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세데스 AMG나 BMW M, 아우디 RS 등 적잖은 메이커에서 스페셜 브랜드를 운영 중이다. 이들은 기존 라인업과 구별되는 성능과 비범한 개성으로 남다른 고객 취향을 만족시키며 이미지 리더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하지만 SUV부터 대형 세단에 이르기까지 가리지 않고 달리는 이름이라면 희소성은 반감되기 마련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쉐보레 콜벳에만 붙이는 ZR1, 포르쉐가 911에만 부여하는 GT2 RS처럼 말이다. 특정 모델에만 허락되기에 남다른 가치를 지니는 존재들이다.
한 자리에 모인 신구 콜벳 그랜드스포트. 초대 그랜드스포츠는 레이스 참가를 위해 개발된 초경량 버전이었다
1. CHEVROLET CORVETTE GRAND SPORT
콜벳의 장대한 역사 속에는 다양한 특별 버전이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레이스 활동을 위해 개발했던 그랜드스포트다. 1960년대 미국 모터스포츠 무대에서는 캐롤 쉘비의 코브라가 막강한 전투력을 과시했다. 영국산 경량 섀시에 포드 V8 엔진을 얹은 코브라는 수많은 레이스에서 활약했다. 코브라의 독주를 막기 위해 콜벳의 아버지 조라 아커스-던토프는 초경량 버전을 개발해 그랜드스포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알루미늄 튜브 프레임에 경량 파이버글라스 보디를 씌운 이 차는 무게가 612kg에 불과했으며 V8 550마력 엔진을 얹었다. 원래 125대가 생산될 예정이었지만 당시 대형 자동차 메이커들의 워크스 활동 자율규제에 묶여 겨우 5대만 만들어졌다. 이 때문에 전문 레이싱카 클래스에서 경쟁해야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저 펜스키, AJ 포이트, 짐 홀 같은 뛰어난 레이서들이 몰고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당시 제작되었던 5대는 현재 모두 생존해 있으며 역대 콜벳들 가운데서도 가장 희소하고 값진 모델로 평가받는다.
제대로 꽃피우지도 못하고 사라졌던 그랜드스포트의 이름은 30년이 넘은 지난 1996년이 되어서야 되살아났다. 쉐보레가 4세대 콜벳의 마지막 스페셜 버전으로 준비한 것이 컬렉터 에디션과 그랜드스포트 두 가지였다. 그중 그랜드스포트는 330마력을 내는 LT4 엔진에 아메리칸 레이싱 컬러인 블루/화이트 스트라이프를 칠하고 쿠페와 컨버터블 합쳐 1,000대가 생산되었다.
1996년 부활한 4세대 기반의 그랜드스포트
이후 6세대와 7세대 콜벳에도 그랜드스포트가 만들어졌다. 다만 이들 역시 초경량이나 레이싱 버전은 아니었다. 2016년 제네바모터쇼에서 발표된 현행 그랜드스포트의 경우 Z06용 와이드 보디에 Z51용 LT1 드라이섬프 V8 460마력 엔진을 조합하고 브렘보 브레이크와 마그네틱 라이드 컨트롤, LSD 등을 장비한다.
2. CHEVROLET CORVETTE ZR1
최근 쉐보레는 현행 7세대 콜벳의 고성능 버전인 ZR1을 런칭했다. 8세대 콜벳이 미드십으로 바뀔 것이 기정사실화된 시점에서 FR 콜벳 최후를 장식하게 될 주인공이다.
콜벳에 ZR1이라는 이름이 처음 붙은 것은 샤크라는 애칭으로 알려진 3세대부터다. LT-1 엔진(V8 5.7L 370마력)을 포함하는 1,221달러짜리 고성능 옵션 패키지로 엔진뿐 아니라 크로스레이쇼 4단 변속기와 고성능 브레이크, 알루미늄 라디에이터, 레이스용 서스펜션, 스테빌라이저 등이 망라되어 있었다. 동시에 파워윈도와 파워스티어링, 에어컨, 뒤창 열선, 오디오 등 편의장비를 제거해 무게를 최대한 덜어냈다. 이 차는 1970~71년에 걸쳐 53대만이 생산되었다. 쉐보레는 비슷한 시기에 ZR2 버전도 선보였는데, 이쪽은 7.4L의 LS6 425마력 엔진을 얹었으며 1,747달러의 가격표가 붙었다.
