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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28일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제1독서 : 다니 2,31-45
복 음 : 루카 21,5-11
그때에 5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6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7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8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9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10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11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교수이자 심리학자인 로버트 에먼스는
사람들을 세 그룹으로 나눠 10주 동안 매주 1번씩 기록을 하게 했습니다.
첫 번째 그룹에는 감사한 일들을, 두 번째 그룹에는 스트레스를 느끼게 했던 일들을,
세 번째 그룹에는 일주일 동안 일어난 일들을 그저 객관적으로 적게 했습니다.
연구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감사할 일들을 적었던 첫 번째 그룹만 현실의 삶에 더 만족하고
미래를 낙관적으로 전망하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운동을 더 자주 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건강이 증진되었다고 합니다.
이 연구 결과만을 보면 무조건 감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감사하기 어렵다고 느낄 때, 더욱 감사해야 할 때임을 깨닫습니다.
우울증 환자가 치료를 거부하고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더 상황이 안 좋아집니다.
마찬가지로 감사할 일이 없다며 자기 스트레스만 바라보고 있으면 분명히 더 안 좋아지고 맙니다.
사실 우리 뇌는 가상의 현실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가상 현실을 체험할 수 있는 시설 안에서
VR 안경만 써도, 롤러코스터를 타야 경험할 수 있는
짜릿한 긴장감이나 공포를 거의 비슷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뇌는 실제 경험과 상상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본인의 생각하는 대로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계속 가지면 실제로 감사하면서 얻는 만족감을 느끼게 될 것이고,
스트레스만 계속 나열하게 되면 불만족 속에서 힘든 시간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말과 글, 또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은 아름다운 돌과 자연 예물로 꾸며졌다면서
성전 건물과 봉헌 예물을 보고 감탄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이 무너지고 부서지리라고 예언하십니다.
실제로 성전은 기원후 70년경에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것은 성전의 파괴만을 이야기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에는 마지막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슬퍼하고 절망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세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말이지요.
그래서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나고, 하늘의 무서운 징조가 일어난다고 해도
바로 끝이 아님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감사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인이 말하고 행동하는 그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명언
최고의 복수는 상대에게 똑같이 되갚아 주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 아니라,
제 삶의 가치를 굳건하게 지켜나가는 것이다(김홍신).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성전에서 하신 긴 담화의 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과
세상 종말이 오기 전의 표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루카 21,6)
옛 솔로몬 성전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기원전 586년에 파괴되었고,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에 의해
기원전 515년에 즈루빠벨의 치하에서 재건된 제 2성전이었습니다.
이 성전은 헤로데 왕에 의해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며지면서
그 본래의 의미를 잃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십니다.
사실 성전 파괴에 대해서는
이미 예언자 미카, 예레미아, 에제키엘 등에 의해 예고된 바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때와 표징을 묻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루카 21,8)
이는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에게 속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이비 메시아는 누구일까요?
우리는 ‘재물’이라는 우상을 사이비 구세주로
따르고 속아 넘어가고 있지는 않는지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세상에는 “돈을 많이 벌게 해주겠소.”
“치유해 주고 행복하게 해주겠소.”하고 외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결국 우상을 따르고 섬기도록 부추기는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 행세를 하고 있는 꼴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입으로는 주님을 구원자라 고백하지만,
정작 무엇에 목매달고 쫓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재물’이나 ‘능력’ 혹은 ‘세속정신’을 사이비 메시아로
따르고 섬기고 있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로마 12,2)
또 우리에게는 아주 특별하고 고약한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녀석입니다.
우리는 곧잘 자신의 욕망과 생각, 자신의 주장과 뜻을 섬기고 추종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곧 ‘자기 자신’이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 행세를 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디모테오에게 말합니다.
“그대 자신을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그대의 가르침의 내용을 잘 살피시오.
이렇게 꾸준히 일을 해 나가면, 그대 자신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모두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티모 4,16)
그렇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 하여라.” (루카 21,8)
주님!
속이지도 속지도 않게 하소서.
재물에 속지 않고, 세속에 속지 않게 하소서
또한 나의 생각과 견해와 편견, 허영과 탐욕에 속지 않게 하소서.
무엇보다도 내 자신과 내 자신의 뜻에 속지 않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를 담아낸 ‘영상다큐’를 볼 때가 있 습니다.
제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1970년대와 80년대의 영상을 보면 감회가 새롭습니다.
겨울이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습니다.
길가에 수북이 쌓여있는 다 타버린 하얀색의 ‘연탄’이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종종 들려오는 뉴스 중에는 ‘연탄가스’가 있습니다.
