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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하 12;15-31. 하나님이 이루시는 원본과 사본. 2023. 6. 4.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다윗의 잘못으로 빚어진 결과의 산물입니다. 잘못된 결과의 산물은 3가지입니다. 12;10, 칼이 다윗의 집안에 영원히 떠나지 않는 것과 12;11. 벌건 대낮에 다윗의 아내와 사람들이 동침하는 것과 12;14. 다윗이 지금 낳은 아들이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포한 내용 중에 시작이 다윗의 아들이 죽는 내용 입니다. 이것은 다윗에게 아픔과 고통 이였습니다. 이만 저만한 고통과 아픔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도 3가지 중에서 제일 먼저 다윗의 아들의 죽는 일인데 이 것이 하나님의 의도대로 이루어집니다. 오늘 본문 바로 위의 14절에 다윗이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라. 반드시 죽습니다. 정년 죽고 반즈시 죽는 것은 이미 선포되어진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아들이 죽는 것은 하나님의 선포이고 하나님의 의도가 그대로 드러난 행위입니다, 정녕이고 반드시입니다. 정녕과 반드시는 문자 그대로 변치 않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런 선포와 결과 앞에서 다윗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선포와 결과 앞에서의 다윗의 태도가 오늘을 사는 우리 신앙인에게 반드시 필요하고 생각이 되어서 이 본문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남겨놓았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선포와 의도 앞에서도 기도 합니다. 잘못한 결과의 산물인 것을 알면서도 기도 합니다. 풀리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기도 합니다. 여러분, 다윗은 하나님께서 결정 하신 내용은 좀처럼 바뀌어 지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잘 압니다. 3가지가 모두 다윗에게 큰 부담이지만 그럼에도 자녀의 문제가 제일 큰 현실의 문제이었습니다. 밧세바가 낳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우리아 에게 책임을 다하려는 다윗의 정성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윗을 다윗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작정이고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내용을 다 인지 하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기도하되 간절히 기도하고 이 내용의 기도의 끈을 사건이 마무리 될 때까지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왜 이렇게 할까요? 혹시나 입니까? 금식을 하면서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오직 하나님 앞에 간절히 소망하고 기대하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겉모습이 아니고 진정이고 다윗의 혼네 입니다. 다윗의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다윗의 문제를 푸실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으시다는 것을 아는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결정이 되어 있고 판결이 났음에도 기도를 합니다. 여러분, 대단 하지요? 얼마나 담대하고 얼마나 뻔뻔하고 얼마나 당찹니까? 여기서 우리 신앙인이 배워야 합니다. 선포가 되고 결과의 산물이 매듭지어질 때까지 결단코 포기하지 않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결단코 포기하지 않은 기도가 문제를 바꾸기도 하고 아니면 또 다른 더욱 놀라운 축복을 대신하여 주십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다윗을 사랑하시고 또 다윗을 만들어 가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부르실 때에 그렇게 작정했기 때문입니다. 모태에서 조성되기 전에 약속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합한 사람이 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한번 사랑한 사람은 절대로 손을 놓지 않으시고 끝까지 주목하시고 끝까지 추적하시고 마지막 날까지 책임지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끝까지 주목하고 추적하고 책임지신다는 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끝까지 주목하고 추적하고 책임지시는가? 축복하시므로, 길을 여시므로, 목적지에 도달 하게 하시므로, 과정 속에서도 간섭하시므로 주목하고 추적하고 책임을 지십니다. 그런데 이런 주목하고 추적하는 일은 잘 될 때에도 그렇습니다. 안 될 때에도 그렇습니다. 잘못 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렇습니다. 잘못의 결과 속에서도 그렇습니다. 그 어떤 댓가를 지불할 때에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징계 앞에서 취할 태도가 무엇입니까? 먼저는 하나님의 작정이고 하나님의 간섭이고 계획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 하나 깜짝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기도하되 간절히 기도하고 기도의 끈을 이 사건이 마무리 될 때까지 놓지 않아야 됩니다. 다윗이 혹시나 이었습니다. 