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같은 호반 산책길
괴산 산막이옛길을 걷다
10월. 가을의 중심인 이 달은 특히 단풍이 절정인 달이다. 사람들은 붉게 익어가는 계절을 만끽하기 위해 산으로 숲으로 떠난다. 걷기 좋은 계절이다. 단풍 만 즐기려면 설악산, 내장산, 지리산 등 단풍으로 유명한 산들을 오르면 좋겠지만 등산을 자주 하지않는 사람들에게는 산행의 부담이 있어 선뜻 나서기가 쉽지않은 것도 사실이다. 별로 힘들지않게 느린 걸음으로 가볍게 산책하면서 물과 가을숲의 아름다움을 함께 즐길 만한 곳은 어디가 좋을까? 필자는 이에 대한 답으로 이번에는 괴산 산막이옛길을 추천하고 싶다.
산막이옛길은 충북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 사오랑마을에서 산골마을인 산막이마을까지 연결됐던 총길이 4km, 10리의 옛길이다. 흔적처럼 남아있는 옛길에 덧그림을 그리듯 그대로 복원된 산책로이다. 옛길 구간 대부분을 목제데크로 만드는 친환경공법으로 환경훼손을 최소화하여 살아있는 자연미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산책로를 따라 펼쳐지는 산과 물, 숲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산막이’는 산 깊숙한 곳에 장막처럼 주변 산이 둘러쌓여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예전부터 이곳에서 살던 산막이마을 사람들이 오고가던 옛길이다. 한국관광공사 자료에 의하면, 아주 오래전 첩첩산중에 마을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산속 오지였던 터라 죄인의 유배지로 제격이었다. 조선 중기의 학자 노수신(1515-1590)은 을사사화(1545년)에 휘말려 이 두메에서 한동안 유배생활을 했었다. 나중에 그의 10대손인 노성도가 선조의 자취를 더듬어 이곳으로 왔다가 마을을 에둘러 흐르는 달천 주변의 비경에 반해 아홉경승지를 골라 ‘연하구곡’이라고 이름붙였다 한다. 1957년에 괴산댐이 들어서며 괴산호가 생겼다. 연하구곡이 물에 잠기고 산막이마을과 옆마을을 이어주던 섶다리, 돌다리도 없어졌다. 마을사람들은 나룻배로 호수를 건너야 했다. 이것이 불편해 산비탈에 벼랑길을 냈다. 이것도 불편해지자 아예 마을을 떠났다. 사람들이 떠나자 길의 흔적도 흐릿해졌다. 산막이옛길은 당시 이처럼 위태롭고 불편했던 벼랑길을 2011년에 복원한 것이다.
괴산댐은 지난 1957년 초 순수 우리기술로 최초 준공된 댐으로, 주변이 산으로 아늑하게 둘러쌓여 있어 자연스럽게 호수를 만들어 그림같이 아름다운 풍광을 그려냈다. 산막이옛길은 괴산댐으로 형성된 괴산호 호반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이다. 산막이옛길은 호수와 어우러지며 한 폭의 동양화같은 풍광을 보여준다. 괴산호를 따라 고인돌쉼터, 연리지, 소나무동산, 정사목, 망세루, 호수전망대, 물레방아 등 30여 개의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조성했다. 산막이옛길이 무엇보다 빼어난 것은 짙은 숲터널을 지나면서 맑은 괴산호의 물을 내려다보면서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 햇볕이 들지않을 정도로 우거진 활엽수의 숲속에서 물을 바라보며 걷다 보면 몸과 마음이 저절로 깨끗해지고 힐링이 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산막이옛길을 즐기는 방법은 두가지. 산책길처럼 편안한 벼랑길을 따라 산막이마을까지 걷는 방법과, 노루샘에서 등잔봉(450m)과 천장봉(437m)을 잇는 등산코스를 따라 산행하는 방법이다. 등잔봉에 오르면 산막이마을과 한반도지형을 싸고 도는 달천의 비경을 맛볼 수 있다. 산행은 약 3시간정도 걸린다.
