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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1.03 13:47 | 수정 : 2014.01.05 10:32
내가 최연혜 코레일 사장을 처음 만난 것은 2001년 봄이다. 그는 한국철도대학 교수, 나는 건설교통부(국토교통부) 담당 기자였다. 그가 전화를 걸어왔다. “러시아 시베리아 주립 교통대학교 카마로프 총장이 방한했는데 인터뷰해 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솔직히 러시아 교통대 총장보다도 철도 전공 여교수인 그에게 더 흥미를 느꼈다. 인터뷰하겠다고 했다.
지금은 없어진, 서울 덕수궁 인근의 세실레스토랑에서 만난 최 교수는 체구가 자그맣고 인상은 부드러웠다. 젊은 날엔 미인이란 소리도 꽤 들었을 법했다. 말투는 한 마디 한 마디 또렷했고, 대화하며 눈길을 떼는 법이 없었다. 시종 진지했다. 그래도 분위기는 좋았다. 카마로프 총장은 시베리아 횡단철도(TSR)와 남북한 종단철도(TKR)의 연결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해 얘기했고, 난 그걸 몇 장 원고로 정리해 ‘사람들’면에 게재했다.
후일 들은 얘기지만 당시 최 교수는 사비를 들여 카마로프 총장 일행을 초청했고, 여기 저기 면담과 견학 및 인터뷰를 알선했다. 철학은 분명했다. “지금은 우리 철도가 북한에 막혀 섬나라나 다름없이 고립됐지만, 머잖아 다가올 남북 간 본격 교류나 통일에 대비해 연구와 준비를 게을리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러시아와의 교류도 이런 차원에서 마련한 것이었다. ‘철도를 업으로 삼은 여성도 있구나’ 하던 나의 단편적 관심은 ‘이런 비전과 의욕을 가진 철도인도 있구나’ 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는 후일 이렇게 얘기했다. “그런 걸 해야 나라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호텔도 잡아주고 한 거죠. 그런데 나중에 그 인연으로 연구 프로젝트도 생기고 돈도 약간 나오고 했어요. 그러니 손해 본 건 없죠.”
이후로도 최 교수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나로선 철도 관련 현안이 생겼을 때 기사 작성과 관련한 코멘트를 받기 위해서고, 그녀 입장에선 주로 조선일보에 기고문 게재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현안은 많았다. 철도 사고, 고속철(KTX) 개통, 철도노조 파업, 민영화나 공사화 등 구조개혁에 관한 논란 등이다. 그의 말은 간명했고, 글은 깔끔했다. 설명에 알아듣기 힘든 부분이 없고, 글에도 수정을 요청할 필요가 거의 없었다. 아무리 교수라 해도 흔치 않은 일이다. 조선일보에 실린 그의 기고만 대여섯 번은 되지 싶다.
최연혜 사장은 1956년 충북 영동생. 우리 나이 59세다. 어릴 때 대전으로 가 대전여고와 서울대 독문학과를 나왔다. 이후 역시 서울대 독문학과 동문인 두 살 위 남편과 독일 만하임대로 유학 가서 경영학을 공부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공은 공기업 경영을 택했다.
두 딸도 독일에서 낳았다. 그녀는 유학 시절 ‘동양에서 온 작고 귀여운 여인’을 향한 독일 남성들의 관심과 애정 공세가 지겹고 무서울 정도였다고 했다. 처녀건 유부녀건 상관없이 대시했다는 것.
서울대 독문과 시절에는 홍일점이었다. 인문계열로 입학해 1학년을 마치고 독문과를 지원했는데 남자 19명에 여자 1명이었다. 당시 인문계열 신입생 200명 가운데 여학생은 10명이 안 됐다고 한다.
“그 시절 저는 소극적이고 말도 적은 편이었어요. 그런데 어쩌다 보니 이런 길로 들어왔네요. 친구들도 저보고 그래요. ‘넌 의사나 검사 같은 남편 만나서 주부로 조용히 잘 살 스타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제일 바쁘게 사니 정말 의외’라고요. 그렇지만 사실은 제가 고집이 좀 세요. 겉만 보고 했던 얘기들인 셈이죠.”
나도 그를 ‘잘못 보았다’는 면에서 예외가 아니다. 그가 철도를 위해 무언가 계속 열심히 할 것임은 의심치 않았지만, 철도공사 사장이 되고, 철도개혁 현장의 주역이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최 사장의 남편 강용탁씨는 KT&G 성장사업본부장을 지냈다. 형제는 2남2녀. 오빠 연익씨는 아주대 교수, 여동생 연성씨는 성균관대 의대 교수, 막내인 연구씨는 뉴욕 컬럼비아대 경제학과 캘빈랭카스터 석좌교수다. 최연구씨는 경제학에선 세계적인 유명 인물이다. 한 마디로 수재 집안이다.
큰딸도 부모가 졸업한 서울대 독문학과 출신이다. 작은딸은 이화여대 중문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다닌다. 엄마처럼 두 딸도 수준급 미인이다. 사실은 딸들이 훨씬 예쁘다.
