 하는 거는 우선 내가 예수를 믿는 자체가 사람들이 봤을 때 아 저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 그 자체도 하나님한테 영광이 될 수도 있는 거고, 또 공을 더 잘 차서 더 유
명해지고 그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면 또 하나님한테 영광이 될 수 있는 거고 사람
들한테 기쁨을 줄 수 있는 거고… 그래서 큰 소망이 생기니까 기도를 하기 시작을 했
지. 말씀을 보고 분데스리가 세계 무대를 보내달라, 지금까지는 나 자신을 위해서 축
구를 했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축구를 하겠다. 그 담에 가서 돈도
좀 많이 벌고, 그 담에 축구교실, 후진양성도 하겠다 이런 게 기도에 그때 당시 내가
세 가지로 기도했던 기도의 제목들이야. 축구교실은 78년도 재팬컵을 갔다 오면서 축
구교실, 앞으로 축구학교를 꼭 해야 되겠다
후:그 말씀 하셨어요 예전에
차:응, 그게 있었고, 좋은 축구를 배워야 되잖아. 그래야 세계 축구를 봐야 뭐 내가
가서 뭐를 하든지 하지. 그래서 돈이 있어야 되니까 또 프로에 가면 돈도 많이 준대
니까 뭐 돈도 벌게 해 달라고 그러고 독일 보내달라 그러고. 근데 그게 뭐 그렇잖아,
하루 아침에 분데스리가에 가면, 3류급 선수가 테레비만 나오는 거를 보고, 그래서
내가 우리 저녁에 앉아서 이렇게 테레비 보다가 햐 꿈 같은, 저기 한 번 분데스리가
가봤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허정무가 그러는 거 아냐 꿈 같은 소리 하지도 말라고. 그
게 현실이야 그때는 뭐 지금 이렇게 잘못된 게 아니고, 우리는 3류고 그때는 1부리그
만 만나도 덜덜덜덜 떨 때니까. 똥오줌 못 가리고. 근데 우리가 거기를 갈 수 있다는
거는 꿈이지. 근데 그게 이제 5월 달에 재팬컵을 갔는데, 브라질의 팔메이라스 팀하
고 보르시아 MG의 우도라텍이 왔다고. 그때 내가 팔메이라스 경기도 우리가 1대 0으
로 졌는데 잘했어 그때는 우리가. 굉장히 외국 감독들이 인상에 남게 그렇게 경기를
했다고 글라드빠하고 할 때는 우리가 3대 2로 졌는데, 물론 거기가 잘하니까… 뭐 후
딱 하더니 벌써 인제 세 개 넣더라고 두 갠가… 두 개 때려넣더라고. 그래서 내가 하
나 넣고 그래서 2대 1됐다가, 또 하나 먹고 김재한이가 하나 넣고. 근데 그 경기를
굉장히 잘했어. 그래가지고 그때 우도라텍이 상당히 거… 코가 높은 사람 아냐 그 때
당시에 뭐 관심들은 있을 정도의 그런 경기를 내가 보였으니까. 굉장히 내 스스로 한
테도 자신감을 많이 찾았던 경기지. 그랬다가 인제 대통령배에 9월인가 10월인가 할
때에 우연찮게 그때 계속 기도를 하면서 꿈을 가지고 있을 때 슐테라는 사람이 온 거
지. 어느날 경기 끝나고 중간에 그 축구 협회 박동희 교수를 통해서 그때 그분이 인
제 국제 이산가 국제 부장인가 뭐 그랬었어. 그래가지구 독일 사람이 너 거기 분데
스리가 한 번 가보지 않겠냐 그러는데, 그거야 한번 생각해 봐, 내가 그거를 위해서
예수를 믿으면서 그렇게 기도를 쭉 하고 있는데, 내가 바라던 거지. 나는 가고 싶다
나는 그거를 위해서 지금도 그런 꿈을 가지고 있고 이렇게 이렇게 해 오고 있다. 그
러니까 만나게 해 줬지. 그랬더니 너는 가면 뛸 수 있다 이거지.
후:슐테가?
차:그럼. 갈 수 있게만 해 달라. 근데 그때 내가 이제 군인이었지.
꿈의 무대 - 분데스리가 I
후:예 공군.
