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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16)―[별첨]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제5일)] * 제6구간(안동→ 풍산)
▶ 2021년 11월 10일 (토요일) [별도 탐방] ① 송야천 금계- 안동 서후면(2)
안동시 서후면 일대의 유적탐방 (2)
족손 정택과 규택이 함께 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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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당종택(敬堂宗宅) ― 안동 장씨
안동 장씨(安東 張氏) 경당 종택은 조선중기 유명한 성리학자 경당 장흥효(1564~1634)의 종가이다. 장흥효는 벼슬길을 멀리하고 퇴계 이황―학봉 김성일의 학통을 이어서 후학 양성에 전념하여 도통을 전수한 대학자이다.
장흥효의 안동 장씨는 태사 장정필(張貞弼, 888~?)을 시조로 하는 가문이다. 장정필은 ‘3태사’ 중의 하나인 장길(張吉)과 동일 인물이다. 장정필 공은 신라 진성여왕 6년(892년)에 당나라에서 아버지를 따라 신라로 넘어왔고, 고려 태조 13년에 김선평, 권행 등과 군사를 일으켜 견훤군을 격파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그 공을 높이 사 ‘태사’라는 벼슬을 주고 안동을 ‘식읍’(나라에서 공신이나 왕족에게 내리던 토지와 가호)으로 하사했다. 장정필 공은 후에 벼슬이 진현전(進賢殿) 직제학(直提學), 예문관(藝文?)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고, 고창군(古昌君)으로 봉하여졌으며, 삼중대광보사벽상공신태사(三重大匡保社壁上功臣太師)로 불리어졌다고 하며, 고려 태조는 그를 아부(亞父)라고 칭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장정필 공은 만년에 중앙의 벼슬을 그만두고 안동으로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안동에서 타계하였다고 한다. 임종 시의 나이가 91세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그의 호는 포음(圃陰)이고,시호는 충헌(忠獻)이다. 장태사(張太師)의 묘(墓)와 재사(齋舍)는 경당종택에서 멀리 않은 서후면 성곡리에 있다.
장정필 공으로부터 시작된 ‘안동장씨’의 역사는 처음부터 화려하게 전개되어 나간다. 『대동보』에 의하면, 2대 보천(寶千)이 이부상서(吏部尙書), 3대 금선(錦善)이 상장군(上將軍), 4대 광현(光賢)이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을 역임하는 등, 대를 이어 가면서 중앙의 높은 벼슬을 역임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 왕조의 전 기간 동안에 ‘안동 장씨’는 중앙의 크고 작은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15대 장사길(張思吉)의 대에 이르러 또 한 번 중흥의 기회를 맞이한다. 15대 장사길은 13대 장수명(張壽命)의 셋째 아들 장려(張儷)의 자식으로 이성계를 도와 조선개국에 공을 세웠다.
조선 초 이성계를 도와 공을 세운 장사길(張思吉)의 5대손 장의(張儀)가 안동으로 내려왔다. 20대 장의(張儀)의 춘파(春坡) 정착할 때 안동을 떠나 타지로 흩어져 갔던 안동 장씨가 다시 안동에 들어와 살게 되고, 안동장씨 ‘춘파파’를 형성하기 시작하는 것은 20대 장의(張儀)가 안동 춘파(春坡, 봄파리)에 정착하게 되면서 부터라고 한다. 『대동보(大同譜)』에 의하면 장의는 초명은 유의(由義)로써 후릉참봉(厚陵參奉)의 직첩을 받았고, 벼슬에 뜻이 없어서 서울로부터 낙향하여 금계(金溪)의 위쪽 춘파에 은거하였다고 한다. 장의 5대손인 장팽수(張彭壽)는 서후에 사는 권덕기(權德祺)의 사위가 되어 금계에 자리를 잡았고 그 아들이 경당 장흥효(張興孝)이다.
