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昭君(왕소군)
왕소군은
한나라의 양가집 딸로 원제의
궁녀로 들어갔다.
그녀는
재주와 용모를 갖추었으나 황제의 눈에
띄지 않아 총애를 받지 못했다.
≪西京雜記(서경잡기)≫에 의하면,
당시 황제는 궁녀의 초상화를 보고 골랐는데 궁녀들은 화공 毛延壽
(모연수)에게 뇌물을 바치고 초상화를 잘 그려달라고 청탁했다.
그러나 왕소군은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얼굴이 추 하게
그려져서 그래서 황제의 눈에 띄지 않은 것이다.
당시 匈奴(흉노)의
침략에 고민하던 한나라는 흉노를 다독거리기 위해
여자를 선발해 보내고 있었다.
B.C 33년,
궁녀 왕소군이 선발되어 흉노의 왕 呼韓邪
(호한야)에게 시집가게 되었다.
황제는
왕소군이 떠나기 전에서야 그녀의 실제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
절세의 미모에
단아한 태도를 가진 경국지색의 미 인이 후궁으로
있었는데 그걸 몰랐던 것이다.
황제는
크게 후회하였으나 이미 흉노에게 선 발해
보내기로 한 결정을 번복할 수 없었다.
왕소군의 초상화가
엉터리라는 것을 안 원제는 크게 노하여 초상화를
그린 화공을 참형에 처했다.
왕소군이
한나라를 떠나 흉노의 땅으로 가는 길에 그녀는
멀리서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았다.
이 때 문득
고향 생각이 났던지 그녀는 말 위에서 비파로
이별 곡을 연주했다.
이때
남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이 곡조를
듣고 땅으로 툭 떨어졌다고 한다.
왕소군의
미모를 보느라 기러기가 날갯짓하는 것을
잊었다는 전설이다.
어쨌든 왕소군은
이 전설에서 落雁(낙안), 즉 ‘떨어진 기러기’
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왕소군은
흉노로 가서 閼氏(연씨)부인이 되었고,
아들 하나를 낳았다.
호한야가 죽은
뒤에는 호한야 본처의 아들인 復株累(복주루)에게
재가하여 두 딸을 낳았다.
이러한 왕소군의 전설 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윤색되어서 흉노와의 화친정책 때문에
희생된 비극적 여주인공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출처] 王昭君(왕소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