저의 집에도 연탄가스가 있어서 자칫 큰일 날 뻔했습니다.
겨우내 먹을 김치를 담그는 ‘김장’이 있습니다.
동네 어르신들이 함께 김장을 하였고,
맛있는 김치 속에 돼지고기를 삶아서 먹는 호사도 있었습니다.
동 네 개울에서 타던 ‘썰매’가 있습니다.
손재주가 좋았던 큰 형은 멋진 썰매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 나는 ‘호빵’도 있습니다. 달디단 ‘군고구마’도 있습니다.
50년이 지난 지금 서울의 겨울은 그때와는 많이 다릅니다.
다닥다닥 붙어있던 달동네는 재개발이란 이름으로 ‘아파트’로 변했습니다.
겨울을 따뜻하게 해주었던 연탄은 언제나 따뜻한 물이 나오게 해주는
가스보일러에게 자리를 내 주었습니다.
맞벌이 부부와 핵가족은 더 이상 김장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마트에서 종갓집 김치를 간편하게 사서 먹습니다.
동네 개울에서 타던 썰매는 보이지 않고 많은 젊은이들은 스키와 스노보드를 타고 있습니다.
먹을거리도 많이 변했습니다. 피자, 햄버거를 먹습니다.
배달의 민족답게 원하는 것들은 배달시켜서 먹습니다.
제가 직접 겪어온 시절은 아니지만 40년대와 50년대의 영상을 볼 때도 있습니다.
산업화 이전의 대한민국입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대한민국은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그 가난한 나라가 이념의 대립으로 둘로 나뉘었습니다.
남과 북으로 갈라진 나라는 비극의 3년 전쟁을 겪어야 했습니다.
전쟁의 결과 수많은 이산가족이 생겼습니다.
전쟁의 결과 많은 사람이 부상당하고 죽었습니다.
전쟁의 결과 그나마 있었던 산업기반 시설들이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모 세대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놀라운 경제성장의 기적을 일구어냈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누나는 가발공장에서 일하였고,
버스 차장으로 일하였고, 좁고 어두운 방에서 미싱을 돌렸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형들은 인력거를 몰았고,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밤을 새우면 일하였습니다.
공장에서 기계를 돌렸습니다. 삼촌은 서독의 탄공으로 일하러 갔습니다.
고모는 서독의 병원으로 일하러 갔습니다.
아저씨들은 사막의 나라 중동으로 일하러 갔습니다.
제가 자라면서 보아왔던 생생한 기억들입니다.
그리고 2023년 대한민국은 경제력으로 부유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문화적으로 ‘한류’를 보여주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Made in Korea'는 부끄러운 제품이 아니라
당당하게 어깨를 겨루는 자랑스러운 제품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자원이 풍족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아서도 아닙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강한 ’정신‘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2000년 교회의 역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죽었고, 제자들은 모두 무서워서 숨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땅에서도 새싹은 올라오듯이
죽음을 넘어, 시대를 넘어 부활의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교회는 갈릴래아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 세상 끝까지 세워졌습니다.
239년 전에 세워진 조선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박해의 모진 광풍이 불었습니다. 수많은 신앙인들이 순교하였습니다.
239년이 지난 대한민국의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쳤던 곳은 ‘성지’가 되었습니다.
원조를 받던 교회는 이제 원조를 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어두웠던 시대에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었습니다.
많은사람들 이 교회를 통해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매 10년마다 100만 명씩 신자가 늘어나는 놀라운 모습을 저는 직접 보았습니다.
신앙은 혼자 뛰는 마라톤이 아닙니다. 신앙은 함께 뛰는 이어달리기입니다.
오늘 나의 ‘삶’이 뒤에 오는 이들에게 ‘이정표’가 될 수 있도록
열정과 헌신으로 복음을 살면 좋겠습니다.
“이 임금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느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그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그 왕권이 다른 민족에게 넘어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꿈은 확실하고 그 뜻은 틀림없습니다.”
깨어 준비하면 걱정할 것이 없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루살렘 성전은 기구한 운명을 겪었습니다.
세 번에 걸쳐서 세워지고, 세 번 무너진 기구한 운명을 겪었습니다.
첫 번째 성전은 가장 화려한 왕권을 누린 솔로몬 왕 때 건축되었고,
솔로몬이 죽고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게 되었으며
남 유다는 기원전 587년 바빌론에 의해 멸망 당하고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어 성전은 무너졌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노예로 살았습니다.
