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근 반년만에 마로니에장미회(회장 장기호) 모임이 있었다.
단골로 참석하던 구대렬동문이 조금 몸이 불편하여 불참하였다. 대렬은 불참을 퍽 아쉬워했다.
오겠다던 안광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골프치러 간 것 같았다.
12시에 약속한대로, 학림다방에 모였다.
학림은 그야말로 40년 전 그대로의 모습인 것같았다. 다탁과 내부구조가 거의 바뀌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같은 노객들이나 찾아오지 요즘 젊은 세대들은 그냥 오라고 해도 절대 오지 않을 것같은 분위기 였다.
서울 시내에, 특히 대학로에 학림같은 데가 남아 있다는 것이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
냉키피와 이이스티를 시켜 마시며 잠시 추억에 젖어보았다.
그때 그시절 어느 누구와 바로 저 다탁에 앉아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지 이런 생각에 잠시 잠겨보았다. 이제는 완전히 무로 돌아간 그 영상이 마냥 아쉽게만 느껴졌다.
우리는 웬지 그냥 즐거워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그것은 어쩌면 그 오랜 세월 이렇게 무사히 살아 있음에 대한 찬미의 웃음인지도 몰랐다.
고혜령 동문과 임운봉 동문이 조금 늦겠다는 전갈이 왔다.
정소성은 계산대 앞에 놓여있는 추억의 원두커피 봉지를 여성회원들에게 선물하였다.
우리는 학림을 나와 진아춘이 있는 동성고교 건너편까지 걸었다.
초여름의 향긋한 냄세가 코끝을 간지렸다. 더운 날씨였으나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줄기가 불어왔다.
동승동거리가 많이 넓어졌다거니, 가로수가 옛날 것이 아니라는둥 우리는 대화를 나누면서 한 100미터 데이트를 했다. 퍽 인상적이었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장기호는 대사 출신이라 정장을 해서 좀 더워보였고, 정소성은 이 거리를 문리대여학생과 이렇게 같이 걸어본 것은 처음이라는 말을 했다. 우리는 마냥 깔깔거리면서 웃었다. 평일 정오라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학림다방을 배경으로 사진을 한장 찍었다.
성균관대학으로 빠지는 삼거리쯤에서 고혜령 동문과 해후했다.
진아춘으로 들어가 6인석 식탁에 자리잡았다.
우리는 추억을 위해 약간의 요리 외에, 자장면과 빼갈을 시켜 먹었다.
여성분들이 빼갈에 고개를 저었으나, 그냥 혀만 대어 보시라고 정소성이 권하여 그야말로 빼갈 맛을 보게 하였다.
우리는 자장면을 먹는지, 빼갈을 마시는지, 추억과 살아 있음의 환희와 만남의 기쁨을 마시는지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운봉이 지각하여 도착하였다. 언제나 젠틀한 운봉이 그답게 지각 턱으로 점심값을 치루겠다고 해서 그래라고 했다. 다들 깔깔거렸다.
강남에서 제일 잘 나가는 세무사가 점심약속에 조금 늦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인데도.
키가 조금 작은 편인 운봉이 사진 속에서 우뚝 커보이고 싶으시다며 진아춘 앞에서 기념으로 찍는 사진 포즈 시 계단 위에 서겠다고 하여 또다시 깔깔거렸다. 김선리 동문은 남자가 키 크고 작은 것이 문제되는 경우는 처녀 시절 결혼식 할 때 단 십분 뿐이라고 격려하였다. 요사이는 사실 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큰 대학의 부총장의 격무에서 헤어난 문명숙 동문은 시종 웃을 뿐 별 말이 없었고, 역시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장의 격무에서 해방된 고혜령 동문은 자신이 주관하고 있는 <역사 사랑 모임>과 <뿌리회>라는 모임에 대해 참가해 달라는 부탁의 말을 했다. 나는 이 두 모임에 대해 여기저기서 들은 적이 있었다. 지금 장안 지식인 사이에서 인기짱의 모임인 것같다.
식사가 끝난 후 마로니에가 보이는 곳에서 커피를 마시자고 하여, 옛 문리대 터까지 다시 데이트하였다.
이병도 교수가 한국사 강의하던 건물터에 들어서 있는 카페에서 팥빙수와 냉박하차를 시켜먹었다. 이곳은 십년전 쯤 곽명규 김숙자 동문이 전 회원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던 장소이다.
장 대사가 사는 팥빙수 맛은 일품이었다.
기호는 최근 자신이 주 이락대사의 경험을 살려서 창립 경영하던 석유회사에서 손을 떼고, 장신신학대학원에서 목사의 길을 걷고 있다. 언제나 복잡하게 돌아가던 머리가 맑아져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는 말을 하였다.
기호는 이태원 입구에서 <토크>라는 상호로 양식당을 경영하던 미모의 따님을 수개월 전 결혼시켰다. 신랑 측의 요구로 집안 사람들과 최측근의 몇몇 인사들만 결혼식에 초청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고등학교와 대학 동기생들 그리고 자신이 일생 몸 담았던 외교통상부의 누구에게도 청첩장을 보내지 않았다. 오직 간소하게 예식을 치르자는 신랑측의 뜻을 수용한 결과라 기호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우리들의 다정한 친구 기호의 따님의 결혼식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우리의 마음을 이 글 속에 담아본다.
정소성은 이 모임이 여러가지 상징직인 의미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우리 동기회에서 개 닭 보듯이 지내는 우리 남녀 회원들이 우연하게 만나 이제는 신라 백제 통로같은 구실을 하는 것같다는 의견을 내어놓았다.
우리들의 나이가 점점 깊어져 가면,
이런 모임의 필요성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더욱 필요할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 모임이라도 화합이 잘 되면 내년 쯤 해외여행이라도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하였다.
그간 도무지 진척이 되지 않던 남녀회원들의 만남이 작은 결실을 이루려고 하는 것 같아 어느면 긴장되기도 했다.
마당으로 나와 그 울창한 우리들의 마로니에를 배경으로 하여 사진을 찍고 헤어졌다.
참석회원; 문명숙(중문), 김선리(역사), 고혜령(사학), 장기호(외교), 임운봉(미학), 정소성(불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