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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jtr28114
91강. 성령이 가르쳐 주시리라 (요 14:25-31)
요 14:25-31=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다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29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30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오늘 본문을 보면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예수님이 말씀 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이 하신 구속에 일들이 믿어지게 해 주신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에서 성령에 대하여 증거하기를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시며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다는 뜻입니다.
그럼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성경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써졌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데에는 인간의 지혜나 지식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오직 성령께서 알게 해 주셔야지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위하여서 우리가 노력하거나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자연적으로 깨닫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눈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감지하는 촉(矚)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눈이 떠지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감지하는 촉이 생기면 산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됩니다.
내가 사는 것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면 마음에 쉼을 누릴 수가 있어집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이 누렸던 그 평안을 주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평안이 주어지면 마음에 근심이나 두려움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걸 실제로 삶 속에서 경험하고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은 관념이 아니고 실제입니다.
예수님이 실제이듯이 예수님이 주는 평안도 실제입니다.
성도는 역사 속에 이러한 삶을 살았던 증거자들입니다.
지금도 이 증거자로 살고 있습니다.
평안을 주신다는 말은 평안은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성도에게 선물로 주신다는 말입니다.
이 평안은 오직 성도에게만 주어집니다.
육체로 오신 예수는 아무나 보고 만질 수 있었지만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은 오직 택한 백성들만 보고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속에서도 성령을 받은 성도는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이러한 일들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사도들이 그러하였고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러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온갖 위협과 협박 속에서도 이런 평안을 누렸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태장을 맞고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찬송을 하였습니다.
찬송을 한다는 것은 마음에 평안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찬송은 마음에 쉼을 누릴 때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감옥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합니다.
사도들이 누린 평안은 세상에 없는 평안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사자에게 잡아먹힘을 당해가면서도 이 평안을 누렸습니다.
그러니 죽어가면서도 찬송을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이 죽어 가면서 원수를 위하여 기도 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이 평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러한 일들이 성도들 속에서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평안으로 사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일평생 항상 그렇게 사느냐 못사느냐로 따지지 마십시오.
예전에는 맛보지도 못하고 누릴 수 없었던 것을 간헐적이지만 잠시 잠깐이나마 맛보고 누리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보증이라고 했습니다.
보증을 다른 말로 보증금이라고도 합니다.
보증금이란? 계약이 체결되었음을 알리고 전체의 금액 중에서 일부분을 선수금으로 주는 것입니다.
계약이 성사되었기 때문에 보증금을 줍니다.
비록 일부분의 보증금이지만 그 속에는 전부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 이러합니다.
천국을 보증금처럼 주었습니다.
우린 천국의 맛을 간헐적이지만 조금씩 맛을 보고 있습니다.
천국에 맛을 부분적이지만 맛보고 누리고 있다면 이미 천국 안에 와 있는 것입니다.
평안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안을 보증금처럼 일부만 맛본다는 것은 예수님이 주신 평안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마음에 쉼을 누리고 있다면 주님이 주신 평안 속에 있는 것입니다.
평안을 받았기 때문에 고난 속에서도 평안을 누리고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평안을 누린다는 것은 이성적으로는 불가해합니다.
고난은 아픔인데 어찌 평안하단 말입니까?
그래서 성령의 일하심은 세상 사람들은 받지도 못할 뿐더러 감당치도 못한다고 합니다.
이는 곧 성령을 받은 성도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을 이기게 하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 라고 합니다.
여기서 “또 다른” 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알로스”라고 합니다.
“알로스” 라는 말은 본질적인 면에서 같은 의미의 또 다른 것이란 말입니다.
예수님과 성령은 본질이 같은 다른 분입니다.
성경에는 다르다는 말을 두 가지 어근(語根)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본질이 같은데 다르다고 할 때는 “알로스” 라고 하고,
본질이 전혀 다른 것을 다르다고 할 때는 “헤테로스” 라고 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쉬운 예로 듭니다.
“알로스” 적인 다른이란? 동일한 코카콜라를 각기 다른 병에 담아 놓은 것과 같아요.
콜라가 담겨 있는 병들은 각각 다르지만 그 안에 내용은 동일합니다.
이걸 “알로스” 라고 합니다.
하지만 “헤테로스” 적인 다른이란? 콜라라는 이름은 같지만 다른 공장의 제품을 말합니다.
코카콜라와 펩시콜라는 같은 콜라인데도 다른 회사 제품입니다.
콜라 라는 말은 같지만 질적으로 다른 콜라입니다.
코카콜라와 펩시콜라는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맛이 다릅니다.
그 속에 첨가된 성분들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신자”와 “불신자”는 같은 인간이지만 영적으로는 전혀 다릅니다.
이 때 다르다는 말은 “헤테로스”를 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성도”는 다릅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같습니다.
이 때 다르다는 말은 “알로스” 를 씁니다.
성도와 성도는 각각의 다른 사람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들이기 때문에 다르면서도 같은 자들입니다.
이걸 “알로스” 라고 합니다.
성도는 한 성령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들입니다.
각각의 지체마다 모습은 다르지만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서라는 같은 목적을 두고 살아갑니다.
모두가 한 성령을 마셨기 때문입니다.
이게 “교회” 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면 “또 다른 보혜사” 를 보내 준다고 하면서 “알로스” 를 쓰고 있습니다.
이는 곧 자신과 동일한 분을 보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 분이 바로 성령님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자신과 같은 보혜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보혜사란? 돕는 분이란 뜻입니다.
무엇을 돕습니까?
오늘 본문 중심으로 살펴봅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닫도록 도우십니다.
둘째로, 마음에 평안을 누리도록 돕습니다.
셋째로, 두려움과 근심 걱정을 없도록 도우십니다.
예수님은 다른 보혜사를 보내는 이유는 성도를 세상에서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우린 한시도 하나님과 떨어져 있은 적이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과 함께 했습니다.
다만 우리가 깨닫는 것이 둔하여서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고, 앞으로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시대고 하나님은 우리가 인식하든 못하든 상관치 않고 항상 자기 백성들을 보혜사가 되셔서 돕고 지켜왔습니다.
그럼 어떻게 도우셨는지 살펴봅시다.
예레미야 31장입니다.
렘 31:31-3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도우셨습니다.
어떻게 출애굽을 도우셨느냐 하면 남편이 되어서 도우셨습니다.
마치 부모가 아이의 손을 잡고 끌고가듯이 도우셨습니다.
그런데 실패했다고 합니다.
이걸 옛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새 언약을 세운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옛 언약으로 실패한 것을 새 언약을 세워서 온전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새롭게 세울 언약은 옛 날에 세운 것과 다르다고 합니다.
옛 날에 세운 언약은 하나님이 남편처럼 옆에서 도와준 언약입니다.
그런데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옛 언약을 파하였다고 합니다.
언약을 파하였다는 것은 징계하신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지키지 못하였다는 말은 옛 언약은 언약을 지킬 주체가 이스라엘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못 지켰다고 하나님이 언약을 파기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옛 언약은 인간이 지켜야 하는 언약임이 드러납니다.
인간이 못 지키니 파기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남편처럼 곁에서 도우셨는데도 언약을 못 지켰을까요?
