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 일병시절 두 번째 휴가
영등포에서 시흥 가는 7~2번 버스에 올랐습니다
버스는 군에 입대 전처럼 만원이었습니다
영등포역을 지나 대림동을 지날 때
안내양이 없어진 거였습니다
안내양 없이 버스는 달렸고
기사 아저씨도 화가 났고 승객들도 황당해했습니다.
제대 후 여자 후배에게 들었습니다
그 안내양이 나의 국민학교 동창이었는데
안내양 하는 모습을 나에게 보이기 싫어 내렸다는 거였습니다
그 이야긴 듣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갑자기 가슴에 납덩어리를 던진 것처럼 무거웠습니다
버스를 버리고까지 모습을 숨겨야 했던 서글픔
버스의 반대편으로 가면서
어깨가 얼마나 시렸을까~
어쩌면 자신에게 화가 났을지도 모르죠.
모른 척 지나갈 수도 있었는데..
아니 열심히 사는 모습이 좋다고 말해줄 수도 있었는데..
많은 세월이 흘렀건만
벚꽃이 피는 계절이 오면
약속처럼 생각나는 사람이 돼버렸습니다
지금은 어디에서 사는지...
그때의 그 싸늘한 기억을 안고 할머니가 되어
지는 벚꽃을 바라보겠지요
그 시절은 이미 가버렸고
그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나의 일기장 속에선
가는 버스를 바라보며 울먹이는 소녀가 살고 있습니다.
첫댓글 그때 그시절 억척스러운 또순이 같은 버스안내양
또래는 교복입은 모습과 생계를 책임을 지는 모습이었는데
군복을 입은 멋진친구에게 보이기 싫었던 그심정을 이해하겠네요
20살 제기동에서 동대문가는 시내버스에서
토큰을 받지도 않고 신설동에서 내리는데 내려주지도 않고 생글거리면서
웃었던 버스안내양의 모습이 아직도 생각나네요
편하게 그여인과 이야기를 조금더 했을걸 하는 아쉬움이 생각나네요
어린나이에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었었나 봐요
저는 안내양이 누군지 관심도 없었거든요
국민학교 동창이라는말에
당황했었고요~
댓글 감사드립니다
이젠 그 시절이 그리워집니다
그러게요 그녀가 얼마나 열등감으로 아팠을지 아마 다시 공부했거나 세월지나 저 처럼 공부 시작했을 수도 있겠네요 버스 차장도 글을 알아야 하는데 당시 일자 무식 처자에겐 그 직업도 차례오지 않았을겁니다 워낙 문맹이 많던 시절이라
동창회에 참석하였지만
그 친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어요
어느곳에서 취직을 했던지
공부를 시작했던지 했겠지요
감사드려요
오늘은 한 여름같았어요
감기 조심하시고요~~
그시절
시골 처녀들이
상경 하면
할수있는 대표적인
일이지요
그정도
결기 라면
무엇이든지
해냈겠지요
아픈 이야기 입니다
시대가 그런 슬픈 시대였어요
뭐든지 해야 했던
안내양이 취직하기 제일 쉬운 직업이었나 봐요
감사드려요 매방산님 건강 챙기시고요~
버스 안내양에 대한 아픈 추억이 있었습니다 ~
그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린 나이에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요
하지만 버스에서 내려 어디로 갔을까
하는 생각에 더 마음이 아팠네요
감사드려요
독감이 유행이라네요
감기 조심하시고요~
얼마나 창피했으면 버스에서 내려 사라졌을까요
아마 그분은 그만두고 다른 일을 했을거 같습니다
지금은 어디선가 잘살고 계실겁니다
저도 전에 그녀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란글로
안내양에 대한 추억을 이곳에 올린적이 있습니다
어린나이에 안내양 유니폼을 입은 모습을
보이기 싫었겠죠
하지만 버스에서 내려 어찌했을까요
댓글 감사드려요
항상 건강하십시오~
충격적입니다. ㅜㅜ
그 시절에는 안내양 구직 광고가
무척 많았던 걸로 기억 됩니다
감사드려요
편안한 오후 보내시고요~
1.오라이 스톱 마즈막 버습니다 빨리빨리 타세요 차례차례로 나는야 시골버스 차장이구요
그이는 제대장병 운전수야요 뿌붕뿡 덜컹덜컹 다이아가 빵구
시골버스 여차장은 수집구만유.
2.오라이 스톱 두 시간 연착이오
차속에서 여손님 옥동자 낳소
황소가 길을 막아 늦은데다가
빵구로 마차시켜 끌고 왔지요
뿌붕뿡 덜컹덜컹 기어가는 차지만
시골버스 여차장은 친절하당께.
3.오라이 스톱 읍내 가는 버습니다
멀미하는 할머니 창 옆에 가소 친정가는 떡동구리 선반에 나요
족도리 사모관대 신랑각시는 뿌붕뿡 덜컹덜컹 흔들리면 싱글벙글 시골버스 여차장은 명랑하구마.
노래 가사 인가 봐요
그 시절 취직하기 쉬운 직업이 안내양 였던 것 같습니다
댓글 감사드려요
아직 환절기이지요
감기 조심하시고요~~
저도 동창이 졸업후
차장하면서 동생들 공부시키고 집안의 기둥이었어요
교복입은 제가 타고 다녔는데
지금에서 돌아보면
얼마나 힘들었을지ㅠ.
지금은 오리고기집 크게 하면서 잘 삽니다
어느날 동생이 엄마모시고 고기먹으러 갔더니
돌아가신 엄마생각난다며
용돈까지 손에 쥐어주더랍니다
다들 열심히 살았으니
잘살고 있고말고요
고생은 사서도 한다했지만
안내양 유니폼을 입은 모습을
나에게 보이지 않으려 했던 것 같아요
힘들었지만
그시절이 그리운 오후입니다
감사드려요 항상 건강 하십시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내양 하면서 월급타 시골집으로 송금했었겠지요
어려웠던 그시절
그땐 정이란게 있었지요~
감사드려요
편안한 오후보내시고요
가난을 벗어나려 온나라가 힘썻던 그시절 이야기들,
저는 시골친구나 동창이 없어서 비슷한 이야기조차 없지만 공감은 할수 있겠네요.
가난 벗어나려
온몸 던지며 일으킨 지금
부디 잘 가꾸어가길
진심으로 바라게 됩니다
제의 누나 친구분은
안내양하면서 동생들 학비를 보내주었어요
75년도 이니까
서울 외 시골에는 비포장도 많았구요
가끔 일기장을 펼치며 생각해봅니다
난 그친구를 모르는데
그 친구는 해병대 복장을 한 나를 알아보았구나
모른척 지나가지...
바보처럼. 바보같이
버스를 버리고 가는 발길이 얼마나 아팟을까 하고요~~
리진님 감사드려요
요즘 독김이 유행이라네요
감기 조심하시고요~~
@정 아 힘 들었던 시절이었지만
당시에는 인정이라는게 있었는 데요
지금은 너무 각박 합니다
감사 드려요
편안한 오후 되시고요~
상처받은 과일은 빨리 익는다지요
아픈만큼 빠른성장 했지싶고요 영민한 그분 잘살아 냈을것이고 결과도 좋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지금은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노인이 되어
계절 속을 걷고 있겠죠
어디 있던지 건강하게 잘 살기를 바라지요
감사드려요 함박산 2님
항상 건강 하시길 바랍니다
네 아픈 사연있어요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