금식을 하면서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오직 간절히 소망하고 기대하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이 것이 혼네 이고,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오직 문제를 푸시고 해결하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결정이 되어 있고 판결이 났음에도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 것이 임마누엘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자세와 태도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오늘 다윗을 통해서 또 다른 은혜를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 앞에서가 아니라 징계 앞에서도 기도 하므로 은혜의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의 답은 언제나 기도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1.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여러분, 어떤 상황 앞에서도 기도하십니까? 예수님을 믿은 후 지금까지 기도하여 내 인생을 바꾼 경험이 있습니까? 기도는 우리들의 인생을 바꾸어 주는 능력입니다. 특별히 포기하지 않는 기도가 큰 역사를 이루어 갑니다. 기적과 큰 역사가 안 일어나도 기도해야 합니다. 누구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을 괴롭게 하지 말라. 억지 기도하지 말라. 하나님을 내 문제로 끌어 들이지 마라. 무모하게 기도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들은 기도로 이루게 되는 역사와 기적을 진실로 맛보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일부분만 알고 경험한 것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괴롭게 하고 하나님을 귀찮케 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 앞에서도 기도를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하루는 두로 지방에 가셨습니다. 마15:21∼28과 막8;24 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두로 지방에 가셔서 한 집에 들어갔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었는데 왜 예수님은 한 여인이 사는 두로 지방에 있는 마을로 갔습니까?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발걸음은 의미 없이 움직이는 발걸음이 아니고,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는 사역 위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발걸음은 항상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는 목적이 있는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여인이 사는 마을로 발걸음을 움직인 것은 바로 이 여인을 만나 구원해 주시기 위한 발걸음 이었습니다. 오늘 해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해답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말씀 속에 문제를 풀어 가야 합니다. 이 여인이 사는 두로 지방의 마을로 갔을 때에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인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더럽고 흉악한 귀신이 들려 고통 중에 있는 어린 딸의 문제를 가지고 찾아 왔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발아래에 엎드리며 큰 소리로 기도하기를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내 딸에게서 더럽고 흉악한 귀신을 쫒아내 주시옵소서!!! 간절하게 기도하고 소리 지르며 기도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1. 자신에게 누군가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딸의 문제를 예수님이 해결하신다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무엇 입니까? 적극적 구함이요, 간절한 소망입니다.
1-2. 자신의 귀신들린 딸을 고쳐줄 분이 메시야이신 예수님이심을 정확하게 알고 그 문제를 예수님께 가지고 나왔고, 또 자기에게 찾아온 기회를 잡고 결코 놓치지 않고 그 기회를 붙잡았습니다. 응답이 무엇 입니까? 나를 고쳐주고, 나를 축복하고, 나를 회복 시켜줄 분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분께 구할 때에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1-3. 겸손히 예수님께 자신의 형편과 사정을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이 여인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습니다. 소리 지르며 도와 달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고 그의 앞을 그냥 지나가십니다. 애절하게 소리 지르며 간곡하게 부르짖는 여인을 보는 제자들이 너무 딱하여 오히려 제자들이 그 여인을 대신하여 예수님께 예수님!!! 이 여자가 우리 뒤에서 저렇게 간곡하게 소리를 지르오니 저의 소원을 들어 주어서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 주소서. 돌려보내 주소서. 여인은 자신을 무시하는 예수님의 행동을 알았습니다. 간절함이 있는가? 치유하는 능력을 확실히 믿고 소망을 하는가? 시험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 말씀을 전하여 준 제자들에게 시선과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고 오직 예수님께만 집중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예수님은 여인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두 번째 주님이 하신 행동 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오늘 이 동네에 온 목적을 숨기셨습니다. 