차:공군, 근데 그때 공군이 3군 사관, 3군 중에서 가장 길어. 근데 우리 때에 총장…
그게 없이는 우린 스카우트가 못 됐지. 우리때 부터 타군하고 똑같이 해 준다는 조건
에 우릴 스카우트를 했어. 뭐 2년이 지나면 뭐 총장의 권한으로 뭐 어떤 어떤 조항에
의해서 제대가 가능하다고 그랬거든. 그래서 인제 우리가 들어갔어. 그걸 가지고 보
여주고 설명을 하고 그래서. 나는 자원입대를 한거거든, 외국으로 갈려고. 근데 나중
에 경기 한 경기 하고 너무 막 시끄러워지면서부터 문제가 생겼다고 그러는데, 어쨌
든 나는 10월… 12월 말 그때 제대로 돼 있는거야. 그러니까 나는 제대하면 바로 갈
려고 생각하고 있던 거고, 그때가 아시안 경기가 12월에 있으니까 끝나고 가면 된다
고 나는 생각을 한거지 왜? 제대가 그때니까…
후:근데 그때 혹시 뭐 박정희 대통령이 그 얘기 듣고 “국내에서는 저만큼 독일에서
해 주는 만큼 못해줘?” 뭐 그런 말씀 한마디 하시는 바람에 브레이크가 걸렸다는 얘
기도…
차:어어어 그런 얘기가 있었대 그래가지고, 그러니깐 나는 독일 갔다 와서도 대령이
비서야. 대령이 우리 본부에 그니까… 우리 축구단이 그 사람 인사 근무천지 뭐 인사
근무처 처장이 대령이야. 그래서 돈 뭐 인사 이런 거를 하는 게 거기더라구. 그러니
까 총장하고 밀접한 그런 게 있더라구. 그래가지구 나한테 뭐라 그랬냐면, 거 대위한
테 딱 시켜 가지구, 차 딱 태워 가지구, 그거 할 때는 하지도 못해. 대위한테 차 내
주면서 사식, 대방동 저 밤에 뒤로 나가서 3일 동안, 그니까 다시 말하면 그때는 나
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 워낙 여론이 그러니까. 그래서 이제 밥 사 먹이라고 야식,
그래서 3일을 타고 났는데 갑자기 탁 끊어졌어. 그래서 혼자 짬밥먹고 혼자 부대 안
에 붙들려 있는거야.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렇게 얘기를 해 놓으니까 공군본부
에서 이제 더 이상… 그때 이제 참모 차장이 누구냐면 윤재중씨였었지. 그 사람이 나
제대 말년에 돌아와 가지고
후:그 양반이 그 교통부 장관 하셨다는…
차:응, 그 사람이 이제 휴가 병가 뭐 이런 거 끊어줘 가지구 그냥…
후:다름슈타트 첫, 한 경기하고 나오신거죠?
차:그렇지.
후:거기 경기장에 딱 설 때 어떠셨어요 기분이? 두 골, 아니 어시스트 두 개 하셨다
면서요.
차:뭐뭐뭐… 그거야 뭐… 아이구야,. 뭐 분데스리가를 테레비에서만 보던데 현장에
와 서 있으니까 이게 뭐
후:제정신이 아니셨겠네요
차:그럼, 생각해봐 그리구 1년동안 합숙하고 그 땡볕에서 하다가 여기 왔는데, 내가
봐도 공 처음 차는 사람이야. 나도 공을 찰 수 가 없더라구. 시간차 다르지 뭐 거기
다가 분데스리가지, 뭐 기도하고 나가는 거지. 근데 하여튼 경기를 잘했어. 연습하는
거 봐 가지구는 저게 뭐 경기 뛸 거 같냐? 근데 더 재밌는 건 그 오는 과정이 굉장
히 어려웠어.
후:서독까지요?
차:그럼. 그래서 참… 성경적으로 얘기하면 하나님이 준비 하셨다는거야, 여호와…
리그는 그때 12월 24일까진데… 24일날 인가? 경기야. 23일날인가 24일날이 경기였어
그때. 다음슈타트하고 경기가. 근데 선수들이 그 경기를 할려면 등록이 돼야 돼, 선
수 등록이 팀으로. 근데 다 한국에서 일을 한다고 하는데 안 들어가는 거야 이게.
