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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25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제1독서 : 1마카 6,1-13
복 음 : 루카 20,27-40
그때에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28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 그래서 둘째가, 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2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39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40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세계적인 글로벌 유통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이긴 토종 대형 마트가 있습니다.
이 대형 마트는 ‘노브랜드’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질 좋은 물건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팔기 위해 브랜드를 붙이지 않겠다는 의미로 이름을 붙인 자체 브랜드입니다.
그런데 노브랜드가 햄버거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내세운 광고 모델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검은 피부의 모델을 쓴 것입니다. 온라인에서는 다음과 같은 댓글이 등장했습니다.
‘검은 피부 모델이라니, 한국에서 만들어진 브랜드라며 외국인을 모델로 쓰는 것이 올바른 일인가?’
소비자들의 직관적인 추측에서 보았을 때,
검은 피부를 가지고 있으니 외국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모델은 한국인이었습니다.
나이지리아 출신의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한국말만 쓰고 또 한국에서만 살았던 완벽한 한국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반박 댓글이 올라왔습니다.
‘한국인이 검은 피부일 리 없다고 생각하는 당신은 편협한 사람이군요.’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당연히 함께해야 할 사람을 내쳤던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함께해야 할 이유가 너무 많은데, 함께하지 못할 이유 몇 가지를 내세워
절대로 함께할 수 없다고 단언하는 모습도 또 얼마나 많습니까?
편협한 생각은 결코 하느님의 생각이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하느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몇 사람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당시 율법에 의하면 어떤 형제가 자식 없이 죽게 되면,
다른 형제가 죽은 형제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지만, 자식 없이 죽었고
그래서 그 아래의 형제가 차례로 형수를 맞아들였지만, 자식 없이 모두 죽게 되었다는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부활할 때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관점이 아닌, 세상의 관점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지상 생활의 연장선 정도로만 보고 있기에,
부활 자체를 인정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런 편협한 생각이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바뀌는 삶,
그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초대받은 하느님 나라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의 명언
많은 사람은 실수 때문에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시도하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조지 포먼).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우리는 ‘사두가이들의 부활에 관한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서, 우리의 부활신앙을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사두가이들의 영적 무지와 예수님의 신적 지혜가 대조를 이룹니다.
곧 영적 무지로 인한 속박을, 신적 지혜로 인한 자유와 해방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속박과 자유가 ‘믿음’에 달려 있음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의 병행 구절인 마태오복음에서,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두가이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마태 22,39-40).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부활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의 영적 무지를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곧 ‘성경에 대한 무지’와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면서 물질만을 유일한 실체로 여긴 까닭에,
내세나 부활과 영적 존재에 대해서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 아래 하느님의 권위와 능력을 제한했습니다.
곧 부활케 하시는 하느님의 초월적인 권능을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25장 5-10절에 나오는 ‘수혼법’을 예로 들면서,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하여,
하느님의 부활의 능력을 마치 죽은 사람을 원래대로 죽기 전의 생활로 되돌려놓는 정도로 여깁니다.
그래서 부활한 상태의 초월적인 실재인 부활체를
마치 육체를 지닌 존재로 보고서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영적 존재는
“마치 천사와 같아 시집가는 일도 장가가는 일도 없고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고 하시면서,
그들이 믿고 있는 모세오경의 <탈출기>(3,6)를 인용하여 그들의 영적 무지를 깨우치십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루카 20,37)
이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비록 죽어 과거의 인물이 되었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살아 있는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루카 20,38)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으로서, 인간을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로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이러한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에게 이렇게 설명해 줍니다.
“우리 모두 다 죽지 않고 변화할 것입니다.
~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1코린 15,51-52)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는 이들입니다.
진정 믿으면, 신적 지혜가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와 해방이 올 것입니다.
불신은 우리를 끝없이 속박할 뿐이지만, 믿음은 우리를 진리에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곧 믿음이 해방을 가져올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루카 20,38)
주님!
저희를 깨우쳐 주소서.
죽음이 단절과 파괴가 아니라 충만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임을!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충만함 속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탄생임을!
생명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게 함을!
단지 되살아 난 것만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다시는 죽지 않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됨을!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교우들과 함께 ‘지 세실리아 수녀님’의 금경축 축하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미사 후에는 본당에서 준비한 조촐한 축하 행사가 있었습니다.
수녀님은 1973년에 첫 서원을 하였고 어느덧 50년이 지났습니다.
수녀님과 함께 30년이 넘는 인연을 이어온 신부님께서 강론 중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호메로스의 작품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는 수많은 어려움과 난관을 극복하고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전우들이여 생각건대 이번 일도 언젠가는 우리에게 추억이 될 것이다.’