이는 죄 아래 팔렸기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이 옆에서 도와주어도 못 이기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 아래서 태어난 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옛 언약을 인간의 실존을 알려주는 언약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엔 옛 언약과 다른 새 언약을 세운답니다.
옛날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입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이 남편처럼 곁에서 돕는 것이 아니고 아예 우리 안에 법을 두고 우리 마음에 새겨놓겠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친히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와 한 몸이 되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거하신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우리를 쥐락펴락 장악하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새 언약은 예수님이 친히 지키겠다는 뜻입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는 언약의 주체가 인간에게서 예수님으로 바뀐 겁니다.
옛 언약은 인간이었지만, 새 언약은 예수님이십니다.
옛 언약에선 하나님이 인간을 파트너로 인정을 했지만, 새 언약에선 인간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럼 새 언약 하에선 우린 없는 자입니다.
죽은 자와 같습니다.
그럼 새 언약 안에선 인간의 그 어떤 것도 무가치합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새 언약은 우리 인간들 입장에선 좋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새 언약 안에서 인간은 부정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취급을 해 주지 않는데 어찌 좋겠습니까?
넌 꺼지라고 하는데 누가 좋아 하겠습니까?
인간이란? 자기 이름을 내고 자기가 긍정되어지는 맛으로 사는 자들인데 자신을 부정하는데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인간은 생래적(生來的)으로 자기 이름을 내고자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새 언약 안에선 인간의 이름이 없습니다.
예수님 이름만 있습니다.
사람이 제일 화가 나는 것이 남에게 무시당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부정당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인정받고자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시한답니다.
인간이 아니고 죄인이기 때문에 무시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무시합니까?
상대할 가치를 못 느끼면 무시하잖아요.
누가 무슨 말을 하여도 대꾸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종할 가치를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무시하는 것은 상대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새 언약이 그러합니다.
인간 자체를 죽은 자로 취급하고 인정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넌 끼일 자리가 없다고 합니다.
그럼 누구랑 상대 합니까?
새 언약은 예수님과 하나님 두 분이서 세웠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예수님하고만 상대한다는 말입니다.
옛 언약은 구약이고 새 언약은 신약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차이는 구약은 하나님이 곁에서 도왔으면 신약은 우리 안에서 도우십니다.
구약은 하나님이 우리 곁에서 동행했는데 신약은 우리 안에서 한 몸이 되어서 동행하십니다.
옛 언약에서는 우리 더러 하나님의 법을 지키라고 했는데, 새 언약에서는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법을 지켜내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홀로 다 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럼 그 새 언약이 언제 우리 안에서 세워집니까?
성령이 오심으로 세워집니다.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옛 언약 아래 있습니다.
성령이 와야 새 언약이 시작이 됩니다.
새 언약은 새 사람하고 세우는 언약입니다.
새 사람은 성령이 오셔서 거듭나게 해 주십니다.
그러니 성령이 오심으로서 새 언약이 발효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신다고 하면서 그가 오면 너희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다고 합니다.
그럼 내가 거듭난 너희 안에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결국 예수님이 성령과 함께 오셔서 우리를 새 사람으로 만들고 그 안에 거한다고 합니다.
거한다는 말은 예수님이 우리를 다스리겠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이젠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입니다.
예수님은 성도를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이 성도의 몸을 가지고 예수님이 하고 싶은 일들을 행하십니다.
어떻게 사용하시는가 하면 지난 시간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도록 사용하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예수님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케 하십니다.
성령께서 보혜사가 되셔서 도우신다고 합니다.
이건 온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증금으로 받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없던 예수님의 마음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도우십니다.
오늘 본문에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 주시고!
평안도 주시고!두
려움도 쫓아내시고!
염려 근심도 다 사라지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예레미야가 말한 옛 언약과 새 언약을 예수님으로 적용해 봅니다.
문자적으로 말하면 옛 언약은 예수님이 겉에서 도왔고, 새 언약은 안에서 돕는다는 말이 됩니다.
그럼 겉에서 도운 예수님은 누구이고, 안에서 돕는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겉에서 도움 예수님은 육체로 오신 예수님이고,
안에서 돕는 예수님은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자 이걸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우리도 두 사람이 있습니다.
옛 사람이 있고 새 사람이 있습니다.
옛 언약 안에 있던 사람이 있고, 새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옛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은 옛 사람이고, 새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은 새 사람입니다.
육체로 계신 예수님은 우리 겉에서 도왔습니다.
옛 사람을 도왔습니다.
옛 사람이 담당하여야 할 것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육체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 옛 사람을 돕는 보혜사 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 새 사람을 돕는 보혜사 입니다.
우리 안에 들어와서 도우십니다.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은 새 사람을 돕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마음을 주시고 예수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육체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 옛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도우셨다고 한다면,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 안에 와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새 사람을 도우십니다.
그래서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를 보내 줄 테니 그가 오면 너희와 내가 하나가 되어 새로운 피조물로서 살아가는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계신 겁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예수님과 연합된 자로서 살게 하십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이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성령을 받은 자들이 예수님처럼 말을 합니다.
예수님처럼 행동을 합니다.
성령이 성도들을 예수와 한 몸으로 만드신 겁니다.
그러자 세상 사람들도 성령을 받은 성도들을 예수님과 같이 취급합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예수님처럼 핍박하고 죽입니다.
그럼에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건 예전에 도망가던 사도들이 아닙니다.
죽음에 벌벌 떨던 자들이 성령이 임하자 죽음을 초월한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성령이 두려움을 몰아내고 담대히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도록 도우신 것입니다.
이건 그 당시 제자들만 그런 것이 아니고 어느 시대이고 모든 성도가 동일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합니다.
내가 가면 아버지께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 주신다고 합니다.
오순절이 이르자 예수님이 약속하신대로 성령이 오셨습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성령이 부어지자 성도들이 구약의 사람에서 신약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과 성령이 오시고 난 후의 제자들의 모습은 완전히 다릅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겁쟁이들이었습니다.
문을 잠가 놓고 집안에서 죽음에 벌벌 떨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고 난 후에는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도리어 문을 박차고 나와서 죽음 속으로 뛰어 듭니다.
예수님 때문에 고난당하는 것을 합당하게 여깁니다.
고난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받아 냅니다.
살고자 하지 않고 죽고자 합니다.
세상에 더 이상 미련이 없다는 식으로 세상과 정면으로 부닥칩니다.
그러자 세상이 이들을 감당치 못합니다.
어디서 이런 담대함이 나옵니까?
그건 바로 그들 속에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버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은 옛 인간 그대로인데 그 속에 성령이 오시고 나자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입니다.
이젠 죽음을 이긴 자로서 당당하게 삽니다.
이는 성령이 보혜사가 되셔서 제자들 안에서 돕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성령을 받은 성도들에게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어느 시대고 있어 왔습니다.
성령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는 성도들은 하나 같이 세상을 이겼습니다.
어떻게 이겼느냐 하면 예수님 방식으로 이겼습니다.
역설적으로 이겼습니다.
예수님처럼 목숨을 버림으로서 이겼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옛 언약의 마침이라고 한다면!
성령으로 오심은 새 언약의 시작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새 언약 백성으로 살게 하십니다.