그래가지구 그때 박동희 교수가 뭐 어떻게 어떻게 해 가지구 국제 교환을 통해서 뭐
이렇게 해가지구, 그건 저 사람 (오은미씨)이 더 잘 아는데 뭐 어떤 걸로 해서 일
단, 통신으로 하여튼 그게 뭐 가등록이 이렇게 그런식으로 됐어 그게. 그래가지구 뛸
수가 있는데 그 팀만 유독 딱 한… 뒤로 미뤄져 있는 거야 한 경기가 딱. 나머지는
다 끝났고 전반리그가. 12월이니까 끝났지. 그래가지구 그 팀하고 남은 한 경기를 딱
하게 된 거지. 근데 그 한 경기를 잘 해 가지구 그냥 막 온 신문, 또 다른 경기가 없
고 뭐 어디서 이상한 데서 한 놈이 와 가지구 그러니까 신문이 요란 법석을 좀 떨었
지. 그러다 이제 한국에 파장이 좀 커져가지구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군대가 아
직 남았는데, 내년 5월말 제댄데 어떻게 간다 그러느냐?” 그거 인제 허정무 삼촌이
그때 공군본부에, 아니 공군팀 감독이었다고.
후:허정무 감독 삼촌이?
차:응, 허윤정씬가… 그래가지구 방송에 나가서 그랬겠다? 그러니깐 그때 막 난리가
났지 또. 어떻게 제대도 안하고 가느냐 그래가지고 한쪽에선 보내야 된다 모… 하여
간 그래서 안 올려고 사실은 막 애를 썼는데, 1월 5일까지 안 들어오면 그러니까…
그냥 구속이야 그냥. 그래서 1월 5일 날 들어왔어 내가. 미루다 미루다가 안 돼가지
구. 그때 인제 부크만 감독이 거기 감독이었고 슐라프너가 코트레이너였는데, 조감독
인가 그때 내가 못봤지. 그때 그 사람은 부크만만 보고 근데 부크만은 팀이 다음슈타
트가 2부리그로 이렇게 떨어지니까 인정을 받아가지고 3위하는 슈트트가르트루다가
옮겨갔지. 그래서 내가 그 다음에 제대하고 왔을 때는 그팀에 있었지.
후:슈트트가르트에?
차:응.
후:79년도 6월 달에 서울운동장에서 환송경기 하셨잖아요 연고전 OB, 고연전 OB.
OB전? 근데 그때 무슨 인터뷰하신 다음에 모 축구협회하고 불화설이 있다고 뭐 그런
얘기가 있었다는데…
차:불화설이 있을게 없지
후:아 뭐 일개 개인이 가는데 무슨 환송경기냐 이런 걸로 시끄럽진 않으셨어요?
차:아니 그거 저걸 못하게… 아니, 그런 저거는 아니고 이제 축구협회 아니 그때 그
걸로 불화가 아니고, 그때 함흥철씨가 감독이었다고 대표팀. 그… 방콕에서. 근데 이
걸 자꾸 트는 거야. 이쪽에 저사람(오은미씨)이 인제 서류를 해야 되는데, 협회나 체
육부 공군본부 이렇게 뭐가 있어야 등록을 하잖아. 근데 이상하게 자꾸 트는 거야,
함흥철씨가. 그때 협회 부회장인데. 아니 감독인데. 그래서 저 사람한테 전화가 온
거야, 일이 중단이 됐다고. 하다가 지금 막 끝나면 가야 되는데 여권 수속이 중단이
됐어. 그래서 이 사람이 얘길 해 가지고 한 거야. 그래가지고 막 내가 이제 그때는
이미 내가 간대는 게 거의 다 알려지고 신문에 막 나오는데, 부회장이 한 사람이 있
었어 체육회에.
후:박…박준웅?
차:아냐아냐 체육회에… 노인네 한 분 있었는데, 그분이 김택수 회장님이 온다 이거
야, 그러니까 김택수 회장님한테 직접 붙어라 이거야. 그 사람도 이제 도와 줄려구.
그래서 이제 김택수 회장, 나, 김택수 회장이 불렀지, 나 함흥철씨, 그 축구한 사람
이야 그 부회장님, 그 부회장님, 훈련… 모라고, 원장이라 그래야 되나? 김성집씨.
근데 거기 인제 그때 체육 그거는 아시안 경기는 축구협회 그게 아니잖아.
후:그쵸, 대한 체육회 쪽.