여러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축복을 주시기 전에 당신의 선하신 뜻을 감추고 반드시 그 축복을 담을 믿음의 그릇을 확인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평안하고 좋은 때 주님에 대하여 3가지를 기억하고 늘 시인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어떤 어려움에도 주님을 오해하지 않고 그 시험을 넉넉하게 이길 수 있습니다. 여인과 아무 상관도 없고 관심도 없다는 상처에 더 큰 상처를 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여인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 앞으로 더 달려 나와 예수님께 절하며 더 간절하게 주여!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이 여인이 가진 믿음의 복입니다. 믿음이 확실하지 않으면 이런 일 앞에 무너집니다. 기도는 약속하신 불변의 말씀을 붙잡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물러서거나 실망하여 포기 하지 않아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이 신실한 것을 알고 믿고 참고 인내하며 더 적극적으로 주님께 기도로 매달립니다. 결코 포기하여 중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야곱처럼 기도에 생사를 걸고 올인 합니다. 이 여인은 야곱처럼 물러서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기도에 올인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여인이 가진 복입니다. 그런데 평상시와 같지 않은 예수님입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고, 상상 할 수도 없었었습니다. 이미 두 번이나 상처를 받은 여인의 인격에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잔인한 인격 모독을 합니다. 여인의 말에 대한 대답으로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하는 것이 순서인데 어찌 자녀에게 주어야 할 귀한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겠는가? 마땅치 아니하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큰 복을 받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 큰 시험을 받고 통과한 사람들 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시험을 받았으나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큰 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만 그렇습니까? 이삭은 큰 흉년 앞에서 그랄지방에 머물라는 시험을 받아 믿음으로 순종하여 복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그 엄청난 시간 동안 불같은 고난의 시험을 받아 믿음으로 순종하여 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족장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시험이 크면 클수록 더 큰 축복은 예비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예수님으로부터 도무지 상상 할 수 없고, 생각하지도 못하고, 아니 생각할 수도 없는 말을 들었지만 결코 포기하고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 앞에 더 바짝 다가서서 주여! 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나는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하찮은 개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상아래 개들도 제 주인의 아이들이 먹다가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저에게는 그 부스러기를 주옵소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에 대한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고 굳건하게 지키는 믿음 이것이 이 여인이 가진 가장 큰 복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될까요? 주님에 대한 본질적인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인격에 대못을 박는 상처를 주는 말을 하여도 괜찮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님의 본심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시험하신 문제에 대한 해답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모진 말을 들어도 결코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고 오히려 더 주님 앞으로 나아가 자신을 낮추고 주님의 부스러기의 은혜만이라도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를 했고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자신의 기도를 반드시 들으시고 은혜를 주실 것을 믿었고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은혜로도 자신의 소원을 이루고도 넉넉하게 남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더러운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으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라며 축복을 했습니다. 이에 그 여인이 집에 돌아가 보니 아이가 침상에 누어있는데 귀신이 아이에게서 떠나간 후이었기 때문에 그 얼굴은 천사처럼 예쁘고 평안히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포기하지 않는 기도가 낳은 축복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축복을 받을 그릇을 시험하신 후에 놀라운 축복을 응답으로 하십니다.