수녀님도 지난 50년 동안 다가오는 많은 어려움을 지혜와 열정
그리고 기도와 헌신으로 극복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금경축 축하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오디세우스가 다양한 능력으로 난관을 극복하였듯이,
수녀님도 수녀님의 내면에 많은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수녀님은 낯선 미국 땅에서 이민자들을 위한 상담을 해 주었습니다.
교사로서 5,000명이 넘는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화가로서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수도자로서 가난, 정결, 순명의 삶을 충실히 살았습니다.
50살밖에 안 돼 보이는 수녀님이 벌써 수도생활 50주년이라니 놀랍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건강한 모습으로 기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축하드립니다.”
축하미사에는 저를 포함해서 4명의 사제가 함께하였습니다.
시몬 신부님은 3년 후에 금경축이고,
강론을 하였던 브로스논 신부님은 8년 후에 금경축이고,
저는 18년 후에 금경축이고, 가비노 신부님은 계산은 하지 않았는데
대략 33년 후면 금경축이 될 것 같았습니다.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면서 저도 제 안에 하느님께서 주신 은사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능력이 부족하기에 제게 부지런한 성격을 주셨습니다.
남보다 일찍 일어날 수 있기에 좀 더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능력이 부족하기에 높은 목표를 정하기보다는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목표를 이루지 못해서 안타까워하거나, 실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어차피 교회의 직무는 ‘이어달리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못하면 다음 분들이 이어 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능력이 부족해서 혼자서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는데
주님께서는 제게 많은 협조자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분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좋았던 기억은 오래 기억하려 하였고, 나쁜 기억들은 빨리 잊어버리려고 하였습니다.
오디세우스처럼 불굴의 의지와 지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금경축을 맞이하는 수녀님처럼 다양한 능력을 지니지는 않았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은사를 감사하게 생각하며 지내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부활 이후의 삶에 대해서 질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삶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차원의 삶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능력과 업적으로 제국을 세웠던 왕들도, 이름없는 산골에서 피었다 지는 꽃처럼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던 사람도 부활 이후의 삶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기에 능력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좀 더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감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삶은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웃과 세상을 섬기는 삶을 살았다면, 자신이 걸어온 길을 성찰하는 삶을 살았다면
우리 모두 천상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부활’이란 말의 뜻은
단순히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일어서다. 다시 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낡은 관습과 습관을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 잘못된 틀을 벗어버리고
사랑과 희망의 날개를 얻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갈릴래아로 가라!’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던 곳입니다.
절망 중에 있던 사람들에게, 두려움에 떨고 있던 사람들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십자가의 끝은 절망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을 박해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에 대한 용서입니다.
분노와 원망을 던져버리고, 화해와 용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몸의 변화가 부활이기도 하지만, 인식과 태도의 변화가 부활의 시작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믿으면 아나니, 그때 아는 것은 예전에 아는 것과는 다르다.
사랑하면 보이나니, 그때 보는 것은 예전에 보는 것과는 다르다.”
하느님을 믿으면서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봅니다.
분노와 미움, 증오와 불만에서 사랑과 용서, 겸손과 친절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천상에서 우리가 살아갈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언제나 살아계신 하느님
반영억 라파엘 신부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미래를 더 소중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과거에 묶여 삽니다. 미래가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에 잘못 집착해서 오늘을 인색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오늘을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약속된 미래가 오늘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과거는 역사요,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신비입니다.
그러나 그 신비는 오늘 주어진 선물을 통해서 옵니다.
오늘을 사랑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새 시대를 살면서도
과거의 율법 안에 갇혀서 살았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미래가 없이 오늘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실에 밝아 자기 잇속을 챙겼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코린2,9).하며
약속된 부활의 삶을 확인시켜 줍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몸소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도 새 생명에 대한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에 대한 희망 안에 있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의 생명을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활을 믿는 이에게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견디어 냅니다.
그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약속을 믿기에 현세적인 것보다도 영적인 것에 더 마음을 씁니다.
현세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약속된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희망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씨를 뿌려야 합니다.
‘눈물로 씨 뿌리면 곡식 단 들고 올 제 춤추며 노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믿음이 성장했고
마침내 목숨을 내놓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으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성경은 “그분께서 명령하시면 뜻하시는 바가 모두 이루어지고
아무도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의 손길을 막지 못한다”(집회39,18).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그 약속을 믿고 사는 이에게 언제나 살아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산 사람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결국 깨어 있는 이에게 능력의 하느님으로 다가오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 의지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죽음은 인간의 잣대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영생이 있고, 그것을 믿는 한 우리도 언제나 살아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마음이 흔들비쭉입니다.
이 시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 뵙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주님을 기다리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천국에서는 장가드는 일이 없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사두가이란 보상을 바라고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여,
의로운 자라는 뜻으로 불린 명칭이다.