그 후 기원전 538년 바빌론을 제압한 페르시아의 키루스 황제에 의해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환 이후 제일 먼저 성전을 재건 하였으나
이 제2의 성전 또한 기원전 170년경 시리아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점령되고 맙니다.
시리아왕은 유다인을 말살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유다교를 핍박하였으며
예루살렘 성전을 폐허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성전 한가운데 제우스 신의 제단을 세우고
유다인들이 가장 부정하게 생각하는 돼지고기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습니다.
그 후 시리아가 멸망하고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써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로마의 헤로데왕은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의 성을 다시 화려하게 증축하였고
이 성전이 다시 폐허로 변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예언하셨는데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35년경 전후이고 기원후 70년경 성전은 또다시 로마에 의해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예루살렘 성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유다인들 전체가 나라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이스라엘로 정착하기까지 유다인들은 참으로 험난한 길을 걸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아직 복원되지 못하고 그 자리에는 이슬람 사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다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의 성지로써 의미 깊은 땅이 되어 있습니다.
그토록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께서 함께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폐허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충만하였지만, 회개하지 않았고
하느님을 외면하였으며 은총을 담을 그릇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앞서 겪게 될 환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헛된 예언자가 나타나고,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가 등장하며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과 기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 했습니다.
세상의 종말은 결국 혼란을 겪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결코 헛된 예언에 속는 일이 없도록 하고 큰 표징들에 무서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내가 평정을 지키고 있으면 바깥바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진 대,
어떤 표징이 일어나면 어떻고, 종말이 오면 어떻습니까?
그저 오늘을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깨어 준비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약속한 미래를 희망할 뿐입니다.
희망하는 만큼 지금에 충실합니다.
작은 불은, 바람 앞에서 쉽게 꺼지지만 큰 불은 바람 앞에서 활활 탑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큰 사람은 환난 앞에서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세상 종말에 앞선 외적인 혼란을 두려워 말고
오히려 마음 안에 평온이 없음을 염려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 예고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에서 보면, 어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과 화려함에 감탄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그 성전이 돌 위에 돌이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파괴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성전이 언제 무너질 것이며 당신께서 오시기 전에 어떤 표징들이 나타날 것이냐는 질문에,
주님께서는 그 표징들에 대해 일러 주시며 그때가 언제인지는 알려주시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많은 사람이 오류에 빠져 참된 믿음을 버리고 떠나갈 것이다.
그러면 마침내 주님의 날이 올 것이다.
주님께서 첫 번째 오심은 속죄를 위해서였고
두 번째 오심은 더 많은 이가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주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일어날 일을 알려주시며 그들에게 경계하라고 하신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8절).
두 번째로 오실 때에는 비밀리에 오시지 않고 무시무시하고 화려하게 오실 것이다.
세상을 정의로 심판하기 위하여,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내려오실 것이다.
하느님은 이 모든 것을 미리 말씀해 주셨다. 우리는 모든 말씀을 읽고 들었다.
우리는 언제 종말이 오는지 우리 모두 들었다.
그때에는 전쟁과 지진과 환난과 기근이 일어날 것이다(마르 13,7-8).
마지막 날에 민족과 민족이 맞서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날 것이다.
너희가 전쟁과 지진과 기근을 보게 되거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라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종말이 가까웠을 때, 일어날 표징들을 알려주신다.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고 하신다.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다.
예루살렘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셨고 당신 백성들과 만나신 유서 깊은 곳이다. 그런데 그토록 파멸했다.
예루살렘처럼 회개하지 아니하고 자기중심적으로 하느님을 따른다고 할 때,
이러한 파멸을 우리 자신도 당하게 될 것을 경고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신다. 벌주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뜻을 거부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그 길을 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언제나 주님의 뜻에 귀 기울이고 그분 안에 기쁨의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이 될 것이다.
보다 영원한 성전, 보다 진실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건립합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한 몇 년 동안 저희 수도회 창립자 발자취를 따라가는 기획 순례 담당자로 일할 때였습니다.
원 없이 명품 성당들을 셀 수도 없이 순례했습니다. 나중에는 질릴 정도였습니다.
엄청난 대성당의 규모를 바라보며, 고색창연하고 화려한 모습을 바라보며,
성당 내부에 가득 찬 역사적이고 찬란한 작품들을 바라보면서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습니다.
예수님 시대 지어졌던 예루살렘의 대성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대성전이 값비싼 돌과 진귀한 보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습니다.
얼마나 장중하고 화려했으면 당시 관광의 명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외형이나 허례허식, 겉치레를 누구보다도 싫어하시던 분이셨습니다.
