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을 지우다 / 이원규
평사리 무딤이들의 보랏빛
꽃무리 속에
저 홀로 하얗게 피어난 자운영과
실상사 삼층석탑 옆
두 그루 희디흰 배롱나무
자운영이 백운영으로
백일홍이 백일백으로
제 이름을 버리고 사는 이들이여
녹슨 칼날을 갈며
돌연변이의 팽팽한 시위를 당기며
흰 소를 타고
낯선 길을 가다보면
누군가
야, 이원규!
반갑게 부르기도 하지만
안면 몰수하고
가던 길 그대로 가고 싶다
아득하고 아득하니
날 부르는
이 세상의 모든 이름들마저 지워지고
무명비 하나
저만치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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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미술가가 성인의 모델로 삼았던 사람이 십여년이 지나
악마의 모델을 찾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성인의 모델로
삼았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는 소설이 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일기를 자기 얼굴에 쓰면서
산다. 이원규 시인은 지리산에 칩거하며 지리산의 일기를
이 시인의 얼굴에 박으면서 살았으리. 아니, 어쩌면 지리산이
순수한 이 시인의 얼굴에 일기를 썼는지도 모르겠다.
서서히 나이들면서 철이 들며 자신의 얼굴을 책임지려 하는
것이 선한 인간 본연의 모습이 아닐까, 모두를 훌훌 털고
지리산으로 갈 수 있었던 시인의 용기가 부럽기도 하다
/ 황동섭 시인
[출처] 이원규 시인 3|작성자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