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0911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절 후 제14주)
온전함(Wholeness)을 향하여
렘4:22~28; 딤전1:12~17; 눅15:1~10
한가위 연휴 중입니다. 남은 시간 동안, 평화롭고 넉넉한 한가위가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 한가위는 원래 일종의 가을추수감사제의 성격을 띠었으니까 구약 성경에 나오는 초막절과 비슷한 절기입니다. 물론 시기도 비슷합니다. 9,10월. 초막절은 원래 수장절이라고 해서 올리브나 포도를 거두어들이던 추수제였습니다. 이때 포도를 거두다 보면, 몇일을 포도원에서 지내야 해서 포도원에서 초막을 짓던 풍습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도원에 초막을 지으며 자기 조상들의 출애급 광야 생활을 회상합니다. 조상들이 광야에 초막을 치고 살았지만 하나님께서 40년간 그들을 지켜주시고 인도하셨던 것을 기억하면서 수장절을 초막절이라고 개명을 하지요. 그러니까 풍성했던 가을추수감사제가 단지 많은 열매들을 거두어 쟁이는 것(수장)에 대한 감사만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을 주신 분, 또 그런 열매가 없었을 때에도 자신들을 지켜주시고 인도하셨던 분을 기억하는 절기(초막)로 바뀐 것이지요. 이스라엘에서 오래 동안 머물렀던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유대인들 중에 지금도 초막절이 되면 집안 뜰이나 집안 주차장에 초막을 짓고 어린 자녀들과 거기서 몇일을 거주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녀들에게 출애급 얘기나 광야 얘기를 들려주는 거지요. 우리 조상이 아무 것도 없이 광야를 지날 때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셨단다... 우리의 삶은 무언가를 더 많이 가져서 안전하고 사랑스럽고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을 이끄시는 분을 기억하고 그분의 이끄심에 승복할 때 안전하고 사랑스럽고 힘이 있는 것이란다... 듣고 또 듣고, 기억하고 또 기억해도,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듣고 기억해야 할 말입니다. 사실 우리 마음이 시끄러우면 이런 소리는 들리지도 않지요. 마음이 좀 고요해지고 영혼의 두꺼운 비늘들이 떨어져 나갈 때에야 그나마 희미하게나마 들리는 소리들입니다.
수피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상이 창조될 때 하나님은 아담에게 물으셨답니다. “내가 너를 창조한 너의 하나님이 아니냐?” 아담은 “예,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뒤로부터 모든 남녀, 모든 사람들 안에는 “내가 너를 창조한 너의 하나님이 아니냐?”라는 질문이 기본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안에도, 우리가 피조물임을, 다시 말해, 우리가 잠시 세상에 왔다가 가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는 말없는 질문이 내장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당신 자신이 우리 존재의 근원으로써, 우리의 존재의 바탕으로써, 우리를 존속하게 하시며, 우리 안에서 창조활동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이 말없는 질문(“내가 너를 창조한 너의 하나님이 아니냐?”)이 내장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내장된 이 질문에 대해 우리는 응답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은 그냥 말로만, “예”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살아 보이는 “예”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수피들의 깨달음이 깊지 않습니까?
헤셀은 <사람을 찾는 하느님>이란 책에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테오리아)
“우리가 그분을 찾음은 인간의 일만이 아니고 그분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간 홀로 해내야 하는 일로 보아서는 안된다. 우리의 열망 속에는 그분의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성경에 묘사된 인류의 역사는 다음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겠다. 하느님이 인간을 찾으신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하나님의 질문에 응답하는 것이다.”
헤셀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이 부르는 음성은 거듭하여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여전히 작은 음성의 작은 메아리요 언어로나 생각의 범주로 발설되고 전달되지는 않지만, 신비스럽다. 그것은 침묵으로 싸여지고 덮여 있지만, 삼라만상 모두가, 너 어디 있느냐는 질문의 메아리인 듯하다. 신앙은 경외에서, 우리가 그분 앞에 노출되어 있음을 깨달음에서, 하나님의 질문에 응답해야 하는 두려움에서, 그분이 우리를 부르신다는 사실을 깨달음에서 생겨 나온다. 종교는 하나님의 질문과 인간의 대답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보면, 오늘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의 말씀도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다한 부름으로 들립니다. 아니 오늘 말씀만이 아니라, 예언서 전체가 그렇습니다. “나의 백성은 참으로 어리석구나. 그들은 나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모두 어리석은 자들이요, 전혀 깨달을 줄 모르는 자식들이다.”(렘4:22)
사람을 향한 탄식과 성냄과 심판의 말씀도 결국은 “사람을 찾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이 질문에 접속되고 이 마음에 조율될 때 우리는 진정 사람답게,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람을 찾으시는 것은 “사랑의 힘”입니다. 지금도 온 세상은 사랑의 힘으로 움직이고, 우리도 지금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사는 것 같지만, 실은 사랑의 힘으로 사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찾으시는 것은 우리를 잡아다 자신의 노예로 삼으시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입맛대로 길들이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장 사람답게, 이 세상을 사랑을 충만하게 누리며 살라고, 결국 사랑이 되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으신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찾으신다는 걸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15장에 세 개의 찾는 이야기 나옵니다. 잃은 양의 비유, 드라크마의 비유, 잃은 아들(탕자)의 비유. 이 중 드라크마의 비유와 탕자의 비유는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비유입니다. 오늘 우리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놓아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기뻐하는 “잃은 양의 비유”와 열 잎의 드라크마 중에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려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며 마침내 한 드라크마를 찾았다고 하는 “드라크마의 비유”를 읽었습니다.