잠시 지나가는 외적인 화려함보다는 항구함, 영속성, 진실함을 추구하시던 분,
본질과 핵심을 꿰뚫어 보시던 분이셨습니다.
지금 비록 당신 눈앞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대성전이지만,
세월의 흐름 앞에 서서히 허물어질 건물, 언젠가 수명을 다해 사라질,
별 것 아닌 인간의 업적임을 잘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과 인간의 차이를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항구함입니다. 영속성입니다. 불변함입니다. 언제나 거기 계심입니다.
반대로 인간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가변성입니다. 변화무쌍함입니다. 유한성입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확실성입니다.
이런 불완전한 인간이 짓는 인간의 성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성전이라 할지라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50년, 100년, 200년이 흐르면 서서히 허물어집니다.
마침내 수명을 다해 보수작업이 필수입니다.
리모델링을 해야 하며 마침내 완전히 허물고 재건축을 해야 합니다.
반대로 진정한 성전인 하느님의 집은 어떠합니까?
그 집의 특징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허물어지지 않습니다.
다른 아름다운 대성전들이 하나하나 허물어 사라질지라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하느님의 집은 다름 아닌 우리 인간 각자입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우리 각자의 영혼입니다.
비록 죄인이지만 거룩함을 추구하는 인간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세월이 흘러 시대가 바뀌고 사람도 바뀌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영성이 언제나 지속되는 우리 교회입니다.
정말이지 세월 앞에 장사 없습니다. 세월의 흐름에 모든 것이 변합니다.
영원할 것 같던 우리의 인생이 지나가고, 꿈결 같던 파릇파릇한 청춘도 가고,
꽃 같던 아름다움도 세파에 떨어지고,
한때 대단해 보였던 모든 것들이 우리 눈앞에서 사라져만 갑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느님께 드린 사랑입니다.
외형적인 성전 건립도 중요합니다.
웅장하고 화려한 문화재 성전의 유지 보수도 중요합니다.
성인들의 피와 땀이 서린 성지 계발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작업이 하나 있습니다.
참된 성전인 예수님, 그분의 사랑의 정신과 영성으로 충만한 제대로 된 나,
그리고 우리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입니다.
몇백 년 세월이 흘러가면 수명을 다해
어쩔 수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그런 성전이 아닌,
보다 영원한 성전, 보다 진실하고 아름다운 성전인 우리 공동체를 건립하는 일입니다.
오늘 내 삶의 동기와 지향은?
박상대 마르코 신부
어제 복음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동전 두 닢이라는 과부의 헌금(루카 2,1-4)이
과연 자신의 가진 것 모두를 바친 것인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당장은 알기 어렵지만 언젠가는 밝혀질 것이다.
그 ‘언제’란 바로 종말 때의 심판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종말까지 갈 필요는 없다.
누구보다 자기 스스로가 자신이 행한 행동의 動機(motive), 志向(intention)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께 바치는 헌금하는 자의 마음이 결정하는 것이다.
문제는 늘 제3자의 시각과 판단이다.
부자가 넉넉한 가운데서 많이 바치고 자랑스럽게 뽐내는 행동과,
과부의 경우처럼 가난한 사람이 어려운 가운데서 가진 모든 것을 바치고도
부끄러워 미안해하는 행동은 겉으로만 보이는 제3자의 인식이다.
그러나 부자와 가난한 자의 그 속마음과 사정을 제3자가 어떻게 알겠는가?
따라서 제3자의 인식에는 분명히 矛盾(contradiction), 不一致(discrepancy)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종말의 공심판이 필요한 셈이다.
교회 전례력의 마지막 주간(화~토요일)에 들려주는
매일 미사의 독서와 복음 말씀은 모두 세상 종말에 관한 내용이다.
독서는 홀수 해의 경우, 다니엘서(1-7장)의 말씀을 듣고,
짝수에의 경우에는 연중 제33주간 월요일부터 34주간 토요일까지
요한 묵시록(1-22장)의 말씀을 듣게 되며, 복음으로는 루카복음 21장을 듣는다.
모든 내용이 종말론적이고 默示문학적인 성격을 아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종말과 묵시적 성격이란,
세상이 이제 그 마지막에 직면하여 드러내거나 맞이하게 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말한다.
啓示(revelation)라는 개념이 ‘시작’과 관련하여
새로운 것과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드러내는 단어라면,
‘종말’과 ‘묵시’와 관련하여 드러나거나 맞이하게 될 일들을 대표하는 개념은
顯現(epiphany)과 폭로(apocalypse)라는 단어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세상의 종말을 선언하는
대변화, 죽음과 부활, 그리스도의 재림, 生者와 死者에 대한 그분의 심판,
그리고 종말 후의 來世에 관한 일 등이다.
