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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장
"경계를 철저히 서라!"
분주객잔 서쪽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천무맹에서 흘러나온 외침소리였다.
청성파 인물인 풍뢰검객 문상이 수하들을 독려하며 핏발 선 눈으로 전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르게 오십여 명의 부하들이 목숨을 잃었다.
천마맹에 대해 감시조를 보내기도 전에 기습을 당했기에 더욱 당혹스러웠다.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격을 해야 한다. 맹에서는 무천각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라 하였으나 그럴 수가 없다.
무천각주가 오게 되면 그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당당한 구대문파의 정예가 일개 세가 집합체인 무천각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여야 하다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들이 오기 전에 지금 와 있는 천마맹의 인물들을 제거해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무천각주와 동등한 지위에서 작전을 펼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겨버렸다. 이곳에 자리를 잡기도 전에 기습을 당했고, 천마맹을 공격할 생각도 못한 채 경계만 서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장 대협, 그쪽은 어떻습니까.'
'아무런 조짐이 없습니다. 너무 조용합니다.'
문상이 점창파의 장일권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기습을 당한 지 하루가 지났지만 더 이상 다른 징후가 없었다. 아마 자신들이 촉각을 세우고 있는 줄 알고서 자중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군요. 잠시 후에는 해가 뜰 테니 그때 좀 쉽시다.'
설마 벌건 대낮에 기습을 해오는 바보는 없으라는 게 문상의 생각이었다. 아무리 경공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낮에는 흔적이 더 쉽게 발견될 것이 아닌가.
주변이 점점 밝아오면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바라보던 문상이 기지개를 펴며 몸을 돌렸다.
거의 이틀 동안의 밤샘이 무공으로 단련된 심신을 피곤하게 하였던 것이다. 거처로 돌아온 그가 검을 풀어서 놓는 순간, 또다시 기습을 알리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악! 적이닷!"
"이런, 빌어먹을."
거칠게 검을 집어 든 문상이 몸을 날렸다. 다시 똑같은 상황이었다. 이번에도 정확하게 열네 명의 부하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적에게 살해되었다.
"장 대협, 보았습니까?"
그러나 장일권도 곤혹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은 문상보다 멀리 있었기에 처소로 돌아가는 데 시간이 더 걸린다.
비명소리를 듣고 곧바로 달려왔으나 죽어 있는 부하들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으악! 아악!"
"헉!"
두 사람이 헛바람을 들이키며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들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는 광경 하나, 막 쏟아지는 태양빛을 받으며 허공으로 사라지는 희미한 인물들이었다.
"웬 놈들이냐?"
사라진 놈들이 있던 곳으로 무서운 속도로 내달린 두 사람이 거칠게 검을 휘둘렀으나 그 무엇도 걸리는 게 없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허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는 무공이라니.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귀신이야! 귀신……. 그렇지 않으면 어찌 형체도 없이 다니는가."
이번에 새로 영입된 무사들 사이에서 겁먹은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육파의 제자들이야 자파에 대한 자부심도 있고, 자신들의 체면도 있기에 겁을 집어먹어도 감히 뭐라 말을 하지 못하고 있지만 외부에서 영입된 자들은 달랐다.
적을 발견해야 그들을 물리치고 공을 세울 터인데, 적은 고사하고 동료들의 죽음만 보고 있으니 겁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멍청한 소리 하지 마라. 귀신이 어디 있나. 한 번만 더 그딴 소리하면 즉결 처분할 것이야, 알겠나?"
문상의 입에서 내공을 가득 담은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동요하는 부하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하는 말이었지만 그의 놀라움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철저히 경계하라. 움직임이 빠를 뿐 사람이다, 알았나?"
부하들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본인에게 하는 말이었다. 자신의 실력으로도 상대의 움직임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에 대한 당혹스러움이었다.
'침착해라, 문상. 잡을 수 있다. 네가 흥분했을 뿐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전방을 노려보는 그의 눈에 십여 장 밖에서 홀연히 나타나는 일단의 무리들이 보였다.
마치 그림 같았다. 태양을 등지며 허공 속에서 걸어나온 십여 명의 인물들이 부하들에게 일 도를 날린 직후 뒤쪽으로 멀어지면서 다시 허공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었다.
"쫓아라!"