차:체육회 그거니까, 그리고 또 북한하고 결승전인데, 북한하고 붙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독일 가고 그런 것 때문에 모 안 된다, 그래서 그 일을 못하게 해야 된다 그래
서 그게 중단이 됐었던가봐. 그래서 내가 이제, 저 사람이 이제 그렇게 연락이 왔길래
“그럼 나 못한다 이거 해 줘라” 그래서 이제 해결이 안되니까 김택수 회장이 와서
하여튼 “요구가 뭐냐?” 그래서 “일을 할 수 있게 해 줘야 되지 않냐? 끝나면 가야
되는데” 모 항간에는 모르니까 내가 열심히 안 했다고 그러는데, 아, 열심히 안 할
게 뭐가 있어? 그거 때문에 열심히 안 한대는데, 안 할 이유도 없지. 아 독일을 가
야 되는 데 더 잘해야지. 그래가지구 그것 때문에 시끄럽게 좀 피곤하게 그랬었지.
근데 김택수 회장님이 만나 가지고 “보내주겠다 그 서류 하게 해라. 그러면은 최선
을… 몸이 부서져라 뛰어라” 몸 아낀다고 트집을 잡고 그랬었어. 그때 근데 이제
그거는 아니었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또 그거야 뭐 체육회 회장도 그러니까 다
시 하라고 했고, 그래서 인제 결승전까지 뛴거고. 그… 저거는 환송 그거는 협회차
원에서 이루어진 게 아니고 환송 그거는 내가 고대니까,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게 좋
겠다. 고대측에서 아마 그런, OB 그거를 해 가지고 경기를 하고 환송 겸 이렇게 해
가지고 끝난 거야.
후:독일 오셔가지구요, 짧게 짧게 대답해 주셔도 되는데, 고기만 죽어라고 드셨다면
서요.
차;그렇지 우선… 몸에 기름이 없으니까, 뛰고 나면 허기가 져 한국음식 먹고 나면
뭐 여긴 비가 많고 땅이 질척질척 하니까 또 힘도 들고 자꾸 느끼한 게 먹고 싶고,
못 견디는거야 몸이. 근데, 한국음식은 먹으면 우선 허기가 지니까, 그거 먹어가지고
는 안… 이제 못 있을거 같고. 저 사람이 음식을 그때는 잘 못했으니까. 고기를 그냥
기름에 이렇게 튀겨 가지고 그냥 집에 오면 그렇게 먹었지. 6개월 동안은 뭐 죽었다
고 생각하고 약으로 알고 먹었으니까. 진짜로. 고기 벌레였었지. 나는 합숙가서도 딴
애들 스테이크 하나 주면, 하나 이상 안 줘 고기. 정해진 양이 있거든, 예산이 다 있
는 거니까. 두 개씩 스테이크가 안 돌아가거든. 근데 나는 배고프다 그러고, 밤에 저
녁에 그 빵 찬 거에다가 스프만 나오는 거, 그거 먹곤 못 견디거든, 우린 양으로 배
를 채웠던 사람이 돼 놓으니까 스테이크 두 개 먹고, 근데 그것도 안 차 내가. 스테
이크 두 개먹으면 100%, 근데 한국음식 먹었다 그러면 3일을 못 가. 그냥 팍 주저앉
아버려. 그래서 ‘아 여기서 앞으로 살려면 체질 개선을 해야 되겠다. 고기를 안 먹
으면 큰일나겠구나.’ 그래서 죽으나 사나, 진짜 살기 위해서 먹는 거지. 그때는 그
걸 밥으로 맛을 알고 먹는 게 아냐 진짜, 솔직한 얘기로. 우선 여기 온 게 두렵고,
분데스리가 자체가, 공포고 한 눈을 팔 그게 없어. 그니깐 뭐 딴 사람들이 초대를 하
고 뭘 해도 어디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어 내 한가지 하는 것도 지금 바쁘고 벅찬데.
그리고 우선 실력들이 뭐 다 좋으니까, 옆에 보면 다 나보다 잘하니까 내 자리가 없는
거야 자리가. 10년 동안… 그 옆에 보면 나보다 다 잘하는 애들이 옆에 있으니까 뭐
게을리 한다든지, 다른 데 갔다 오고 뭐 할 시간이 없었던 거지. 그래서 고기를 많이
먹었어. 6개월 동안은 뭐. 그래서 그러고 10년이 지나가니까 지금은 뭐 독일 음식, 한
국가면 한국음식, 중국가면 중국음식, 근데 웬만한 사람은 못 견뎌. 먹는 거에.
