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자매님이 제법 큰 집을 장만하여 이사 오신 후에, 교회 성도님들을 집들이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맛있는 메뉴들이 많은데 그중에 제 눈길을 끈 것은 고추절임이었습니다. 요즘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그런 것 말고 제가 어릴 적에 시골에서 먹었던 바로 그 고추절임입니다. 고추가 납작하게 되도록 삭혀서 입에 넣으면 아삭아삭하게 씹히는, 전혀 맵지 않으면서도 뒷맛은 개운한 그런 고추절임! 한 연세 드신 자매님이 가져오셨다는데, 담근 후에 시간이 많이 지나야 이런 상태가 된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 메뉴로 인해 어릴 적에 저도 모르게 조성된 저의 내면의 어떤 것이 재소환인 셈입니다. 아침에 아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신앙생활과 관련해서 이 조성의 문제가 새롭게 제게 다가왔습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여러분을 사로잡아 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런 것들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보적인 교훈을 따른 것이지,
그리스도를 따른 것이 아닙니다(골 2:8).
적지 않은 분들의 신앙의 틀은 구속을 믿어 죄인이 의인이 되고, 믿음 생활하다가 죽으면 저 하늘 어디엔가 있을 천국에 가는 범주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위 본문을 포함한 신약의 서신서들은 거듭난 후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우리가 어떤 생활을 하고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다룹니다. 즉 훗날의 거기는 지금의 여기의 삶에 크게 의존될 것을 말씀합니다(고후 5:10, 롬 14:10-12, 딤후 4:7-8). 그리고 그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집중해야 할 한 가지 일은 타고난 타락한 본성을 씻어내고 우리의 존재가 새로운 본성으로 재조성되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엡 5:26, 4:22-24, 고후 4:16).
부끄러운 죄들이 많았던 고린도 교회와 달리, 골로새 교회는 철학과 문화와 종교와 같은 제법 고상해 보이는 것들이 그리스도 자신을 대체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골로새서의 초점은 그리스도만 주목하고 그리스도 외의 것들은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위 말씀을 묵상할 때, 언젠가는 버려야 할 것과 영원히 간직해야 할 것을 잘 구분하는 것과 그 판단은 우리가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시도록 소위 시각 조정의 과정이 우리에게 필요함을 보았습니다.
시각 조정의 필요성 : 사도 바울은 위 본문에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는 아닌 것(좋은 것 포함)을 대비시키고, “그리스도 자신에 따른 것”이 아니라면 조심하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관점으로는 ‘헛된 속임수’야 그렇다고 해도 철학과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교훈이 왜 나쁘냐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 되신 한 새사람(골 3:10-11)을 얻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심지어 좋은 문화와 전통도 그 목적 달성에는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처럼 보는 눈이 바뀔 필요가 있습니다.
철학, 헛된 속임수, 사람의 전통, 세상의 초보적인 교훈 : 문맥상 여기서의 ‘철학과 헛된 속임수’는 영지주의 가르침을, ‘사람의 전통’은 문화적인 어떤 것을, ‘세상의 초보적인 교훈’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초보적인 가르침들을 가리킵니다(갈 4:3, 9 참조). 이 모든 것이 다 나쁘거나, 우리 삶에 필요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공통적인 문제는 그 안에 그리스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진단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 것 : 사도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말은 그의 가치관, 그의 생각, 그의 선호, 그의 감정, 그의 사는 목적이 다 그리스도가 기준이고 또 내용이셨음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그 그리스도는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아버지의 인격을 따라 사셨고(요 6:57), 그분의 제자들과 가족을 포함해서 어떤 사람을 의지하거나 사람의 문화를 추종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분은 인륜을 저버리거나 불필요하게 민폐를 끼친 적이 없으십니다. 이것이 사람들 눈에 기이하게 보였지만 그분의 삶은 ‘하나님 사람’으로서의 품격과 향기를 풍겼습니다. 이것은 “신격의 모든 충만이 몸을 지니신 그분 안에 거하고”(9절), 그분이 겸손하고 온유한 영으로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는 삶을 사셨기에 가능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도 이처럼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는 삶(요 17:14)을 살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묵상을 통해 제게 다음 두 가지가 정리되었습니다.
첫째, 버릴 것과 간직해야 할 것을 분명히 봄 : ‘새 예루살렘’(계 21:2) 즉 그분의 충만인 몸인 교회의 최종 모습이 완성되면 없어질 것들은 지금부터 하나씩 버려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본 정도에 달려 있습니다.
둘째, 그리스도 아닌 이물질의 처리에 시간이 걸림 : 애굽을 떠난 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는 애굽에서 자주 먹었던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이 조성되어 있었습니다(민 11:5). 마치 제 안에 고추절임에 대한 그 맛이 조성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정죄하시지 않으시고 만나라는 하늘의 양식을 먹여 그들의 조성을 점차적으로 바꾸셨습니다. 이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문득 한 신실한 형제님과 대화 중에 들은 말이 생각납니다. 하루는 오랜만에 자매님과 바람 쐬러 라구나 비치 쪽으로 드라이브를 가면서 라디오 한인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소위 “7080 노래”를 듣게 되었답니다.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 두 분이 크게 따라 불렀더니 기분전환이 되었다고 크게 웃으셨습니다. 예전 같으면 무슨 유행가를 따라 부르냐고 속으로 정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지난날에 살아온 과정이고 제 안에도 여전히 그런 것이 남아 있기에, 지금은 형제님이 공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도 그분의 선민을 가나안 땅에 인도하신 후에 그 이방 거주민들을 속히 쫓아내지는 않으셨습니다(삿 2:23).
오 주님, 당신의 기준을 따라 당신의 때에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를 당신 자신으로 충만케 하실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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