금계의 춘파(春坡, 봄파리)는 학봉종택과 경당종택의 중간 지점에 있다. 이곳은 그 시조인 장정필이 가문의 역사를 시작하였던 곳으로 장의가 돌아와 다시 안동에서의 안동장씨의 역사를 열어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20대 장의 때에 안동에 다시 정착한 안동장씨는 그 6대 후에 장흥효가 배출됨으로써 이 가문을 영남 유학사에 편입시켜 준다. 장흥효는 김성일의 제자로 퇴계의 학통을 계승한 대학자이고 경당의 따님인 정부인 장씨는 학행이 사임당에 비견 되었으며 장부인의 아를 갈암 이현일(李玄逸)과 손자 밀암 이재(李栽)는 퇴계학파의 적통을 이어받은 대학자로 이름 높다.
경당고택(敬堂宗宅)은 안동 서후면 성곡리, 서후면사무소에서 삼거리에서 서쪽으로 약 500m 들어간, 송림이 울창한 산 아래 위치해 있다. 학봉종택에서 차로 약 5분 남짓 거리에 있다.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선생의 후손이 대(代)를 이어 살아온 종가(宗家)이다. 원래는 제월대(霽月臺)와 광풍정(光風亭)가 있던 ‘봄파리[春坡]’에 있던 것을 50여 년 전에 이 자리로 옮겨서 중건한 것이다. 현재의 종손 장성진씨는 장정필 선생의 37대손이자 장흥효 선생의 11대손이다.
고택의 구성은 정침과 사당으로 되어 있다. 정침은 팔작지붕 홑처마 민도리집으로 정면 6칸. 측면 7칸의 ㅁ자형의 집이다. 현판글씨는 의성김씨 김방걸(1623~1695년)의 종손인 남정(南井) 김구직(金九稷)이 썼다.
광풍정(光風亭)은 학봉종택에서 경당종택으로 오는 중간 쯤 금계 건너편 봄파리[春坡] 칠개재고택 옆에 있다. 천등산 남쪽 서후면 금계리, 거대한 자연 암석 아래에 있는 정자이다. 1630년대에 경당 선생이 초당(草堂)으로 지어 300여 문인에게 강학(講學)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1838년(헌종 4) 이 지역의 유림들이 현재의 모습으로 개축하였다.
경당은 광풍정(光風亭) 뒤편의 암벽을 제월대(霽月臺)라 명명했는데, 이는 송나라 황정견(黃庭堅)이 북송의 대 성리학자 주돈이(周敦颐)의 인품을 형용하여 "가슴속의 맑고 깨끗함이 광풍제월(光風霽月: 화창한 날씨의 바람과 비 갠 뒤의 달이란 뜻으로, 깨끗하고 맑은 마음을 비유)과 같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부단한 자기 수양을 통해 본래의 깨끗한 마음을 회복한다’는 뜻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집이다. 지대의 경사가 심해 건물의 몸체만 기단 위에 올라앉아 있고, 계자(鷄子) 난간을 두른 마루 부분은 기단 바깥으로 돌출된 특이한 구조이다. 왼쪽 뒤쪽으로 2칸 방, 그 앞쪽에 1칸 방을 두었고 앞은 마루이다. 따라서 건물의 전면 왼쪽 모서리에서 오른쪽 뒷면 모서리까지 대각선을 그어보면 방 두 개의 모서리와 만나는 대각선대칭의 평면구성을 하였다. 지형적인 환경요인을 적절히 받아들인 건물로 건축사적 의미가 크다.