그러나 이번에는 문상만 본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천무맹 무인들이 보았고 문상의 명령보다 앞서 달려나가고 있었다.
"와아! 죽여라!"
천마맹이 있는 곳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인물들이 빛살 같은 속도로 백산과 광견조 일행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들 중 가장 앞서나가며 백산 일행을 쫓아가는 인물, 비마 상남이었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부하들의 죽음에 극도로 분노한 그가 광전비(光電飛)를 극성으로 펼치며 도망치는 인물들을 무섭게 뒤쫓았다.
"감히 나에게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했더냐?"
사정권에 들어온 놈들을 향해 자신의 절기중의 하나인 천풍만화류(天風滿花流)를 펼치려는 순간, 그의 눈에 엄청난 광경이 목격되었다.
팟!
열댓 명의 인물들이 동시에 사라진 것이다. 마치 증발해버린 것처럼 그들의 존재감이 지워져버렸다.
"이럴 수가……."
비마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믿을 수가 없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눈이 잘못되었다 싶었다.
자신의 있는 곳 바로 오 장 앞에서 아무런 기척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비마 상남이 넋을 잃고 있을 때 백산 일행 또한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진을 구축함과 동시에 최대한의 속도로 몸을 뺐기에 망정이지 자칫 했으면 암기세례를 받을 뻔했다.
암기를 막는 것이야 큰 문제가 아니지만 혹여 쫓아오는 저들과 섞이게 되면 혼전이 벌어지게 될 수도 있음이다. 그 또한 바라는 바가 아닌 것이다.
"와아! 와아!"
"저건 또 뭐야?"
백산과 광견조원들이 은밀하게 몸을 빼내고 있을 때, 화인걸과 패웅이 나타났던 곳으로부터 수백의 인물들이 뛰쳐나오고 있었다.
패잔병들이었다.
냉무기가 이끌고 있던 제마각 무사들과 그들을 쫓고 있던 흑기철기병의 잔여 인원들이었다.
그러나 겉보기만 쫓고 쫓기는 모양새였을 뿐,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달린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행색이었다.
그 강함을 자랑하던 흑마와 철갑을 어디로 버렸는지 자신들의 무기였던 장창만 꼬나쥐고 제마각 무사들을 뒤따르고 있었다.
서로 간에 계속적인 혈전으로 인하여 양쪽 다 절반의 인원밖에 남아 있질 않았다.
"잘됐네, 뭐! 후퇴한다."
두 세력이 서로 엉기는 것을 쳐다보던 백산과 광풍대원들이 몸을 날려 객잔으로 사라졌다. 이제 전쟁은 남아 있는 자들의 몫일 뿐이었다.
"쳐라!"
비마의 입에서 포효 같은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자신들을 기습했던 놈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가득 메우며 나타나는 천무맹의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원래 자신들을 기습했던 자들이 문제가 아니었다. 천무맹의 정예라 할 수 있는 십천각 인물들이 대거 나타났고, 결국 전쟁은 그들과 벌이는 것이다.
자신의 손이 스쳐간 자들의 생사는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죽어갈 자들이기에. 이 혼전의 와중에 살아 있는 자도 목숨을 장담하기 어려울진대 하물며 부상을 당한 자가 무슨 수로 버텨가겠는가.
"천풍만화류(天風滿花流)!"
무서운 속도로 몸을 날리던 비마로부터 통렬한 외침이 흘러나오고 전방에 있는 인물들을 향해 죽음의 꽃이 뿌려졌다.
태양빛에 번쩍거리는 암기는 아름다운 꽃이었다. 살기를 머금은 사화(死花)였다.
단 일수에 십여 명의 인물들이 쓰러지고 그 공간 속으로 또 다른 인물들이 들어찼다. 물러나고 싶어도 물러설 수가 없다.
뒤쪽에서 밀어붙이는 동료들 때문에 무작정 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전진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검과 도와 창이 얽히고 붉은 핏물이 허공에 번진다. 너무도 하찮은 게 인간이런가.
죽고 죽이는 살육 속에는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것은 없었다. 다만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노력만이 있을 뿐이었다.
"계속 밀어라! 전진하라! 움직여라!"