후:근데, 외국나가서 성공할라면 음식부터 적성에 맞춰야…
차:음식 안 먹으면 여긴 죽었다 깨나도… 뛰지를 못해, 여기 다, 오꾸데라 제외하고
나머지 선수들 다… 뛰지를 못해, 후반전까지. 제대로.
후:그러니까 굳이 요즘도 뭐 외국 진출하는 한국 선수나 동양애들 뭐 김치랑 쌀이랑
바리바리 싸갈 필요 없네, 별 도움 안되겠네요?
차:그거? 그거 먹을 거면 그냥 가라 앉는 거지 뭐. 근데 지금은 쟤(차두리)같은 경우
는 이제, 기름이 많이 찼거든, 두리 같은 경우는 괜찮지. 한국에서 옛날에 우리는 대
학교 때도 먹을게 없으니까 라면 국물에 밥 먹고 라면 먹고 그랬으니까 뛰고 나면 푹
꺼지는 그게 되는 거지. 그리고 하루 훈련 강도 높게 해 봐, 그냥 가는 거지. 그니
까 고등학교 때 아니 먹는 것도 없이 그냥 딥다가 빠다에다 그냥 밥비벼 먹고 간장에
다 이렇게 먹고, 고기가 어딨냐 고기가 고기 거 이런 거 돼지고기 기름만 둥둥 떠다
녀도 그렇게 맜있던데 국물이 응? 그러다가 참… 그러니까 음식 못 먹어 가지고는 우
선… 그담에 여기 나오면 가정적으로 바뀌어야 돼 생활이. 프로선수들은… 뭐 말이
좋아, 무슨 뭐… 천만에. 프로선수들은, 이거 완전히 골수분자들이 돼야 돼. 미쳐야
돼. 그담에 그렇게 안 하면 오래 못 가고. 생활이 나쁘면 부상이 생기고, 수면이 부
족하면 부상 생기고, 많이 돌아다니면 피곤하니까 부상 생기고, 집중력 떨어지고 안
돼, 1년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실력이 좋아 가지고, 2년 3년은 안 된다 이거지.
그래서 분데스리가를 외국선수, 우리 그럴 때는 5년 이상 분데스리가에 있는 선수는
잘 하는거니까. 경기를 뛰건 못 뛰건 5년 동안 여기 붙어있으면 잘하는 거야. 거기다
뛰는 건 뭐 그건 말할 것도 없지.
후:겔스도르프있죠. 이 ‘사건’ 얘기 좀 말해주세요.
차:게일스도프… 때문에 결국은 이제 슬럼프가 시작이 된 거지. 우리가 그 해 그 준
비하는 두 번째 시즌인가 내가 여기와서…
후:80년돈데요.
차:80년도지?
후:예.
차:처음 와서 두 번째 시즌.
후:예, 레버쿠젠 어웨이 경기에서
차:준비과정을 굉장히 잘했어 그때, 내가.
후:첫 시즌 끝나고 인제?
차:응. 굉~장히… 펄펄 날랐어. 그러고 인제 시작을 잘 했는데 어웨이 경기 인제 거
기 갔는데, 하프라인 부근에서 내가 인제 이렇게 사이드에서 올리면 공을 이렇게 딱
잡아가지고 여기서 수비가 나오니까, 딱 나오니까 주구 뛸려구, 딱 주구 주구 갈려
고 그러는데 여기서부터 태클로 쫙 이렇게 밀면서 나오면서 이걸로다가 이거로다 이
렇게 가위로다가 쳤는데 그게 여길 맞았지 여기. 그래서 요추뼈가 부러진거야. 그러
니까 그대로 그냥 딱 뻗었지. 그래서 당가 실려가지구 거기서부터 와서 여기 프랑크
프루트까지 내려와서 여기 인제, 거기서 사진을 찍었는데 부러졌어. 그래서 인제 고
정시켜 가지고 여기 그 마인가워라고 우리 그 닥터가 거기 있었거든 룬츠하이머가. 그
래서 거기 입원을 했지. 근데, 오줌에서 계속 피가 나오니까. 거기는, 그 신장을 싸
고 있는 요추가 쪼끄매가지구 그냥 뼈하고 달리 요 위에 바로 요렇게 신장 뒤에, 신
장 앞에 아니 뒤쪽으로 딱 있으니까 이게 부러지면 신장에 타격을 받는대니까. 그러
면, 그러니까 최소한 6개월, 잘못하면 축구를 못하게 될 지도 모른대 그 진단이. 그
래서 뭘 어떻게 해. 그저 하나님을 힘으로 안고 사는 사람이니까 인제, 그때도 천상
기도를 또 계속 하면서, 뭐 하나님이 여기서 이렇게 여기서 망신당하고 이렇게 다쳐가
지고 보낼려고 여기까지 보내지는 않았을텐데… 힘들게 기도를 계속 했는데 참 회복이
빨랐어.