죽음을 이기고 벗어난 하늘 백성으로 살게 하십니다.
새 언약 백성으로서의 삶이란?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근거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에 벌벌 떨던 죄의 종이 아니라 죄에서 해방이 된 의에 종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를 이긴 자로서 사는 겁니다.
우리가 죄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겨주신 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여 나아가면 죄 없는 자로 인정해 주십니다.
이걸 “간과하심” 이라고 합니다.
간과하심이란? 실제로는 죄인인데 예수님을 보시고 죄인 아닌 것으로 인정해 주겠다는 뜻입니다.
이걸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이걸 믿어지게 해 주십니다.
성령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주어진 대속을 실제 우리의 삶에 적용을 시키는 것입니다.
육신으로서는 죄를 이기지 못하여도 예수님의 피 뿌리심으로 정죄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안에서 실제화 시킵니다.
믿어지게 하여서 믿음으로 살게 하십니다.
우리 인간들은 자기가 인식한 경험된 것을 믿고자 합니다.
자기가 경험한 것을 믿음으로 붙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믿음이 아니고 경험입니다.
믿음은 내가 경험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내 외부에서 발생된 사건을 내 것으로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남이 한 것을 내 것으로 인정하기 위해서 믿음이 필요한 겁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경험한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믿는다고 하는 것은 인식론을 바탕으로 하는 경험입니다.
이게 인간의 믿음관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우리가 경험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밖에서 예수님이 하신 것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인간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믿음의 체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성령을 보내서 예수님이 하신 일이 자신이 한 것으로 믿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이걸 성경에선 “하나 됨” 혹은 “연합”이라고도 하고 또는 “한 몸”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나와 예수님을 한 몸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이젠 예수가 타자(他者)가 아니라 나와 하나입니다.
내가 주 안에 주가 내 안에 있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몸이 되면 예수가 죽은 것이 아니라 내가 죽은 것으로 믿어집니다.
예수님이 부활 한 것이 아니라 내가 부활한 것으로 믿어집니다.
그러니 성령이 임한 성도는 예수님의 것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와 연합 된 자로서 산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예수님을 대표 원리로 적용해서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우리를 한 몸으로 취급하십니다.
그래서 아담의 죄값을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해서 죽입니다.
이걸 그대로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도 적용하십니다.
예수님과 성도를 한 몸으로 취급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한 것을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해서 살립니다.
이사야 53장을 보면 고난 받는 종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라고 합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가 죽음으로 “우리”가 살아났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물어야 할 책임을 예수님에게 대신 물었습니다.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을 대신 죽였습니다.
아담 안에서 우리가 죄인(罪人)이 되었듯이! 예수 안에서 의인(義人)이 되게 하십니다.
이게 창세전에 언약한 하나님의 일하심에 방법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하나님은 예수님하고만 상대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예수 안에서 대하기로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예수님)”와 “우리”를 동일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모든 성도를 대표로 해서 대하시고 계신 겁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은혜로운 일입니다.
성령이 이걸 믿어지게 합니다.
그러니 성령이 그 안에 와 있는 성도는 죄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기 행위로 인하여 낙망하지 않습니다.
비록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여도 애통은 하여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마귀의 참소로부터 자유하며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이란? 우리가 어떤 바른 행동을 하고 윤리 도덕적으로 온전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공로로 살고 있다고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는 온전 할 수가 없음을 알고 예수님의 온전하심을 붙잡고 사는 것입니다.
이걸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의로운 행위가 나올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의로운 분은 오직 예수님뿐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 공로로 용서받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깊이 깨달아 질 때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 공로는 더욱 더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이 모두가 성령이 오시면 믿어집니다.
이걸 바울은 성령의 인침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인침은 구원을 보증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인침을 받은 성도는 자기 안에 예수의 증거를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증거가 있기 때문에 죄 가운데서도 두려움 없이 살 수가 있습니다.
신앙의 증거란? 그 어떤 것으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주님은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우린 이제 주님의 피로 의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죄인이었을 때도 사랑해 주었는데 의롭게 된 자는 얼마나 더 사랑하지 아니하겠습니까!
더 확실하지요.
성령이 이 확실한 도장을 우리 가운데 찍어놓았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이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도 광대하여서 우린 다 담아 낼 수가 없습니다.
우린 일평생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를 많이 알아가게 됩니다.
이 사랑은 많이 부대끼면서 더욱 더 깊어져 갑니다.
그래서 저는 신앙생활을 하나님과의 스킨십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많은 부대낌을 통해서 하나님 사랑을 많이 알고 깊이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을 보면 사소한 것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눈(촉)이 있어요.
그러니 사소한 일에도 감격하고 감사해요.
그건 그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감지하는 감각이 발달하였다는 말입니다.
마치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부부처럼 서로를 읽어내는 감(感)이 있어요.
많이 부대끼다 보니 알아진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부대낌 속에서 깊어집니다.
그러니 오랜 세월동안 예수를 믿어 오신 분들의 신앙을 함부로 폄훼하면 안 됩니다.
저는 예전에 연세를 많이 드신 분들의 신앙을 폄훼했어요.
에이~ 저 분이 알면 뭘 안다고!
성경도 모르면서 믿음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어!
내 기준으로 판단하고 폄훼했어요.
성경적인 지식을 아느냐 모르느냐 로만 그분들의 신앙을 판단했어요.
그것도 내 주관적인 기준으로 말이에요.
이게 제 짧은 생각이고 성급한 판단이었던 것을 제 자신이 하나님과 많이 부대껴 가면서 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도록 하신 분들은 말로 표현되지 않는 뭔가 있습니다.
속된 말로 은근하고 끈끈한 내공이 있어요.
젊은 사람들이 모르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읽어내는 감이 있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있게 보는 남다른 눈이 있단 말입니다.
이건 하나님과 부대껴 오면서 알아진 것입니다.
이러한 감은 젊은 사람들이 읽어 내지를 못합니다.
젊은 사람들의 신앙을 휘발유 불같다고 한다면 오래 되신 분들은 숯불과 같아요.
활활 타는 휘발유 불로는 음식물은 조리하지 못합니다.
음식을 하면 설익어서 못 먹어요.
휘발유 불은 불을 밝히는 데에는 필요하지 음식을 조리하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아요.
그래서 젊은이들의 신앙으로는 사람을 살려내기 보다는 넘어지게 해요.
젊은이는 법이 앞서고 은혜는 저만치 뒤따라 와요.
그러니 무슨 일이 생기면 먼저 옳으니 그르니 변론하면서 편당을 짓고 다투고 잘라내는 일을 먼저 합니다.
전부 심판관이 되어서 심판을 해 버립니다.
이건 선 무당이 사람 잡는 것과 같아요.
젊은 사람은 법을 좋아해요.
그런데 말이죠.
법으로는 사람을 살려 내지 못해요.
생명은 은혜에서 나옵니다.
은혜는 용서와 사랑입니다.
생명은 용서하고 참아주고 사랑하는 관심 속에서 자라가요.
하나님은 사람은 사랑으로 살도록 만드셨어요.
사람만이 부모의 돌보심으로 살아가도록 미숙아(未熟兒)로 태어나게 만드셨어요.
