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 생명의 노래, 200호 크기, 혼합재료에 먹과 채색, 2020
■ 이브 몽탕과 샹송 ‘고엽’
몽마르트르 카페 ‘라팽 아질’
에디트 피아프가 노래하던 곳
고즈넉한 파리 옛 분위기 여전
잡역부처럼 일하던 이브 몽탕
피아프와 연인 된 뒤 전성기
샹송가수 겸 배우로 사랑받아
사랑·이별 사연 간직한 ‘고엽’
인생의 빛·그늘 노래하는 듯
나는 지금 카페 라팽 아질(Lapin agile)의 흔들리는 불빛 아래에 앉아 있다. 화가 앙드레 질이 벽에 그린 와인병을 든 토끼 그림으로 유명해진 곳. 이 집은 그래서 ‘민첩한 토끼’라는 이름의 별호로도 불린다. 화가가 벽에 그 그림을 그릴 때만 해도 설마 이토록 유명해질 줄은 몰랐을 것이다. 어쩌면 술병 든 토끼는 화가 자신일 수도 있겠다. 이제는 관광업소처럼 바뀌어 버린 시끌벅적한 물랭루주보다는 이곳이 훨씬 고즈넉하게 파리의 옛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랭보의 집’으로 알려져 있을 만치 시인과 음악가들이 자주 드나들었다는 곳이어서 아직도 그들의 에스프리를 느낄 수 있는 점도 고맙고 말고다. 저만치 어둑한 곳에서 우울한 랭보가 뭔가를 끄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오래된 붉은 벽돌의 한쪽 벽을 담쟁이들이 뒤덮다시피 감아 도는데 그 이상한 술병 든 토끼 그림은 그 속에 보일락 말락 숨어 있다. 이제 세계적으로 유명해져 있어서 그 그림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라는데. 그러고 보면 여행자의 옷소매를 잡아끄는 것은 번쩍거리는 새것보다는 이렇게 낡고 오래돼 사라져 가는 것들이다. 희미한 불빛이나 잡초 속에 삐죽 나와 있는 돌비석 하나에 마음과 눈길이 쏠리는 일은 얼마나 많은가.
잡초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시인 랠프 월도 에머슨이 말했단다. 잡초란 아직 그 아름다움이 발견되지 않은 식물이라고. 가끔 ‘아름다움’이 ‘미덕(美德)’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문장은 이렇게 계속된다. ‘(그러니) 아름다움을 볼 기회를 놓치지 말라. 그것은 신의 친필이며 거리의 성사(聖事)다.’
그런데 잡초는 어떻게 발견돼서 아름다운 꽃이 될 수 있는가. “사랑의 손길이 닿을 때”라는 것은 플라톤의 정의. 그 손길이 닿으면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단다. 왜 아니겠는가. 파리하고도 몽마르트르 언덕의 한 노래하는 술집에 이탈리아에서 무작정 상경한 청년 하나가 있었다. 그곳에서 잡초, 아니 잡역부처럼 일하던 그에게 어느 날 사랑의 손길이 닿았고 잡초 같은 인생은 순식간에 눈부신 꽃으로 피어났다. 우리가 다 아는 대로 ‘나니아 연대기’의 환상 동화 같은, 가수이자 배우 이브 몽탕의 신화다. 그가 에디트 피아프와 얽힌 사랑과 상실의 사연까지 여기서 굳이 꺼낼 필요는 없겠다. 하지만 그가 참새 아닌 ‘매의 눈’을 가진 한 여자에 의해 발견됐고 그 순간에 잡초는 꽃이 됨으로써 에머슨의 가정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그 이브 몽탕하면 잡초, 아니 ‘고엽’이 생각나고 ‘고엽’ 하면 이브 몽탕이 생각난다. 그는 많은 노래를 불렀지만 그중 ‘고엽’이라는 이름으로 피운 꽃이 가장 찬란했다. 찬란하기는 한데 거기에는 곧 지고 말 운명의 슬픔 같은 것이 어려 있는 찬란함이다. 사람들은 왜 그 슬픈 아름다움에 열광하는 것일까. 흔히들 생각하는 대로 그 노래가 파리의 아니 세상의 가을을 가장 잘 표현해 줘서였을까. 하지만 그 노랫가락에 젖어 있다 보면 그것이 기실 계절 노래이기보다는 인생 노래임을 알게 된다. 사실 거기에는 인생의 가을뿐 아니라 봄 여름 겨울이 다 담겨 있다. 그리고 그 계절들의 끝에 다가올 죽음과 이별의 다섯 번째 계절에 대한 예감까지가 담겨 있다. 그 이별의 분리 공포와 예감은 비단 노년의 어느 날에만 덮치는 감정은 아닐 터다. ‘고엽’을 남녀노소 수다한 사람이 좋아하는 이유기도 하다.