한국철도대학 교수이던 최연혜가 철도 수장 자리를 처음 노크한 것은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말이다. 고속철도를 개통한 뒤 미뤘던 철도청의 공사화를 앞두고 정부가 철도청장을 공모했을 때다. 그 시절 최 교수는 대통령직인수위 경제분과 자문위원, 건교부 철도구조개혁추진위 심의위원 등을 맡은 경험이 있다.
공모에는 전·현직 건교부 간부 등 여럿이 응모했는데 최 교수의 서류와 면접 점수가 가장 높았다고 한다. 하지만 최종 결정권을 가진 청와대(중앙인사위원회)는 ‘적임자가 없다’며 재공모를 요구했다. 이후 애초 공모에 나오지 않았던 신광순 철도청장 직무대행이 지원했고, 결국 그가 청장으로 결정됐다. 철도청을 공사로 전환시키는 시점에서 벌어질지 모를 노조의 반발과 직원들 사기를 감안해 철도청맨을 과도기 수장으로 앉힌 것. 처음부터 신광순씨를 사장으로 뽑으면 “무늬만 공모” “개혁 의지가 있긴 한 거냐”는 여론의 비난을 들을 것을 우려한 ‘예정된 재공모’였던 셈이다.
최연혜 교수는 탈락했지만 이내 건교부로부터 부사장 자리를 제안받는다. 공모 취지를 조금이라도 살리고, 만년 숙제인 철도경영 합리화에 관한 그의 지식을 현장에 반영해보자는 생각이었다. 최 교수는 며칠 고심하다가 받아들였다.
“솔직히 기분이 언짢아요. 두 번이나 공모에 들러리 세우고는 임명직 부사장이라니요. 하지만 첫술에 배부를 순 없다고 생각해요. 부사장도 아주 중요한 자리고, 할 일도 많고, 언젠가 기회는 또 올 거라고 생각해요.” 당시 그가 했던 이야기인데, 결국은 실현됐다.
그는 2년 반가량 부사장으로 일하다가 학교로 돌아가 2007년부터 4년간 한국철도대학 총장을 맡는다. 총장 시절엔 중국, 러시아, 호주 등의 교통·철도대학을 리드해 세계철도대학교협의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을 맡았다. 또 구조개혁에 직면한 철도대를 국립충주대와 통합해 국내 유일의 교통특성화 대학인 한국교통대학을 설립했다. 대학 업무와 관련해 그가 가장 자부하는 두 가지다.
최연혜 교수는 정치인으로 변신을 시도한 적이 있다. 2012년 총선 때 새누리당 대전 서구을 후보로 나섰다. 처음엔 반대하던 남편과 딸들이 직장과 학교를 잠시 접고 총력 지원했지만 실패했다. 지역 성향상 최 교수가 아니라 새누리당 후보로 누가 나섰어도 힘든 곳이긴 했다.
나는 당시 그의 ‘외도’에 내심 실망했다. 한국 철도를 위해선 한우물을 파는 것이 낫다고 봤기 때문이다. 출마 배경을 이해할 순 있었다. 당선된다면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에서 일할 수 있을 테고, 정부 감시와 입법 활동을 통해 평소 생각을 또 다른 방식으로 구현할 수 있을 터였다. 당시 그는 “당에서 여러 번 출마를 권해도 계속 고사했는데 결국 마음을 돌리게 됐다”며 미안해 했다. 그렇지만 나는 일각에서 말하듯 ‘설령 당선되지 않더라도, 차기 코레일 사장을 차지하기 위해 당과 정권의 눈에 들려고 출마한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유는 곧 알게 된다.
그는 2013년 코레일 사장 재수에서도 실패할 뻔했다. 코레일 임원추천위원회(임추위)의 1차 심사에서 4등에 그치면서 3명 안에 들지 못해 일찌감치 탈락하고 만 것. 심사 방식 자체가 문제였다. 11명 심사위원 가운데 몇 명만 입을 맞춰도 특정인을 3명 안에 올릴 수 있는 구조였다. 임추위원은 11명인데 코레일 전직 간부 두세 명과 외부인들이다. 아무튼 박근혜 정권이 최 교수를 염두에 두었다면 1차 심사에서 황당한 고배를 마시도록 방치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3명을 2명으로 줄여 청와대에 최종 추천하는 기재부 공공기관운영위원회(공운위)의 심사를 앞두고 상황이 반전됐다. 1차 심사 과정에서 국토교통부 간부가 임추위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국토부 출신인 정일영 교통안전공단 이사장을 밀어달라고 청탁했음이 노조 등의 폭로로 드러나 공모 절차를 다시 밟게 된 것. 투명하게 진행된 재공모에선 최 교수가 수위였고, 청와대도 사장으로 결정했다.
최 교수 입장에서 볼 때 2차 공모에서는 다소 운도 작용한 것 같다. 예를 들면 공운위가 재공모를 결정하던 날 청와대 비서실장이 김기춘씨로 교체된 점이다. 최 교수는 몇 해 전 김기춘씨가 회장이던 한일해저터널연구회가 주최한 세미나에 토론자로 나간 적이 있다.