풍뢰검객 문상의 입에서도 거친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어차피 출병한 목적이 바로 이들이다. 천마맹을 치기 위해서 출병했지, 미끼를 잡기 위해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의 애병(愛兵)인 풍뢰검(風雷劒)에서 거친 바람소리와 살기가 섞이고, 천마맹 인물들이 죽어나갔다. 누구를 보호하고 누구를 살리고 할 틈이 없었다.
앞에 적이 있는가 싶으면 옆에서 적이 나온다. 모든 무인들이 서로 뒤섞여 죽음을 휘둘렀다.
남보다 조금 강한 내공도, 남보다 조금 우세한 몸놀림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단지 약간의 시간만 더 벌어줄 뿐, 죽음에 이른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쓰러진다.
살아 있는 인간으로 방금까지도 생동감 있게 숨을 쉬던 몸뚱이가 차디찬 바닥으로 몸을 누인다.
왜 쓰러져야 하는지, 왜 등에 칼을 맞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함인지 부릅뜬 눈을 감지 못한다.
자신의 눈앞에 흐르고 있는 붉은 물이 곧 자기 피라는 걸 인식하지 못한다.
무너진다.
인간의 존엄성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성이 철저히 무너졌다. 팔이 잘려서 허둥거리는 놈의 목을 치고 검에 찔려서 울부짖는 놈의 허리를 갈라버린다.
내 동료였는지, 아니면 적이었는지 구분할 수도 없고, 또한 구분하고 싶지도 않다.
한순간 멈칫거림, 그것이 곧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라도 움직여야 했다.
사라진다.
죽고 죽이는 환각 속에서 동료가 사라지고, 팔이 사라지고, 목이 사라진다. 인륜이 사라지고, 도덕이 사라지고, 생명이 사라진다.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가운데 살아 있는 유일한 것은 붉은 피였다. 모두가 죽어가는 시체들 속에서, 역동하는 샘처럼 힘차게 솟아오르는 피만이 살아 있었다.
검게 변해가는 시체들의 수효가 점점 늘어갔고 죽은 자를 따라서 같이 쓰러지던 검과 도가 대지 위에 꽂혔다.
서로가 살기 위해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순간에 더 이상의 삶을 포기한 자들이 있었다. 제마각 무사들과 흑기철기병 잔여 인원이었다.
혼전의 와중에서 가장 먼저 목숨을 잃어간 자들이 그들이었다. 거의 십여 일 이상을 그들이 섭취한 것은 물이 전부였고 같은 기간 동안 서로 쫓고 쫓기는 추격전만을 벌였다.
더 이상 쫓을 힘도 도망칠 힘도 없을 때가 되어서야 도착한 초리하였건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이었다. 검을 들어올리지도 못하고 창을 찔러보지도 못한 채 전부 쓰러져갔다.
그들의 시체 속에는 다섯 개 이상의 검이 꽂혀 있는 냉무기의 시체도 포함되어 있었다. 용문산에서 시작된 전투에 참가했던 제마각 인물 중 화인걸을 제외한 마지막 죽음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이 전쟁은 시작일 뿐이었으니…….
초리하 동쪽 끝에 백여 척의 선박들이 정박하면서, 그곳으로부터 쏟아져나온 검은 복장의 무사들이 벌떼처럼 전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들의 전신에 흐르는 기운은 적을 죽이겠다는 살기였다.
"빨리빨리 움직여라! 이미 적들이 도착했다."
철권 고인엽이 부하들을 독려하며 최전방에서 몸을 날렸다. 조급한 심정이 앞섰다. 천마맹 인물들의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수적으로 십천각에 밀리고 있었다. 비마로 보이는 자가 사방을 휩쓸며 분전하고 있지만 저대로 계속 두면 결국 패하게 될 것이다.
천마맹의 혈마궁과 철마궁의 병력들이 전장을 향해 몸을 날리는 그 순간, 초리하 서편 선착장에서도 분하를 타고 내려오는 급한 발걸음이 있었다.
"각주님, 초리하에서 벌써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무슨 소린가. 대기하라고 했는데, 설마……."
제갈장령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분명 맹에서 무천각이 도착할 때까지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했었다.
그럼에도 전투가 벌어졌다 함은 십천각에서 선제공격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미끼로 쓰고 있던 자들이 두 세력을 도발시키기에는 여건이 되지 않는다. 자신들의 숨을 공간이 없는데 두 세력을 상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는 초리하였기에.
