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개의 10경
10리벚꽃 길
김동리의 《역마》와 박경리의 《토지》가 꽃길 언저리에 무대를 두었고 지리산 남록의 종가(宗家) 쌍계사가 있어 화개 벚꽃은 더욱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화려한 춘색이 밀어 닥친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 벚꽃 10리 길》! 땅위에 흩날리는 꽃보리와 화심(花心)에서 꿀을 핥아내는 벌들의 분주함, 꽃 길 옆 개천에서 노니는 은어떼의 한가함이 어우러져 춘색을 다툰다. 지금도 마을 주민들은 화개장에서 쌍계사까지 5㎞ 벚꽃길을 가리켜 그 밑에서 혼담을 나누면 백년 해로를 기약한다해서 《혼례길목》이라 부르기를 좋아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부산(富山)》이라 지적한 화개의 지리산 기슭은 대이슬 먹고 자라 생노병사를 초월한 신선들이 즐겼다는 죽로작설차의 원산지. 해동의 문장 고운 최치원선생도 말년에 이곳에서 신선으로 돌아갔고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일곱왕자가 성불했다는 전설도 이 고장의 산과 물에 연유한 것 같다. 벚꽃의 꽃말은 《뛰어난 미인》 화개 벚꽃은 원산지가 제주 한라산으로 밝혀진 왕벌꽃 나무의 잡종 4월 10일에 만개해 1주일간 활짝 되었다가 꽃말을 증명하듯 한꺼번에 져버리는 미인박명형이다…
《악양정지》P175~176. 1981년 4월 15일 중앙일보
화개, 특히 화개의 봄하면 벚꽃을 연상하게 되었다. 그동안 일제의 꽃. 일제시대에 심은 사꾸라를 베어야 한다는 주장들도 많았다. 벚꽃은 한꺼번에 피니까 만개니 만발이라 하고 낙화도 한꺼번에 무너지듯. 함박눈이 내리듯 한다. 모양이 마치 일본의 무사정신이나 국민성을 상징하고 그들의 기절에 맞는 일본인들이 열광하는 일본의 꽃이라는 것이다. 일본 황실의 국화(菊花)와 백성들의 사꾸라는 일본의 국화이고 학명도 《푸르누스 에도엔시스 마쓰무라》로 일본 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에도는 동경의 옛 이름이고 마쓰무라는 일본의 식물학자이다.
그러나 벚꽃(왕벚꽃)은 원산지가 제주도이고, 일본에서는 자생하는 군락을 한 군데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더욱이 효종(1619~1659년)이 궁재(弓材)로 쓰기 위해 왕벚꽃나무를 서울 우이동과 장충동에 대량으로 심었다는 기록이 나타남으로써 일본 원산을 주장하는 일본학자의 입을 궁색케 했다. 화개의 벚꽃은 1931년 3월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의 신작로가 주민들의 부역으로 개설되고 함께 화개교도 개통되었다.
이를 기념하여 군내 유지들의 성금으로 홍도화(복숭아)200그루와 벚꽃나무 1,200그루를 가로수로 심은 것이다. 이때 묘목 1그루의 가격이 한정식 1일분(1상)과 같았다 한다.당시 하동군수 이소영(李韶榮)은 1931년 《화개동천회고문》에서 《복숭아 벚꽃나무를 함께 심으니 세상에서 명물이라 하리라》하였고 그의 예언대로 화개 십리벚꽃은 전국의 명물이 되었다.
의신계곡 단풍
500여년전. 의신은 사찰이었다. 남효온선생(1487년)과 김일손선생(1489년)이 이곳에 왔을 때에는 마을은 없고 큰사찰 의신사가 있었다. 남효은 선생은,《(의신암) 서쪽은 온통대나무숲이었다. 감나무가 대나무 숲 중간 중간에 섞여 있었는데, 햇빛이 홍시에 부서지고 있었다. 방앗간과 뒷간도 대숲사이에 있었는데, 근래에 본 그 어떤 아름다운 풍경도 이에 비할 것이 없었다.》고 의신암 주변의 경치를 칭찬하였다.
김일순 선생은 의신사 부근이. 《의신사는 평지에 있었다.… 대나무 숲과 감나무 밭 사이사이에 채소밭이 있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인간세상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머리를 돌려 청산을 바라보니, 안개와 노을이 드리우고 원숭이와 학이 노니는 선경을 떠나온 회문가 벌써 가슴 속에 밀려 들었다.》고 하였다.
화개동천의 계곡중 아름답지 않은 곳이 있는가? 화개동천 전체가 호중별유천(壺中別諭天)인데, 부춘골, 도식과 중천골, 쌍계내월골과 불일푹포, 목통골과 범왕골, 단천골과 의신골… 모두가 선경이고 무릉도원이다.
