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인사
힘들었던 2020년을 떨쳐 버리고 글방 선후배 모든 분들이 건강하게 새해를 맞으시길 기원합니다. 오랜만에 글 하나 올립니다.
‘할아버지, 결혼생활 몇 년인가요?’
‘My bloody marriage?’, ‘Ah...bloody thirty five years....’
bloody는 영국 하층계급 사람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죠. 우리말로 번역하면 ‘빌어먹을’, ‘젠장’ 정도라 할 것입니다. 요즘 미국 애들이 입에 달고 사는 ‘fuxx’에 비하면 점잖은 말이라고 하겠지요.
유학초기 영어에 어려움을 겪을 때입니다. TV를 보면 좀 나아질까 해서 한 달에 2-3 파운드 내고 임대하여 보았습니다. 당시 영국 TV는 시스템이 한국과 달라 귀국할 때 가져 갈 수 없어 교민들은 임대했지요. 컬러 임대료는 매월 10파운드 정도였을 겁니다. 그런데 런던 사투리를 쓰는 코미디는 아무리 보아도 도통 알아들을 수 없더군요. 영국은 지역별 사투리가 아니라 교육수준에 따라 Queen’s English 혹은 Oxford English라는 표준어와 지역 하층민이 주로 쓰는 사투리로 나뉘지요. 스코틀랜드를 여행할 때 애들에게 캠핑장(camping site)를 물어보았더니 ‘깜핑 시트?’라고 되묻더군요. 런던에서는 East End라는 빈민층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 쓰는 코크니(cockney)로 하는 코미디는 영어가 아닌 다른 외국어 같이 들렸지요. 코미디를 보면서 영국인들과 같이 웃는 한국인들이 신기했습니다. 얼마나 오래 열심히 공부했기에 알아들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런 영어는 베개머리에서 배워야 한다나요? 그런데 대학 도서관에서 일하는 한 할아버지가 코크니 영어를 쓰는 겁니다. 도서관 사서들은 표준어를 사용하는데 이 할아버지 같이 2차 대전에 참전하고 직장에서 정년을 마친 노인네들은 수위나 도서관에서 책을 옮기는 일들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한번 말을 걸어 보았는데 돌아온 대답이 바로 ‘bloody marriage’였습니다.
이 말은 묘한 여운으로 남아 나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혹은 세속적인 관점에서 성공적인 결혼 여부를 떠나 누구나 한번 쯤 큰 소리로 외쳐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말일 겁니다. 작년 12월이 나의 결혼 50주년이었습니다. 우리 동기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모두 비슷한 상황이 아닌가요? 정치학과 권무수형은 ‘스타트는 자기가 빨랐다’고 자랑했는데 쬐끔 앞섰겠지요. 글방 방장님은 나 보다 몇 달 먼저 결혼했지요. 아직도 2년 전에 떠난 부인 지혜여사를 가슴이 안고 지내는 방장님에게 미안하지만 한번 웃으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씁니다.
금년 초 1주일 예정으로 남해로 갔습니다. 서울이 가장 추웠던 날들이라 좋은 피한(避寒)을 한 셈이었습니다. 출발 일주일 전부터 새로운 코로나 환자가 없더군요. 지금까지 총 3명이니 한국에서 최고의 청정지역인 셈입니다.
동백은 원래 3월이 되어야 피는데 일본동백 혹은 개동백이라 내가 이름 붙인 분홍색을 띈 동백은 벌써 피고 지군요. 장기 투숙객이라고 좋은 방을 주어 남해 앞 바다의 절경을 즐기면서 뒹굴고 낮에는 주변을 산책했습니다.(사진 1, 2) 멸치 쌈밥도 먹었는데 멸치가 새끼손가락만큼 작았지만 그래도 별미더군요. 5월 부산 대변항을 비롯하여 남해 바닷가 곳곳에서 굵직한 멸치로 먹어야 제 맛이 나지요. 이 보다는 지금 남해는 마늘이 한창 자라고 시금치가 삭막한 주변을 푸르게 만드는 시절이더군요.
햇볕이 따스한 오후 주변 산책에 나섰습니다. 익숙한 언덕배기 길을 걸으니 나도 모르게 봄노래가 나오더군요. ‘불어라 봄바람 솔솔 불어라, 산 넘고 물 건너 불어 오너라. ...’ 이 노래 제목이 무엇인가? 국민학교 때 부른 건데? 멜로디는 교회에서 들려오던 찬송가 같기도 하고.... 집사람에게 물었더니 그런 걸 알아서 무얼 할 거냐고 핀잔을 주네요. 맞는 말이죠. 더 알아서 무얼 하겠습니까? 기분 나서 흥얼거리다가 곧 잊어버릴 건데... 이날 오후와 같이 따뜻한 햇볕이라면 정초지만 시들은 잔디 밑에서 파릇한 새싹이 올라오지 않을까 기대 되군요. 우리가 걷는 길옆 개울엔 물도 얼지 않아 졸졸 흐를 것이고 햇볕을 쪼이며 개울가에 앉아 시간을 보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소월의 시도 읊으면서,
개여울(김소월)
당신은 무슨 일로/그리합니까?
