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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1-03일간 남도여행(고창 고흥 여수 장흥 정읍시고부면 새만금) 이야기 1부.
(고창까지의 여행 경로)
2022.06.01.일 아침 05시11분경에 서울 도봉동 아파트 단지를 출발했다. 물론 집사람과 함께하는 여행이었다. 아침 조식은 도시락으로 준비해서 출발했다.
의정부ic-외곽순환선-판교ic-경부고속도로-천안논산고속도로-정안휴게소에 도착하니 시간은 07시01분이었다. 서울에서 정안휴게소까지의 주행거리는 144km였다. 정안휴게소 차속에서 도시락으로 조식을 떼웠다. 휴대해간 커피로 식후 입가심까지 하고 다시 출발한 시간은 07시47분이었다. 정안휴게소에서 체류한 시간은 47분 정도였다.
(미당 서정주 문학관 이야기)
목적지는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231번지의 미당문학관과 578번지의 생가”였다. 천안논산고속도로 정안휴게소에서 공주jc-대전당진고속도로-서공주jc-공주서천간고속도로-동서천jc-서해안고속도로-선운산ic 톨게이트를 빠져나왔다. 미당문학관에 도착하니 시간은 09시46분이다. 서울에서 미당문학관까지의 누적주행거리는 293km이고 소요된 시간은 4시간35분이다.
미당문학관 내부에는 여러 가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주로 서정주 시인이 저술한 책들과 벽면에는 미당 개인 사진들과 미당의 생애와 이력 및 작품들이 걸려 있다. 내부 사무실에는 관리직원이 한 분 계셨다. 서정주 시인은 1915년생이다. 대표시는 “국화옆에서”이다. 이 시가 전시관 벽면에 걸려 있는데 이 시의 주요내용은 아래와 같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1)소쩍새는 봄부터 그렇게 울었고
2)천둥은 먹구름속에서 그렇게 울었다.
3)거울앞에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4)그 꽃잎을 피려고
5)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6)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아름다운 시이지만 다른 벽면에는 자신의 친일행적에 대한 반성문이 아래와 같은 요지로 기록 전시되어 있다.
“1)나의 친일은 잘못된 일이다.
2)국민문학 편집일을 할 때 일제의 요구대로 작품을 썼고
쓰라는 대로 쓸 수밖에 없었다.
3)조국해방이 그리 빨리 오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 었고 젊은 시절 살기 위해 어
쩔수 없었던 그것이 새삼 아픔으로 다가 온다.
4)내 정신의 실상을 내가 죽기전에 꼭 글로 남기겠다.”
일본제국주의를 위해 부역하라고 또 목숨을 바치라고 부추겼고 그래서 당대 국민들중에는 큰 피해를 입은 사람도 있으니 이 분들에게 사과 한마다라도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남들에게 피해를 입혀가면서까지 자신의 이익만을 챙겼으니 얼마나 악랄한 짓인가. 이것은 공정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사람이 할 짓도 아니다.
또 민족독립을 위해 항일투쟁하며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게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자기만 잘 살기 위해 양심을 팔고 자존심을 버린 자는 국민적 추앙을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 정서다.
조정래 작가가 서정주 시인에게 죽기전 공개 사과를 요구했지만 끝까지 침묵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 문학관 벽면에 반성문만 남겼으니 이 분도 무척 용기가 없는 분이고 이기심이 드센 분이다. 이렇게 역사적 사건에 연루된 사람은 역사적 기록에 영원히 남는다는 것이 역사적 교훈이 아닌가 싶다. 이것이 역사교육의 참뜻이 아닌가 싶다.
안내판 설명에 따르면 현재의 미당 문학관 건물은 부안면 봉암초등학교의 선운분교가 폐교되자 이 학교건물을 개보수하여 미당 문학관으로 조성해서 2001년11월3일 개관했다. 그리고 이곳은 미당 서정주의 고향마을이다. 이 문학관 좌우로 미당의 생가와 묘소도 있다고 안내판은 기록하고 있다.
(주차장에서 바라본 미당 문학관 모습 전경.초등학교분교가 폐교되자 개보수해서 미당문확관으로 사용있다고함.)
(미당의 생가 모습)
(인촌 김성수 생가 구경 이야기)
미당 문학관을 둘러본 뒤 10시21분에 인근에 있는 인촌 김성수씨의 생가로 향했다. 인촌 김성수 생가에 도착하니 시간은 10시33분이다. 서울에서 인촌생가까지 누적주행거리는 296km이다. 미당 문학관에서는 약 3km 떨어진 거리다.
인촌 선생의 생가 앞에는 널다란 주자장과 인촌선생의 생가 안내판이 2개가 서 있다. 하나는 인촌 집안에서 세운 안내판이고 다른 하나는 전라북도에서 세운 안내판인데 그 내용은 조금 다르다. 전라북도에서 세운 안내판에는 인촌 김성수 선생이 친일반민족행위자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 안내판 요지는 아래와 같았다.