"이런 바보 같은 놈! 무작정 달려들면 다 죽는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제갈장령의 얼굴에 분노의 표정이 어렸다. 십천각 수뇌들의 어리석음에 화가 났음이다. 모름지기 많은 수가 참여하는 전쟁을 치를 때는 병법에 따라야 한다.
상대를 읽고 거기에 맞추어 대응해나가야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적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다.
한꺼번에 떼로 덤벼서 혼전을 치르면 이긴다 하더라도 과연 몇이나 살아남겠는가. 그것은 승리가 아니다. 양패구상일 뿐이다.
"각주님, 어떻게 할까요."
"진격은 안 된다. 궁수를 준비시키고 십천각이 있던 곳에 진영을 구축한다."
진격 여부를 묻는 말에 제갈장령은 냉정하게 명령을 내렸다.
같이 휩쓸리다보면 이길 수 있는 전쟁도 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조금 희생이 따르더라도 장기적인 안목으로 일을 풀어야 함이다.
"빨리 움직여라, 조금이라도 서둘러야 승리할 수 있다. 십천각이 승리를 거머쥐게 놔둘 것이냐?"
제갈장령의 한마디에 무천각 인물들의 행동이 기민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 드러나는 감정은 투지였다. 십천각 인물들에게 질 수 없다는 투지.
"이봐, 뭐해? 서두르지 않고. 십천각 놈들이 승리하는 것을 두고 볼 텐가?"
십천각이란 한마디에 무천각 인물들이 투기를 내뿜고 있었다. 제갈장령의 무서움이었다. 이 급한 와중에도 적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오직 무천각 인물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지니고 있는, 십천각에 대한 자격지심을 자극하여 부하들을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응, 저게 뭐지?"
초리하를 바라보던 제갈장령의 눈이 한곳으로 고정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곳은 환상미로진으로 그 실체를 감추고 있는 초리하의 언덕, 백산 일행이 머물고 있는 곳이었다.
"운장주!"
"네, 각주님."
강서 운가장(雲家莊)의 장주인 유운도(流雲刀) 운남천(雲南天)이 머리를 조아리며 제갈장령의 곁으로 다가왔다.
"수하들 중에 최근 이곳을 와본 적이 있는 자를 찾아보게."
"무슨 일로……."
운남천이 의아한 표정으로 제갈장령을 쳐다보았다.
이미 초리하의 지형에 대해서는 전부 숙지가 되어있는데 새삼스럽게 이곳을 알고 있는 자를 찾으라는 지시였기 때문이었다.
"일단 찾아보기나 하게, 이유는 천천히 말해주겠네."
말을 마친 제갈장령이 다시 초리하의 선착장이 있는 언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두고 보면 알겠지…….'
분명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알 수가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제갈장령이 이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부하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문의 진로에 대해서 고민했던 게 언제였냐 싶을 정도로 그의 분위기는 돌변해 있었다.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는지 늙은 노안에 잠깐씩 보이던 망설임의 표정도 사라지고 없었다.
"꿈은 꿈으로 끝내는 거야, 현실을 직시해야겠지……."
바로 이것이었다. 지난 밤 고민하면서 내린 결론, 모든 강호인들이 인정하고 추앙받는 가운데 최고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었다.
일단 최고가 되고 나서 그 다음 일을 걱정하기로 했다. 어차피 역사라는 것은 승자의 편에 서는 것이기에.
"각주님! 모든 진영이 갖추어졌습니다."
"좋다, 십천각에 퇴각신호를 보내라."
오십 년 세월 속에 묻혀 있었던 제갈장령의 목소리가 초리하에 울려 퍼졌다. 천하를 호령했던 그 목소리였다.
붉게 상기된 그의 얼굴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인간의 환희가 가득했다.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생동감이었다.
"천무맹 쪽에 엄청난 인물이 왔구먼?"
죽엽객잔에서 천무맹 진영을 주시하고 있던 서문천의 입으로부터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보통 무인들 같으면 지금처럼 혼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라 했을 때,
자신의 동료를 지원하기 위해서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게 될 텐데 지금 천무맹을 지휘하고 있는 자는 그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궁수를 배치시키면서 퇴각 준비를 시키고 있다.
