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1월 10일 인사동 정모에서 낭송했던 시 목록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낭송한 분들의 닉네임을 함께 표기했습니다.
뜨거웠던 정모 열기를 떠올리며 함께 감상해 보면 어떨까요?
거울 보면서 직접 낭송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올려야 되는 걸 미처 몰랐었습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이 사실을 알았으니 다행이 아닐까요?
혹시, 본인이 낭송한 시가 아닐 경우 꼭 지적해 주십시오. 오래 되어 기억이 희미해졌음을 밝힙니다.
시사랑 [인사동 정모] 낭송시
1. 오래된 골목 / 천양희 [오래된골목]님
2. 서른, 잔치는 끝났다 / 최영미 [-어린왕자-]님
3. 강진 편지 / 정끝별 [플로우]님
4.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 프랑시스 잠 [JOOFE]님
5. 슬픔의 바다 / 김정란 [슬픔의바다]님
6. 섬 / 강연호 [heartbreak]님
7. 病 / 기형도 [노을에갇힌새]님
8. 이 가을에 나는 / 김남주 [해평]님
9.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 허수경 [초록여신]
10. 내가 사랑하는 사람 / 정호승 [사탕dk ]님
11. 숨길 수 없는 노래 2 / 이성복 [heartbreak]님
12. 낙화 / 조지훈 [하늘사랑]님
* 반디님/ 민영기님/ 여나님/ 가리워진길님/은 늦게 오신 관계로 시사랑 낭송을 하지 못하셨습니다.
오래된 골목 / 천양희
길동 뒷길을 몇번 돌았다
옛집 찾으려다 다다른 막다른 길
골목은 왜 막다르기만 한 것일까
골과 목이 꽉 막히는 것 같아
엉거주춤 나는 길 안에 섰다
골을 넘어가고 싶은 목을 넘어가고 싶은 골목이
담장 너머 높은 집들을 올려다본다
올려다볼 것은 저게 아닌데
높은 것이 다 좋은 건 아니라고
낮은 지붕들이 중얼거린다
나는 잠시 골목 끝에 서서
오래된 것은 오래되어서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래된 친구 오래된 나무 오래된 미래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나무가 미래일까
미래도 없이 우린 너무 오래되었다
오래된 몸이 막다른 골목 같아
오래된 나무 아래 오래 앉아본다
세상의 나무들 모두 無憂樹 같아
그 자리 비켜갈 수 없다
나는 아직 걱정 없이 산 적 없어
無憂 무우 하다 우우, 우울해진다
그러나 길도 때로 막힐 때가 있다
막힌 길을 골목이 받아적고 있다
골목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고 있다고
옛집 찾다 다다른 막다른 길
너무 오래된 골목
(시집- 오래된 골목, 창작과비평사)
서른, 잔치는 끝났다 / 최영미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는 운동가를
술보다는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 ! 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
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시집-서른, 잔치는 끝났다, 창작과비평사)
강진 편지 / 정끝별
버석이던 갈대 잎은 바람에 쏠렸는데요 산벚꽃 웃음에 춘백春柏의 눈매는 헛헛히 무너졌는데요 그렇게 웃자란 꽃핌은 온통 상처라 당신 곁 무릎쯤만 내어주고 싶었는데요 몸끝 어쩌지 못하고 물오르는 풀인지 향기인지
모란 잎새 그늘 불현듯 꿈틀대던 꽃대도 그 꽃대 끝에서 떨던 소란한 저녁 물비늘도 몸안을 일렁이던 햇살도 죄다 한통속들이었는데요 그렇게 한백년 비껴 서 있던 당신 겨드랑이와 내 겨드랑이가 이제야 키 낮은 망대를 만들다니
바라보는 일만도 망설임이었거늘 가슴에 서로를 묻는 일이야 만장輓章처럼 당신 쪽으로 누운 풀자국에 내내 가난할 것입니다 모란 냄새 선명한 하마 흔하디흔한 한 봄밤으로 나 내내 따뜻할 것입니다
(시집- 흰 책, 민음사)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 프랑시스 잠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나무병에
우유를 담는 일,
꼿꼿하고 살갗을 찌르는
밀 이삭들을 따는 일,
암소들을 신선한 오리나무들 옆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일,
숲의 자작나무들을
베는 일,
경쾌하게 흘러가는 시내 옆에서
버들가지를 꼬는 일,
어두운 벽난로와, 옴 오른
늙은 고양이와, 잠든 티티새와,
즐겁게 노는 어린 아이들 옆에서
낡은 구두를 수선하는 일,
한밤중 귀뚜라미들이 날카롭게
울 때 처지는 소리를 내며
베틀을 짜는 일,
빵을 만들고
포도주를 만드는 일,
정원에 양배추와 마늘의
씨앗을 뿌리는 일,
그리고 따뜻한
달걀들을 거두어들이는 일.