“그 당시 보내온 주제발표를 보니 두세 가지 중요한 점이 빠졌더라고요. 아쉬운 생각에 거의 밤을 새워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들어 나가 설명했어요.” 상상하기 쉽잖은 정성이다. 아무튼 이를 본 김 회장이 “이렇게 열심이고 실력 있는 전문가가 있네”라며 감탄했고, 이후 유사한 행사 때마다 초청했다고 한다. 김기춘 비서실장이 이번 사장 결정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몰라도 최소한 불리하게 작용했을 것 같진 않다.
국토교통부는 최연혜 교수가 사장이 되는 것을 그다지 원치 않았다. 개성과 주장이 분명하고 의지도 강해 쉽게 다뤄질 인물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가 철도 민영화나 분리 운영에 대해 기본적으로 반대 견해를 밝혀온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래선지 철도노조도 차라리 최 교수가 사장이 되길 원한다는 소문이 도는 것도 떨떠름했을 것이다. 이 때문일까, 2013년 10월 초 취임 후부터 두 달 가까이 양측의 ‘기 싸움’이 만만치 않았다. 임명장 수령 방식부터 부사장 선임 문제에 이르기까지 연일 마찰이 거듭됐다고 한다.
나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서승환 장관도, 여형구 차관도, 김경욱 철도국장도, 그리고 최연혜 사장 역시 현 상태로는 한국 철도에 미래 없는 악순환의 늪만 깊어질 뿐임을 잘 알고 있기에 가장 필요한 순간에는 힘을 모을 것으로 믿고 있었다. 모든 사람의 생각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같을 순 없다.
실제로 과거 빈번했던 철도 파업과 비교할 때 박근혜 대통령의 청와대부터 국토교통부와 사측인 최연혜 사장 진영에 이르기까지 이번 대열은 단단했다. 정보 부재로 우왕좌왕한 경찰과, 패배가 임박했음을 인식하고 출구를 찾아 헤매던 노조에 뒤늦게 눈치 없이 ‘국회 안에 철도산업발전소위 구성’이라는 어정쩡한 뒷문을 열어준 여야 정치권을 제외하곤 말이다.
“최 교수가 KTX 수서 자회사 설립을 줄곧 반대하다가 사장이 되니 정부 압력에 굴복해 소신을 뒤집었다”는 노동계의 공격도 아전인수형 해석일 뿐이다. 그가 반대한 것은 공사 자회사가 아니라 민영화이고, 실제로 사장 취임 후 국토교통부와 담판해 민영화를 막을 제도적 추가 장치까지 얻어냈다. 코레일이 확보할 자회사 지분을 30%에서 41%로 높인 것인데, 이건 중요하다. 주주의 3분의 1 이상, 즉 코레일이 반대하면 민영화 등 정관변경을 위한 결의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파업 조합원 4356명 전원 직위해제, 세 차례의 대국민 호소, 더 이상 교섭은 없다는 최후통첩…. 파업이 길어질수록 법과 원칙을 더욱 강조하며 강경으로 일관한 최연혜 사장 모습에 네티즌들은 ‘강골’ ‘카리스마’ ‘철의 여인’이란 표현을 올렸다. 박근혜 대통령을 제쳐두고 영국의 대처 총리나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비교하는 ‘광팬’도 나왔다. 국민 인지도가 단번에 50%는 돌파한 것 아닌가 싶다. 파업 내내 배달 도시락으로 일관하던 그가 지난 12월 31일 어느 식당에 갔을 때 많은 손님이 알아보고 인사하고 격려해 와 당황스러웠다고 한다. 과한 찬사는 접는다 해도, 그의 진정성과 원칙주의는 전달된 덕 아닌가 싶다. 여론이 철도노조로부터 완전히 등 돌린 이유 가운데 하나가 최 사장의 이미지였음은 분명하다.
최연혜 사장의 이런 힘은 어디서 나온 걸까. 그가 이 글을 본다면 부끄러워하겠지만 나는 ‘일에 대한 사심 없는 애정’이라고 본다. 그는 코레일 사내방송 등을 통해 이런 말을 자주 했다. “나는 3년 후면 떠날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퇴직 때까지 계셔야 하잖아요.
주인의식과 애사심을 가져 주세요. 단순 서류작업만 반복할 게 아니라, 스스로와 부하의 영혼을 깨울 수 있는 새로운 일을 찾아주세요.” 이 말이 여느 기관장의 공허한 주문으로 들리진 않는다.
그는 책도 열심히 쓴다. 몇 해 전 ‘시베리아 횡단철도, 잊혀진 대륙의 길을 찾아서’라는 기행서를 냈고, 얼마 전에는 ‘독일은 어떻게 잘살게 되었나, 독일 국민은 행복한가’라는 책을 출간했다. 근래에는 딸들 또래인 20~30대 한국 여성을 위한 글을 정리 중이었는데, 코레일 사장 취임 후 너무 바빠서 잠시 중단했을 것 같다.
첫댓글 멋진사장님!좋아요.
열정~대단하십니다
박근혜 대통령을 이을 후보다. 밀어 줍시다!. 김무성 보다 천배는 더 멋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