궁수들의 수도 엄청났다. 백여 장 정도 반원을 그리며 활을 든 인물들이 전체 인원의 절반 정도 되어 보였다.
뿌우! 뿌우! 뿌우!
세 번의 나팔소리가 초리하에 울려 퍼지자, 한창 싸우고 있던 십천각 인물들이 뒤쪽으로 몸을 빼기 시작했다.
달려드는 적을 피해 퇴각하는 것도 쉽지가 않았지만 일단은 살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온 힘을 다해서 물러서고 있었다.
"빌어먹을……. 왔으면 이곳으로 와서 도와줄 일이지, 퇴각나팔이나 불어?"
거친 욕설을 뱉어내며 문상도 뒤쪽으로 몸을 빼냈다. 더 이상 견딜 재간이 없었다.
처음에는 수적인 우세로 인하여 적을 밀어붙일 수 있었으나 천마맹의 수가 늘어나면서 계속 밀리고 있었던 것이다.
"후퇴하라! 전력으로 후퇴하라."
"돌격하라! 마도천하가 눈앞에 있다."
퇴각하는 십천각 무인들을 쳐다보던 고인엽의 입에서 승리의 포효소리가 터져나왔다.
이대로 계속 밀어붙이면 승리를 거머쥘 수 있을 것 같았다. 견디다 못해 적이 후퇴하는 것이 아닌가.
퇴각하는 천무맹 인물들을 보며 사기충천한 천마맹 인물들이 무섭게 뒤쫓았다.
"아-아악! 으-악!"
도망치는 적은 더욱 사냥하기가 편했다. 뒤따르며 검만 휘두르면 끝난다. 십천각 인물들의 시체가 점점 늘어나며 그들의 피가 사방으로 뿌려졌다.
"고 궁주! 너무 추격하는 것 아닙니까?"
혈마궁주인 귀궁 척단세가 우려 섞인 표정을 지으며 고인엽 쪽으로 다가왔다.
그도 적의 퇴각 나팔소리를 들었다. 피해가 너무 커서 퇴각하는 것이면 모르되, 어떤 함정이라도 준비되어 있다면 큰 낭패를 당할 수 있기에 하는 말이었다.
"천무맹의 무천각도 이제 막 도착했습니다. 특별히 준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부하들입니다."
고인엽이 적을 쓰러뜨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부하들을 가리켰다. 최고의 사기라는 말이다.
개개인의 비무가 아니고 지금과 같은 집단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공의 고하보다는 집단 전체의 사기다.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만 있으면 자신보다 강한 상대라 할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희생이 좀 나더라도 한 번에 휘저어야 합니다."
"고 궁주 말이 맞네, 폭풍처럼 몰아치고 빠지면 될 거네."
어느새 비마 상남이 두 사람 뒤쪽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고인엽과 척단세의 표정이 흠칫 굳어졌다.
비마가 다가오는 것을 거의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가 구마 중 일인이라 하지만 자신들도 한 문파를 이끌고 있는 궁주들이다.
'역시 경공 하나는 엄청나군…….'
"경황 중이라 인사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상 선배."
"아닐세, 이 바쁜 와중에 인사는……. 서두르세, 부하들에게 공을 빼앗기면 되겠나."
두 사람을 쳐다보던 비마가 전방을 날려 몸을 날렸다. 정녕 가공할 경공이 아닐 수 없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이었다.
'따라와 봐라, 이건가. 늙은이?'
"갑시다, 척 궁주."
비마의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고인엽이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날렸다. 비마의 도발에 기분이 상했음이다.
너희들이 아무리 용을 써도 구마의 수준에 도달하려면 멀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고인엽의 불편한 심기를 대변해주듯 그의 몸이 지나는 곳마다 조각난 갈대들이 떨어져 내렸다.
"전원 준비하라!"
뒤쪽을 돌아볼 틈도 없이 쫓기고 있는 십천각 인물들과
무서운 속도로 그들의 뒤를 쫓는 천마맹 인물들의 쫓고 쫓기는 광경을 무심한 눈빛으로 지켜보던 제갈장령의 입에서 나지막한 일성이 흘렀다.
