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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베유, 교회 문턱에 앉아 신을 기다리며
신을 기다리며, 시몬 베유, 이세진 올김, EJB, 2015
내가 시몬 베유를 처음 접한 것은 <시몬느 베이유, 불꽃의 여자>(시몬느 뻬트르망, 까치, 1978)를 통해서였다. 시몬 베유는 철학교사였고, 노동운동가였고, 레지스탕스였지만 더 깊은 차원에서는 신비주의자였다. 영성과 실천을 한 몸으로 통합해낸 이 여성에게 홀딱 반했던 나는 노동운동을 마무리하면서, 신학대학원에서 첫 논문으로 베유를 주목한 적이 있다.
당시 논문학기에 들어가면서 제출한 제목은 <사회적 실천과 영성의 상보적 관계에 관하여-시몬 베유를 중심으로>였다. 당시 사회운동에 참여하던 나는 결국 이 논문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학기를 마치고, 그후 10년 뒤에 도로시 데이를 다루는 논문을 겨우 쓰고 졸업할 수 있었다. 저널리스트였던 도로시 데이보다 철학도였던 시몬 베유의 글은 훨씬 어렵고 까다로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중에서 <신을 기다리며>(Attente de Dieu)라는 책은 시몬 베유가 가톨릭 영성에 심취한 상태에서도 왜 세례를 통해 교회로 진입하지 않으려 했는지 알려주는 책이어서 흥미진진하다. 이 책은 1942년 1월부터 6월까지 “세례받기를 주저하며” 페렝 신부(J.-M Perrin)에게 보낸 베유의 편지와 에세이를 엮은 책이다.
페렝 신부는 서문에서, 시몬 베유가 ‘신을 기다리며’라는 제목을 고른 이유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주인이 돌아오기를 늘 깨어 기다리는 종”을 연상시킨다고 했다. 이 제목은 그녀가 새로운 영적 발견을 하고서 대단히 괴로워했던 기다림의 상태, 그 미완의 성격을 나타낸다.
불꽃의 여자, 시몬 베유
페렝 신부는 책의 서문에서 시몬 베유의 삶을 이렇게 요약했다.
시몬 베유(Simone Adolphine Weil)는 1909년 2월 3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베유는 “부모님과 오빠는 완벽한 불가지론으로 저를 키우셨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신앙은 없었지만 베유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공감능력을 지녔다. 1914년 전쟁 당시 그녀는 고작 다섯 살 밖에 안 됐지만 병사들의 불행과 비참을 발견하면서 자기 몫의 각설탕을 한 조각도 먹지 않고 전선에서 고통받는 군인들에게 전부 보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런 연민의 능력은 평생 지속되었다.
지적으로 조숙했던 베유는 앙리 4세 고등학교에서 고등사범학교 진학을 준비하면서 철학자 알랭(Alain)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28년 열아홉 살에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고, 1931년 스물두 살에 교수자격시험을 통과했다. 교사 생활을 하면서도 불가지론자로서 반종교적 성격을 띠었으며, 노동운동가와 혁명가들의 활동에 협력하였으나, 어느 정당에도 가입하지는 않았다.
첫 부임지였던 르 퓌(Le Puy)의 교사로 있으면서도 실업수당권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연대하였고, 그때부터 자신은 실업수당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생활하고 남는 돈은 모두 남에게 주었다. 이 젊은 철학교사가 월급을 받는 날이면 새로운 친구들이 그녀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베유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1934년에 평생 노동자로 살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공장에 들어가면서 굶주림, 피로, 매정한 거부, 연속 공정 노동의 압박감, 실업에 대한 불안을 몸소 겪었다. <노동일기>에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순한 경험’이 아니라 진짜 노동자로 살아낸 시간들이었다. 1936년 스페인 내란이 일어나자, 베유는 주저 없이 바르셀로나 전선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뜨거운 기름에 화상을 입는 바람에 즉시 귀국조치를 당했지만, 자신이 입은 사고를 절대 입에 올리지 않았다.
1938년 베유는 솔렘(Solesmes) 수도원에서 성주간을 보냈고, 몇 달 후에 인생을 바꾸어 놓을 신비체험을 했다. 베유는 “그리스도가 내려와 나를 안아 주셨다.”고 했다. 그 후 생각의 동요가 일어나면서 예전처럼 불가지론자로 돌아갈 수 없었다. 종교적 전통뿐 아니라 자신이 특히 힘쓰던 불행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그녀는 마르세유(Marseille)로 내려갔는데, 그곳에서 1941년 6월 페렝 신부를 만났다. 그곳에서 베유는 농민 프롤레타리아를 만나기 원했고, 결국 론(Rhone) 계곡의 포도원에서 일했다. 그러나 베유는 이념과 철학을 논할 때의 단호한 말투와 달리 수줍은 영혼을 지니고 있었고, 자신의 경험을 말하는데 신중했다.