유명한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부활, 안나 카레니나」 등과 같은 좋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러면 톨스토이가 세계적인 작가가 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백작의 아들로 태어나 1천 여 명의 농노를 거느린 영지에서 부유하게 자랐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했으며, 피아노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교양이 풍부한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섯 남매를 남겨 놓고 톨스토이가 태어난 지 1년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7년 뒤 아버지 니콜라이도 뇌출혈로 돌아가셨고, 할머니도 그 충격으로 9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청년이 되어 대학 입학시험을 보았지만 낙방하였고, 다시 도전하여 대학에 들어갔지만 허무함으로 대학 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고향 땅에 돌아가 농노들과 함께 이상적인 농촌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신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농노들과 하나가 되지 못하여 그 꿈도 실패했습니다. 결국 그는 군에 입대하여 전쟁에 참여하였습니다. 크림 전쟁의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아버지의 가족과 어머니의 가족을 모델로 삼아 전쟁과 평화라는 작품을 썼는데 그 작품으로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작품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갈채를 받았고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삶의 허무와 죄에 대한 공포와 불안한 마음은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적한 시골길을 걸어가던 중 어느 시골 농부를 만났습니다. 그의 얼굴에 유난히 평안해보였고 톨스토이는 그가 너무 부러워 농부에게 평화의 비결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기 때문에 언제나 기쁠 뿐입니다. 그 말을 들은 톨스토이는 모든 것을 다 갖췄고 많은 재산과 성공과 즐거움을 누리며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시골농부보다 더 불행하게 살고 있는 자신을 되돌아보며 그날부터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톨스토이는 나의 회심이라는 글에서 5년 전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나의 전 생애가 변했습니다. 욕망하던 것을 욕망하지 않게 되었고 이전에 구하지 않았던 것들을 갈망했습니다. 이전에 보았던 것들이 다르게 보이고, 대수롭지 않게 보이던 것들이 중요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무지개를 찾아다니며 살았는데 그 허무함을 알았습니다. 거짓으로 꾸미는 것이나, 여인들과의 생활이나, 취하여 기분 좋아하는 것들을 더 이상 행복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시간은 지금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은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일이다. 82세로 하나님 앞으로 가기 전 일기를 남겼는데, 아버지여, 생명의 근원이시여, 우주의 영이여, 생명의 원천이여, 날 도와주소서. 내 인생의 마지막 며칠, 마지막 몇 시간이라도 당신에게 봉사하며 당신만 바라보며 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험을 당할 때에 믿음의 선진들과 이 가나안의 여인처럼 믿음으로 견고히 서서 준비된 큰 복을 받으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끊임없는 기도의 결과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결과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로 연결 됩니다. 사람이 모를 하나님의 원본과 사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원본과 사본을 혼동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다윗이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장면은 다윗의 아들이 그냥 죽습니다. 지금 다윗에게 일어난 결과의 산물은 원래의 징계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이 사본이고 또 다른 섭리가운데 주실 은혜가 하나님의 원본입니다. 더 좋고 더 나은 것을 준비하시고 주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은혜입니다. 오늘 다윗은 일주일간 기도를 합니다. 금식으로 식음을 전폐합니다. 15,16,17절, 아들이 병이 들었습니다. 병의 원인은 하나님께서 의도 하셨습니다. 아들의 병은 다윗의 잘못된 결과의 산물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기도를 합니다. 이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은 대답이 없습니다. 마치 두로와 시돈에서의 예수님을 만난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무응답 이셨던 예수님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하실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아이가 7일 만에 죽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원본처럼 생각합니다. 원본과 사본에 대한 멧세지가 있습니다.
2-1.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라고 하시면 인간의 어떠한 요구도 외면한 채 당신의 하실 일을 하십니다. 그냥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겉으로는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하실 일을 하셨습니다. 말씀하신 바를 바꾸시기도 합니다만 말씀 하신 것을 이루기도 하십니다. 이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지만 사본입니다.
2-2. 그럼에도 끊임없이 기도하고 간구하면 하나님의 가장 완벽한 짧은 시간에 매듭을 지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바꾸심의 또 다른 은혜의 첫 번째 복입니다. 7일 만에 매듭짓도록 하십니다. 겪을 고통 이라면 가장 간단하게 가장 짧게 가장 쉽게 끝을 맺습니다. 다윗의 고통은 7일 이면 족했습니다. 식음도 7일 이면 족 했습니다. 금식도 7일이면 됐습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오래 두지 않습니다. 기도하면 고통의 기간도 가장 줄여주시고 가장 짧게 하십니다.
2-3. 이 아픔을 대신해서 다른 아들을 준비 하시고 그를 통해서 다윗이 이루고자 했던 일을 이루십니다. 이 것이 하나님의 바꾸심의 또 다른 은혜의 두 번째 복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탄생을 합니다. 오늘 본문의 연결로서 솔로몬을 이야기 합니다. 그 것도 25절에서 하나님의 심정을 다윗에게 토로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다윗의 기도 때문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원본을 드러냈습니다.
