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11월 24일 금요일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제1독서 : 1마카 4,36-37.52-59
복 음 : 루카 19,45-48
그때에 45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46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47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48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운전 중에 라디오를 통해 “지금 엄청난 화재가 났습니다.”라는 뉴스 속보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대부분 이런 반응일 것입니다.
“아이고, 큰 사건이 또 났네. 빨리 화재가 진압되어서 희생이 없어야 할 텐데….”
그런데 잠시 뒤에 조금 구체적인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 화재는 인천 연수구에 있는 송도 신도시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말에 저는 “아니, 우리 동네잖아? 잘하면 화재 난 것을 볼 수도 있겠는데?”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바로 그때 뉴스 진행자의 놀라운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인천 송도신도시에 있는 성 김대건 성당에서 불이 났습니다.”
이때 저는 어떻게 할까요? 그냥 남의 집에 불난 것처럼 생각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맙소사, 우리 성당이잖아?”라면서 속도를 높여 성당으로 빨리 갈 것입니다.
대부분 어떤 사건에 대해 구경꾼 신드롬(방관자 효과)을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나의 일이라고 생각되는 순간, 비로소 구경꾼 신드롬에서 빠져나오게 되지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 십자가가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사건으로만 보면서, 자기와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도록, 심지어 모든 시간 속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를 짊어지셨고 그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모든 시간 속에 있는 사람 중에는 구경꾼 신드롬에 빠져있었던 바로 ‘나’도 있습니다.
즉, 주님께서는 ‘나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십자가가 다르게 보이지 않습니까?
나와 너무 깊은 연관이 있는 십자가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뜨겁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끝이 없는지는 ‘나의 주님’이라고 가슴 깊이 고백할 때 가능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나와 연관 깊은 분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속적인 부분으로만 연결하려고 합니다.
과거의 이스라엘 사람도 그러했습니다. 성전에 있으면서 하느님을 바라보지 않았지요.
그래서 성전을 세속적인 물건들이 파는 곳, 장사하는 곳,
심지어 하느님께서 가장 아끼는 약자를 오히려 소외시키는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성전은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곳이고,
이 성전에서 우리 역시 거룩해지기 위해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거룩함이 자신과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변질된 것이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만나는 장소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때 성전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곳임을 느끼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나와 연관 있을 때 가장 큰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의 명언
나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고, 화해했으며,
자신에게 만족할 수 있는 사람만이 깊은 기쁨을 누릴 수 있다(한스 큉).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맨 먼저 찾아가신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루카 19,46)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나의 집, 곧 당신의 집’으로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사야> 56장 7절의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 말씀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성전이 장사와 환전이 행해지는
불결하고 부정한 곳, ‘강도의 소굴’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새롭게 정화하시는 일을 맨 먼저 하십니다.
예수님의 성전정화는 교회개혁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교회가 항상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드러내고,
주님의 생명과 사랑에 응답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쪼개시고,
성전의 장막을 두 갈래로 가르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하느님 현존의 성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사실을 잘 깨우쳐 줍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6)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몸입니다.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현존하시며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시고 활동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주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이
‘강도의 소굴’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냄이란
우리 몸을 잘 보전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몸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어주는 데 있습니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그렇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을 때,
곧 우리 자신을 타인과 세상을 위해 내어놓을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우리 자신은 ‘기도의 집’이 되고,
우리 안에서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루카 19,46)
주님!
기도하게 하소서
제 몸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 행실로 당신의 성전임을 증거하게 하소서.
제 영혼이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가 당신이 거주하시는 당신의 집인 까닭입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산보 중에 ‘이단(異端)과 사이비(似而非) 종교’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이단은 다르지만, 끝이 다른 것이라고 합니다.
‘신당동 떡볶이, 장충동 족발, 종로 닭 한 마리’에는 ‘원조’라는 이름의 가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원조와 비슷한 이름의 가게들이 함께 있습니다.
이단은 맛이 조금 다르지만 그렇다고 먹어서 건강에 해로운 것은 아닙니다.
보통은 원조 집에 손님이 많지만, 자리가 없으면 다른 집에서 식사를 하기도 합니다.
취향에 따라서 원조가 아닌 집을 선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교회는
‘가톨릭, 동방 가톨릭, 그리스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개신교’로 나뉘어졌습니다.