그런데 무심한 얼굴 표정과는 달리,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것 같은 느낌은 듣는 이의 착각이었는지.
"이래서 모두들 야망을 꿈꾸는 것인가……."
붉게 상기된 얼굴을 한 제갈장령이 혼자만의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던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흥분하고 있는 그의 심정을 대변한 울림이었다.
심장 뛰는 속도가 무섭게 빨라지며 그곳으로부터 흘러나온 뜨거운 피가 온몸으로 급속하게 퍼져나간다.
이미 늙어버려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 같았던 근육들이 아우성치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지금 자신의 몸으로 느끼는 이 현상은 무엇인가.
오십 년 동안 잠들었던 투지였다. 살아 있다는 외침이었다. 죽어버린 몸이 다시 살아나면서 외쳐대는 생명의 소리였다.
자신을 고뇌하게 했던 손녀딸도, 언제나 미안해했던 큰아들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벌이고 있는 전쟁의 의미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잘려진 십천각 무인의 목에서 솟구쳐 오르는 피가, 고통스러워 내지르는 처절한 비명소리가 몸을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였다.
"쳐라!"
"와-아-아!"
붉게 상기된 제갈장령의 입에서 새롭게 태어난 자가 발하는 환희의 외침 같은 일성이 터져나왔다.
순간, 갈대밭에 은신하고 있던 이백여 명의 궁수대가 고함을 지르며 벌떡 일어섰고, 동시에 당기고 있던 시위를 놓았다.
"장창대 전진!"
"무천찰!"
"검수대 전진!"
"무천격!"
"으아악! 아악!"
무수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단 세 수 만에 수백의 천마맹 인물들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럴 수가……."
천마맹 수뇌 삼 명이 경악스런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시체, 시체들. 순식간에 천마맹 인물 삼백여 명이 목숨을 잃어버렸다. 단순한 화살공격에 의해서…….
"어떻게 화살로……."
자신들은 일반 병사가 아니다. 적어도 날아오는 화살을 쳐낼 수 있는 무인들이 아닌가. 그런 무인들이 그까짓 화살공격에 의해서 무더기로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창에 의한 찌르기, 화살공격에 의해서 당황한 부하들이 움찔한 틈을 타서 무자비하게 찔러 들어왔다.
더욱 경악할 사실은 그 다음이었다. 창기병의 머리를 타 넘은 검수들이 천마맹 인물들을 향해 일검을 휘두르고 물러나 버린 것이다.
제갈장령의 무서움이었다.
무인들에게 화살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화살이 통하게 만들었다.
그의 작전의 시작은 십천각 무인들의 퇴각에서부터였다. 십천각 무인들을 쫓는 자들도 매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작전을 수행했다.
도망치는 적을 치면서 쫓는다는 것은 일반적인 경공보다 배나 많은 힘이 들어가게 된다.
그런 상태로 전력을 다해 달려온 적을 향해 매복하고 있던 궁수들이 일어서면서 지른 고함소리는 순간적으로 그들을 멈칫하게 만들었고 그 틈을 화살이 파고 든 것이었다.
검이나 도를 이용해서는 그 미세한 순간을 공략하는 것에 무리가 있지만 화살만큼은 가능한 방법이었다. 아주 고수가 아니라면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창과 검의 공격, 진식을 이용하는 것도 아니었다. 단순한 용병술로 전세를 역전시켜버렸다.
"쳐라!"
이번에는 제갈장령의 입에서 공격을 알리는 명령이 터져나왔다.
"물러서지 마라, 우린 천마맹이다."
"이런!"
제갈장령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천마맹도들이 물러나야 이번 작전이 마무리가 되는데 오히려 더욱더 달려들고 있었다.
이번에는 천무맹 진영에서 혼전이 벌어졌다.
귀궁 척단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두세 명의 천무맹 인물들이 쓰러졌고 비마의 신형이 떠도는 곳에는 어김없이 시체가 쌓였다.
그러나 수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미 사기가 꺾인 천마맹은 승기를 회복하지 못했다. 천무맹 인물들이 쓰러지는 것에 비해 더 많은 수의 천마맹 무인들이 죽어나갔다.
"후퇴하라!"
결국 견디다 못한 비마의 입에서 퇴각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그들의 퇴각은 십천각 인물들처럼 일방적인 도주가 아니었다. 방어를 하면서 자신들의 진지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었다.