2-4. 매듭이 지어지면 그 것을 바로 하나님의 섭리로 보는 다윗입니다. 7일간 금식을 합니다. 식음을 전폐하고 하나님께만 부르짖습니다. 21절, 22절, 신복들이 왕께 묻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위하여 금식을 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어찜이니이까?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 런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선포만으로는 다윗은 소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면... 가능한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금식하고 웁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더라도 하나님의 선포대로 매듭이 지어지면 이 일이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로 하신 일이라고 믿음으로 받아 드리고 그 다음의 일을 위하여 힘써 살아가는 다윗입니다. 그러니까 이전도 하나님을 보고 지금도 하나님이 하실 은혜를 보는 다윗입니다.
3. 사건의 매듭은 또 다른 무엇이 기다립니다. 여러분, 사건이 어떻게 매듭 지어 지든지 매듭이 되면 새로운 일이 전개가 됩니다. 사건이 매듭이 되자 언제 금식하고 울었던가? 할 정도로 다시 자기의 삶의 자리로 복귀합니다. 새로운 일을 모색합니다. 잊어 버려야 될 일이라면 다윗은 훌훌 털어 버립니다. 잊어버릴 일을 끌어 않고 전전긍극 하지 않습니다. 버릴 것은 간단하게 지워 버리는 다윗입니다. 그래서 23절 후반에, 나는 저에게로 가거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 하리라. 원망도 안하고 불평도 안하고 기도의 결과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바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잊어버립니다. 버릴 것은 버립니다. 그리고 새로운 일을 모색하여 이전에 이루고자 했던 랍바를 쳐서 취하고 새로운 전진을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금한 달란트의 면류관을 다윗에게 씌워 줍니다. 다윗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은혜입니다. 결국 금 한 달란트의 면류관으로 영광의 뿔을 높였습니다.
여러분, 헨리 나우엔은 그의 친밀함 이라는 저서 속에 나오는 나는 소망합니다. 입니다.
내가 누구를 대하든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타인의 죽음을 볼 때마다 내가 작아질 수 있기를 그러나 나 자신의 죽음이 두려워 삶의 기쁨이 작아지는 일이 없기를 나는 소망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줄어들지 않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상대가 나에게 베푸는 사랑이 내가 그에게 베푸는 사랑의 기준이 되지 않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모두가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기를 그러나 나 자신만은 그렇지 않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언제나 남들에게 용서를 구하며 살기를 그러나 그들의 삶에는 나에게 용서를 구하는 일이 없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남자)를 만나게 되기를 그러나 그런 사람을 애써 찾아다니지 않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언제나 나의 한계를 인식하며 살기를 그러나 그런 한계를 스스로 만들어 내지는 않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삶이 언제나 나의 목표가 되기를 그러나 사랑이 내 우상이 되지는 않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모든 사람이 언제나 소망을 품고 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헨리 나우웬 박사가 예일 대학과 하버드대학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메사추세츠에 있는 작은 정신지체아 시설에 직원으로 들어갔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세계적인 신학자가 모든 지위와 명예를 뒤로하고 정신지체아들의 용변 지도와 세수, 옷 입히는 일을 하며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뉴스를 접한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아 이런 질문들을 했습니다. 왜 그러시는가? 꼭 그래야만 했는가? 헨리 나우엔은 예수의 이름(In the name of Jesus)』이란 책에서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예수는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희생으로 증거 되기 때문이다. 그는 영적 발돋움, 영혼의 양식, 상처 입은 치 유자,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20여권의 저서를 남기고, 정신지체 공동체인 라르쉬(L'Arche)의 캐나다 토론토 지역 데이브레이크(Daybreak)에서 사역하다가 1996년 9월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도 다윗처럼 모든 어려움이 매듭 되고 마무리되면, 그 것이 내가 보기에는 나쁜 결과로 나타났음에도 새로운 일과 금 면류관으로 씌워 주시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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