능주목사를 지낸, 학봉파의 종손김진화가 바위 표면에 ''경당선생 제월대''라는 휘호를 남겼다. 광풍정과 제월대는 경당이 돌아가신 후 30여 년 뒤 없어졌다가, 1838년(헌종 4) 유림들이 뜻을 모아 다시 지었고 중간에 보수를 해오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끈하고 잘 생긴 바위 위에는 날아갈 듯 세워져 있는 건물이 있다. 1987년에 완공한 같은 이름의 정자이다.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경당(敬堂) 장흥효는 어려서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년~1593년) 문하에서 공부했고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년~1607년),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년~1620년)에게도 배웠다. 그리하여 퇴계의 학통이 학봉(鶴峰)과 서애(西厓)를 거쳐 장흥효(張興孝)에게 전수된 것이다. 평생토록 명예와 이익을 멀리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오로지 후학 양성과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퇴계 선생을 종조(宗祖)로 하는 그의 학문은, 그 제자이면서 사위인 이시명(李時明)을 통하여 외손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년~1704년)에게 전해져 많은 제자(弟子)와 문인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경당고택(敬堂宗宅)은 퇴계학파를 이끌었던 ‘영남유학의 근간’이 되는 곳이다. 이현일 아래로 밀암 이재(李栽)- 정재 유치명(柳致明)-김흥락(金興洛) 등을 통하여 ‘퇴계학의 정맥’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경당종택 별채의 벽에 경당 장흥효의 칠언시(七言詩)가 단정한 액자에 담겨있다. 〈春日山堂卽事〉(춘일산당즉사, 봄날 산당에서 시를 짓다)이다.
水碧苔班沙又明 수벽태반사우명 맑은 물 고운 이끼 모래도 새하얀데
林風乍過柳絲輕 임풍사과유사경 숲의 바람 스쳐가니 버들가지 나부끼네
塵紛不到靈臺裏 진분부도영대리 속세의 먼지 이르기 않는 내 마음 그 속에는
泂若氷壺澈底淸 형약빙호철저청 빙호까지 맑디 맑아 바닥까지 깨끗하다.
특히 장흥효는 ‘경(敬)의 학문’을 중시하여, 책상 위에 ‘敬’ 자를 붙여놓고 생활의 신조로 삼았으며 그래서 ‘敬堂’(경당)을 아호로 쓰고, 고택의 당호로도 삼았다. 퇴계로부터 이어져오는 경(敬)의 마음으로 수양하니, 파릇파릇 움이 트는 봄날, 산당에 앉아서 그 청정한 마음을 노래한 것이다.
장계향(張桂香) — 정부인(貞夫人) 안동 장씨
특히 경당고택이 세상의 주목을 받은 것은 경당의 딸 ‘정부인(貞夫人) 안동 장씨’ 때문이다. 현모양처 여중군자로 알려진 안동 장씨 장계향(張桂香, 1598년~1680년)이 이곳 경당고택에서 태어났다. 경당 장흥효의 부인(夫人)은 봉화 닭실의 ‘안동 권씨’로 혼인 후 18년 만에 낳은 딸이 장계향이다. 장계향이 태어날 때는 임진왜란 · 정유재란으로 온 조선이 쑥밭이 된, 7년 전쟁이 끝난 5일 뒤였다. 권씨 부인은 병약하여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해 장계향은 무남독녀이다.
시(詩)와 서예에 능한 장씨부인
장계향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아버지가 글을 가르치면 그 뜻을 잘 이해하고 특히 문학적인 감수성이 뛰어났다. 장계향(張桂香)은 경당 장흥효(張興孝, 1564~1633)의 절조 높은 가르침을 받아 재덕(才德)을 두루 갖춘 규수로 성장했다. 아버지 장흥효에게 《소학(小學)》과 《사략(史略)》을 배웠다. 그녀는 이때부터 이미 문장에 능숙하였다. 어린시절부터 총명하고 현숙하여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시, 글씨, 그림을 익히고 의학에 까지 조예가 있었다. 다음은 장계향이 어린 시절에 지은 《학발시(鶴髮詩)》이다.
鶴髮臥病 학발와병 백발 늙은이가 병이 들어 누웠네
行子萬里 행자만리 자식은 만리 밖 전쟁터에 나갔다네
行子萬里 행자만리 만리 밖 전장에 나간 내 아들!