이는 인간은 사랑으로 살아가는 존재로 만들어 놓으신 겁니다.
짐승은 갓 태어난 새끼라도 스스로 엄마 젓을 빨고 스스로 걷고 살아가요.
그러나 어린아이는 부모가 젓을 주고 돌보지 않으면 굶어 죽어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처럼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자로 창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삶 속에는 하나님 사랑이 담겨져 있는 겁니다.
이는 하나의 계시사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돌보심과 사랑으로서만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것을 통해서 우리의 생명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희생과 사랑으로 자라간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자식을 키워가면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젊은 부모들은 자식을 잘 키우지 못해요.
서툴러요.
자기 성질에 못 이겨서 아이들이 잘못하면 법으로 판단하고 잘했느냐 못했느냐 소리치고 두들겨 팰 줄은 알았지 그 아이를 가슴으로 부둥켜안고 울어주지 못해요.
아이들은 잘못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아이인 겁니다.
그런데 젊은 부모들은 아이를 어른의 생각으로 키우는 겁니다.
어이에게 어른의 행동을 요구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아이를 올바로 키워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우리들의 신앙 속에도 그대로 녹아져 있어요.
신앙생활은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옳으냐 그르냐 갈라내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을 사랑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먼저 “나는 죄인” 이라는 것을 바탕에 두고 출발을 해야 합니다.
“나는 용서받은 자” 라는 것을 깔고 시작하여야 합니다.
이게 바탕에 있어야 남을 판단하지를 못합니다.
누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여도 “나도 저런 인간이다” 라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우린 그 누구도 심판 할 자가 아니라 용서 하여야 하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린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정죄니 심판이라는 말은 우리가 쓸 말이 아니에요.
그건 오직 하나님만이 사용하실 언어에요.
그럼에도 우리는 심판자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법으로 판단을 받아야 하는데 우린 법을 집행하고 있어요.
그러니 나만 옳고 다른 사람은 다 틀렸다고 하는 겁니다.
정죄를 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에게 하여야 합니다.
내 자신은 법으로 대하고 남에겐 은혜로 대하여야 합니다.
내가 죽은 그 자리에 남이 살아나야 해요.
이 일을 하라고 성령을 보내 주신 겁니다.
설령 누가 우리 눈에 원수 같을 지라도 뽑아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왜? 이런 원수를 내 앞에 두셨는지를 알고 그 원수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원수를 통하여서 나도 하나님 앞에선 원수였는데 긍휼을 입었다는 것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나 같은 죄인이 용서 받은 것이 너무도 감사하여서 모든 이로 더불어 빚진 자로서 주님의 마음으로 다가가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속엔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것과 같은 사랑이 묻어 나와야 합니다.
신앙이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는 것으로 나아가야지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쪽으로 흘러가서는 안 됩니다.
그건 한 시절 철없을 때 지나가는 한 과정으로 두셔야 합니다.
이젠 때가 오래 되었으면 젊은이처럼 법으로 잘라내는 자가 아니라 넘어진 자들을 은혜로 사랑으로 보듬고 일으켜 세우는 어른으로 서 있어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그늘이 되어가야 합니다.
만약에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심판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복음을 법으로 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복음에 사로잡혀 먹힘 당한 것이 아니고 머리로 알고 있는 겁니다.
복음은 살려내는 것이지 죽이는 것이 아니에요.
복음을 바로 받은 사람은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지 않아요.
복음을 올바로 모르기 때문에 십자가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리면서 사람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SBS TV에 보면 문제 아이들을 교화시키는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 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전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참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거기에 보면 아이들의 그릇된 바탕엔 대 부분이 부모들의 문제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여기에 등장하는 젊은 부모들은 그냥 아이들을 윽박지를 줄만 알았지 참아주고 배려하는 것이 없습니다.
자기 뜻대로 안 되니 아이를 폭력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이들은 점점 더 반항적으로 삐뚤어지는 것입니다.
악순환만 계속되어 가는 겁니다.
그러다가 전문가가 등장해서 부모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부모들이 전문가의 카운슬링을 받고 나면 아이들이 다 달라지는 겁니다.
전문가들이 일통된 말은 어린아이는 사랑으로 대하여야 한다는 겁니다.
사랑으로 대하는 것은 그 아이의 눈 높이에 맞추어주는 겁니다.
이 훈련을 부모들이 받고나서 아이들을 대하면 다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포학하고 공격적이던 아이도 온순한 양처럼 변해요.
부모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참아주고 이해하고 보듬어주니 아이가 변하는 겁니다.
공격성이 온순하게 바뀌는 바탕엔 부모의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꼭 이솝 우화에 나오는 햇님과 바람이 지나가는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내용과 같아요.
바람이 세차게 불면 불수록 나그네는 옷을 더 여미고 추수려요.
하지만 햇님이 따뜻하게 햇볕을 비춰주면 나그네 스스로 옷을 벗어요.
이건 동화가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이야기에요.
부모가 참아주고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것은 자기를 희생하는 겁니다.
결국 생명이란 부모의 희생이라는 죽음을 통해서 자라간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어요.
이게 생명의 원리에요.
하나님은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부모와 자식을 통하여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보호하고 있는지를 말씀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처럼 생명이란?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또 다른 생명의 희생이라는 죽음을 통해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부모의 죽음으로 자식이 살아가듯 하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아셔야 합니다.
젊은 신앙은 멋은 있을 줄은 몰라도 생명이 없어요.
생명은 멋으로 키워내지 못해요.
생명은 참고 또 참고 용서하고 감싸 안으면서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사랑으로 살아나요.
우리의 신앙도 하나님의 끝없이 참아주고 용서하시는 희생 속에서 지켜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희생은 옳고 그름만 따지는 젊은이들은 이해하지 못해요.
마치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왕같이 늙은 원로들의 교훈을 거절하고 젊은이들의 말을 듣다가 나라를 반쪽으로 결단 내는 일들을 벌리는 것입니다.
이 시대 르호보암 시대처럼 교회 안에서 원로들의 은혜로운 말이 사라져 가고 있어요.
젊은이들 말인 법만 난무해요.
그러니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옳고 그르냐 라는 법이 난무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도통한 것처럼 말하지만 속을 까서 먹고자 하면 땡감처럼 떫기만 했지 달콤함이 없어요.
죄인이라는 말을 하면서도 쭉정이처럼 목이 뻣뻣하고 교만하였지 겸손이 없어요.
복음을 말하면서 정죄하고 심판하여 잘라내고 쫓아내는 것은 있었지 붙이고 일으켜 세우는 것이 없어요.
그러므로 말씀을 이론적으로 많이 아는 사람들 곁엔 사람들이 도망을 가지만 오랜 세월 하나님과 많이 부대끼면서 살아오신 분들 곁에는 사람들이 붙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엔 푸근함이 묻어나오거든요.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과 부대껴 오신 분들은 은은한 숯불에 폭 고아진 삼계탕처럼 덕이 나오고 용서가 나오고 오래 참아줌이 나오고 사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있단 말입니다.
이건 그 분들이 살아오면서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하여 체휼하면서 얻어진 사랑이에요.
이 분들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산다는 것을 알아요.