면단위의 10경중 화개의 별칭으로도 사용하였고 신흥, 단천, 의신, 대성골과 어울러지는 삼신동 계곡보다는 더욱 구체적이고도 좁은 지역의 아름다운 계곡을 주민들이 설정하는 합리함을 보인 것 같다. 의신계곡은 의신마을부터 위쪽 인 삼정, 빗점골짜기를 이른다. 의신의 계곡복판에 있는 바위 끝이 외로운 소나무 - 고송암(孤松巖), 봄의 철쭉, 여름의 시원한 계류, 빗적골의 단풍과 겨울의 설화… 등은 가히 화개 제일의 계곡이라 할 만하다.
단천계곡 단풍
흰 구름과 푸른 시내 골골이 잠겼는데
가을바람에 물든 단풍 불꽃보다 고와라.
천공이 나를 위해 산 빛을 꾸몄으니
산도 불고 물도 불고 사람까지 붉더라.
조식선생이 지리산 단풍을 읊은 시이다. 늦가을 경치를 빛나게 하는 것은 온산과 시내는 물론이고 그 품에 안기는 경봉선사도 “온 산의 단풍 경치는 2월(음력)의 꽃보다 곱구나.
화개의 단풍은 다른 명승에 비해 덜 알려져 있다. 인근의 피아골 단풍을 지리산 10경으로 선정하면서 더욱 그런 것 같다. 그러나 부춘골의 형제봉과 신선대의 단풍이나 중춘골ㆍ내원골의 단풍, 황장산 단풍, 목통골 단풍, 의신골의 빗점단풍, 단천골의 단풍 등은 험하지도 않아 가족끼리 하루 등산나들이 코스로 더없이 아름답고 즐거운 곳들이다. 화개사람들은 이들중에서 단천골 단풍을 10경으로 선정하였다.
단천은 삼신동에 있으면서도 입구를 숨기고 돌아 앉은 별구(別區)이다. 도로가 개설되기전에는 시내를 건너 의신ㆍ영신으로 가는 길에 잘 살피지 않으면 입구를 놓치기 쉬워, 마을 입구 시내 단천골의 계곡은 옥류가 흐르며 만든 작은 폭포들과 소와 담이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이 있고, 산신봉가는 곳에는 거대한 바위를 타고 쏟아지는 거폭 용추폭포가 있어 더욱 경외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여름에도 냉기를 느끼게 하는 비밀과. 가을이 단풍 겨울이 빙벽이 있어 계절마다 색 다름을 연출하고 있다.
곡우절 차따기
안개자국 신흥골에 봉창문이 밝아 온다
아낙네들 잠을 깨라 작설작설 새작설은
곡우절을 앞세우고 안개먹고 꿈을깬다.
화개장터 구경가세
(진주산업대 김기원 교수가 채록한 차따기 민요)
따라서 화개에서 차 따던 일 논하네
관(官)에서 감독하여 노약자까지도 징발하였네
험준한 산중에서 간신히 따 모아
머나먼 서울까지 등짐으로 져 날랐네.
(고려. 이규보 선생의 차시 중에서 - 《화개동을 노래함》 참조)
화개동의 곡우 차따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 차의 시배지이자 고향으로 차의 색향미가 뛰어나 예부터 화개 사람들은 차따기에 내몰려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야생차의 명성이 높고 어려운 농가 소득에서 최고의 수입원이 되고 있다. 그 해 첫차를 곡우(4월 20일경)전에 따기 시작한다. 참새의 혀같은 어린 차싹을 따는 여인들이 산야를 덮어 장관을 이루게 된다.
산비탈을 메운 울긋불긋한 차따는 아낙들과 집집마다에는 차 덖는 연기와 향기가 피어오르는 곡우절 풍경은 화개동의 신 풍속도가 되었다. 1980년대에 화개 녹산다인회에서 화개 10경을 선정한 적이 있었으나, 대표성 등의 문제 때문에 발표를 유보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초겨울을 화개 주민들은《곡우절에 차따기》를 선정하였다.
불일폭포
불일암에서 바라본 전경.
쌍계사 뒤쪽(동쪽) 3㎞에 있다. 폭포의 높이는 60m에 달하는 2단 폭포로 남한에서 두 번째라 한다. 폭포아래에서 하늘을 보면 둥글게 보이고 사방이 막혀 항아리 속 같고, 이 때문에 떨어지는 물소리가 더욱 우렁차고 항아리 속을 진동케하여 후련함과 함께 공포를 느끼게 한다.
