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아주 특별한 번개'이후 여러 친구분들이
거기에 대한 의견들을 올려주셨었지요..
읽으면서 부끄럽기도 하고 마음아프기도 하고
정말 눈시울이 뜨거웠습니다.
예전에 그 할머님들이 그리신 작품전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관련 그림을 찾아 올려 드리려고 돌아다니다가.. 이제야 찾아서 올려드립니다.
우선은요...
80년 5월 광주를 소재로 한 판화 연작<쓰러진 사람들을 위한 기도>
http://www.kwangjubiennale.org/last-biennale/95/95-special/22.jpg
http://www.hani.co.kr/h21/data/L980518/image/83-1.jpg
일본 작가 도미야마 다에코의 그림입니다.
제 1회 광주비엔날레 때 소개되었었지요.
1922년생인 도미야마 다에코는
식민지 시대를 산 일본인으로서
아시아의 양심과 일본의 과거사를 세상에 알리는
작품을 제작하는데 주력해 온 화가입니다.
종군위안부 문제 외에도
우리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관심이 많아
입국금지조처를 받았던 외국인이기도 하지요.
그녀는 종군위안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일본정부의 천인공노할 만행에 너무 놀란 나머지
작품을 제작하면서 가슴 속에서 얼마나 큰 분노가 일어났던지
스스로도 매우 놀랐다고 토로한 적이 있었습니다.
종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작품들은
위에 올린 것들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끔찍한 감정이 살아있는
작품들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군요.
<전쟁, 환상의 눈>
이 작품은 동아시아의 패권자를 자처하는 일본을 흰 여우..
사냥감을 홀리는 약탈자에 비견한 그림입니다.
http://www.kwangjubiennale.org/bien20/sspeci-artartist11-pbig.htm
다음은 종군위안부의 뼈저린 상처를
그림으로 표현하신 할머니들의 그림들을 보여드릴게요.
좀 많지만..되도록 다 보셨으면 좋겠구요,
설명은 생략합니다...누구라도 쉽게 아실테니 말입니다.
편하게 보실 수 있게 붙여드리고 싶었지만 실력부족으로 링크합니다.
특히 위 그림들을 그리신 강덕경 할머님은
일본군의 만행과 당신의 아픈 심사를 그림을 통해 적극적으로 표현하셨고,
죽음을 눈 앞에 두시고도 정부가 아닌 민간기금 형식으로 전달해 온
일본인들의 '사죄'아닌 '타협'안을 끝까지 거부하셨던 분입니다.
비참한 위안부생활로 급성신우신장염을 앓고 계시긴 하셨으나
연세도 가장 어리시고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시던 강덕경 할머님은
1995년 폐암 말기 선고를 받고 모두들 놀라고 슬퍼하는 가운데,
스스로 변영주 감독을 찾아오셔서
자신이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영화를 찍어달라고 부탁하셨답니다.
<낮은 목소리> 연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고 하더군요.
결국 1년여 투병생활을 한 후 돌아가시기 전
"내가 그린 그림을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역사에 알려달라."고 하셨고,
후손인 우리들이 해야 할 일 중의 하나는..절대로 잊지 않는 것,
그 분의 그림을 보고 종군위안부 생활의 아픔과 결코 사라지지 않는 분노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서 너무나도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아래 주소로 가시면 강덕경 할머님의 추모 비디오가 있습니다.
채널인 http://www.channelin.com
채널인의 ch 1116 바로가기
http://www.channelin.com/channel/ch_main.asp?ch_id=108
여기 가져와 보여드리고 싶었으나,
로그인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라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가입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ch 1116은 정대협 관련소식을 전문으로 모아놓은 곳으로
위에 있는 할머니들의 작품과, 정대협의 활동내용, 당시의 현장사진..
그리고 관련된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참 잘 잊어버리고들 삽니다.
마주치면 가슴아파하고, 분노하며 행동하자고 목소리를 높이다가도
또 그렇게 잊고 살아갈 겁니다.
너무나도 죄송스럽지요....정말로요...
할머님들의 모습을 영화로 만들었던 변영주 감독을 아실 겁니다.
그 분들의 아픔과 그보다 더 큰 희망을 담아낸 영화지요.
1995년 4월 <낮은 목소리>를 연출하고 난 후 그녀가 했던 말로
저의 죄송스러운 마음을 감춰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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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섣부른 엄살일지도 모릅니다.
수십년을 들여 기록영화를 만들었던 위대한 감독들을 생각하면
감히 여기서 고생담을 늘어놓을 수도 없습니다.
한편의 기록영화를 만들었다고 해서
할머니들의 한숨과 분노를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지난 1년 8개월은 지금도 저를 몸살나게 합니다.
1993년 7월, 나는 멋대로 이 영화를 먼저 시작해버렸습니다.
조금은 성가시고 많이 상처받은 모습으로,
할머니들은 훨씬 뒤에서야 함께 시작해 주셨습니다.
언제부턴가 제작진과 할머니들은 의기투합했고,
서로 대견해하며 동지처럼 눈맞추고,
희망을 불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뷰 도중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흘리던 눈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하던 기대와 절망.
매일매일 저를 미치게 한 것은 이 영화를 끝까지 만드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고,
우리들은 오기가 솟았습니다.
모두가 힘들 것이라고 했던 이 영화를 끝내고야 말겠다고,
할머니들의 ‘낮은 목소리’를 알리고야 말 거라고.
1995년 1월, 모든 촬영을 마치면서 나는 깨달았습니다.
나는 이 영화를 만들면서 사랑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할머니들의 삶과 고통, 추억, 그리움, 인내와 분노에
나는 끊임없이 구애하며 목이 말랐습니다.
진정 고백하건대 이 영화는 나에게 있어서
영화라는 곱은 손으로 1년 8개월 동안
수없이 고쳐쓰며 적어내려간 한편의 연애편지입니다.
4월 첫 시사회에서 할머니들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이 영화 속에 우리가 살아 있으니'
라고 즐겁게 말씀하셨습니다.
할머니들께 새로운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영화로 많은 사람들이
살아 있는 할머니들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뒷머리가 당기는 어줍잖은 책임감이 아니라,
그 살아 있는 아픔과 희망을 만나길 바랍니다.
이 편지의 다음 장을 위하여.
그냥 끝내려다가 예전에 듣고 화났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연작 말씀인데요...
일본에서는 많은 중고등학생들이 단체관람의 형식으로 이 영화를 보고
할머님들께 편지를 보내오기도 한다는군요. 그런데...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90%에 달하는 중고등학교측이 단체관람을 거부하였다지요.
어린 학생들에게 성과 관련된 것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답니다.
지난번 웜님께서 우리의 작은 성의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셨지요.
여기는요..우리들이 할머님들께 편지를 쓸 수 있는 곳입니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바랄 수 없는 소망인 줄은 알지만
아기 한 번만 낳아봤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할머님들..
모두가 달려가서 아들 딸, 그리고 손자손녀가 되어 드립시다.
누구보다도 따스한 마음을 지닌
우리 책 읽어주는 친구들 카페의 회원님들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