최초의 ZR1은 1970년 태어난 고성능 옵션 패키지였다
80년대 잠시 끊겼던 콜벳의 역사는 4세대 등장과 함께 다시 명맥을 이어갔다. 1990년에 등장한 새로운 ZR1은 조금 독특한 이력을 지닌다. 아메리칸 스포츠라면 응당 V8 OHV 엔진을 떠올리게 되지만 당시 GM은 영국 로터스의 협력을 얻어 V8 DOHC 엔진 LT5를 개발, 이 차의 심장으로 삼았다. 출력은 당시 콜벳 일반형보다 100마력 이상 강력한 375마력. LT5 엔진은 이후 몇 가지 컨셉트카와 로터스 GT1 경주차에 쓰였지만 양산차는 콜벳 ZR1이 유일했다. ZR1은 뛰어난 성능만큼이나 가격이 높아서 당시 기본형의 2배에 가까운 5만8,995달러에 팔렸다. 이는 포르쉐 911도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지난해 말 공개된 7세대 베이스의 최신형은 FR 콜벳 역사의 마지막 장을 장식할 가능성이 높다. 외모 변화는 역대 ZR1들 가운데 가장 크다. 범퍼와 보닛 등 흡기구를 새롭게 디자인했고 뒤에는 섀시에 직결된 대형 리어윙이 달렸다. 또한 전용 스플리터와 언더보디 등을 포함해 콜벳 레이싱의 힘을 빌린 결과 기본형에 비해 70%의 추가 다운포스를 얻었다. 엔진은 V8 6.2L에 대용량 이튼 수퍼차저를 얹어 최고출력 755마력을 뽑아낸다. 변속기는 회전수 매칭 기능을 갖춘 트레멕 7단 수동과 패들시프터가 달린 8단 자동 두 가지. 보다 높아진 출력을 바탕으로 최고시속 338km가 가능하다. 쿠페형에 이어 LA모터쇼에서 컨버터블형이 데뷔했다.
3. CHEVROLET CAMARO ZL1
포드 머스탱으로 촉발된 포니카 열기는 비교적 싼 값으로 매력적인 디자인과 고성능을 즐길 수 있다는 데 매력이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최초의 카마로 ZL1은 포니카의 범주를 벗어난 모델이었다. 최초의 ZL1은 쉐보레의 정식 모델이 아니었다. 일리노이 주에서 딜러를 하던 프레드 깁스는 쉐보레의 레이싱카 주문제작 부서인 COPO(Central Office Production Order)를 통해 ZL1 엔진을 얹은 매우 특별한 고성능 카마로를 주문했다. V8 7.0L 빅블록 ZL1 엔진(427)은 당시 경주차를 위해 개발된 물건으로 매우 강력했을 뿐 아니라 헤드는 물론 블록까지 알루미늄으로 만들어 가벼웠다. 425마력의 공식 스펙과 달리 실제 다이노 테스트 수치는 550마력에 달했다고 알려진다. 깁스의 당초 계획은 50대를 주문해 레이서나 프라이비트팀에 판매할 계획이었지만 콜벳보다도 비싼 카마로를 선뜻 구입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최초의 비공식 카마로 ZL1은 69대가 만들어졌다.
카마로 ZL1은 쉐보레 딜러 프레드 깁스가 주문한 비공식 모델이었다
이름의 근거가 된 레이싱 엔진 ZL1
이후 디자인 스터디나 쇼카, 컨셉트카 등에 간간히 쓰이던 ZL1의 명칭은 5세대 카마로를 통해 2012년 공식화되었다. V8 6.2L LSA 엔진에 1.9L 용량 수퍼차저를 얹어 당시 카마로 역사상 가장 강력한 580마력을 냈다. 변속기와 듀얼매스 플라이휠을 바꾸고 브레이크와 냉각 시스템도 개량해 하드코어한 서킷 주행에 대비한 강력한 카마로였다.