비록 성경 말씀은 많이 몰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니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은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에요.
오랜 세월동안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통행하면서 넘어지고 시험 들고 깨어지고 일어나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조급한 것은 사단이 주는 마음입니다.
신앙은 생명의 자람처럼 인내가 필요합니다.
생명이 자라가는 것에는 다 때가 있어요.
하루아침에 쑥~ 하고 크는 그런 생명은 없습니다.
알다시피 생명은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우리들의 생명에 주인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세요.
그럼 우리의 신앙의 자람에 때도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그래서 때와 기한은 하나님이 정하신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을 봅시다.
갈 4:1-7=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유업을 이을 자는 주인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어렸을 동안에는 종으로 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정한 때 동안은 후견인인 청지기 아래 두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와 같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때가 차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서 율법 아래 있던 우리를 속량해 내셨다고 합니다.
종에서 아들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고 합니다.
아들에 영을 보내서 종에서 아들로 만들어 주셨다고 합니다.
이걸 성도의 구원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서 낳다고 하지요.
이는 모든 신앙을 율법으로부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우린 법 아래서 태어나기 때문에 법이 익숙해요.
우리 안에 법으로 가득해요.
그러므로 우리는 본능적으로 니편 내편 편 가르기를 잘하는 것입니다.
나만 옳고 남은 다 틀렸어요.
내 주장에 반대하면 다 이단이에요.
이게 법 아래 있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때가 차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그 법 아래서 빼내 주셨습니다.
우리 안에 은혜를 심어 주셨어요.
이게 새 언약입니다.
그리곤 성령을 보내서 예수님을 우리 안에 상주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 예수님이 계신 성도는 법으로 살지 않고 은혜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어른들의 신앙이에요.
그런데 이러한 신앙의 자람이 하나님의 정한 때라는 시나리오대로 움직여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다가 은혜 아래로 빼내심을 입는 것은 우리의 원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원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럼 한 사람이 태어나고 지는 때를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도 하나님이 정한 때에 따라서 움직여진단 말입니다.
법 아래서 빼내심을 입고 은혜 아래로 옮겨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때를 따라서 더 깊이 깨달아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신앙이 숙성되어 가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처음 부르심을 입었을 땐 믿음이 없었어요.
그러니 마누라를 두 번씩이나 팔아먹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해서 낳은 자식이 이스마엘 입니다.
조급해서 낳은 자식이 결국엔 약속으로 낳은 자식을 핍박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조급하면 이스마엘과 같이 남을 핍박하는 신앙 밖에 안 되어요.
그러나 아브라함도 오랜 세월 하나님과 부대껴 가면서 자기를 점점 비우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어요.
자기 계산법으로 살아가던 것을 점점 하나님의 계산법으로 살아가는 방식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게 나중엔 자기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어요.
아브라함이 하루 아침에 이삭을 바칠 믿음이 생긴 것이 아니에요.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과 씨름해 오면서 자기를 빼앗기면서 얻어진 신앙입니다.
이걸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라고 합니다.
우린 모두가 이 자리로 부르심을 입었어요.
“아브람”만 “아브라함”으로 되어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도 그렇게 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아브라함처럼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은근히 숯불에 삼계탕을 끓이듯이 우리도 흐물흐물하게 푹 삶아 가십니다.
우린 고난을 통해서 나라는 존재는 점점 더 빼앗겨 가면서 은혜 안에 강한 자로 폭 삶겨져 갈 것입니다.
일을 시작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이 다 정한 때를 맞추어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때를 따라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 입장에선 조급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신앙을 우리가 키워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키워 가시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말씀을 깊이 있게 깨달아야 우리의 신앙에 유익이 된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알아서 깨닫게 해 주실 시기도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필요에 따라서 깊은 곳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린 하루 하루 주어진 환경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라 믿고 감사하면서 살면 됩니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거창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영웅호걸이 되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알고 그저 하루하루 감사하며 살아가면 됩니다.
평범함의 축복을 아십니까?
사사기를 보면 많은 사사들의 기록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록을 보면 다 달라요.
어떤 사사는 몇 장을 걸쳐서 이야기하고 있고 어떤 사사는 달랑 한 줄로 기록하고 있어요.
한 줄로 기록된 사사들은 무슨 일을 하다가 죽었는지 모를 정도로 흔적이 없어요.
흔적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평안하게 살다가 갔다는 말입니다.
많이 시달린 사사일수록 분량이 많아요.
달랑 한 줄로 기록된 사사나 몇 장에 걸쳐서 기록된 사사나 그 구원은 동일합니다.
그러니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저 있는 듯 없는 듯하면서 평범하게 평안하게 살다가 간 사사가 얼마나 큰 은혜이고 축복입니까?
그럼에도 우린 이 평범함의 복을 몰라요.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의 사고로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이름이 거창하게 나는 것을 성공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건 예수님의 12제자들의 행적을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도는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서 말하고 있고!
어떤 사도는 한 마디 언급이 없어요.
그냥 이름만 달랑 있어요.
우리 생각엔 이름이 많이 난 바울이나 베드로를 부러워해요.
이름 없이 살다간 사도들은 부러워하지 않아요.
이게 우리의 세상적인 사고에요.
성경 속에 이름이 많이 기록된 사람일수록 많은 고난을 겪었어요.
그러니 좋은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평범한 것이 좋은 겁니다.
그냥 감사하고 사세요.
제가 성경 속에서 제일 은혜를 받는 대목이 누가복음 2장 29절입니다.
너무도 은혜로운 말씀이니 한 번 보고 갑시다.
눅 2:25-30=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늙은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시므온은 메시야를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찍이 성령께서 너는 메시야를 보아야 천국에 간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겁니다.
난지 팔 일만에 모세의 결례대로 할례를 받고자 성전에 오신 겁니다.
시므온이 예수를 보자 너무도 기쁜 겁니다.
이제 예수님을 보았으니 하나님께 갈 때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기쁨으로 찬송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군요!
하나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라고 찬송을 하였어요.
이제 이 세상에서 제대 할 때가 되었다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황홀한 고백입니까!
부럽지 않으세요.
전 엄청 부러운데!!!
암튼 우리들의 신앙도 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정한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조급해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린 머리털 하나도 검게나 희게 할 수가 없어요.
그냥 하나님이 이끄는 대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을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 말씀도 억지로 알려고 하지 마세요.
우리가 성경을 알고 싶다고 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세요.
필요하면 다 깨닫게 해 주십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써 졌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만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성령의 감동하심은 우리가 조정 할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알아서 간섭을 하세요.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간섭해 주시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어린아이 때는 어린아이만큼 깨닫게 해주시고 어른은 어른 만큼 깨닫게 해 주세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적당하게 깨닫게 해 주셨어요.
그러니 지금 우리가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주신 은혜도 다 깨닫지 못하면서 맨 날 새로운 은혜를 달라고 하고 있어요.
그건 탐욕입니다.
만나를 주면 만나만 먹으면 되는데 꼭 메추라기를 달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메추라기를 주고 그 입에 고기를 다 씹기도 전에 죽여 버리잖아요.