슬픔의 바다 / 김정란
난 내가 혼자 건너가야 할 이 생의 바다를 그렇게 불러요
슬픔 또는 내가 할 수 있는 바의 다함의 바다라고
이젠 알아요 왜 당신이 그토록 내 눈앞에
완강히 옆모습으로만 나타났던지
그것이 운명이 내게 던진 도전의 기회라는걸
한때는 당신이랑 같이 그 바다를 건너가고 싶었어 정말로 간절히
이승에서 그저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만나듯이 그렇게
이젠 알아요 내가 이 바다를 혼자 다 건너야 저 건너에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듯이 당신을 만나리라는걸
내가 나의 당신을 여의어야 그의 당신을 얻는다는걸
거기 그의 땅에 한 송이 꽃이 아니라 천만 송이로 피어있는 당신을
내가 나로 가지리라는 걸 이 생에서 오래 참고 오래 기다린 뒤에
이 슬픔의 바다를 다 건넌 뒤에 그때에 내가 진실로
사랑을 알게 되리라는걸
(제22회 소월문학상 수상작품집)
섬 / 강연호
당신이 정박하신 항구에 나는 배를 댈 수가 없습니다 불러보아도 썰물에 밀리는 그리움 폭풍에 나가 떨어지는 뱃고동일 뿐입니다 누가 내 힘겨운 방향타를 저 캄캄한 바다로 돌려 놓았는지 환장할 지경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찢기운 돛폭자락마저 입술 벌리고 비웃음을 나부낍니다
자정을 소스라치는 삼각파도 무지막지합니다 수평선 마구 물어뜯는 저 의지의 이빨 이빨들, 바다는 온통 굶주림 성성한 상어떼가 되어 뱃전 위협하는데 시방 당신의 정박이 토해놓은 불빛은 얼마나 멀고 아득한지요 흐느적거리는 등뼈 조각을 곧추세우기에는 이제 너무 지쳤습니다
이윽고 항구에 불이 꺼집니다 잠시 어리는 빛살, 차라리 황홀하다고나 할까요 허나 삽시간에 어둠이 폭력을 휘두르고 나는 다시 저 바다를 떠돌아야 합니다 떠돌 곳 다 떠돌아 파란만장 정처 없어야 합니다 당신의 무심한 정박이 잠시 뒤척이다가 닻줄 스르르 풀릴 때까지는요
필경엔 당신도 떠도는 섬일 테지만... 그때까지 무럭무럭 그리울 겁니다
(비단길, 세계사)
病 / 기형도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主語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든다.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이 가을에 나는 / 김남주
이 가을에 나는 푸른옷의 수인이다
오라에 묶여 손목이 사슬에 묶여
또 다른 곳으로 끌려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번에는
전주옥일까 대전옥일까 아니면 대구옥일까
나를 태운 압송차가
낯익은 거리 산과 강을 끼고
들판 가운데를 달린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따가운 햇살 등에 받으며 저만큼에서
고추를 따고 있는 어머니의 밭으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숫돌에 낫을 갈아 벼를 베고 있는 아버지의 논으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 내려
염소에서 뿔싸움을 시키고 있는 아이들의 방죽가로 가고 싶다
가서 그들과 함께 나도 일하고 놀고 싶다
이 허리 이 손목에서 오라 풀고 사슬 풀고
발목이 시도록 들길 한번 나도 걷고 싶다
하늘 향해 두 팔 벌리고 논둑길 밭둑길을 내달리고 싶다
가다가 목이 마르면 샘물에 갈증을 적시고
가다가 가다가 배라도 고프면
하늘로 웃자란 하얀 무를 뽑아 먹고
날 저물어 지치면 귀소의 새를 따라 나도 가고 싶다 나의 집으로
그러나 나를 태운 압송차는 멈춰주지를 않는다
내를 끼고 강을 건너 땅거미가 내리는 산기슭에 돈다
저 건너 마을에서는 저녁밥을 짓고 있는가 연기가 피어오르고
이 가을에 나는 푸른옷의 수인이다
이 가을에 나는 푸른옷의 수인이다
(시집-옛 마을을 지나며, 문학동네)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 허수경
그때, 나는 묻는다. 왜 너는 나에게 그렇게 차가웠는가.