이 시기에 베유는 레프 추기경의 회고록과 아그리파 도비네(Agippa d'Aubigné)의 <비가> (Les Tragiques, 1616)를 탐독했는데, 독서와 글쓰기로 만족하지 못했다. 드골주의자로 체포되어 장기간 심문을 받으며 “철학 선생이 창녀들과 함께 옥살이를 하게 될 것”이라는 위협을 받았을 때 베유는 “항상 그 바닥을 알고 싶었어요. 그 세계에 들어가려면 옥살이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몰랐네요.”라고 대답해 판사를 놀라게 했다. 이 때문에 미친 여자 취급을 받고 베유는 석방되었다. 당시 베유는 페렝 신부와 더불어 그리스도교 정신에 기초한 레지스탕스였던 ‘그리스도의 증언’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마르세유에서 베유는 종교문제에 깊이 빠져 있었다. 미사에 참석해 동료들과 복음서를 탐독했고, 평일 새벽미사에도 참석했으며, 특히 페렝 신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을 기다리며>에 실린 글이 대부분 이때 이야기다. 유대인이었던 베유는 결국 1942년 5월 16일에 부모와 함께 미국 뉴욕으로 떠났다. 그곳에서도 베유는 흑인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녀는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했다. “할렘을 돌아다녔어. 일요일마다 할렘의 침례교회에 나가거든. 그 교회에 백인은 나밖에 없어.”
결국 그녀의 바람대로 1942년 11월부터 런던의 프랑스 임시정부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샌드위치 한 조각으로 연명하면서 밤늦게까지 책상에 매여 일을 했다. 지하철 막차가 끊기면 책상에 엎드리거나 맨바닥에 누워 눈을 붙였다. 허나 과로와 영양실조로 쇠약해진 베유는 결국 회복되지 못하고 1943년 8월 24일 애시포드 요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42년 1월 10일 이런 글을 남겼다. “만약 내가 생명을 여러 개 가지고 있다면, 어머니나 아버지께 그 중 하나를 바치겠습니다. 하지만 내게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바쳐야 합니다.”
세례받기를 주저하다
1942년 1월 19일부터 5월 26일 사이에 시몬 베유는 페렝 신부에게 자신이 세례 받을 수 없는 이유에 관해 세 차례에 걸쳐 편지를 썼다. 베유는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순응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늘 더 큰 사랑과 집중으로 하느님을 생각하고, 그분께 내 영혼이 깡그리 구속당할 때 우리는 완전함의 경지에 이른다.”고 했던 시몬 베유는 가톨릭 입교(入敎) 자체도 하느님의 뜻이 자신을 강제할 때 가능하다고 말한다.
베유는 세례가 교회로 들어가는 구원의 공통경로겠지만, 그게 하느님이 자신에게 바라시는 몫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류의 대부분이 유물론에 빠져 있는 지금 시대에 하느님께서 당신과 그리스도에게 속하되 교회 밖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기를 원하시지 않을까요?” 하고 묻는다.
“제가 입교한다고 생각하면, 저 많고도 불행한 무신론자들에게서 멀어진다는 생각이 무엇보다 제일 괴롭습니다. 온갖 계층의 사람들 틈으로 들어가 그들과 더불어 지내고,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는 한 그들과 똑같은 모습을 취하고, 저는 그들 속에 묻히고 그들은 제게 꾸밈없이 그들 본연의 모습을 보여 주기를 바라는 욕구가 제게는 있습니다. 그것이 제 소명이라고 생각해요. 있는 그대로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제가 사랑하는 대상은 그들이 아니요, 제 사랑은 참된 것이 아닙니다.”
시몬 베유는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거리보다 교회에 꼬박꼬박 출석하는 가톨릭 신자들과 불신자 사이의 거리가 더 멀고 벽이 또렷하다고 믿었다. 베유는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를 막론하고 나도 천국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교회에 속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싸잡아서 거부하는 말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 말씀을 교회 출석 여부를 떠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고, 그분의 정신을 널리 전하지 않고, 기회가 닿는 대로 그분 이름에 영광을 돌리지 않고, 그분께 충실하기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듣는다. 이런 점에서 시몬 베유는 신앙과 교회를 구분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충실성과 교회에 대한 사랑을 구분한다.