그들은 부활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것도 하나의 보상심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두가이들이 한 여인이 일곱 남편을 맞게 되는 경우를 들어 예수께 질문한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33절).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35절)
어째서 그럴까? 그들은 두 번 다시 죽지 않는다.
그들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주님께서는 다가오는 세상의 새로운 상황을 알려주신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모습이란,
부활 자체가 결혼의 목적성을 상실해 더는 자손을 낳을 필요가 없다.
부활 때에는 사람들이 천사들과 같아지기 때문에(36절) 죽는 일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36절).
이것은 우리가 부활하게 되어 있고, 그 부활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에 연결되고 있다.
즉 부활로서 완전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자녀이다.
지금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분의 생명에 결합하여 있으므로 장차 부활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루카는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35절)에 대해서 말했다.
모든 일상의 삶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활로 가는 진실한 하느님의 자녀임을 체험을 할 수 있는 장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체험하기 시작한 사람만이
마지막 부활을 믿을 수 있고 또 갈망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37절)이라 한 것은
모세는 그 순간에 이미 수백 년 전에 죽은 그 선조들과 생명의 관계에 있고,
신비스러운 친교를 통해 계속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활은 단순히 육체적인 사실로서가 아니라,
이미 하느님과 우리를 만나게 하는 그분과의 일치된 생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38절).
그리스도인은 현재 이 순간부터 그분과 사랑의 일치 속에 살아가야 하며,
그분과의 사랑의 일치 속에 사는 것이 참으로 살아 있는 사람의 모습이며,
이 살아 있는 인간의 모습이 하느님의 영광이라고 하였다.
항상 살아 있으면서 구원받은 사람의 삶을 이 땅에서부터 살아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고통과 눈물, 한계와 좌절, 희망과 기쁨 안에서 현존하시는 하느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랜 세월 아동 복지 분야 사목터에서 사목하시다가 정년을 마무리하신 수녀님께 들은 말씀입니다.
평생 사목 일선에서 고생하셨으니, 기도 안에서 편안한 노후 시간을 보내야 하나, 고민하시다가,
그게 아니다 싶어 장상께 청원 하나를 드렸답니다.
아동 보육 시설에서 많이도 말고 딱 한 명의 아기만 케어 할 수 있기를.
장상께서 흔쾌히 수락하셔서 지금 그 일을 너무나 행복하게 하신다는 말씀,
그 아기를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저는 너무 존경스러워서 크게 박수를 쳐 드린 적이 있습니다.
심각한 저출산과 초고령화 현상을 동시에 직면한 우리 사회입니다.
저출산도 큰 문제이지만 초고령도 큰 문제입니다.
정년에 도달했지만, 몸과 마음이 아직도 이팔청춘인 젊디젊은 은퇴자,
저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인물인데,
아직 셀 수도 없이 남은 날들은 대체 어떻게 감당할 것입니까?
이런 측면에서 딱 아기 한 명을 선택하신 수녀님의 선택은 참으로 탁월한 선택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용기와 만용을 잘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연세가 90인데, 그래서 서 있기도 힘들고 팔에 힘도 없는데,
오직 용기로 충만해서 갓난아기 한 명 케어 하다가,
바닥에 아기 떨어트리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입니까?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없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명확히 식별할 수 있는 기도와 식별력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지난 세기 탁월했던 대 영성가 헨리 나웬 신부님도 비슷한 체험을 하셨습니다.
그는 저명한 신학자요 심리학자로 평생 유명 인사로 살았습니다.
전 세계를 두루 다니면서 자신이 개척한 고유한 영성을 전파했습니다.
그의 강의실은 수백 수천 명의 청중으로 가득 찼고, 가는 곳마다 큰 박수와 환호를 받았습니다.
그러던 헨리 나웬 신부님이 어느 날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탁월한 강사, 심리학의 대가, 명문 예일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평생 명예 교수직을 다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캐나다 토론토에 위치한 새벽 공동체로 들어갑니다.
데이 브레이크 공동체의 공동체 일원이 되어 딱 한 명의 장애인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게 됩니다.
나중에 헨리 나웬 신부님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전 세계를 다니면서 명강의를 설파할 때 만나지 못했던 하느님을 거기서 만났습니다.
아담이라는 중복 장애인을 하루 온 종일 케어하면서, 그 형제 안에서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의 고통과 눈물, 그의 한계와 좌절, 그의 희망과 기쁨 안에서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참으로 은혜로운 말씀 한마디를 건네고 계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 38)
그렇다면 우리가 매일 만나는 나와 맞지 않는 이웃들, 그가 죽은 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라면,
그의 숨결, 그의 생명, 그의 인생 안에 하느님께서 반드시 살아계시고 현존해 계십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너무나도 당연히 아직 살아 숨 쉬고 있는 결핍투성이, 상처투성이, 고통 덩어리인
우리 각자의 인생 여정 안에도 하느님께서는 굳건히 살아계시고 현존해 계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저 구름 너머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몸 담고 있는 바로 여기, 이 공동체, 부족해 보이는 동료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 자리입니다.