그래서 애굽에 고기를 달라고 하다가 죽은 자들의 무덤을 “기브롯 핫다아와” 라고 하여 탐욕의 무덤이라고 명명하시잖아요.
왜? 탐욕의 무덤이라는 이름으로 명명합니까?
탐욕은 곧 죽음을 불러일으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만이란? 앞서고자 하는 겁니다.
자기 위치를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쉬운 말로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치 않고 원망과 불평만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알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말씀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필요하면 다 깨닫게 해 주십니다.
때가 되면 다 알게 해 주십니다.
오늘본문에서 뭐라고 합니까?
성령이 오시면 생각나게 하시고 깨닫게 해 주신다고 하잖아요.
성령이 알아서 다 해 주신다고 하잖아요.
그럼 우리가 급할 것이 없어요.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데 필요한 것이라고 한다면 성령이 알아서 생각 날 것은 생각나게 해 주시고 깨달아야 할 것은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건 약속입니다.
이 약속이 믿어지면 조급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나서서 나대지 말란 말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나대다가 일주일이면 들어갈 가나안을 사십년 동안 헤매다가 들어가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십년을 광야 길을 왔다가 갔다가 갈 지(之)자로 오르락내리락 했어요.
하나님이 광야에서 진을 빼고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셨어요.
이게 다 나대다가 얻은 결과에요.
결국 신앙은 끝에 가면 주님 알아서 다 하세요! 라로 가게 되어 있어요.
자포자기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다 하셨네요 라고 고백하게 되어 있어요.
우린 내게 가능성이 있으면 포기하지 않아요.
그 가능성이 다 사라져야 포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힘을 빼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하도록 만드십니다.
우릴 탕자처럼 만드세요.
은혜 아래 가두어 버립니다.
자신이 탕자라는 것을 알 때 비로서 종의 자리로 내려가 앉게 됩니다.
우린 다 상석에 앉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스스로 말석으로 내려가 앉게 하는 일을 벌이십니다.
그리하여 상석엔 주님이 앉을 자리 라는 것을 알고 나는 주님의 발이나 닦아 주는 종이라는 것을 알게 만드세요.
아직도 힘이 많이 남아 있나요.
복음 안다고 까불고 있나요?
반드시 그 안다고 하는 복음이 하나님의 원수로 드러날 일이 올 겁니다.
복음이 잘못 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잘못 행사하고 있는 우리의 죄가 드러나게 된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복음 안다고 하는 그 힘조차 다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욥처럼 주둥이를 닫게 할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을 다 빼서 죄인 중에 괴수로 만들어서 하나님이 등에 업고 천국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천국엔 우리 힘으로 걸어서 갈 수가 없어요.
다 하나님 등에 업혀서 가게 되어 있어요.
이걸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를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왔다고 하셨어요.
우리도 독수리 날개에 업혀서 갑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독수리 날개 같은 손에 이끌려가는 삶입니다.
그러니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받은 만큼만 하세요.
지금 깨달아지는 것만큼만 하시면 되어요.
이해되어지면 이해되어지는 대로 믿고, 이해가 안 되어지면 안 되어지는 대로 믿으세요.
꼭 이해가 되어야 한다면 하나님이 꿈에서라도 이해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주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라고 생각하고 안심하고 사세요.
전 진리를 알고자 수십 년을 헤맸어요.
만약에 내 뜻대로 성경을 알 수 있었을 것 같았으면 헤맬 필요가 없잖아요.
그냥 내가 필요 할 때 공부해서 알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게 안 된단 말입니다.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하고 수많은 설교를 듣고 수많은 책을 보아도 못 깨달았어요.
나중에 은혜를 받고 보니 하나님께서 말씀을 깨닫게 해 줄 시기가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하나님이 때가 되면 다 깨닫게 해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하여서는 우리가 애쓴다고 되어질 문제가 아니더란 말입니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셔야지만 합니다.
만약에 지금이라도 내 힘으로 복음을 깨달을 수가 있다고 한다면 내가 예수가 될 겁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내게 배우라고 할 겁니다.
그럼 교주되는 겁니다.
이건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여러분도 다 복음 잘 알고 싶잖아요.
그럼 교회 가서 목사님 설교 들을 필요도 없을 것 아닙니까?
예를 들어서 모든 성도가 다 자기 힘으로 복음을 깨달을 수가 있다고 한다면 어찌 될까요?
다 예수가 되는 거지요.
그럼 이 세상에 예수 천지가 될 겁니다.
전부 자기가 아는 것만 복음이라고 할 것 아닙니까?
그럼 지옥 되는 겁니다.
지옥이 어떤 곳인 줄 아세요.
잘난 놈들이 모인 곳이에요.
서로가 다 잘났으니 싸우고 다투는 곳이 지옥입니다.
천국은 자기가 못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러니 천국에 다툼이 없는 겁니다.
전부 못났는데 뭘 싸웁니까.
전부 입 닫고 주님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복음 다 안다고 꼴값 떨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여 난 아무것도 모르니 도와주소서! 라고 하고 있습니까?
어느 과(科)입니까?
복음 안다고 남을 무시하고 심판하면서 남을 들이 받는 염소 과입니까?
아니면 묵묵히 목자만 졸졸 따라다니는 양과 입니까?
영에 관한 일들은 우리가 노력하고 애쓴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들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도 그렇고!
은혜 받는 것도 그렇고!성경을 깨닫는 것도 그렇고!
모든 성도는 다 하나님이 정한 때가 있어요.
우린 하나님이 정한 그 때에 따라 살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광야 이스라엘을 구름기둥이 앞서서 진 칠 곳을 찾아주고 떠날 때는 알려주셨어요.
지금은 성령이 구름 기둥처럼 보혜사가 되셔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십니다.
신앙에 있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알아서 스케줄을 세우고 그 계획표대로 우리를 다스려 가세요.
이건 마치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가 등장하는 시기를 감독이 정하는 것과 같아요.
배우가 자기 마음대로 아무 때나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에요.
배우의 모든 것은 감독이 정하세요.
성도의 신앙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세요.
그 때가 되면 자연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관점에서 보면 우리로서는 전혀 급할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때와 기한은 하나님이 정하시기 때문입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처럼 하나님이 각자 때를 정해서 부르십니다.
어떤 사람은 일찍 부르고 어떤 사람은 늦게 불러요.
일찍 부름을 입은 사람이나 나중에 부름을 입은 사람의 품삯은 다 동일해요.
목사라고 해서 믿음이 더 좋고 평신도라고 해서 믿음이 작지 않아요.
주님 사랑하는 마음은 목사나 평신도나 차별이 없어요.
그러니 받은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면 됩니다.
그런데 우린 이걸 모릅니다.
인간들 생각으로 우열을 정합니다.
일반 성도들보다 목사가 좋아 보이는 겁니다.
아니에요.
목사가 말씀을 많이 알고 설교를 잘 한다고 해서 믿음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에요.
믿음은 설교를 잘하거나 말씀을 잘 아는 것과는 상관이 없어요.
그건 우리들 생각이고 착각일 뿐입니다.
그러니 좋은 설교 듣는다고 믿음이 다 좋아진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만약에 좋은 설교를 들어서 믿음이 좋아진다고 한다면 사도들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다 예수를 잘 믿어야 했습니다.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의 충만을 입고 설교를 하였는데도 이빨을 뿌드득 가는 자들이 있었어요.