시작은 같지만, 교리와 제도의 해석에 따라서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예전에는 교리적인 이유와 더불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목적에 따라
이단을 단죄하였고, 전쟁까지 벌였습니다.
현대에는 공동선을 위해서 서로 협력하고, 배려하고 존중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방인, 과부, 고아를 잘 돌보아야 한다.
한때는 너희도 이방인, 과부, 고아로 떠돌아다니지 않았느냐?”
사이비는 비슷한 것 같지만 완전히 다른 것을 이야기합니다.
어릴 때 먹던 ‘불량식품’과 같습니다. 욕심 때문에 몸에 해로운 음식을 파는 경우가 있습니다.
겉보기에 비슷해서 사 먹지만 먹으면 설사를 하기도 하고,
심한 경우에는 사람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불량식품의 유형을 이렇게 나누기도 합니다.
“불량식품은
1. 위해식품, 2. 병든 동물고기 등을 사용한 식품,
3. 기준·규격이 고시되지 않은 화학첨가물 등이 첨가된 식품,
4. 유독기구 등을 사용한 식품, 5. 기준과 규격이 정해지지 않은 포장을 사용한 식품,
6. 허위표시, 과대포장 등을 한 식품 등 6가지로 유형화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이비는 종교를 가장하여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범죄자들입니다.
사이비 종교도 종교를 '가장'하고 기존 종교의 교리를 따오는 경우가 많기때문에
종교의 계통학적 구분으로써 답을 찾으려 하다 보면
사이비 종교를 구별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사이비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확실한 방법은,
그 나라의 사법 체계 안에서 '사이비다'라고 판정이 나거나,
그에 상응하는 유죄판결을 받은 단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짧게 요약하자면 사이비 종교는 이단에 포함되지만
모든 이단 종파가 사이비 종교는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정화’를 하십니다.
사이비들이 기도하는 하느님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변질시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이비들의 위선과 허위에 대해서도 ‘정화’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저들의 가르침은 따라라. 그러나 저들의 행동은 따르지 마라.
저들은 자기들도 하느님께 가지 않으면서 남들도 하느님께 가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있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르지 않는다면 자신의 욕망에 따라서 산다면 그 역시 사이비입니다.
공동체를 갈등과 분열로 이끈다면 그 또한 사이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라고
칭찬하셨던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뜻만 생각한다.”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교우라고 하는 사람이 불륜을 저지르는 자거나 탐욕을 부리는 자거나
우상 숭배자거나 중상꾼이거나 주정꾼이거나 강도면 상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와는 식사도 함께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 가운데에서 그 악인을 제거해 버리십시오.”
나의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이 사이비는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백성은 크게 기뻐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민족들이 남긴 치욕의 흔적이 사라졌다.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강도의 소굴
반영억 라파엘 신부
태국의 왕궁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관광객에 떠밀려 겉모양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화려한 수공예 작품으로 꾸며진 왕궁을 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며 존중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사람은 무릎 밑으로 내리는 긴치마를 빌려 입어야 하고
슬리퍼를 신은 사람은 다른 신으로 갈아 신어야 할 정도로 국왕에 대한 예의를 챙겼습니다.
왕궁의 곳곳에 그려진 벽화는 규모나 섬세함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벽화를 복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장인 정신을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들락거려 소란스러운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온갖 정성을 들여 붓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몇몇 한국인들이 눈에 뜨여 아주 반가웠습니다.
한국사람은 사원이나 왕궁 등 역사적인 장소를 찾기보다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곳을 즐겨 찾는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들이 달리 보였습니다.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만큼 왕궁은 보호되겠지만, 관광객으로 넘쳐 나는 왕궁은
아마도 돈벌이의 장소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잘 포장된 과일바구니를 봉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봉헌한 사람이 자리를 비우기가 무섭게 바구니는 치워지며,
이미 판매되었던 과일바구니를 다시 판매하는 모습을 보면서
봉헌의 의미가 무시되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왕궁 덕에 백성이 산다고 하는 마음입니다.
모쪼록 왕궁이 돈벌이의 장소가 되지 않고 백성을 살리는 곳, 곧 기도의 집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가끔은 마음이 혼란스럽습니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과 마음에 끌리는 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상충할 때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마땅히 주님을 따라야 함에도 말입니다.