이런 비유들은 그동안 교회에서 소위 불신자들을 전도할 때 독려하던 본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죄인들이 돌아오기를 바라시는데, 우리가 열심히 전도해서 불신자인 죄인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자!
그러나 오늘 본문을 깊이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들이야 말로, 잃어버려진 사람들은 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일차적으로 우리 자신이야말로 잃어버려진, 길을 잃고, 중심을 잃고, 전체성(온전성)을 잃고, 뭔가 비어있고 상실된 뭔가를 찾는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백 마리의 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한 마리를 잃어버림으로써, 99마리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99마리를 놓아두고 끝까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간다는 것은, 99마리의 양으로는 온전한 전체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양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아직 99마리나 남았는데, 라고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 사람에게 한 마리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백 마리가 차야(백은 온전함, 전체성의 상징입니다) 그것이 온전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으러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들에 두고 찾을 때까지 찾아다닌다는 겁니다. 한 마리를 찾으러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었다? 이 사람은 수량적으로 계산하게 되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합니다. 또 찾으면 기뻐하며 이웃과 친구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베풉니다.
다시 찾은 드라크마의 비유도 비슷합니다. 열 닢의 드라크마가 있는 사람이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렸습니다. 한 드라크마는 한 데나리온에 해당되며,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되니까, 사실 잃어버린 은전이 그렇게 큰돈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유 속의 여자는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며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집니다. 그리고 찾은 뒤에는 벗과 이웃을 불러 [잔치를 베풀고]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도 잔치가 벌어집니다. (고작 드라크마 한 닢을 찾고는 잔치를 벌입니다!) 경축되고 축하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잃어버렸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잃어버렸다는 말은 중심을 잃었다고 할 수도 있고, 전체성이나 의미를 상실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길을 잃었다고도 할 수 있고, 어떤 확실함과 힘을 결여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뭔가를 잃어버림으로 우리가 전체성, 중심, 실재, 나임(Iamness), 궁극적 바탕을 잃어버린 것이 바로 우리의 인간조건이라는 겁니다.
당시 팔레스틴 지방의 평민들의 집 구조는 내부에 방 하나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낮은 출입문이 하나가 있었으나 창문은 없었기 때문에 어두웠습니다. 그리고 바닥은 다진 진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위에 갈대와 마른 풀이 깔려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닥에 물건을 떨어뜨리면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여인은 그가 가지고 있던 은전을 잃어버리자 등불을 켜들고 온 집안을 쓸면서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졌습니다.
여인은 열 개의 은전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는데, 이 돈은 여인이 저축한 돈이거나 결혼 지참금인일 수 있습니다. 당시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결혼 지참금을 가지고 있다가 결혼하면 은전 열 닢을 실에 꿰어 머리 장식으로 걸기도 했다고 합니다. 어찌되었든지, 비유에서 은전 한 닢은 전체를 이루기 위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이 여인에게 매우 귀중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인은 은전 하나를 잃어버리자 그것을 애타게 찾았고, 찾았을 때는 매우 기뻐하면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자랑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안셀름 그륀은 이 비유를 자신의 중심, 자신의 전체성을 잃어버린 이야기로 봅니다. 이 여인은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는데, 여기서 열은 전체성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온전하고 건강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여인은 은전 한 닢을 잃어버렸습니다. 부인이 은전 한 닢을 잃어버렸다면, 그녀는 온전한 전체성을 잃은 것이고, 자기 자신과 하나님과의 일치를 상실한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중심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닛사의 그레고리는 이 은전을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자신의 온전성을 드러내는 상징입니다.