그러면 너는 나에게 물을 것이다. 그때, 너는 왜 나에게 그렇게 뜨거웠는가.
서로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때 서로 어긋나거나 만나거나 안거나 뒹굴거나 그럴 때,
서로의 가슴이 이를테면 사슴처럼 저 너른 우주의 밭을 돌아 서로에게로 갈 때,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럴 때, 미워하거나 사랑하거나 그럴 때,
나는 내가 태어나서 어떤 시간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이 고맙다.
(시집 없어 출처를 못 밝힘)
내가 사랑하는 사람 / 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랑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열림원)
숨길 수 없는 노래 2 [이성복]
아직 내가 서루운 것은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
이다 봄하늘 아득히 황사가 내려 길도 마음도 어두워지면 먼지처럼 두터
운 세월을 뚫고 나는 그대가 앉았던 자리로 간다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
재를 채우지 못하면 서러움이 나의 사랑을 채우리라
서러움 아닌 사랑이 어디 있는가 너무 빠르거나 늦은 그대여, 나보다
먼저 그대보다 먼저 우리 사랑은 서러움이다.
(시집-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낙화 / 조지훈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추신]
낭송자료집에는 있으나, 낭송되지 못했던 시들의 목록입니다.
덤으로 올립니다. 함께 감상해 보세요.
1. 감격하세요/ 정현종
2. 개여울 / 김소월
3. 내 가슴 속에는 불타는 칼이 / 조용미
4. 불러올 이름도 없고, 새 이름으로 저장할 수도 없는 / 김록
5.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 김춘수
6. 어두워진다는 것 / 나희덕
7. 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왔을 때 / 서정주
8.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 장석남
9. 첫사랑 / 조병화
10. 편지 / 김남조
11.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첫댓글 김광석님의 노래를 들으며 처음부터 낭송해 보았습니다. 역시 시란 쓰는 것이 아니라 읊는다는 말이 딱~맞는 거 같습니다. 조지훈님의 <낙화>를 읊을 때 마침 나온 노래가 <꽃>이었습니다. 이 절묘한 조화~ 시는 종교이고 믿음이고 느낌입니다. 다음 정모에는 염치,체면,부끄 등을 숨겨놓고 홀짝~다녀오렵니다.
다음 정모엔 위에 열거한 것들은 집에다 몽땅 묻어두고 편안한 마음으로 참석 하셔서 센치한 목소리로 시 한편 낭송해 주세요...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ㅎㅎ
여신님 이 많은 걸 어떻게 감사합니다 <강진편지> 중 마지막 줄...하마 흔하디흔한 한 봄밤으로 나 내내 따뜻할 것입니다..으로 수정해 주셨으면 얼마나 좋을까요...지난 번에 올릴 때 지가 빠뜨렸나봅니다. 용서하소서
제가 시집을 참조해서 다 수정한 것 같은데요. 한번 다시 읽어 보세요... ㅎㅎ
헉, 기억이 살아나면 안되는데, 혹 잊고있던 사진올리기 하면 안되는데, 흑 눈이 작아서 사진 올리면 안되는데......
`흔하디흔한'을 `흔하디흔한 한' 으로.... 한이 빠졌었나봐요 ...번거럽게해서 한 번 더.....고맙습니다
수정 완료... 이래서 시집 보고 옮기는 것도 힘들다니까요... '한'에 한 맺혀라. ㅎㅎ ... 오늘 아침은 정말 강추위가 쳐들어왔더군요, 따뜻한 하루 되시기를...
아름다운 시어들... 아름다운 시간이 느껴집니다.
저녁님도 다음 정모에 꼭 오세요. 그럼, 그 기분에 휩싸일 겁니다. ㅎㅎ
몇년전에 제가 사는 곳에서 했던 정모때의 낭송시 목록도 간직하고 있는데요, 다시 이렇게 낭송시들을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롭네요. 두고두고 잘 읽겠습니다.
전 광주 정모에 아쉽게도 병원에 있어서 ㅎㅎ 다음 정모에 옥수수님을 뵐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 감동,,, 정말 좋은 시간이 바로 그 모임의 낭송의 다함께의 ,,그 순간이 아니였을까???
초님도 다음 정모에 오셔서 그 감동을 함께 나누어 보아요. ㅎㅎ
예~~~~~~~
정모 때의 기억이 되살아 납니다. 역시 섬세하고 배려 깊으신 초록여신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