나는 서너 살 무렵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서 낮잠 자고 깨어났을 때의 그 기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방문이 열려 있었고 날파리 소리도 들릴 듯한 한낮의 고요와 정적 속에 끝없이 펼쳐져 있는 하늘을 보며 나는 섧게 울었다. 해가 설핏 질 무렵 바깥에서 들어온 엄마가 빨간 홍시를 내밀며 달랬지만 엄마의 너머로 펼쳐지던 그 끝없는 하늘이 나는 무섭고 서럽기만 했다. 훗날 이런저런 책을 읽으며 그것이 근원으로부터의 끊어짐에 대한 두려움의 감정임을 알게 됐고 심리학자들이 “분리에의 공포”라고 부른다는 것도 알았다. 그 서러움에 엄마가 내민 빨간 홍시 같은 찬란한 색채를 입히는 것이 시(詩)고 노래가 아닐까 싶다. 샹송 ‘고엽’ 또한 그렇다.
창가에 쌓이는 낙엽이여
빨강과 황금색으로 물든 낙엽이여,
나는 당신의 입술과 여름날의 입맞춤
내가 감싸 안았던 저 햇볕에 탄 당신의 손을 생각해요
그 손이 떠나간 뒤의 나날은 우울해지고
머지않아 겨울의 노래를 듣게 될 거예요
그러니 나는 그 무엇보다도 당신을 그립게 생각해요
사랑스러운 그대여
낙엽이 날아 떨어질 때에
샹송은 곡조 있는 시다. 이 시가 아니었던들 이브 몽탕의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는 그냥 센티멘털에 그칠 수 있었을 것이고 빨간 홍시의 찬란한 슬픔과도 만나지 못했으리라.
늘 시의 낭송 소리와 보헤미안 음악가들의 노래가 들려 왔다는 이 오래된 카페에서 나는 고엽의 노랫말을 다시 새겨본다. 고엽은 이브 몽탕이 나이 들어 부를 때가 가장 어울린다. 꼭 그의 목소리가 아니더라도 프랭크 시내트라나 냇 킹 콜의 목소리로도 좋다. 인생의 여러 풍경을 지나서 그 끝자락에 서 있는 나이의 가수가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리는 것이다.
“머지않아 듣게 될 겨울의 노래….”
우리 모두는 그 겨울을 향해 출발했거나 이미 그 목전에 다다르고 있다.
김병종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 이브 몽탕은…
伊서 태어나 佛로 이주… 어린시절 낮엔 미용실서 일하고 밤엔 살롱서 노래
이브 몽탕(1921∼1991·사진)은 여러 모습을 지녔다. 배우이자 가수이고 평화운동가였다. 본명이 이보 리비인 그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몽탕의 가족은 그가 두 살 때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즘 독재를 피해 프랑스 남쪽 항구 도시인 마르세유로 이주했다.
몽탕은 집안의 가난 탓에 어린 시절 누나의 미용실에서 일하고 밤에는 살롱에서 노래했다. 이름을 이브 몽탕으로 바꾼 그는 미국 웨스턴풍의 노래를 불렀다. 이때 ‘서부 황야에서(Dans les plaines du far west)’가 나왔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그는 독일군을 피해 파리로 떠났고, 물랭루주에서 에디트 피아프의 1부 공연을 맡았다. 두 사람은 서로 첫눈에 반했고, 피아프는 몽탕에게 무대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씩 가르쳐 줬다. 피아프와 함께 영화 ‘밤의 문(Les Portes de la Nuit)’에 출연했지만 영화는 실패했고 피아프도 그를 떠났다. 그러나 이 영화에 삽입된 ‘고엽(Les feuilles mortes)’은 후일 불후의 명곡이 됐다.
배우인 시몬 시뇨레를 만나 1951년 결혼한 그는 아내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 공산당에 동조하는 정치 활동을 했다. 1959년 미국행을 단행, 메릴린 먼로와 영화를 함께 찍으면서 둘 사이에 염문이 떠돌기도 했다.
1968년 공산주의와 단절을 선언한 이후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인권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됐다. 1981년 폴란드의 반공산주의 노동자 단체와 그 지도자인 레흐 바웬사를 위해 투쟁에 참여했다.
1985년 9월 아내 시뇨레가 죽자 더 이상 노래하지 않았다. 공산주의에 대한 좌절을 경험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연 활동에 힘썼다. 그러면서도 영화와 TV를 오가며 분주한 시간을 보내다가 1991년 11월 영화 촬영 도중 숨을 거뒀다.
첫댓글 어린시절
집으로 배달되던 신문에 실린
한수산님의 연재 소설
'내일은 비' 의 삽화로 김병종 화가를 기억합니다.
신문에 연재되는
성인 소설을
아버지 몰래 읽던
소녀.
곧 가을이 오고
낙엽도 포도 위를 뒹굴겠지요.
사진을 보니
이브 몽탕과
알랭 드롱의
서늘한 눈빛이
닮아 있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