스데반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최고의 설교를 했어요.
그런데 군중들이 아멘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고 돌로 쳐 죽였어요.
바울을 그 좋은 설교를 하였음에도 듣는 사람들이 없었어요.
그러니 설교 잘하는 목사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 목사 설교를 들으면 믿음이 좋아 질 것이란 생각을 하지 말란 말입니다.
지식으로 알 순 있겠지요.
그러나 지식으로 알아진 것은 지식이지 은혜로 알아진 복음이 아니에요.
지식으로 알아진 복음은 지식을 토해내고 은혜로 깨달은 복음은 은혜를 토해내요.
지식으로 알아진 것은 교만으로 나타나지 생명의 역사로 나타내지 못해요.
생명의 역사로 나타나는 말씀은 오직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는 말씀일 때 나타납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실 때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어서 온전한 믿음에 역사를 일으키게 됩니다.
이 때 생명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분명한 것은 택한 백성은 때를 따라 은혜를 주시고 반드시 복음을 깨닫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택한 백성은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세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보면 어느 때가 되면 다 이해가 되어져요.
지금 당장 이해가 되지 않아도 때가 되면 깨달음이 와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늘 의문으로 품고 살다가 보면 깨달아 질 때가 있어요.
심지어 드라마를 보다가도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눈이 열린다니까요.
저는 갈급함을 참지 못하고 헤매다가 이단에도 빠져 보았어요.
참으로 위태위태한 길을 많이 걸어 왔어요.
하지만 늘 하나님은 보혜사가 되셔서 날 인도해 오셨어요.
이스라엘을 간섭해온 에벤에셀의 돌기둥처럼 저에게도 하나님이 간섭해 오신 에벤에셀의 돌기둥 같은 증거들이 있어요.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증거들이 있기 때문에 두렵지가 않고 안심이 되는 것입니다.
산전수전을 겪어 오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배워왔기 때문에 조급하지가 않는 겁니다.
누가 복음을 몰라도 조급해 하지 않아요.
예전엔 누가 복음을 모르면 안타까워했어요.
그래서 내 열심으로 먹이고자 했습니다.
나중에 가만히 보면 정작 본인은 갈급해 하지 않는데 나만 급해서 난리를 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헛 싸움인 겁니다.
그건 그 사람이 해결할 문제이지 내가 해결해줄 문제가 아닌 겁니다.
그 사람의 주인이 하나님이지 내가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젠 주께서 알아서 간섭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설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젠 주께 맡기고 살아요.
내가 급해 할 것이 아무도 없어요.
우리의 모든 일이 그러합니다.
사람 하나 만나고 헤어지는 것도 하나님이 다 정하세요.
우린 모두가 하나님이 정한 시나리오대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성경 속에 하나님께서 나를 다스려가는 해답이 있습니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다스려 오셨는지를 통해서 지금 나를 어떻게 다스리고 있는지를 읽으셔야 합니다.
성경 속에 인물이 내 자신임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다가 보면 어느 순간 성경 속의 인물 속에 내가 있다는 것이 보여집니다.
그래야 성경 속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성경 속에 성도들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성경을 늘 묵상하십시오.
이것 이상 좋은 신앙은 없어요.
복 받은 사람은 늘 성경을 가까이 하게 되어 있어요.
시편 1편에서 그러잖아요.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고 했잖아요.
복 있는 사람이란?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이란 말입니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알고자 성경을 묵상하게 되고!
성경을 묵상하다가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깨닫고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말씀과 은혜가 수레바퀴 돌듯이 선순환(善順換)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성도는 늘 말씀을 상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뢰아 교인들처럼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성경이 과연 그러한가 상고해 보셔야 합니다.
성경이 해답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늘 묵상하다가 보면 필요에 따라서 깨달음을 주세요.
성경을 많이 읽으세요.
그럼 그게 나중에 엄청난 은혜를 몰고 다녀요.
말씀이 머릿속에서 달음질을 한다니까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 말씀처럼 성령에 깨닫게 해 주신다니까요.
성경을 읽으면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달라고 기도하세요.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세요.
그럼 택한 백성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성령께서 보혜사가 되셔서 인도하십니다.
깨달음은 주께서 주시는 것이지 우리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 원함으로 이루어지지 않아요.
믿음도 은혜도 하나님 말씀을 깨닫는 것도 우리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잃어버린 드라크마나 잃은 양 비유가 나옵니다.
우린 모두가 잃어버려진 드라크마이고 잃은 양입니다.
우린 잃어버려진 줄도 모르고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주인이 찾아 주셨어요.
우린 찾김 받고자 노력하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찾김을 받았어요.
예수가 믿어지고 있어요.
이 모두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은 우리의 주인 되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은혜 받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할 일이라곤 하나도 없어요.
숨 쉬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허락 하에 하는 일입니다.
내가 살고 죽는 모든 것은 주님이 알아서 하십니다.
이 사실을 믿고 사시면 됩니다.
지금 이해가 안 됩니까?
그럼 이해 안 되는 대로 사세요.
내가 정녕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내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찾아내십니다.
마귀 손에 있다 할지라도 찾아오십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을 다 불러내잖아요.
죽어 있던 나사로를 예수님이 찾아가서 무덤에서 나오라고 불러내잖아요.
나사로가 언제 통성 기도 했나요.
나사로는 자기가 죽었다고 슬퍼하지 않았어요.
살려 달라고 하지도 않았어요.
그냥 죄라는 끈에 꽁꽁 묶여서 죽어 무덤에서 썩어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찾아가서 썩어 문드러져 가는 나사로를 썩음과 상관없이 살려 내셨어요.
이게 구원이고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한 알갱이라도 버린바 되지 않고 다 찾아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기어코! 반드시!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찾아내십니다.
여인이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듯이 쓸고 닦아서 찾아내십니다.
목자가 가시덤불 헤치고 달려와서 홀로 음매~ 음매~ 하고 우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내십니다.
그리곤 등에 울러 매고 천국으로 데리고 가 찬치를 벌립니다.
예수님이 홀로 야! 내가 이 놈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다고 기뻐한다니까요.
이렇게 하나님께 찾아냄을 당한 사람은 그 누구라도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빼앗김 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나 이러다가 짤리면 어쩔까 염려하지 마세요.
그건 마귀가 주는 마음입니다.
구원 문제에 있어서는 신경 끄고 사세요.
구원이란? 하나님의 자기 약속의 결과물로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원함이나 노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게 믿어지게 하시려고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을 우리 가운데 보내 주신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성도는 이게 믿어집니다.
믿어지니 믿는 겁니다.
믿어지니 내 안에 주님의 증거가 생기고 주님의 증거를 가지고 있으니 누가 무슨 말을 하여도 흔들림이 없고 안심이 되는 겁니다.
아니! 예수가 믿어지면 되잖아요.
그럼 되었잖아요.
뭐가 문제입니까.
예수 잘 믿으려고도 하지 마세요.
그냥 믿어지는 것만큼만 믿으세요.
전 여러분보다 특별하지 않아요.