육적인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면 몸은 고달플지라도 마음의 자유를 누립니다.
그러나 육적인 욕망을 따르면 당장은 즐겁고 기쁘지만,
주님을 따르지 못한 안타까움에 마음이 걸립니다.
사실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한 마음이 강도의 소굴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고, 하느님의 숨을 받았으며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상태가 강도의 소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루의 끝맺음에 늘 “허물로 누벼놓은 이날 하루를 주님의 자비로 지켜주소서” 하고 기도하지만,
일관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기엔 여전히 힘에 겹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혀에 감미로운 자는 기도의 집이요, 육의 욕망을 따르는 자는 강도의 소굴이거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 버릴 방도를 모색하였습니다.
설사 그들의 계획이 성공한다 해도 진리 안에 자유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끝내 ‘강도의 소굴’을 ‘기도의 집’으로 회복시키지 못한 채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여전히 그들의 전철을 밟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기도의 집을 복구하는 날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의 권세가 아니라 백성과 인류, 세상의 성화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통치가 지배하는 나라요, 영혼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주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신 것은
성전은 이익을 남기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을 예배하고 사람을 섬기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장터였다면 그들을 쫓아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밑지고 파는 장사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파는 이들은 당연히 이익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자리는 주님을 모시는 성전입니다.
성전의 아름다움을 잘 지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제일 먼저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성전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느님 안에서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선택하고 행해야 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성전이 장사치의 소굴이 아니라, 거룩한 집이기를 바라신다.
그분은 사제의 직무가 부정직한 종교적 의무 수행이 아니라, 자발적인 순명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신다.
주님께서는 성전에서 세속적인 교환행위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신다.
즉 돈 바꾸는 환전상들을 성전에서 쫓아내기까지 하셨다.
주님의 돈으로 이익을 챙기려 하는 자는 바로 환전상이다.
그 주님의 돈은 성경이다.
성경을 가지고 자기 이익을 챙긴다고 한다면, 그는 성경을 파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들은 모두 환전상들이지 참 목자가 아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성경을 가지고 현세의 이익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이제 없어지고, 우리 신앙인들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행실,
흠 없는 삶의 영광, 영광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향기로운 예배가 빛을 내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성전 정화이다.
주님께서는 성전의 주인으로서 당신의 권한을 행사하신 것이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비롯하여 유대인 지도자들 모두의 죄가 더욱 크다.
배우지 못한 백성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고, 그 구원의 말씀을 단비처럼 받아 마셨다.
그들의 마음은 열매를 맺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지도하는 자들은 주님을 거역하고 살인을 계획하고 있다.
그들은 모퉁이 돌에 걸려 넘어지고 말 것이다.
주님의 집은 하느님과 우리의 형제들을 만나는 장소이다.
이 만남은 사랑의 만남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 하느님의 집이 어느 개인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고 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몸도 성령의 궁전이라고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셨다.
이 궁전을 인간적인 욕심으로 채우려고 한다면 하느님의 성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언제나 주님을 모실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그래서 세상을 비출 수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보지 못할지라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은 베트남의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의 기념일입니다.
베트남 가톨릭교회는 여러모로 특별합니다.
1975년 베트남이 공산화 이후, 가톨릭교회가 큰 타격을 입었지만,
경제 개방과 더불어 강경했던 공산 정권의 교회에 대한 규제가 느슨해진 틈을 타,
교세가 가파르게 성장해 왔습니다.
현재 베트남의 가톨릭 신자율은 8퍼센트를 넘어선 것으로 추정됩니다.
베트남의 인구가 올해로 1억 명을 돌파했으니,
가톨릭 신자수는 800만 명을 넘어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직도 주교 임명이나 사제서품 대상자 숫자를 정부가 관여하거나 통제하고 있는 등
제약이 많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점진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중국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베트남 가톨릭교회 성장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공산 정권이 들어선 다음 13년간 수감 생활을 거친 후 바티칸으로 추방되셨지만,
그 혹독한 여건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베트남 가톨릭 신자들을
영적으로 동반하셨던 반투안 추기경님 같은 걸출한 사목자의 역할도 크리라고 확신합니다.