홀로 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돋아 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않노라 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않노라 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1922)
이 가사에 붙인 노래는 10여명의 가수가 불렀군요. 그런데 야트막한 산길을 내려오니 내가 상상했던 개울은 없었습니다. 근대화 덕분인지 농촌개량사업 덕분인지 모두가 콘크리트로 물길을 직선으로 만들어 냇물이 조약돌 사이로 굽이쳐 흐르는 정취는 맛 볼 수 없었습니다. 철이 겨울이라 물은 말라 바닥에 쌓인 쓰레기들만 눈살을 찌푸리게 하네요. 물을 모아둔 곳은 제법 깊은 듯 야생오리들만 노니는데 내가 다가가니 날아 가버립니다. 콘크리트 도랑은 양 갈래로 나누이기도 하고 조금 걸으면 다시 합치고. ... 나의 고향 고성 벌을 굽이굽이 흐르던 수리조합 도랑도 이젠 콘크리트로 개조(?)되고 많은 부분이 복개되어 도로 밑으로 흐르지요. 이 도랑벽에서 검은 흙, 아마도 질이 좋지 않은 갈탄 흙을 파내서 집이나 학교 건물, 개, 소 등을 만드는 공작 숙제를 하던 곳은 벌판 중간쯤 있었는데 찾을 수 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들 개울이 콘크리트가 아닌 자연상태의 개울이라면 서울 나그네에겐 한층 좋을 것인데 라는 상상은 부질없는 것이겠죠?
소월의 시와 같이 어린애들도 쉽게 건널 수 있는 ‘개여울’은 이제 다리가 놓여있네요. (사진 3, 4) 정말 이런 곳에 앉아 풀포기를 뽑으며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하고 싶습니다. 75년이란 지난 세월이 나에게 무엇이었던가? 아니, 이같이 싱겁고 심각한 주제가 아니라 그냥 멍청히 앉아 나의 머리를 스치는 것들을 느끼면서 미소 짓고 하루 종일 보내고 싶었습니다. 이때쯤 나는 뭘 하고 있었지? 아직도 연을 띄우고 연싸움을 위해 연줄에 유리 조각을 빻아 넣은 풀을 먹인다고 손가락이 갈라져 피를 흘리고, 때기(딱지)치기나 구슬치기 놀이에 정신이 없었던가? 그 때 따서(이겨서) 모아둔 때기나 구슬은 어디 갔을까? 주변에 난 풀은 먹을 수 있는 거던가? 개울물엔 송사리가 나올 때가 되었는데? 개울이 합쳐지는 곳에 미꾸라지가 나오려면 아직 기다려야 하겠지? .....
두툼한 옷을 입은 할머니가 밭 바닥에 앉아 시금치를 캐고 있더군요.(사진 5) 한겨울을 밖에서 자란 남해 시금치는 땅에 납작 붙어서 추위에 얼었다가 녹고 이파리를 쬐끔 키우다가 또 얼고 녹는 걸 반복하여 맛이 좋기로 유명합니다. 잎은 마치 배추와 같이 단단하고 단맛이 나지요. 그러나 너무 자라면 거칠어져 맛이 없다고 합니다. 집사람은 얼른 밭으로 들어가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더니 할머니 집으로 같이 가는 겁니다. 서울에 있는 친구 4명에게 한 상자씩 보내고 우리는 비닐 백에 하나 담아 왔지요. 그리곤 씻어 생으로 어제 먹다 남은 와인과 먹었습니다.(사진 6)
얕은 개울을 보면 나는 염소가 떠오릅니다. 할아버지가 봄에 새끼염소를 한 마리 사면 여름 내내 이놈을 몰고 들로 나가 풀을 먹이는 게 나의 일이었지요. 염소란 놈은 물을 아주 싫어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새끼라도 또 개울이, 소월이 부른 개여울 같이, 아무리 얕아도 이놈을 끌고 물을 건너려면 무진 애를 먹습니다. 네발을 땅에 딱 붙이고 뻗대면 꼼짝할 수가 없지요. 오히려 이놈을 끌다가 반작용으로 내가 개울에 빠지기 일쑤였습니다. 가을이 되어 제법 커져 내가 제어할 수 없게 되면 집에 묶어두고 키웠지요. 그리곤 이때쯤 할아버지는 이놈을 잡습니다. 이날 저녁은 온 가족이 염소고기로 겨울나는 몸보신을 하는 겁니다. 한 여름 동안 나와는 정들었던 놈인데, 그래서 할아버지는 내가 학교에 간 뒤 이놈을 잡으셨지요.
염소란 놈은 토끼나 노루, 고라니 같이 염주 같은 동글동글한 똥을 누지요. 그래서 불가능한 것을 말할 때 ‘염소 물똥 싸는 것 봤냐?’라고 했지요. 염소가 물똥을 싸면 죽는다고 합니다. 이 말에 대한 대구(對句)가 ‘기차 타이야 빵구나는 것 봤냐?’입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 한번 되살려 보았습니다.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염소는 보이지 않더군요. 집안에서 키우는 건가요?(2021.1.11.)
사진 1, 2, 여수 앞바다가 보이는 절경, 개동백은 피고지고,
사진 3, 콘크리트로 된 개울과 다리
사진 4, 야생오리들이 노니는 개울
사진 5, 밭에서 시금치를 켜는 할머니와
사진 6, 시금치를 살라드로 생으로 먹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