5세대 카마로에서 오랜만에 부활했다
가장 최신의 6세대 카마로 기반 ZL1은 V8 6.2L LT4 엔진이 650마력의 최고출력을 내 400m 가속을 11.4초 만에 끝내며 최고시속은 319km에 달한다. 변속기는 회전수 매칭 기능이 달린 6단 수동과 10단 자동 두 가지. 전용 에어로파츠와 마그네틱 라이드 서스펜션을 기본으로 갖추었고 LE1 트림을 선택할 경우 멀티매틱 댐퍼, 굿이어 이글 F1 수퍼카 타이어를 달면서 무게도 30kg 가벼워진다.
서킷 주행에 특화된 최신형 카마로 ZL1
4. CHEVROLET CAMARO Z28
성능에서는 ZL1이 특별할지 몰라도 가장 유명한 고성능 카마로라면 역시나 Z28이다. 1967년식 카마로에 처음 마련되었던 Z28은 쉐보레의 프로덕트 퍼포먼스 매니저였던 빈스 피긴스에 의해 기획된 레이스용 딜러옵션(스페셜 퍼포먼스 패키지)이었다. 그 이름은 옵션 패키지의 코드네임에서 유래된 것으로, 랠리 스포트(Z22)나 수퍼 스포츠(Z27) 등과 달리 코드네임 쪽이 더 유명해진 케이스다.
최초의 카마로 Z28은 4배럴 홀리 카뷰레터가 달린 V8 4.9L 엔진이 트랜스암 규격에 맞추어 제작되어 기본 290마력에서 사양에 따라 400마력도 가능했다. 여기에 업그레이드 서스펜션과 브레이크, 크로스레이쇼 4단 변속기 등을 짝지었다. 첫해에는 602대만 만들어졌지만 67년부터 일반도로용 고성능 옵션으로 전환되면서 판매량이 급증, 69년까지 2만8,000대가 넘게 팔려나갔다. 카마로 Z28은 앞바퀴 위에 더해진 캐릭터 라인과 휠하우스 디자인, 스트라이프 무늬 등으로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카마로 고성능 버전의 대명사인 Z28
67년에 일반도로용으로 전환되면서 판매가 크게 늘었다
Z28은 옵션 패키지의 코드네임에서 유래되었다
1970년 등장한 2세대 카마로는 미국 자동차 노조의 대규모 파업과 배출가스 규제라는 장애물을 만나 휘청거렸다. 당시 카마로 Z28은 V8 5.7L의 LT1 엔진을 얹었지만 저옥탄 무연휘발유 대응과 배출가스 기준 통과를 위해 출력이 330마력으로 낮아졌다. 1974년에는 연간 판매량이 1만3,000대 수준으로 회복되었지만 쉐보레는 1975년에 Z28 트림을 일시 단종시켰다. 77년 부활했을 때에는 출력이 185마력(캘리포니아에서는 175마력)까지 떨어져 있었다.
3세대 카마로에서는 1982년 인디500 페이스카로 선정되면서 특별 에디션으로도 제작되었다. V8 5.0L 엔진은 145마력으로 더욱 빈약했지만 190마력의 옵션 엔진이 추가되었고, IROC 패키지를 선택하면 215마력이 가능했다. 1987년에는 ASC가 개조한 컨버터블이 판매되었다.
70~80년대에는 배출가스 규제로 인해 출력이 떨어졌다
1987년에는 컨버터블형이 등장했다
매력적인 유선형 보디의 4세대 카마로부터는 콜벳용 V8 5.7L LT1 275마력 엔진을 얹어 성능을 보강했다. 이후 LS1 305마력 엔진으로 업그레이드하더니 가변흡기 매니폴드를 더해 325마력까지 출력을 높였다. 이후 10여 년 이상 자취를 감추었던 Z28은 5세대 카마로 끝물인 2014년이 되어서야 부활했다. 옛날식 명칭 Z/28로 되돌리고 본격적인 서킷 주행을 위한 퍼포먼스 머신을 목표로 했다. 전용 에어로파츠와 언더보디로 공기흐름을 다듬고 콜벳 레이싱을 통해 V8 5.7L LS7 엔진과 멀티매틱 DSSV 댐퍼, 트레멕 6단 MT, 카본세라믹 브레이크를 조합했다. 아울러 에어컨을 제거하고 배터리와 창문까지 바꾸는 수고를 통해 철저히 무게를 덜었다. 덕분에 최고시속 277km, 0→시속 97km 가속 4초의 고성능을 손에 넣었다. 현행 6세대 카마로에는 아직 Z/28이 없지만 700마력의 출력을 지니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