“저는 하느님, 그리스도, 가톨릭신앙을 사랑합니다. 비참하리만큼 미흡한 피조물도 그런 것들을 사랑할 수 있는 한에서요. 저는 성인들이 남긴 글과 성인전에서 본 그들의 모습을 사랑합니다. 단, 온전히 좋아할 수 없거나 도무지 성인으로 보이지 않는 이도 몇몇 있습니다.
저는 가톨릭전례, 성가, 건축양식, 예식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제가 정말로 사랑하는 이 모든 것과 상관없이, 엄밀한 의미의 교회에는 한 점의 애정도 없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공감할 수 있으나, 저 자신이 그 사랑을 느끼진 않습니다. 성인이라면 누구나 교회를 사랑했겠죠. 하지만 성인들은 거의 다 교회에서 태어나 교회에서 성장했습니다. 여하튼 사랑은 자기 의지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베유가 입교 가능성 자체를 원천봉쇄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충동으로 페렝 신부에게 달려가 세례를 청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은총은 조용하고 은밀하게 사람들의 마음속을 파고드니까.” 그러나 그런 은총은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입교 문제로 더 이상 고민할 생각은 없다고 말한다. “제가 왜 고민하겠어요. 저 자신을 생각하는 것은 제 일이 아닙니다. 저에 대한 생각은 하느님의 소관이지요.”
교회의 사회구조적 성격에 대한 비판
시몬 베유는 줄곧 사회구조가 된 교회를 문제 삼았다. 베유 자신은 집단적인 데 잘 휘둘리는 성격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만약 이 순간 독일청년 스무 명이 앞에서 나치스의 노래를 부르면 자신의 영혼 일부나마 당장 나치스가 될 것이라 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에 존재하는 애국심이 겁난다고 말했다. 애국심은 조국에 대한 감정인데, 그런 애국심은 치명적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십자군 전쟁이나 종교재판을 용인했던 성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성인들은 몹시 강력한 어떤 것에 눈이 멀었던 것인데, 그게 바로 ‘사회구조로서의 교회’다. 성인조차 그렇다면 “한 없이 연약한 저 같은 인간에겐 얼마나 해롭겠느냐”고 베유는 묻는다.
교회는 <루카복음서>에서 악마가 이 세상의 왕국을 두고 그리스도에게 한 말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당신에게 이 모든 권세와 그에 따른 영광을 주겠소. 그것들은 내게 맡겨진 것이니 누구든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줄 것이오.” 이것은 악마의 영역이지만, 교회조차 권세와 영광을 탐해 왔기 때문이다. 이런 집단적 감정을 낳는 교회를 제 집처럼 여기고 안착하고 싶지 않다고 베유는 말한다. “저는 어떤 인간 집단에도 속하지 않는 이방인으로 외따로 살아가게끔 예정되었다고 생각합니다.”(편지2) 세례를 구원의 절대적 조건으로 확신한다고 해도 구원을 보고 모험을 하고 싶지 않다는 베유는 “여기 이 책상에 영원한 구원이 있어서 손만 뻗으면 얻을 수 있다 해도, 그 구원을 취하라는 하느님의 명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한, 저는 손을 내밀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세 번째 편지에서, 베유는 프랑스를 떠나는 것과 고통과 위험에서 도망치는 것은 별개라면서, 자신은 그리스도처럼 십자가를 지고 싶다는 소망을 페렝 신부에게 전했다.
“제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할 자격이 영영 주어지지 않는다면, 적어도 착한 강도의 십자가라도 같이 지고 싶습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그리스도 외의 모든 인물들 중에서 저는 그 착한 강도가 단연코 부럽습니다. 그 강도는 그리스도 옆에 있었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린 동안 자신도 똑같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으니, 영광 속에서 그리스도의 오른편을 차지하는 것보다 더 부러워할 만한 특혜 아닙니까.”
그리스도교, 노예들의 종교
베유는 프랑스를 떠나며 마르세유와 경유지인 카사블랑카에서 페렝 신부에게 편지를 보냈다. <영적 자서전>이라 제목을 붙인 편지에서는 가톨릭교회에 대한 중요한 경험을 전한다. 시몬 베유가 공장생활을 마치고 부모와 함께 포르투갈에 간 적이 있다. 당시 베유는 “불행과 만나고서 저의 청춘은 죽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저 자신의 불행 말고는 불행을 경험한 적이 없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데, 공장에서 일해 보니, 비로소 남들의 불행이 자신의 육신과 영혼에 파고들어, 그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적었다. 그녀는 “로마인들이 벌겋게 달군 쇠로 가장 멸시하는 노예의 이마에 낙인을 찍었던 것처럼 (공장에서) 영원히 남을 노예의 낙인을 받았다.”면서, 그때부터 자신을 ‘노예’로 생각해 왔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포르투갈의 작은 마을에서 그리스도교 역시 ‘노예들의 종교’라는 확신을 얻었다.