1.이곳은 인촌 김성수 선생과 그의 아우 수당 김연수 선생 이 태어난 생가이다.
2.이들 형제분은 동아일보사 고려대학교 중앙중고등학교 삼양사 ㈜경방의 창립자이다.
3.형제분은 같은 울타리 안에서 위쪽은 형인 인촌 선생이 살았고 아래쪽은 동생인 수당 김연수 선생이 살았다.
4.1907년은 이 고장을 휩쓸었던 화적떼의 행패와 도깨비불 의 침몰 때문에 여기서 살 수
가 없어서 가족 전체가 부 안군 줄포면 줄포리로 이사 가야 했다.
5.이사후 이 건물은 마을 주민에게 위탁보존하다가 1977년 동생인 수당 김연수 선생이
자비를 들여 옛모습 그대로 복원하여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6.인촌 김성수 선생은 일제강점초기에는 독립운동가들과 긴밀하게 지내면서 자체 독립
운동을 앞장서 주장했지만 일제강점말기에는 일제의 침략정책에 협력한 사실이 드 러
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알려졌다.(본 내용은 전북도에서 세운 안내판 기록내용이
며 후손들이 세운 안내판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되지 않음. 나머지는 두 안내판이 대동
소이함)
(인촌 김성수 생가의 입구에 후손들이 설치한 안내판 게시글 내용1)
(전라북도에서 설치한 인촌 생가에 대한 안판판 게시문 내용 2.여기에는 인촌의 친일행위가 드러나면서 반민족친일행위자로 알려졌다.고 기록하고 있음.)
인촌 선생은 미당 선생보다 더 교활하게 친일행위를 한 사람 같다. 미당 선생은 반성문이라도 썼지만 인촌 선생은 반성문도 없으니 말이다. 이런 사람이 초대 부통령까지 했다고 하니 그저 할 말이 없을 뿐이다. 친일행위가 사실이라면 말이다.
형인 인촌 김성수씨와 동생 수당 김연수 형제의 두 집 사이에는 낮으막한 담을 쌓고 쪽문으로 서로 통행이 가능했다. 두 형제분의 집과 그 부속건물이 마치 한 마을처 럼 기와집들이 촌락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두 형제분의 기와집 촌락이 모두 평평한 평지에 지은 집이라서 전체를 조감할 수가 없어서 조감도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인촌 생가 조감도 사진을 한 장도 찍지 못했다.
(고창군 갯벌 체험장 이야기.)
인촌 김성수 생가 구경을 마치고 10시53분에는 고창군 갯벌 체험장으로 이동했다. 고창군에는 갯벌 체험장이 2곳이 있다. 하나는 하전갯벌체험장이고 다른 하나는 만돌갯벌체험장이다. 만돌갯벌체험장이 훨씬더 시설이 잘 갖춰진 갯벌체험장이었다.
(하전갯벌체험장 이야기)
먼저 하전갯벌체험장에 도착했다. 주소는 “고창군 심원면 하전리 979번지”였다. 도착하니 시간은 11시10분이다.
하전리갯벌체험장 마을주변 도로변에는 바지락공장 바지락 요리집 풍천장어집 등이 군데군데 눈에 띤다. 그러나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는 조용한 마을이다. 마을을 지나 갯벌체험장으로 향했다. 물때가 썰물인 때라서 갯벌이 대평원을 이루고 있다. 갯벌 건너편으로는 아득히 바닷물과 변산반도의 해변 및 산들이 희미하게 보인다. 갯벌평원에는 아마도 바지락을 실은 듯한 경운기 한 대가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이렇게 하전리 갯벌체험장을 둘러본 뒤 다시 우리는 만돌갯벌체험장으로 향했다.
(만돌갯벌체험장 이야기.)
만돌갯벌체험장 주소인 “고장군 심원면 만돌리 960-27번지”를 입력시키고 만돌갯벌체험장에 도착하니 시간은 11시51분이다. 서울에서 만돌갯벌체험장까지의 누적주행거리는 311km이다.