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청학동이라 하였고, 폭포의 이름도 청학폭포라고 하였으나 불일암에 불일 보조국사가 수도하면서 암자의 이름과 함께 폭포까지도 불일폭포라 하게 되었다. 너무나 유명하여 많은 시와 문장이 남아있고 지리산 10경중 하나이다. 폭포는 향로봉과 비로봉사이에 흐르고 있는데, 근세에 와서는 이를 청학봉ㆍ백학봉이라 부르고 있다.
폭포 아래에는 학연(鶴淵)과 용추(龍湫)라는 두 못이 있고, 또 그 아래에는 고운 최치원 선생이 공부했고, 지금도 여기를 통하여 해인사 흥류동을 왕래한다는 천연암굴 고운굴(孤雲 窟-일명 王窟)이 있다. 폭포 건너 절벽에는 고운선생이 폭포를 보고 즐겼다는 완폭대(玩瀑臺)가 있었다한다. 폭포의 절벽위에는 불일암터가 있고 이 곳을 불일애(佛日厓)라 부르기도 하는데, 지리산 최고의 수련터 8곳 중의 하나라고 하는 이도 있다.
가을 불일폭포
쌍계사
쌍계사는 화개를 대표하는 고적이자, 제일의 명승지이다.
화개 10경의 쌍계사는 산문 밖의 장승부터 쌍계 석문과 사찰의 모든 구로물에 이를 감싸고 있는 산수 모두를 이야기한다. 석문을 지나면 쌍계사에 드는 길은 세 갈래가 있다.
연대순으로 살피면, 처음은 석문 뒤에서 바로 시내를 건너 학교담을 따라서 쌍계 별장으로 통하는 소로길이다. 두 번째는 석문교를 지나, 지금은 철조망을 친 룸비니 동산을 통하는 길이고, 세 번째는 지금의 대로이다. 시대에 따라 걸어 다니고, 우마차가 다니고, 차가 다녀야 하는 필요에 의해 길도 바뀌었지만 세길 모두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1970년대 까지만해도 전국 두 번째 규모였다는 일주문과 금강ㆍ사천문, 팔영루와 진감선사 탑비와 대웅전 옛 쌍계사 구역인 팔상전과 6조 정상탑이 있는 금당…
대웅전 뒤편의 불일계곡이 깊고도 은은함과 어울려진 소나무 숲 금당에서 바라보는 화개장터와 섬진강과 백운산! 화개동을 왜 병속의 별천지라 했는지, 선경, 도화동, 청학동 신선이 숨겨둔곳… 그 이상의 찬사는 없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문화와 역사 고적과 예술, 명승과 관광등을 고루 갖춘 우리 고장 최고의 경승지이다.
쌍계사 대 가람 가릉풍경
화개장터
영신철쭉하면 생소하겠지만 세석철쭉과 같은 곳을 말한다. 잔돌평전이라 하는 세석(細石)은 화개 땅의 영신봉과 산청땅의 촛대봉사이의 1,600m 고지대에 있는 평야이다. 이 곳에 있는 수만그루의 철쭉이 되는 5월하순은 요염한 철쭉의 붉은 색과 등산객들의 오색 물결이 장관을 이루고 지리산은 온통 신열을 앓는다고 한다. 이곳 철쭉은 지리산 10경중 하나이기도 하다.
첫째, 영신봉 철쭉의 아름다움과 함께 영신봉은 화개에서 제일 높은 산(1652m)이다.
둘째, 화개동천의 선경을 연출하며 주민의 젖줄이 되는 화개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이미 이륙선생은 1463년(세조9년)에 《지리산기》에서, 《시내는 영신사의 작은 샘으로부터 근원이 되어 신흥사 앞에 이르러는 이미 큰 시내가 되어 섬진강으로 흘러들어 간다.》고 밝혔다.
셋째, 영신봉은 낙남정맥(落南正脈)의 시작점이다. 벽소령이 시발점이라 알려졌으나 산이 수계를 가른다는 《산자분수령(山者分水嶺)》의 이론에 의하면 그렇다. 천방봉에서 흐르는 물은 어떤 경우라도 낙동강 수계로 흐르고, 벽소령에 서 흐르는 물도 언제나 섬진강수계로만 흐르게 된다. 그러나 영신봉에서 흐르는 물은 방향에 따라 섬진강으로도, 낙동강으로도 흘러간다. 그러하니 경상도 서남부 일대의 산지를 포함하는 낙남정맥의 시발점은 영신봉이 되는 것이다.