등잔봉은 옛날 한양으로 과거 보러간 아들의 장원급제를 위해 등잔불을 켜놓고 100일기도를 올렸다고 하며, 지금도 그 효험이 있다 하여 자식들을 위해 정성을 드리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봉우리라 한다. 그리고 천장봉은 하늘 아래 펼쳐진 자연경관이 울창한 노송과 더불어 장관을 이뤄 그 수려함에 하늘도 감탄하여 숨겨놓은 봉우리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괴산군은 다시 오고싶은 산막이옛길을 만들기 위해 2013년 3월, 이와 연계한 ‘충청도양반길’을 조성하고, 올해 말까지는 괴산호를 가로지르는 150m의 출렁다리를 만들어 산막이옛길의 새로운 볼거리와 체험거리를 제공할 계획이다.
충청도양반길은 양반들이 한양을 오고 가던 아름다운 길로, 괴산호 주변의 울창한 노송과 20리 수려한 물길따라 펼쳐진 갈은구곡의 명소, 삼신바위, 양반길 출렁다리, 선유대, 용추폭포 등이 산재해 있다.
이제 산막이옛길을 직접 걸어보자.
산막이옛길 기점, 괴산호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고갯마루에는 제법 큰 산막이옛길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괴산군수 명의로 2011년 11월에 세운 이 기념비에는 “백두대간에서 한남금북정맥이 갈라져 남한강의 달천과 금강의 보강천이 흐르는 한반도의 정중앙 괴산군, 바로 여기 사오랑마을에서 산막이마을까지 하나로 어우러진 정감어린 옛길이 있었기에 우리는 그 길을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으로 십리옛길과 이십리 등산로를 복원하여 하늘과 땅, 산과 강과 바람, 바위와 소나무, 산새와 풀 등이 조화를 이루는 산막이옛길을 만들어 전국민의 휴식공간으로 제공하고자 한다”고 쓰여 있다. 관광안내소 옆에는 산막이옟길과 충청도양반길 안내도가 크게 세워져 있다.
소나무숲이 울창한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우측으로 붉게 익은 사과밭이 보이고 등잔봉 산 전체에 울긋불긋 단풍이 익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좌측으로는 목제데크쉼터 쪽으로 차돌바위선착장 가는 길 이정표가 보인다. 이 선착장은 괴산호 왕복 12km 전구간을 일주하는 유람선 선착장이다. 단풍 든 나무숲 사이로 유람선 한척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숲과 호수, 그리고 산이 어우러져 그림같은 풍광을 보여준다.
산책로 곳곳에는 볼거리가 많다. 안내판과 함께 스토리텔링이 잘 돼 있다. 먼저 고인돌쉼터를 지나면 연리지를 만난다. 두 나무의 중간 부분이 붙어 있다. 뿌리가 서로 다른 나무의 가지가 한 나무처럼 합쳐지는 현상을 연리지라고 부른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연리지 앞에서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면 사랑이 성취되고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남근바위도 보인다.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닮아 있다.
다음은 소나무동산. 괴산호의 푸른 물이 보이는 언덕에 40여 년생 소나무가 1만평 정도 군락지를 이루고 있다. 시원한 바람이 묻어오는 솔향기를 맡으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삼림욕장이다.
소나무동산 안에는 소나무 사이를 연결하여 출렁다리도 만들어놨다. 길다란 출렁다리를 걸어가면 짜릿한 스릴을 만끽할 수 있다.
산책로 초반에는 남녀 사랑 이야기가 많다. 정사목도 만난다. 소나무 두가지가 갈라진 틈으로 말뚝이 박히듯 또 하나의 소나무가 마치 남녀가 정사를 하듯 가운데에 박혀 있다.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남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 소나무는 천년에 한 번 십억주에 하나 정도 나올 수 있는 귀한 ‘음양수’로서 나무를 보면서 남녀가 함께 기원하면 옥동자를 잉태한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호수를 내려다 보면서 계속 걷는다. 숲속 호수가 무릉도원처럼 아늑하다. 주차장에서 1.2km 쯤 오면 노루샘과 연화담을 만난다. 옛 오솔길 옆에 있는 노루샘은 노루, 토끼, 꿩 등 야생동물이 지나다니면서 목을 축였다는 곳이다. 연화담은 예전에 벼를 재배하던 논으로 오로지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만 의존하여 모를 심었던 곳으로 지금은 새로이 연못을 만들고 연꽃을 심었다.