성서상 종말과 묵시 문학적 유형으로는
구약의 다니엘서(BC160년경)와 신약의 요한 묵시록(AD 100년경)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구약시대 말기에 편집된 묵시문학적 작품들은
‘에디오피아語 에녹서’, ‘희년서’, ‘시빌라의 신탁’, ‘열두 족장의 유언’, ‘모세의 승천기’,
‘솔로몬의 시편’, ‘제2 에즈라서’, ‘시리아의 바룩서‘ 등 그 규모가 실로 방대하다.
묵시문학의 발생원인은 이스라엘이 외세의 지속적인 침략에 의해 主權을 잃고
(BC 721년 북왕조 멸망, 587년 남왕조 멸망과 유배생활,
333년부터 알렉산더 대왕과 희랍의 지배, 63년부터 로마제국의 지배)
의기소침한 가운데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주권 회복을
야훼 하느님이나 그분의 使者 또는 메시아에 의탁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묵시문학은 천지창조부터 세상 종말까지의 환란과 난세의 역사를 다루면서
종말 사건과 내세를 통한 통렬한 개벽과 역전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염원하던 개벽과 역전은 없었고,
한 가닥 독립 전쟁(AD66-70)의 시도마저 여지없이 실패로 돌아갔으며,
그 대가로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이스라엘 자존심의 상징인 성전까지 불타고 말았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께서도 공생활 마지막 시점에서
세상 종말과 관련하여 묵시 문학적 가르침을 주셨다.
(마태 24,1-25, 46; 마르 13,1-37; 루카 21,5-36)
그러나 예수님의 종말 교훈은 이스라엘의 염원이나 묵시 문학자들의 생각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것은 구약의 묵시 문학적 염원과 예언의 성취자로 예수께서 이미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도래는 단지 ’사람의 눈으로 오는 것을 불 수 없을 뿐‘(루카 17,20)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왔다는 증거이다.
이렇게 臨在하여 있는 하느님 나라는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끝나는 것도,
가짜 그리스도의 출현이나 반란과 전쟁, 기근과 전염병이나 지진과
우주적 징조로도 끝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왜 공관복음들이 제각기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종말의 시작,
큰 재난의 예고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최후 만찬을 앞둔 시점에
배치하고 있는지를 깨닫는 것이다.(마태 24장; 마르 13장; 루카 21장)
예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파스카의 성삼일)을 목전에 두고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면서
당신의 몸으로 이루어질 新約의 새로운 성전을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아름다운 돌과 사람들이 갖다 바친 예물로 인해
겉으로만 화려한 성전을 보고 넋 나간 듯이 감탄하지 말고,
그 성전 안을 맑은 눈과 마음으로 들여다보며, 자신의 성전을 내적 아름다움으로 채우는 일이다.
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당하는 불행의 결과만 놓고 땅을 치며 통곡할 것이 아니라
그럴수록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침착하며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다.
또 중요한 것은 헛되고 표면적인 가치나 사상,
특히 富나 재물이나 돈 같은 맘몬(Mammon)이나 우상을 따르지 말고,
오직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의 말씀과 가르침을 귀 기울여 듣고 마음에 새겨 실천하는 것이다.
이는 세상의 종말보다 오늘 내 삶의 동기와 지향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이승화 시몬 신부
성당은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입니다.
성당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은
하느님께로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의미를 담고 있고
화려한 치장과 단조로운 장식도
모두 저마다의 의미로 하느님께 인도합니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순서가 바뀌곤 합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려는 사람이 아닌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도록 돕는 요소에 매몰되어
물건만 지키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보입니다.
물론 둘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디에 방점을 두느냐에 따라
정작 사람을 버리고 물건만 지키게 되고
때로는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자기만족으로만 대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성전의 아름다움은 치장과 장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임을 알려줍니다.
많은 이들이 멋드런 말로 사람들을 유혹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미 전해 받은 신앙을 성실히 지키고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뜻을 찾는 우리의 자세입니다.
그것을 잊으면
혼란과 환난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생명의 화관은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이 아니라
실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삶에 달려 있습니다.
직책이나 직위, 경력이 아니라
지금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정화를 위한 상실의 아픔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을 더 사랑하기에 하느님 외의 것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 들어 올리며
주님 안에서 더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 ‘시몬 신부의 신앙 이야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