만돌갯벌체험장에는 넓은 주차장에 많은 차량이 보였다. 모두가 갯벌체험을 하겠다고 찾아온 관광객들 차량 같았다. 아마도 찾아온 관광객이 갯벌체험학습을 하겠다고 등록하면 등록자들을 특수차량에 태워서 갯벌로 나가 바지락을 손수 캐는 체험학습을 하는 것 같았다. 손수 캔 바지락은 바지락망에 담아서 다시 특수차량을 타고 밖으로 나오는 방식으로 갯벌체험이 진행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특수차량에서 하차한 사람들은 민물 수도가에서 각자가 캐온 바지락을 깨끗이 수돗물로 씻어 자기 차량으로 옮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고창군 만돌겟벌체험장에 체험학습을 온 사람들이 타고온 차량들 모습)
(갯벌체험 희망자들을 싣고 만돌갯벌체험장을 출입하는 특수차량 모습)
(만돌개벌체험자들이 개벌에서 캐온 바지락을 민물 수도가에서 수도물로 바지락을 씼는 모습)
만돌갯벌체험장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이곳의 갯벌은 거의가 모래톱 갯벌로 보였다. 그래서 밟아도 발이 뻘속에 깊이 빠지지 않을 것 같았다.
(고창 만돌갯벌체험장 전망대에서 만돌갯벌체험장을 바라본 모습. 이 갯벌위로 특수차량이 갯벌체험희망자들을 차량에 싣고 갯벌 깊숙히 들어가 갯벌속에서 바지락 캐는 실습을 한 뒤 다시 밖으로 싣고 나오는 과저으로 갯벌 체험을 하고 있음.)
(갯벌 체험 학습생들이 갯벌체험을 등록하고 교육을 받는 강당 모습.)
(모꼬지 함초 바지락칼국수집 이야기)
만돌갯벌체험장을 둘러본 뒤 12시12분에 우리는 고창군 관광안내 팜프레트가 소개한 모꼬지 함초 바지락칼국수집으로 향했다. 이 바지락칼국수집 주소인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721-12번지”를 입력시키고 출발했다. 도착하니 시간은 12시36분이고 서울에서 이곳까지의 누적주행거리는 321km다.
모꼬지함초바지락칼국수집에서 집사람은 바지락돌솥밥을 주문했고(1인분1만원) 나는 바지락칼국수를(1인분 8000원) 시켰다. 바지락 칼국수 맛은 별로였다. 차라리 고창군 아산면 소재 인천식당의 보리새우탕이 훨씬 더 맛있는 음식 같았다. 바지락이 유명한 곳이라서 바지락칼국수도 맛있을 줄 알았는데 실상은 달랐다. 다음엔 고창에서의 점심은 꼭 아산면 인천식당의 보리새우탕으로 점심을 먹을 생각이다.
모꼬지함초바지락칼국수집에서 점심을 마친 우리는 고창군 청보리밭 산책길로 유명한 학원농장으로 향했다.
(학원농장 누런 보리밭 사잇길 이야기.)
고창 학원농장 주소인 “고창군 공음면 예전리 468번지”를 입력시키고 학원농장에 도착하니 시간은 14시02분이었다. 서울에서 이곳 학원농장까지의 누적 주행거리는 348km이다.
학원농장은 청보리밭 사잇길 산책이 유명하지만 세월이 6월이라서 청보리는 볼 수 없으니 누런 보리밭 사잇길이라도 보고 싶어서 찾았다.
안내판을 보니 누런 보리밭 산책로는 3개코스가 있다.
1)A코스는 길이가 1.8km이고 전 구간이 포장되어 있고 경 사가 완만하여 유모차 운행이
가능하다.
2)B코스는 길이가 2.0km이다.그런데 일부 구간이 아직 비 포장 길이다.
3)C코스는 길이가 2.2km이고 역시 전 구간이 포장되어 있 고 경사 완만하여 유모차 운행
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렇게 익어버린 보리밭을 조망하다가 누런 보리밭속을 가로 질러 산책로를 걸었다. 그리고 이름 모르는 식물이 잔뜩 심어진 밭까지 구경했다. 밭에 잔뜩 심어져 있는데 무슨 식물인지 알 길이 없다. 줄기 끝에는 가늘고 작은 열매가 많이 달렸다. 그 열매를 하나 따서 까보나 속에는 깨알 같은 작은 씨앗이 들어있다. 그 씨앗의 색깔은 검은 빛을 띠었다.
6월이라서 날씨가 상당히 덥다. 전 구간을 걷기에는 무리일 것 같았다. 3월쯤에는 날씨도 약간 춥고 보리밭도 청보리밭이라서 훨씬 더 운치가 있을 것 같다. 따라서 고창 청보리밭 구경은 2-3월이 딱 좋을 것 같다. 내년에는 2-3월에 꼭 다시 찾고 싶다.