“보름달이 떠 있었고 마침 수호성인 축일 저녁이었지요. 바닷가 마을이었습니다. 어부의 아낙네들은 촛불 행렬을 이루고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 같은 애절한 성가를 부르면서 선박들 주위를 돌았습니다. 볼가 강의 뱃노래 외에는 그렇게 가슴을 치는 노래를 들어 본 적이 없어요. 거기서 문득 그리스도교는 각별히 노예들의 종교요, 노예는 그리스도교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으니 저 또한 마찬가지라는 확신이 들더군요.”
베유는 1937년 아시시의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대성당 부속성당에서 난생 처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으며, 1938년 솔렘 수도원에 열흘 동안 머물면서 미사를 바치는 동안 “순수하고 완전한 기쁨”을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체험은 어느 영국인 가톨릭신자를 만나고서 17세기 영국시인들을 알게 된 것이다. 그 가운데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 1593-1633)의 <사랑>(Love)이라는 시는 아예 외워서 두통이 심할 때마다 혼을 실어 암송하곤 했다.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셔서 베유를 사로잡았다는 영적 체험도 이 시를 외울 때 발생했다고 한다.
"사랑은 내게 오라 하나
죄로 더럽혀지고 추악한 내 영혼은
뒷걸음질 치네.
그러나 사랑은 기민한 눈으로
들어오자마자 주저하는 나를 보시고
다가와 다정히 물으시네.
행여 내게 부족한 것이 있는지
이 몸은 여기 어울리는 손님이 아니라 대꾸하니
사랑은 말씀하시길, 그대가 그 손님이라.
오, 사랑이시여, 배은망덕하고 인정머리 없는
이 자가 말입니까?
저는 당신을 바라볼 수조차 없나이다.
사랑이 내 손 잡고 미소 지으며 말씀하시길,
나 아니면 누가 그 눈을 지었겠느냐?
그렇습니다, 주여. 제가 그 눈을 더럽혔나이다.
제 수치에 어울리는 자리로 가게 하소서.
사랑이 말씀하시길, 누가 멍에를 졌는지
너는 모르느냐?
사랑이시여, 그럼 제가 시중을 들겠나이다.
사랑이 말씀하시길,
너는 앉아 내 살을 먹어야 한다.
하여, 나는 앉아서 먹었네.
그럼에도 사랑하기를 계속한다면"
시몬 베유는 <신을 향한 사랑과 불행>이라는 에세이에서, 불행한 이들의 사랑에 대해 말한다. 불행이란 사회적, 심리적, 신체적 부분에서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생명을 덮치고 뿌리 뽑는 사건이 닥칠 때마다 느끼는 것이다. 이런 불행의 낙인이 찍힌 자들은 기껏해야 자기 영혼의 절반밖에 지키지 못한다고 베유는 말한다. 자기가 직접 불행으로 상처 입은 자들은 누구에게도 도움을 줄 수 없고, 도움 주고 싶은 마음조차 먹을 수 없는 상태이기에 다른 불행한 이들에 대한 공감이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조차 불행은 제발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분조차도 불행이 닥치자 인간들에게 위안을 구하고, 아버지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다. 욥이 “그분은 무고한 자들의 불행에 웃으시는구나.” 하고 말했을 때, 이 말은 신성모독이 아니라 고통에서 터져 나오는 진정한 비명소리다. 정작 위대한 사랑은 그 불행 한가운데서도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다.
“불행은 잠시나마 신의 부재를 낳는다. 신은 죽은 자보다도 부재하고, 칠흑 같은 감옥 안에 빛이 부재한 것보다 더욱더 부재한다. 일종의 공포가 영혼을 덮는다. 그러한 부재상태에는 사랑의 대상이 전혀 없다. 무서운 것은, 사랑할 것이 없는 이 암흑 속에서조차 영혼이 사랑하기를 그치면 신이 정말로 영영 부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영혼은 텅 빈 가운데서도 계속 사랑해야 한다. 아니면 영혼의 미세한 일부라도 여전히 사랑하기를 바라야 한다. 그러면 욥에게 그러했듯이 언젠가 신이 그 영혼에게 친히 나타나셔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신다. 그러나 영혼이 사랑하기를 그치면 그때부터 그 영혼에게 이승은 지옥과 다를 바 없다.”