두 맹의 무사들이 처음 혈전을 벌였던 곳으로 움직이며 치열한 접전을 하고 있는 그 시간, 분주객잔에서는 새로운 작전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자네의 말은 천무맹의 수뇌로 제갈세가의 사람이 왔을 거라, 이 말인가?"
천무맹이 방어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서문천이 내린 결론이었다. 누가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정도의 용병술은 아무나 보여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강호 경험이 많은 노련한 사람임은 물론이고, 진에도 뛰어난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대응인 것이다.
"엄청난 사람이 왔습니다."
서문천이 굳어진 표정으로 일행을 쳐다보았다. 우려하던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제갈세가의 인물이 온 게다.
이곳에 진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볼 것이고, 그렇게 되면 광풍대원들의 활동에 제약이 생기게 되었다.
"설마 그 양반이 왔단 말인가?"
남궁세우와 팽무도의 입에서 경악스런 외침이 터져나왔다. 과거 자신들이 숙부라 불렀던 인물, 제갈장령이 이곳에 왔다는 말이 아닌가.
"그 양반이 무천각주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산서성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럼 그자 때문에 우리가 힘들어진단 말이오?"
제갈장령은 백산도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던 자였다.
독령곡에서 만났던 사람. 무인들의 주머니를 뒤지고 있을 때 자신을 꾸짖던 신선 같은 풍채의 노인장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얼굴만 보았을 때는 사부보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던데?"
분명 그때의 느낌으로는 결코 야망이나 명예를 탐하는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었다. 자신의 헛소리 한마디에 천선비도를 포기하고 갔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본 적이 있는가?"
"독령곡에서 만난 적이 있었소."
"지금은 상황이 그때와 달라졌네,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만 하면 제갈세가는 천하제일가가 되는 걸세. 남궁세가와 팽가를 뒤로하고……."
"그까짓 천하제일가라는 간판 때문에 백 살이나 처먹은 노인네가 전쟁터에 나와? 아예 관을 짜 가지고 다니지."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앞으로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저리 발버둥을 치는지 알 수가 없다.
도대체 천하제일이면 뭘 어쩐단 말인가.
기껏 해봐야 자신에게 굽실거리는 놈들이 한두 놈 더 늘어나는 것밖에 없는데, 그깟 목에다 힘 좀 더 주고 다니기 위해서 최고가 되고자 하는 자들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그 사람들에게 천하제일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나?
자네가 조 소저나 구 소저, 그리고 추렴이를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네. 그들의 모든 것이고 수백 년을 내려온 꿈."
"그들의 꿈을 위해서 죽어가는 저들은 뭐요. 저 들판에 죽어 있는 놈들은 꿈이 없는 놈들이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꿈이 있겠지. 높은 자리라든가, 아니면 강한 무공이라든가. 그 꿈에 대해서는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네. 그들에게는 그것이 최고의 선(善)이니까……."
단순한 사람이 단순한 머리로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말이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만 생각하고 있는 백산이나 광풍대원들에게는 머리 좋고 뛰어난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이니 꿈이니 하는 것에 대해서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인 것이다.
세 끼 밥 먹는 것은 짐승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사고를 무슨 수로 이해하겠는가.
"좋다고……. 지들은 지들 꿈을 꾸는 것이고 우리는 우리 꿈을 꾸면 되는 것이지, 뭐. 그러니까 그 늙은이가 문제가 된다, 이거 아뇨."
"산아……."
백산의 몸에서 풍겨나는 살기를 읽었는지 팽무도가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자신에게 숙부 되는 사람을 백산이 죽이려 하고 있다. 만나봐야 아무런 해결책이 없다는 현실이 더 안타까웠다.
제갈장령의 신분 때문이었다. 제갈세가의 가주 신분이 아닌 무천각주로 와 있으니 그에게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을 터이다.
제갈세가는 이미 생사의 도박을 시작해버렸다. 전쟁에 이기면 천하제일가요, 지면 멸문이라는 도박을……. 자신이 나서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사부! 그자의 가문 때문에 살우의 팔이 없어졌소.
그자들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전부 죽었소. 그자들 때문에 애들이 죽었던 말이오. 자신들의 욕심밖에 모르는 무림인들 때문에……."