똑똑하지도 않고 잘나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뜻을 이해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어요.
하나님과 교제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어요.
늘 보혜사 되신 성령의 인도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상하게 생각 할까봐서 참으로 조심스러운데?
전 말씀이 머릿속에서 늘 달음질을 합니다.
길을 갈 때도 설교를 하고!
차를 운전 할 때도 설교를 하고!
잠을 잘 때도 설교를 해요.
이건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요.
이상하게 그렇게 되어요.
혼자 설교를 하다가 보면 모든 성경이 예수님 이야기로 깨달아져요.
늘 그렇다는 말이 아니고,,, 이러한 일이 참 많아요.
말씀이 달음질을 하면 성경이 마치 퍼즐이 하나 둘 맞추어져서 하나의 그림을 그려내듯이 모든 성경이 예수님 이야기로 이해가 되어진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거 혹시 내가 그릇된 신비주의가 아닌가 싶어서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를 참고하고 책을 보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럼 저와 같이 깨달은 분들이 있어요.
저 혼자만 깨달은 것이 아니고 앞선 믿음에 사람들도 이미 깨달은 것임을 알게 되어요.
그래서 아! 성령께서 시대를 초월하여 깨닫게 해 주시는구나! 를 알게 됩니다.
얼마나 신기한지 아세요.
그 맛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황홀한지 이해하셨으면 좋겠네요.
그래서 저는 어느 책을 보거나 그 누구의 설교를 들어도 저것이 사람이 공부해서 얻은 지식으로 전하는 말인지 아니면 성령의 은사로 깨달아진 것인지 분별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 한 부분만 살펴보고 마칩시다.
예수님을 돕는 보혜사 라고 하였습니다.
옛 사람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져내는 보혜사 였습니다.
이걸 구약에선 모세를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모세가 그러지요.
나중에 나 같은 선지자가 나타나면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이 일을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자 군중들이 모세의 말을 기억하고 이가 바로 오시리라 한 그 선지자라고 합니다.
그럼 예수님이 모세처럼 이스라엘을 어디론가 빼 내려고 오신 분이란 뜻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끄집어내고 가나안으로 인도하라고 보냄을 입은 보혜사였어요.
그럼 예수님은 우리를 어디에서 어디로 빼내는데 돕는 보혜사였습니까?
죄와 사망으로부터 빼내서 의와 영생의 세계로 인도하는 보혜사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의 힘으로 바로의 권세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모세를 보혜사로 보내서 출애굽을 돕게 하신 겁니다.
구원이란? 외부에서 건져주는 것을 말합니다.
출애굽을 언약적인 관점에서 보면 율법이라는 옛 언약으로부터 나오는 겁니다.
옛 언약은 죄와 사망 가운데 가두는 언약입니다.
옛 언약이 가는 곳마다 인간은 여지없이 죽음에 가두어집니다.
반면에 새 언약은 살리는 언약입니다.
새 언약이 닿는 곳마다 죽었던 자들이 살아납니다.
마치 죽은 강도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살아난 것과 같습니다.
성경의 구조를 언약으로 보면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입니다.
옛 언약이 어떻게 새 언약 안에서 완성이 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옛 언약은 하나님의 뜻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쉽게 설명할게요.
옛 언약을 율법이라고 합니다.
율법이 뭡니까?
인간의 죄를 고발하는 것이잖아요.
율법은 인간이 범죄함으로 더하여 진 것입니다.
죄가 없는 곳엔 율법이 없어요.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은 곧 너희는 죄인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고발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어요.
율법 속에는 하나님이 바라는 인간상이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는 “난 이런 인간을 원한다” 는 겁니다.
둘째는 “그런데 너희는 이렇데 틀렸다” 라는 겁니다.
율법의 요구대로 살면 예수님처럼 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신 분입니다.
그러니 율법대로 살면 예수님처럼 된다고 하는 겁니다.
율법이 정답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난 이런 인간을 만들었는데 !
죄가 너희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고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실존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옛 언약을 준 것은 새 언약을 주기 위함입니다.
왜? 새 언약이 주어져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언약 이후에 새 언약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새 언약은 옛 언약을 완성하는 언약입니다.
옛 언약이 하지 못하는 것을 새 언약이 성취하세요.
그럼 새 언약이 어떻게 누구랑 맺어집니까?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으로 맺지요.
그럼 옛 언약을 누가 완성합니까?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은 자기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서 이 사실이 믿어지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율법의 요구대로 살지 못하여도 정죄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성령이 오셔서 성도에게 적용하십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자기가 한 일로 믿어지게 한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면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예수그리스도의 평안을 주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이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릅니다.
이는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평안과 다르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평안은 육적인 평안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육신이 안락함을 누리는 평안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평안은 불안전한 평안입니다.
평안의 반대말은 불안이고 두려움입니다.
인간의 두려움은 원초적인 겁니다.
이 원초적인 두려움은 죽음으로부터 옵니다.
죽음이 두려움을 몰고 다녀요.
인간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그 어디에서도 평안 할 수가 없어요.
사망은 죄의 삯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평안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죄 문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해결해 주세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해결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죽어야 너희들의 죄 문제가 해결이 되고!
그럼 성령이 와서 죄와 사망으로부터 벗어난 평안을 준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평안을 주시겠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난 후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합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해 준다고 합니다.
어떻게 쉼을 주느냐 하면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멍에란?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이는 곧 성도의 평안은 예수님의 죽음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죽어야 자기백성들의 죄사함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성도들의 평안은 예수님의 죽음 안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다는 말은 내가 너희를 평안케 하기 위함이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내가 사단에게 내어줌을 당하고 죽어야 너희가 율법의 요구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그러면 평안이 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 임금이 있는 이곳을 떠나자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모세가 구약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떠나자고 하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바로 라는 세상 임금으로부터 떠나게 했습니다.
어떻게 끄집어내시는가 하면 홍해바다에서 수장시켜서 빼내십니다.
바로의 종으로 난 애굽에 사람을 홍해바다에 죽이고 바로와 상관없는 자로 살려 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모세에게 속하여서 홍해를 건넜습니다.
이는 모세가 이스라엘을 안고 건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모세 안에서 건넜기 때문에 홍해 바다는 모세 혼자 건넌 것입니다.
이처럼 신약의 출애굽도 예수님 혼자 하세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홍해 바다를 건넌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자기백성들을 몽땅 안고 죽은 겁니다.
성도는 예수 안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같이 죽었어요.
아담 안에서 태어나 일평생 죽음이라는 두려움에 쫓기던 옛 사람이 죽었어요.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의 사건이 나의 사건화 시켜 주십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게 하십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 주신 평안을 누릴 수가 있어지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한 성도는 이 평안의 세계 안에 이미 들어와 있습니다.
성령이 누리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우리의 영원한 보혜사가 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보혜사가 되어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가 않습니다.
이게 성도의 운명입니다.
그러니 예수 안에서 안심하고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보혜사 되신 성령의 위로와 교통하심 속에서 살아가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눈을 여시고 귀를 여셔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하시고 듣게 하셔서 하나님이 친히 우리의 보혜사가 되셔서 우리의 발걸음 하나 하나를 다 세시고 계신다는 것이 믿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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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jtr28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