(고창 청보리밭 입구 모습. 지금은 청보리가 익어서 누런보리밭으로 변해 있음.청보리밭 면적은 보이는 것 이외에도 전후좌우로 굉장히 넓은 면적임.그래서 청보리밭 사잇길은 A코스 B코스 C코스로 구분되어 있음)
(누런 보리밭 사잇길에 들어가서 바라본 보리밭 모습. )
(누런 보리밭 옆에는 이름 모르는 식물이 잔뜩 심어져 있음. 그리고 사잇길도 있음. 이 식물은 끝에 열매가 달려 있고 그 열매를 까면 깨알 같은 검은 색 알갱이가 들어있음)
(영광군 백수해안도로 이야기)
고창 누런 보리밭 구경을 마치고 우리는 14시57분에 영광군 백수해안도로로 향했다. 영광군 영광대교 주소인 “영광군 백수읍 구수리 영광대교”를 입력시키고 출발했다.
(백수해안도로 8주차장 풍경)
영광대교를 건너서 백수해안도로에 들어섰다. 백수해안도로에서 첫 번째로 만난 주차장이 8주차장이었다. 백수해안 도로변에 모두 8개의 주차장이 있다. 1주차장부터 8주차장까지다. 각 주차장 마다 서해바다를 조망할 수 있게 휴게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8주차장에 도착하니 시간은 15시29분이다. 서울에서 백수해안도로 8주차장까지의 누적 주행거리는 372km다.
8주차장에서 바라보는 서해바다는 시간이 만조 때라 법성포 포구와 영광대교 밑 바닷물이 가득 찬 모습과 영광군 홍능읍 해안선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8주차장에서 15시39분에 다시 출발해서 남쪽으로 해안도로를 타고 달렸다.
(영광군 백수해안도로상의 제8주차장에서 바라본 영광대교 모습과 이 대교밑으로는 서해바다에서 잡은 조기를 실은 배가 법성포 포구로 들어가는 바닷길임.)(법성포에서 말린 조기가 영광굴비란 이름으로 전국에 배송됨.)
(백수해안도로 노을전시관 모습)
새로 개장했다는 백수해안도로 노을전시관에 도착하니 시간은 시간은 15시49분이다. 서울에서 노을전시관까지의 누적주행거리는 374km다.
(영광군 백수해안도로변에 새로 개장된 노을전시관 모습.)
노을전시관 마당에는 한때 유명가수였던 조미미씨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대표곡인 “바다가 육지라면”이란 노랫말이 돌비석에 조각되어 있다. 안내문에는 재일교포와 결혼한 조미미씨는 2000년에 남편과 일본으로 가서 살다가 2010년에 귀국하여 2012년에 작고했다고 한다. 조미미씨는 1947년에 태어나서 2012년에 작고했다. 필자와 동년배인데 65살로 생을 마감했으니 그녀는 행복한 삶은 살지 못한 것 같다.
(영광 노을전시관 마당에 새로 설치된 영광군 출신 유명가수 조미미씨의 모래비 모습.우측에는 조미미의 대표곡인 바다가 육지라면 이란 노랫말이 기록되어 있음)
노을전시관 내부에는 (1)영광군의 4계절 풍경사진과 (2)빛의 성질인 비춤각과 굴절각의 동일성. (3)빛은 물질의 성질에 따라 굴절율이 다르다는 현상 (4)노을이 왜 생기는가 등등을 그림과 사진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
노을전시관 전망대에서 서쪽으로 펼쳐진 칠산바다 수평선은 인생의 무상 허무 같은 것을 생각나게 하는 묘한 힘을 발휘하는 것 같았다.
(노을전시관 내부 통로상에 설치된 뷔너스 조각상 모습. 아름다운 여체의 볼륨감과 아름다운 자태가 신비로워 보임)
(노을전시관 전망대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칠산바다 모습. 칠산바다는 조기잡이 어장으로 유명한 바다인 칠산바다가 수평선 너머에 존재함.)
(노을전시관 전망대에서 남쪽으로 바라본 백수해안도로 전경 모습.산책로 주차장 등대 등과 서해바다 모습)
(노을전시관 전망대에서 바라본 서해바다 수평선 모습. 망망대해와 수평선은 세월의 무상함과 삷의 허무함을 느끼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영광군 백수해안도로 노을전시관을 구경하고 16시18분에 다시 목포 친척집으로 향했다. 백수해안도로를 지나면 그 도로는 다시 영광군 염산면 해안도로를 거친다. 염산면 해안가에는 풍력발전소가 작년보다 더 많이 설치되어 있다. 아마도 염산면 해안가는 풍력발전소 적지라는 판단을 받은 것 같다.
(영광군 백수해안도로 다음에는 영광군 염산면 해안도로가 이어지는데 여기의 염산면 해안도로변에는 작년보다 더 많은 풍력발전기가 설치되어 있는 모습)
목포시 인근의 청계면 면소재지 태성식당에서 석식을 마치고 목포 친척집에 도착하니 시간은 21시11분이다. 서울에서 목포 친척집까지의 누적 주행거리는 468km이다. 이렇게 여행1일차는 마감했다.
* 2부에서 2-3일차(6.2-3일) 여행 이야기는 계속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