후:얼마나 걸리셨어요?
차:8주만에 내가 운동장에 다시 나왔으니까. 그런데 그때 아마 우리가 두리를 낳았을
거야.
후:맞네요. 80년도.
차:두리를 낳아가지고 내가 이렇게 아파 가지고 이렇게 안고 있는… 그러고 쟤를 합
숙을 가면서 쟤를 낳았으니까,그리고 이제 첫 경기니까 얼마 안됐을 때지.그래가지구…
후:그때 아까 말씀하신 거처럼, 슬럼프 시작이고, 그저께 말씀해 주신 국내언론 독일
언론 막… 제일 힘드셨을때가 그때 셨어요?
차:그럼, 그때 해가지구, 8주만에 다시 나왔지 세 경기를 뛰었는데 그때… 유럽컵 3
회전인가 소련에 도네츠크라는 팀이 있어. 그 팀하고 할 때 내가 두 골 넣고 우리가
3-0으로, 3-1로 이기고 굉장히 잘했어 회복을 잘했는데, 또 다쳤어. 그때 당시에. 그
러면서 바로 경기를 계속 상승세를 못 타면서 다쳐서 이제 쉬게 되니까, 그러면서부
터 이제 여기 다치고 막 이러면서 이제 몸이, 체력을 이렇게 이렇게 쭉 준비 기간이
했다가 다쳐서 쉬었다가 다시 하니까 몸이 잘 만들어줘야 되는데, 그때만 해도 그런
걸 잘 모르니까. 그니까 몸이 체력적으로 떨어져있는 상태에서 자꾸 경기만 나갈라고
생각하니까 못 따라오는 거지, 그런 것도 있고 또 심리적인 그런것도 있고. 그래가지
구 이제 계속 그 반 시즌이 인제 어려웠는데 그 연말에 또 기자양반들이 오셔 가지고
그러면서부터 반년이 더 어려웠었지. 그래서 그 다음 반 시즌이 끝나 갈쯤 부터 다시
정상적으로 회복을 했고, 그때 하여튼 내가 전방에 안 서고 처음에 와서 내가 12개 넣
고, 그 때 다쳤을 때 내가 8개 최저골을 넣었었다구.
후:8골?
차:8개..
후:맞네요. 스물 여덟 경기 나가셔 가지구 여덟 골.
차:그래 가지고 첫 경기 내가 31경기인가 뛰고, 그 다음에 28경기인가… 뭐 이렇게
밖에 못 뛰었어. 그래서 3년이 지날 때까지는 그러니까 체력이 따라 가지를 못해. 그
래서 전경기를 못 뛰는 거야. 우선 훈련을 너무 많이 해 내가. 시합에 쏟아야 될 거
를 훈련에 너무 많이 쏟더라구. 그게 인제 한국 식이야. 양의, 거 이제 3년이 지나니
까 내 몸이 이쪽 훈련에 적응을 하기 시작을 하더라구. 그래서 서른 네 경기를 내가
아마 4년 됐을 때 다 뛰었던가 그랬을거야.
후:서른 네 경기요?
차:응
후:서른 네 경기가… 83년-84년 레버쿠젠 옮기신 첫해에 서른 네 경기 뛰셨어요.
차:프랑크푸르트에서도 그런 경기 하나 있을 것 같은데..??
후:프랑크 푸르트에서 고 전에 서른 두 경기 뛰셨구요, 81년도에 서른 한 경기 그렇
게 뛰셨어요.
차:서른 두 경기?
후:예. 그때 뛰셨을 때 15골 팀 최다 득점 올리셨구요.