(《화개의 지명》-영신봉 참조)
넷째, 영신봉은 지리산 불교문화의 중요한 요람이자 삼신동의 제일 끝자리에 내려다 보는 맏형같은 산이다. 영신봉은 화개 제1봉으로 성산(聖山)이자 주산(主山)이라 할 수 있다.
칠불사 단풍
칠불사의 역사와 유적은 《화개의 유적》에 대강은 기록하였다. 칠불사는 쌍계사 북쪽 20리에 있다. 반야봉의 남쪽 800m 고지에 있는 절로 우리나라 최고 오래된 사찰, 운상원이라는 전설이 전하는 곳이다. 이 곳의 오랜 역사와 전설, 남겨진 문화유산, 유적들과 영지등을 두루 살펴보았으며 이제 아름다운 경관과 주위를 살 필 차례이다. 1655년 화개동을 찾은 김지백 선생은 지리산 370여 사찰 중에서 칠불암이 제일 아름답다고 하였다.
칠불사에서 보면 남쪽만이 툭 터져 있다. 화개장터와 그 건너의 백운산을 굽어 보는 것은 그야말로 선경이 아닐 수 없다. 서산대사의 제자인 정관일선(靜觀一禪, 1533-1608년)선사의 시가 있다. (백운산은 해발 1.218m의 높이다. 백운산 전남 광양시의 옥류면ㆍ진상면ㆍ다압면의 경계에 있고, 남지리의 종주능선 상에서 보면 정남향에 위치하고 있는 산이다. 예부터 남지리에서 남쪽에 백운산 정상이 보이지 않으면 명지ㆍ명당ㆍ좋은 절터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다.)
두류산 반야봉 동쪽에 절이 있는데
달빛이 금당을 밝혀 그림자 영롱해라
향불 꺼지자 아지랑이가 탑 끝에 날고
종소리가 꿈 깨며 늦바람에 들려오네.
청학은 청학동에 오지 않는데
백운(白雲)은 항상 백운산을 감싸고 있네,
쌍계사 멀리 보이는 석문(石門)사이로
희미한 가을빛이 한 눈에 보이네
이 곳 사람들은 지리산에서 백운산이 보이지 않는 곳은 명당이 아니고, 안대의 정면에 백운산 정상이 보여야만이 진정 좋은터이자 아름다운 곳이라고 한다. 쌍계 벚꽃 10리길, 중간지점인 침적부락 입구의 《망운대(望雲臺)》, 잠시 쉬어가는 곳이지만 백운산이 바로 보이는 곳으로 풍광도 좋지만 풍류를 즐기기 좋다고 한다.
칠불사 영지
국사암 탑봉 (진감선사부도)
1879년 송병선생은 국사암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국사암에 닿았다. 비고도 밝게 빛나고 깊고도 먼 아취가 사뭇 인간세상이 아닌 것 같다.”
1714년(숙종40년), 송암산인(松巖山人)의 《지리산 국사암기》에 “주위의 승경을 보니 세상밖이 선계이다. 멀리는 백운산과 접하였고, 기이한 산봉우리가 하늘에 꽃혀 백옥같은 신선이 경계이다. 가까이 살펴보니 화개라 뭇나무 병풍처럼 둘어있고 황금같은 부처님과보에 의지했네. 봄이면 시내에 꽃이 만발하고 겨울 산길에 눈그치면 바람은 대를 좋아하고 달은 물을 통하네…”
살펴보지 않으면 지나치는 국사암. 다소곳이 들어 앉아 별천지라고 하였다. 화개 10경 중 10경인 《국사암에서 탑봉까지》는 탑봉에서 국사암을 찾아가는 것이 더 좋다. 불일폭포를 다녀 오면서 탑봉에서 진감국사의 부도와 위대한 정신을 보호하려는 듯 노송들이 부도탑을 감싸고 있는 것을 살 필 일이다. 그리고 남쪽 장터와 섬진강ㆍ백운산을 조망하는 즐거움을 챙겨야 한다. 이제 쌍계사 반대 길로 가면 서낭당. 돌 하나 얹고 노송과 대나무가 우거진 호젓한 오솔길이다. 노송들이 보이지 않을 때 쯤이면 사천장수가 보이고 국사암의 조그마한 산문(山門)이 있다.
이 길은 여럿이 가는 것보다는 다정한 사람과 단 둘이가 좋으나, 그것 보다는 혼자 걷는 것이 더 좋다. 이 길은 사철 어느 때라도 좋다. 가을 비에 떨어지는 낙엽과 단풍을 보며 조락(凋落)을 생각하고, 하얀눈을 이고 있는 짙 푸른 노송을 보면서 봄을 생각하는 것도 좋으리라.
칠불사 아(亞)자 방
섬진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