“오랫동안 불행했던 사람은 누구나 자기 불행에 공모 의식을 느낀다”고 베유는 말한다. 그래서 팔자를 바꿀 노력도, 불행에서 벗어날 수단도 찾지 못하고, 해방을 바라지도 못한다. 마치 불행이 그를 숙주로 삼아 기생하면서 이 사람을 휘두르는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사랑으로, 사랑을 위해 그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와 사랑의 수단들 외에는 다른 것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사랑 안에서 버티는 자들은 불행으로 밑바닥까지 굴러 떨어진 중에도 이 음(音)을 듣는다. 그때부터 그에게는 어떤 의심도 들어설 수 없다고 베유는 말한다. 불행 가운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시선의 방향이다. 이건 하느님을 계속 바라볼 것인지 묻는 것이다.
베유는 “불행은 사람을 구별하지 않는다.”고 했다. 불행은 사심이 없다. 이 공평무사함의 차가움, 금속성의 차가움 때문에 불행을 접한 모든 이의 영혼은 바닥까지 얼어붙는다. 하지만 믿음 때문에, 진리 때문에 박해받는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불행하지 않다. 고통이나 두려움이 영혼을 점령하여 그들이 박해받는 이유를 잊어버리게 되면 그때 비로소 불행에 떨어지는 것이다. 맹수의 밥이 될 상황에서도 찬송가를 부르며 원형경기장으로 들어갔던 순교자들은 불행하지 않았다.
그래서 베유는 하느님을 갈망하는 자에게 기쁨과 고통은 빛깔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아름다움은 기쁨을 통해 우리 영혼에 파고든다. 그 아름다움이 고통을 통해서는 우리 육체에 파고든다.” 베유는 영혼의 중심에 기쁨이든 고통이든 나타나면, 사랑하는 이의 심부름꾼에게 문을 열어 주듯 우리 자신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심부름꾼이 경우가 바르든 상스럽든, 사랑하는 이의 전갈만 전해 주면 됐지 뭐가 중요한가?” 묻는다. 망치로 못을 박을 때 못대가리가 받는 충격은 뾰족한 끝까지 전해진다. 못 끝은 하나의 점에 지나지 않지만 충격은 어디 가지 않고 고스란히 전해진다. 불행이란 이런 것이라고 베유는 말한다. 불행은 차갑고 가차 없고 맹목적인 거대한 힘을 유한한 피조물의 영혼에 집어넣는 단순하고 절묘한 장치라는 것이다. “신과 피조물 사이의 무한한 거리는 영혼의 중심을 꿰뚫는 한 점으로 집중된다.”
베유는 “못에 찔리는 동안에도 영혼이 여전히 하느님에게로 향해 있는 사람은 우주의 중심에 못 박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못은 창조된 우주, 영혼과 신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두터운 장막에 구멍을 뚫는다. 그렇게 우리는 고통을 통해 현존하는 하느님 앞에 이른다고 베유는 말한다.
시몬 베유에 따르면, 창조란 하느님이 자기를 포기한 결과라고 했다. 그리스도 역시 하느님이심을 부정하며 자신을 ‘죽음’에 넘겨줌으로써 사랑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결국 자기 자신을 철저히 내던져 버리고 하느님에게서 버림받은 상태에서 깨어지고 부서질 때 ‘초자연의 빛이 자기를 통해’ 움직인다고 보았다. 베유는 타인에 대한 사랑은 그렇게밖에 이룰 수 없다고 보았다. 이런 점에서 수치스러운 시련을 받고 죽음에 이른 전형으로서 그리스도를 흠모한다고 고백한다. 베유는 평생 “자기를 뿌리 뽑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름 없는 자가 될 것, 인간이라는 물질이 될 것, 몸에 붙은 장식을 떼고 알몸이 되는 일을 인내할 것, 자기를 낮출 것, 죽음을 받아들일 것. 성인이란 살아 있어도 사실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사람”이라고 말했다.
“신을 향해 부르짖는다. 아버지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일을 내가 이룰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 저의 사랑이 당신의 사랑처럼, 육체의 양식과 정신의 양식이 모두 부족한 불행한 자들에게 음식으로 줄 수 있도록. 그리고 나는 마비환자, 맹인, 백치, 병든 노환자로 전락해 버리도록. 영원히 나는 찢겨지고 찢겨지게 해주십시오. 나는 없어지는 일밖에 남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그녀의 바람처럼, 시몬 베유는 애시포드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고독 속에서 죽어갔다. “마음속에 타오르는 빛밖에, 이끌어주는 손도 없이 빛도 없이”(<성령의 노래>, 십자가의 성 요한) 그녀가 죽었을 때 나이는 34세였다.
*이 글은 격월간 <가톨릭일꾼> 2020년 봄호에 실린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