백산의 몸에서 무섭도록 차가운 살기가 흘러나왔다. 고향인 칠성리와 똑같은 화전마을이었다. 마냥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죽게 만든 자들이 제갈세가다.
마을 사람들을 인질로 하라 부추긴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남의 인생을 마음대로 짓밟고 그 위에 자신들의 꿈을 세우려는 자들이다.
분노가 서린 백산의 말에 팽무도가 입을 다물었다. 그도 백산의 한을 알고 있기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진정하세요, 백랑.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면 되는 거예요."
백산이 외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뛰어온 조천영이 재빨리 그를 진정시키며 나섰다. 이제는 조그마한 변화에도 백산의 상태가 걱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너의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다, 다만……."
팽무도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라더니 그 말이 너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형님! 우리 가문은 여기 있는 이 애들입니다. 천하제일도와 신수신룡은 오십 년 전에 죽었습니다."
남궁세우의 입장도 팽무도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과거의 인연일 뿐이다. 과거에 형제였던 자들이 자신들을 치려 했었고, 지금도 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막아야 할 것이다.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이번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할 가문인 것이다. 과거보다 미래의 삶이 더 중요한 일이기에 해야만 하는 일이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남궁세우가 서문천에게 앞으로의 일을 물었다. 아직 적들이 다 도착한 것도 아니고 전쟁의 양상이 장기전으로 돌입할 것 같아서 더욱 걱정이 되었다.
"글쎄요, 천무맹에 그 양반이 있으면 쉽지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서문천으로서도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계속해서 양편을 혼전으로 몰고 가려 했는데, 제갈장령이라는 거물 때문에 차질이 생겨버렸다.
병법을 알고, 진을 알고 있는 자가 아니던가. 자신들의 의도가 먹히지 않을 것임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참, 그 양반 답답하네. 굶기면 되지, 뭘 걱정하오."
"무슨 소린가?"
"이 세상에 굶고 싸우는 놈 있으면 나와보라 하쇼. 내가 굶어라 했는데도 저 자식들은 날고기를 먹고 옵디다."
백산의 말에 소살우와 광견조원들이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모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전부 알고 있었던 거였다.
사실 사냥꾼이었던 백산이 날고기를 먹었다 해서 모를 리가 없었다. 다만 스스로 깨닫도록 두었을 뿐이었다.
"알고 있었소? 개코네."
소살우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어기적거리는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그래, 임마. 내 직업이 사냥꾼이란 걸 몰랐냐?"
"이보게……."
서문천이 황당한 표정으로 백산을 불렀다. 적들을 굶긴다 해놓고 소살우와 딴소리만 하고 있는 백산의 태도가 내심 답답했다.
"참, 그 양반도. 그 정도 이야기했으면 됐지……. 저기 양쪽에 있는 게 뭐요?"
"그야 배 아닌가."
"그럼 왜 지금까지 안 떠나고 있겠소."
"그래!"
백산을 쳐다보던 서문천이 환한 표정을 지으며 무릎을 쳤다. 군량이었다. 양편이 전부 급하게 전장에 뛰어드느라 보급품을 아직 내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먹을 게 없다고 저놈들이 서로에게 잘 가라 하며 떠날 수 있소?"
"없지!"
서문천이 흥이 나는지 백산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천무맹이나 천마맹이나 이곳 산서성은 가장 중요한 거점이다. 먹을 양식이 없다 해서 퇴각할 수 있는 그런 입장이 아니다.
어느 편이든 하나만 남아야 하는 곳이 이곳 산서성이다. 당연히 바빠질 수밖에 없다.
"자네 머리는 보면 볼수록 신기해."
서문천이 감탄해하는 바였다. 보통 때는 별생각 없이 사는 것 같아도 자신의 생존 문제에 접하면 무섭도록 치밀해진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자신과 석두는 제갈장령에 대응할 방법만 생각하고 있었지, 군량은 염두에 두질 않았다. 그런데 백산은 그것을 집어낸 것이다.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고 먹는 걸 중요하게 생각해서요. 가자, 불꽃 놀이하러."
광풍대원들이 두 패로 나뉘어 객잔을 나섰다
첫댓글 잘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하였습니다
즐독 ㄳ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