아직도 우리가 죽지 않고 이렇듯 열심히 살아 숨 쉬고 있음에 감사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비록 고통과 상처 비참으로 얼룩진 오늘 하루지만,
바로 그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復活은 甦生과 다르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예수님의 그리 길지 않을 예루살렘에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복음에 아주 드물게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등장하고,
예수께서 이들과 함께 부활에 관하여 논쟁을 벌이신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누구인가?
당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대항자로서 잘 알려진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기록된 율법,
즉 모세오경만을 받아들여 모세율법의 字句를 고집하였으므로,
바리사이들이 중시하는 口傳의 法을 인정하지 않았다.
敎義的으로 영혼의 불멸이나 육체의 부활 및 천사와 영적 존재를
믿지 않았고,(마르 12,18; 루카 20,17; 사도 23,18) 오직 부유한 평안만을 추구하였다.
실제로 司祭들을 포함한 부유층과 귀족계급들이 이에 속하였고,(사도 4,1; 5,17)
로마인의 지배까지도 평화와 복지를 가져오는 것으로 생각하여 환영하였다.
따라서 예수에 대하여는 바리사이들보다 더 격한 증오를 표시하여
예수를 단죄하고 처형, 사도들을 박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렇게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실로 극단적인 예를 들어 예수를 곤욕에 빠뜨리려 하였다.
그들이 내세운 근거는 아들 없이 남편이 죽으면,
그의 아내가 남편의 형제와 결혼하여 대를 잇게하는 嫂婚法이다.(신명 25,5-10; 창세 38,8)
그러나 사두가이파들의 맹점은 來世를 현세의 연장으로 생각한 데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은 復活을 甦生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선 죽은 후에 맞이할 새 세상의 연장이 아니라고 가르치신다.
실제로 일어날 일은 우리의 상상 밖이다.
내세란 현세의 모든 생명질서가 무너지고, 죽음 자체가 완전히 극복되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내세의 부활은 이승의 차원이나, 죽었다가 소생하는 차원과는 전혀 다른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현세의 질서, 철저한 시간과 공간, 즉 物理법칙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우리가
부활의 차원의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사람에게는 시간과 공간의 영역이 過去, 現在, 未來로 나누어져 있으나,
하느님에게는 오직 현재의 시간과 공간만이 존재한다.
이를 일컬어 ‘純粹現在’(pura praesentia)라고 한다.
그분은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시작이 있다면 과거가 있는 것이고, 끝이 있다면 미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비록 죽어 과거의 인물이 되었더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살아있는 자들이요, 하느님 또한 그들의 하느님이시며,
죽은 이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느님이신 것이다.(출애 3,6)
그래서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있는 것이다.”(38절)
하느님은 죽은 이들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들로부터 찬미를 받으신다.
즉 죽은 이들은 하느님을 섬길 수 없으며, 오직 산 사람만이 하느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하느님을 섬기는 자는 살아 있는 것이며,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 자는 살아있더라도 죽은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셈이다.
그렇다고 하느님을 섬기는 자들이 자신의 힘으로 부활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생명의 주인이시고,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에게 부활의 생명을 선사하시는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이승화 시몬 신부
신앙인은 하느님을 바라보지만
현실을 살아갑니다.
하느님이 창조한 세상이지만
온갖 악과 유혹이 가득하기에
우리는 세상 안에 머물면서 신앙을 살기는 어렵습니다.
시시각각 찾아오는 유혹과
죽음으로 이끄는 문화는
우리를 너무 많이 흔들기 때문입니다.
균형을 잡지 못하고 기울어졌지만
기울어졌는지 모르고 생명을 놓치게 됩니다.
사두가이들이 부활을 믿지 않은 이유는
현실에 너무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이란
지금 살아 숨 쉬는 순간에만 돌봐주시는 분입니다.
현실에 너무 집중했기 때문에
그들은 죽음 너머를 희망하지 못했고
결국 현실에서 축복을 받기 위해서만 집중했습니다.
결국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깨우침을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은 이미 죽었지만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에 동참했기에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닌 산 이들의 하느님이 되십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음은
이러한 희망에 동참하도록 이끌어 주시는 손길입니다.
세상 안에서 하느님 축복을 찾으면서도
영원하신 하느님을 희망하는 삶
바로 이런 삶을 하느님께서 바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기도합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균형은 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안에서 희망을 간직하며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을 살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살아갈 수 있음을 기억하며
오늘도 주님 안에서 더 좋은 선택을 하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 ‘시몬 신부의 신앙 이야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