차;그래가지고 그… 4년이 지나니까 어쨌든, 내가 이쪽 훈련에 적응을 하더라. 그전
까지는 적응을 못해, 몸이 우선. 우선 그 때만 해도 뭐 지금처럼 뭐 왔다갔다 하는
사람이 있다던지 뭐 그런 저기 없이 그냥 나만 홀랑 와 있는 시절이었으니까 그런 노
하우가 없어. 그니까 내가 이렇게 터득해서 알 수 밖에 없는… 기간이었지. 내가 느
끼는 것은 한 3년 4년 지나니까 식사문제라든지…
후:노하우가?
차:뭐 이제 그런 몸이 훈련에 적응하는 거라던지. 아 어떻게 내가 훈련을 내 몸을
이렇게 해가야 되는지 안배 같은 거. 한국은 그냥 토너먼트 툭 하고 끝냈으니까 그런
거를 알 수 있는 기회 같은 거는 없지. 지금은 프로 팀이 있으니까 알지만 그 때는
그런 게 없었으니까. 그래서 인제 그때 당시에 그런 거는 굉장히 좋은 경험이었지.
후:그때 인종 차별 같은 거 그런 거 축구장 내에는 없었어요? 페차이 걔는 뭐 인종차
별 그런 거 때문에..
차:아니, 몇 일 전에 이야기 했지. 연봉 문제 때문에...
후:연봉문제 때문에..
차:싸우고 싸움을 해서 35만 마르크 받았는데, 나는 아퍼 있을 때 이런 종이에다가
사인만하라고 가져왔어요 그거를. 우린 또 그것도 모르고 거… 우리 공부하시던 분이
학위하시던 분이 그런 거를 좀 봐줬었거든. 근데, 보더니 그냥 기절할려구 그러더라
구. 이거 분데스리가에서 세 사람 밖에 못 받는거라고.
후:그때 세 사람이면 브라이트너, 베켄바워 이런 사람 아니었나요?
차두리 : 루메니게.
차 : 루메니게, 나…
차두리 : 브라이트너라며..
차 : 브라이트너인지 베켄바워 미국 갔다 와서 인지 하여튼 뭐 그런 봉급이었어. 그
래가지구 뭐, 기절할려 그러더라구 당~장 해야 한다구. 3일을 시간을 줬어 그 사람이
우리한테. 3일동안 해서, 보고 그리고 갖고 오라구. 그런데 인제 그 사람 애기로는
아퍼 있는 사람은 또 계약을 안해준다. 뭐 그 때 당시, 그건 맞는 애기야. 지금도 선
수가 아프면 계약 완료되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기다리고 이렇게 이렇게 해서 어떻
게 하겠지. 그런데 어쨌든 아프고..있는데
오 : 아빠
차 : 응~ 그걸 해왔으니까. 가지고 딱 와서 그냥 사인만 해 가지고… ^^ 그게 그 당
시에 분데스리가에서 세 사람이 받는 봉급이었다는 거야. 그러니 그거는 3개월 동안
파니 안 파니 싸움 싸움하고 해서 35만 마르크를 받았는데…
후:페차이?
차:어. 걔들도 여기 애들도 그러는거야. 나보구 얼마에 사인 했냐고. 40만 마르크.
그럼 내가 마이스터 개런티를 받는 거라고.
후:옛날에 프랑크푸르트에서 골인 넣으시면 전광판에 진짜 차범근이라고 한국 말로
나왔어요?
차:그럼. 그거 보고 우는 사람도 있고…
후:그래요?
차:그럼… 대단한 거지. 프랑크푸르트에서 아예… 차범근 이렇게… 그 스토리는 나
는 관중석에 없으니까 저 사람이 더 잘 알지. 이게 이렇게 나와 저기 거기 나오는거.
후:예
차:옛날에 거 지금 여기 ‘신라’(프랑크푸르트 내 한식당)에 가면 지금은 주인이 바
뀌었지만, 옛날에는 여기 있는 사람들은 발트스탄(프랑크푸르트 홈 구장)에 가는 게
낙이니까, 상사 직원들이고 다. 그래가지고 그냥, 그거 보구 감격해서 운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지. 차.범.근. 이렇게 나왔어 ‘토아 골~ 차 범 근`하하하~ 것두 크게
첫댓글 저기 이거 연재하죠..한번에 읽기에는 넘 긴데..^^
원래 이렇게 올라온거라서 제가 맘대로 편집해도 될란지..ㅎ
후추닷컴의 명예의전당 황선홍편도 구해볼게요. 차범근감독님만큼은 길지 않지만 아주 수필처럼 잘썼었든걸로 기억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