반 투안 추기경님께서 독방에 투옥되고 난 직후의 일이었습니다.
경제 상태가 극도로 열악했던 당시, 공산 정권은 재소자들의
식량이나 생필품 지급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재소자들은 가족이나 친지들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야 했습니다.
다른 재소자들은 가족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대부분 식품이나 담요, 생필품을 보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런데 반 투안 추기경님은 ‘위장약으로 사용할 포도주 한 병’을 청했답니다.
교우들은 즉시 반 투안 추기경님의 의중을 알아차렸습니다.
포도주병 겉에다가 다음과 같은 메모를 붙였습니다.
‘위염 치료를 위한 약품.’ 그리고 옷가지 속에다가는 제병을 잘 숨겨서 소포를 보냈습니다.
소포를 받아 든 반 투안 추기경님은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뻤습니다.
그 순간의 기쁨을 이렇게 회상하셨습니다.
“그동안 교도소 안에서 제가 지니고 있었던 가장 큰 두려움은
언제 다시 미사를 봉헌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는데,
포도주와 제병을 받았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 손바닥에 포도주 세 방울과 물 한 방울을 떨어뜨려서 매일 미사를 드렸습니다.
바로 그때 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파블로 도밍게스, 마지막 피정, 성바오로)
뿐만, 아니라 베트남 가톨릭교회는 오랜 박해의 세월 속에서 탄생한
무수한 순교자들의 후광을 업고 있습니다.
1533년 최초로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이래, 1625~1886년까지 총 53차례의 박해가 계속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13만 명 가량의 선교사들과 가톨릭 신자들이 순교의 영예를 얻었습니다.
그 가운데 총 117명의 순교자들이 1988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에 의해 시성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격인 안드레아 둥락 사제를 필두로
26명의 베트남 사제들, 59명의 평신도들, 8명의 외국인 주교들,
그리고 13명의 외국인 사제들이 시성의 영광을 획득했습니다.
박해가 한창이던 1843년 목숨을 무릅쓰고 전교에 열중하던
바울로 레바오틴 신부님께서 모국에 있는 신학생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그들이 얼마나 영웅적인 순교자들이었는지를 생생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 갇혀 있는 감옥은 영원한 지옥에 비길 만하니,
족쇄, 쇠사슬, 포승 등 온갖 종류의 잔인한 형벌과 더불어
미움, 복수, 비방, 폭언, 불평, 악행, 거짓 맹세, 저주와 궁핍과 근심 등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옛적에 세 소년을 불가마에서 구원하신 하느님께서 언제나 함께 계시면서
나를 이 고난에서 구하시고, 이 고난을 달게 받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그분은 그 무거운 십자가를 전적으로 지시고,
저에게는 겨우 한쪽 끝부분만 지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제 싸움을 구경만 하시지 않고, 친히 싸우시고 승리하시며 모든 번민을 이기십니다.
그 까닭으로 그분은 머리에 승리의 관을 쓰셨으며, 그분의 지체들은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주님, 주님의 권능을 보여주시고, 저를 구원하시며 붙들어 주시어,
제 연약함 안에 주님의 능력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주님께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그리하여 행여나 제가 고난의 도정에서 비틀거려
원수들이 거만하게 머리를 쳐들지 못하게 하여 주소서.
저는 이 폭풍우 가운데서 제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하느님의 옥좌에 희망의 닻을 던집니다.
여러분은 제가 당당하게 싸우도록, 훌륭하게 싸우고 끝까지 싸우며
달릴 길을 다 달리도록 기도로 저를 도와주십시오.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보지 못할지라도,
후세에서는 흠 없는 어린양의 옥좌 앞에서 승리의 기쁨에 넘쳐,
한마음으로 영원토록 그분을 찬양하는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아멘.”
너희가 곧 성전이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聖都 예루살렘의 불행과 멸망을 예고하신 예수님의 마음은 편치 않으셨다.
그래서 그분은 눈물과 한탄으로 그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러나 눈물이 그분의 발목을 잡을 수는 없는 일, 올리브산을 내려오신 예수께서는
곧바로 성전으로 가셔서 갖은 商魂으로 더렵혀진 성전을 정화하신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은 4복음서 모두가 보도하고 있다.