曷月歸矣 갈월귀의 어느 달에 돌아올꼬?
鶴髮抱病 학발포병 백발 늙은이가 병에 지쳐 누웠네
西山日迫 서산일박 서산에 지는 해는 저물어 간다
祝手于天 축수우천 하늘에 손을 모아 빌고 또 빌어봐도
天何寞寞 천하막막 하늘은 무심케도 대답없이 막막하구나
鶴髮扶病 학발부병 백발 늙은이가 병든 몸을 일으키니
或起或踣 혹기혹북 일어나다가도 다시 넘어지는데지금
今尙如斯 금상여사 지금은 오히려 이와 같은데
絶据何若 절거하약 아들이 옷자락 끊고 떠나가면 어이할거나?
장계향이 10대에 이웃집 아들이 변방으로 국경을 지키려 떠나자 백발의 노모가 기절했다가 상심하여 앓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이런 시를 썼다. 〈학발시(鶴髮詩)〉이다. 어린 시절부터 시서에 능한 그녀의 면모를 알아볼 수 있는 작품이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공감하는 그녀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이렇게 장계향은 시작(詩作)과 서예에 천재적 재질을 가졌으며, 꽃과 나비, 그리고 낙화(落花)에 능하였다. 지금 학발시(鶴髮詩)를 초서로 쓴 책 한 권과 한시 몇 편이 남아있어 그의 뛰어난 시작과 서예 작품을 알 수 있다. 영양 두들마을 ‘장씨부인 유물전시관’에 게시되어 있다.
19살이 되던 해,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 거주하는 아버지 경당의 애제자인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에게 계실로 출가하였다. 그녀는 시부모 봉양에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남편을 섬김에 어진 부인의 도리를 다하였다. 슬하에 전실 자식을 비롯한 이상일(李尙逸) · 이휘일(李徽逸) · 이현일(李玄逸) · 이숭일 등 10남매를 지혜와 도덕과 학문으로 가르치고 기른 어진 어머니로 널리 알려졌다. 그녀의 셋째아들 갈암 이현일(李玄逸)이 이조판서에 추증되면서 ,법에 따라 '정부인(貞夫人) 안동 장씨'로 불렸다.
경당고택이 특별히 세인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장씨 부인의 자녀 교육과 후덕한 삶이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요리책인 ‘음식디미방’-《규곤시의방(閨壼是議方)》이라는 책을 저술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후덕함은 임진왜란 때는 도토리죽을 끓여 굶주린 백성들의 배를 채워줬다는 일화도 전한다
그녀가 70대 초반에 쓴 '음식디미방'의 146가지 조리법은 전통음식의 교과서로 불리며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음식디미방’은 순 한글로, 그것도 세밀하게 실제의 조리방법을 적어 놓은 요리책이다. 아시아권 최고의 조리서로 인정받고 있다.
경북 영양군 두들마을에는 장계향, 즉 ‘정부인(貞夫人) 안동 장씨’의 업적을 기리는 유적비가 1989년 세워졌으며 정부인의 자취를 기리기 위해 음식 체험과 예절을 배우는 '정부인 안동 장씨 기념관'도 설립됐다. 재령 이씨 문중에서는 여성임에도 부인의 공덕을 기려 3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음력 7월 6일이면 ‘불천위(不遷位) 제사’를 지낸다.
— 지금, 경당종택에는 장흥효의 11대 종손 장성진(80) 공과 종부 권순(79) 여사가 살고 있다. 두 분은 몸이 불편한데도 ‘고택 체험’을 원하는 탐방객을 받으며 집을 적극적으로 개방하고 있다. 특히 종부의 음식 솜씨는 정평이 나 있다. …♣ [계속] ☞ 「안동 권태사 묘역」과 「천등산 봉정사」 탐방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