이 여인은 그래도 은전 아홉 닢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버텨 보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건강, 재능, 학벌, 명예로운 삶, 사교적인 삶, 종교생활, 그녀가 쌓아 올린 덕행이 될 수 있습니다. 그녀는 그것으로 좀 더 열심히, 좀 더 성실히, 좀 더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 자신의 삶을 잘 꾸며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 가리면 가릴수록 자신의 진정한 내면은 온전하지 않다는 느낌만 가득 찰 뿐이었습니다. 이런 내면의 비어있음을 극복하기 위해서 자기 존재라는 집 안에 많은 것들을 들여놓고 치장을 해 보지만, 그것들은 일시적인 대체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 여인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이 여인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습니다. 그래서 등불을 켜듭니다. 여기서 등불은 믿음의 빛입니다. 믿음의 빛은 우리가 내면에서 잃어버린 은전을 찾기 위해 필요한 하나님의 빛입니다. 니사의 그레고리는 이 등불을 이성(의식)으로 보았습니다. 여인은 무의식의 어둠을 밝히고 그 속에서 잃어버린 온전함을 찾기 위해 이성(의식)의 빛도 필요했습니다.
여인은 등불을 켜들고 온 집안을 뒤집니다. 방 안에 자신이 들여다 놓은 온갖 치장한 것들을 하나하나 밖으로 꺼내놓습니다. 그러자 방안에는 켜켜이 싸인 먼지와 지저분한 것들이 드러납니다. 그녀는 켜켜이 싸인 먼지와 오물들을 깨끗이 쓸어내면서 샅샅이 뒤지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샅샅이” 라는 말은 <에피멜로스>라는 말인데, “조심스럽게, 꼼꼼하게, 정확하게, 부지런하게”라는 듯입니다. 여인은 조심스럽고 꼼꼼하게 또 부지런하게 잃어버린 은전을 찾기 위해 방 안에 쌓인 먼지와 오물들을 청소하며 뒤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은전을 찾는 것과 방 안에 켜켜이 싸인 먼지와 오물들을 쓸어내는 일이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그녀는 잃었던 은전을 다시 찾습니다. 다시 말해 비로소 자신의 온전함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자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모아 외칩니다.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 이것은 전체성(온전성)을 찾은 사람의 외침이기도 하지만, 그 깊은 심원에는 전체성을 찾은 사람(온전한 사람)을 보는 하나님의 외침이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온전성을 회복하는 것을 이렇게 기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면서, 이는 내 기뻐하는 자다, 내가 좋아한다, 말씀하신 이유가 거기에 있고, 반대로 예언자들을 통해서 “나의 백성은 참으로 어리석구나”(<키 에윌 암미> “나의 백성은 바보 얼간(숙맥)이다”) 외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추동하는 힘은 바로 온전한 사람, 너 자신 그대로가 되라는 (아니, 발견하라는) 부르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와 온 세상을 만드시고(바탕이 되시고) 유지하시고 존속하시는 사랑의 힘입니다.
세 가지 권고를 하고 싶습니다.
특별히 우리의 열망(갈망) 속에는 그분의 의지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만족하지 못하는 그 속에도 온전함을 향해 나가라는 하나님의 의지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열망(갈망)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를 잘 살펴야 합니다. 그 갈망 속에는 온전함을 향한 씨앗이 있습니다.
또한 온전함을 이루는 일은 혼자서 도 닦고 하늘 위로 올라가는 일이 아닙니다. 온전함을 우리의 삶의 장(場) 안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가정, 일터, 의미 있는 모임들, 교회, 그리고 더 큰 공동체. 이 안에는 물론 갈등이 있고,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갈등과 문제들이 우리를 온전하게 이끌어 준다는 역설도 진실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통해 상처받지만, 결국 받아들여지고 위로받는 것도 사람들입니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과 가까이하고 마음을 털어놓는 법을 배우십시오. 혼자서 끙끙대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정말 압박감을 주던 일들도 압력이 풀리고 나면 대하기 훨씬 쉬워질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교우들은 서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신뢰그룹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좋은 장은 어디서 쉽게 찾을 수 없습니다. 잘 활용하십시오.
끝으로 온전함을 향해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고 연습하십시오. 오늘 여인이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면서,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졌던 것을 상기하십시오. 온전함은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책을 읽고, 좋은 사람들과 내면의 이야기를 하고, 고요히 머무는 좋은 기도를 하십시오. 몸을 방치하지 말고, 몸으로 훈련하십시오. 몸은 여러분의 전체성을 담는 그릇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 하나님, 우리의 이중성, 우리의 혼란과 불안, 우리의 무력감이 우리 안에 있는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후유증일지 모릅니다. 의사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붙잡으시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좀더 온전하게 이끌어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