(마태 21,12-17; 마르 11,15-19; 요한 2,13-17)
익히 알고 있는바, 요한복음은 성전정화사건을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 시점에 두었고,
공관복음은 공생활 종료 시점에 두고 있다.
그런데 루카는 원전이 될 마르코복음을 대폭 축소하였고,
정화의 시점도 예루살렘 입성 다음 날인 것(마르 11,12)을 입성 當日로 보도하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나타나 있듯이 루카는 예수님의 성전정화사건을 原典에 비해 대폭 축소하여 보도하면서,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서에 없는 ‘성전 안에서 가르침’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도 ‘날마다 가르치셨다.’(46a절)고 한다.
루카 복음이 보도하는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과 성전 안에서의 활동 사건을 함께 묶어 생각해 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먼 길을 오셨다.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사마리아를 옆으로 둘러, 데카폴리스, 베레아, 유다지방을 거쳐
예루살렘에 도착한 長途의 목적은 우선 예루살렘 성전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當日, 곧바로 상인들이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린 성전을 정화하신 이유는
성전이 예수님의 집이기 때문이다.(루카 2,49)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통틀어 하나밖에 없는 성전, 바로 그집에 예수께서 드디어 도착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이사야 예언자도 “나의 집은 뭇 백성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라 불리리라.”(56,7)고 했다.
더럽혀진 성전이 상인들을 쫓아내는 것만으로 다시 聖化되는 것은 아니다.
성화는 기도로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현존과 말씀을 통하여 성전은 자신의 잃어버린 거룩함을 다시 찾는 것이다.
이는 적어도 예수께서 계시는 동안은 가능하다.
그런 다음에는 예수님 스스로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신약의 새로운 성전이요 하느님의 집이 되실 것이다.
성전은 웅장한 벽돌과 아름다운 치장으로만 하느님의 집이 되지는 못한다.
하느님께 드리기 위해 제단에 바쳐진 값나가는 제물이 성전을 하느님의 집이 되게 하는 것도 아니다.
작금에 수십억의 돈을 들여야 땅을 마련하고 그 위에 하나의 성전이 지어지는 것을 본다.
자신은 다 쓰러져 가는 판자촌에 살면서도 웅장한 성전 건립을 위해 기금을 내고 약정을 한다.
성당이 분가되어 겨울에 떨고 여름에 찌는 비닐하우스나
군대 막사 같은 가건물을 마련하더라도 신자들이 모이면 그곳은 성전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려 모여든 공동체가
곧 하느님의 집이며, 성전이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1코린 3,17)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가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봉헌할 수 있도록 지어진 성전은
우리 공동체가 거룩해질 때 함께 거룩해지는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이승화 시몬 신부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십니다.
기도의 집으로 다시 되돌리기 위해서
그분은 폭력을 사용하십니다.
원래 의미를 살리기 위한 행동이
상인들의 입장에서는 폭력으로 전해집니다.
이를 보고 우리는 질문합니다.
사랑이신 예수님이 어떻게 폭력을 벌일 수 있는가?
우리는 어느새 인간적인 생각으로
더 중요한 것을 끌어내리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위한 자리이지만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는 마음 때문에
혹은 더 나은 삶을 위해서라는 변명 때문에
가장 중요한 하느님을 잊어버립니다.
그런 이들을 다시 돌리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아픔을 피할 수 없습니다.
정화의 아픔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자주 만나는 고민입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생각이
혹은 내가 과거에 매몰되어 있음을 잊은 생각이
원래 그랬어.라는 생각이
우리가 하느님을 잊어버리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런 때 변화는 언제나 고통을 동반합니다.
기득권자는 자신의 생각과 권한을 내려놓는 아픔을
변화를 원하는 이들은 변화의 크기만큼의 아픔을
또 공동체는 새로움을 받아들이기 위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내려놓는 아픔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기도로서 행동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처럼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살아가려는 가운데
하느님이 보여주시는 결실
곧 우리의 행동이 가져오는 결실을 성찰하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성장을 위한 고통임을 기억하며
오늘 주님 안에 머물기 위해
내 마음을 정화시키고
하느님 중심의 사랑으로 채워나가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 ‘시몬 신부의 신앙 이야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