데크길 호반에 전망대 형식으로 만든 망세루(忘世樓)라는 곳도 있다. 남매바위 위에 정자를 만들어 비학봉, 군자산, 옥녀봉, 아가봉과 좌우로 펼쳐진 괴산호를 볼 수 있는 정자로, 세상의 모든 시름이 잊혀지고 자연과 함께 평안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망세루에서 아늑한 오솔길을 따라 2-3분 만 더 가면 호랑이굴도 만난다. 이 동굴은 1968년까지 호랑이가 실제로 드나들며 살았던 곳이라 한다. 밑은 흙, 위는 자연암석으로 되어 있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동굴이다. 이어 산막이를 오고가던 사람들이 여름철 소낙비를 피해 쉬어갈 수 있는 바위굴인 여우비바위굴도 만나고 옷벗은 미녀형상의 참나무도 보인다. 또, 풀종류인 사위질빵 넝쿨이 버드나무와 하나가 되어 서로 영양분을 주고 받으며 공생하고 있는 지극히 보기 드문 나무도 만난다. 그 모습이 사람들이 사랑을 나누는 모습과 흡사하다.
주차장에서 1.7km, 산막이옛길 중간 쯤에는 약수터도 보인다. 앉은뱅이약수라고 부르는 이 약수는 앉은뱅이가 지나가다 물을 마시고 난 후 효험을 보고 걸어서 갔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얼음바람골을 지나 산책로 중간지점에는 호수전망대도 있다. 좌우로 전개된 괴산호를 바라보면서 쉬었다 가는 쉼터로서 산막이옛길 최고의 풍경을 자랑하는 전망대이기도 하다. 유람선이 호수 물을 가르며 유유히 움직이는 풍경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산책로 곳곳에는 유명시인들의 시판도 많이 보인다. 초입에 윤동주의 서시, 김소월의 진달래꽃 시판이 보이더니 중간쉼터에는 이육사의 절정, 신경림의 갈대 시판도 세워져 있다.
다음은 산막이옛길의 명물인 고공전망대. 깎아지른 40m 절벽 위에 세워진 망루로, 이곳에 서면 마치 고공에 떠 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전망도 탁월하여 연인과 함께 서 있으면 타이탄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산책로의 스토리텔링은 계속 이어진다. 마흔고개라는 데크길도 만난다. 데크 구간 중 가장 높은 40계단으로 데크를 걸어올라가면서 주변경관을 보면 아래쪽은 호수, 위쪽은 바위절경이 운치를 더해주는 길이다.
다래숲동굴, 가재연못, 진달래동산, 신령스런 참나무 등을 지나면 산막이나루에 이른다. 산막이옛길 산책로는 이곳까지이지만 이어서 계속 충청도 양반길로 연결된다. 들머리인 사오랑마을에서 이곳 산막이마을까지 소요시간은 약 1시간 반. 그러나 옛길을 걷는데 시간은 별 의미가 없다. 얼마나 천천히 호수와 숲 경관을 즐기고, 중간중간 쉬면서 걷느냐는 개인의 여유에 달려 있다.
필자는 일단 트레킹은 이정도로 마무리하기로 하고 산막이나루에서 유람선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나룻터 건너 산능선 위에는 그림같이 아름다운 정자 하나가 보인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세워진 이 정자는 환벽정(環碧亭). 2011년에 청운 조응헌 이라는 문장가가 이곳 연천대(鳶天臺)에 올라 주위의 절경에 감탄을 하며 정자이름을 환벽정이라 지었다고 한다.
산막이나루에서 차돌바위 선착장까지 소요시간은 불과 15분 정도, 유람선 요금은 편도 5천원이다. 천장봉과 등잔봉 능선, 산책로 데크길, 고공전망대, 괴산댐 등 유람선에서 바라보는 산막이옛길이 또 다른 시각으로 아름다움을 더한다. 가을은 이렇게 괴산호 호반에서 점점 붉게 익어가고 있다.(글,사진/임윤식)
*위 글과 사진은 필자가 2015년 9월에 다녀온 후 당시 써놓은 글을 전재한 것이어서 현재 코스 및 조형물들과 다를 수 있음을 밝혀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