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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이후 기독교시민운동의 흐름과 제안
-복음주의 진영을 중심으로
Ⅰ. 들어가는 글
“사회참여” 또는 “사회적책임”에 대한 한국기독교의 태도는 개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앙/신학적 고백에 따라 다양하다. 크게 보아 3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는데 개인구원만을 인정하는 교회, 구제사역으로서의 사회봉사까지 인정하는 교회, 정치사회적(또는 제도적) 참여까지 인정하는 교회로 나눌 수 있다.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정치적으로 민감했던 군사독재시절에는 개인구원만 인정하던 교회가 많았으나 최근 흐름은 대부분의 교회가 구제사역으로서의 사회봉사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여전히 상당수의 교회들은 정치사회적 참여를 경원시하고 세상적인 사회운동으로 매도하고 있는데 이는 신앙/신학적 고백에 의해서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역사 속에서 해당 교단이나 교회가 취한 정치사회적 입장을 번복하지 않으려는 태도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를 중심으로 한 교회들은 과거 KNCC를 중심으로 한 교회들이 정치적 박해를 받으며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 등을 전개할 때 정교분리를 주장하며 세상적인 사회운동이라고 매도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과거의 고백이나 행동을 바꾸는 것에 대한 설명이나 반성 없이 정치사회적 참여를 교회의 당연한 사명으로 선언하며 정치운동, 친미집회 등 극단적으로 편중된 정치사회적 운동을 전개해 어리둥절하게 하고 있다.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개인구원만 강조하던 교회들은 초창기 기독교가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함으로 자연스럽게 이웃에 대한 사랑과 정의를 실천했다는 것을 애써 간과하고 있다. 초창기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해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존중, 평등정신에 따라 양반과 상놈을 구분 짓는 반상제도와 노비제도를 부정하였고, 순결과 절제의 정신에 따라 금주, 금연, 단도박, 축첩제도 반대 등의 생활윤리를 실천하였다.
이런 정신과 행동은 당시 지배세력으로 하여금 기독교를 극심하게 탄압하게 했지만 오히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절제운동, 독립운동, 나눔운동, 농촌계몽운동 등으로 자연스럽게 확대되어 사회운동화 되었다. 이로 볼 때 개인구원만을 강조하면서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를 기독교정권이란 미명에 따라 침묵하고, 군사력을 동원해 정권을 탈취해 세운 군사독재정권과 야합, 지지해온 보수적 교회의 행위는 성경 정신과 한국 기독교의 아름다운 전통을 훼손시킨 것이다.
초창기와 일제 강점기 때의 한국교회는 보수, 진보의 구분이 없었다. 군사독재정권을 지나면서 정치적 상황에 대응하는 방식에 따라 소위 복음주의 진영과 에큐메니컬 진영으로 나뉜 것이다. 본 발제는 복음주의 기독교가 격동과 변화의 시기였던 87년을 지나면서 오랜 침묵을 깨고 ‘시민운동’을 전개한 배경과 활동내용, 변화 발전 과정을 설명하고, 향후 발전 방향에 대해 제언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일반적인 “시민운동”의 개념을 고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기독교시민운동”의 개념, 역사, 특징을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향후 발전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Ⅱ. 일반적 ‘시민운동’의 개념
오늘날 우리는 “시민운동”, “NGO”, “시민사회” 등의 용어에 익숙해 있고, 이런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충 짐작하고 있다. 그만큼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흔하게 접하고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NGO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4대 권력이라는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언론에 이어 5부 권력으로 평가될 정도로 신뢰도와 영향력 측면에서는 전통적인 권력기관보다 상위에 평가되기도 한다.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이런 용어가 사용되고, 일상화 된 것이 불과 20여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가히 혁명적 인식의 전환이라 할 수 있다.
시민운동을 나타내는 용어는 특정 형태의 조직체를 의미하거나, 특정 형태의 운동 양식에 따라 “NGO"(Non Governmental Organization), "NPO"(Non Profit Organization), "제3섹터”, “CSO"(Civil Society Organization) 등으로 불리고, 단체 성격에 따라 “공익단체”, “이익단체”, “관변단체”, "민중단체“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한다. 최근에는 “시민사회운동”, “NGO"란 용어가 시민운동 영역을 통칭하는 보편적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미국과 유럽은 물론, 가까운 일본과 중국 등에서도 비영리민간단체라는 개념인 "NPO"가 시민운동 영역을 통칭하는 보편적 용어로 사용되는 것에 비해 우리나라가 독특한 경우라 하겠다. NGO가 시민운동 영역의 대표 용어가 된 것은 우리나라 시민사회운동의 독특한 역사와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시민운동은 87년 이전까지만 해도 “민간단체”라는 이름으로 다양하게 존재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미 고려, 조선시대에 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다양한 사회단체가 존재했고, 구한말에는 신분제도 철폐를 주장하는 사회단체들이 활동했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민간 차원의 독립운동, 노동운동, 계몽운동, 교육운동, 절제운동 등이 활발히 일어났고 각종 단체들이 활동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다양한 민간단체들이 활동했다.
특별히 87년 6월 항쟁 이전인 군사독재시절에는 정부가 직간접적으로 개입해 민간단체를 조직해 특정 목적을 위해 활용했는데 이를 “관변단체”라고 했다. 관변단체는 새마을운동이나 의식계몽단체 뿐 아니라 노인단체, 청년단체, 여성, 지역단체, 심지어 노동, 교육단체까지 전 분야에 걸쳐 조직되었고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고 필요에 따라 동원되었다. 당시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하며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 학생운동 등을 전개한 단체들은 집회, 결사, 언론의 자유가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불법단체였다. 이런 구도에서 대선, 총선 등의 선거철이 되면, 관변단체는 여당지지운동, 재야단체 혹은 불법단체들은 야당지지운동으로 극단적으로 갈렸다.
그러다가 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정치적 민주화가 시작되면서 집회, 결사, 출판,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합법적 대중운동이 가능하게 되었고 이런 사회적 변화에 따라 “시민운동”이라는 중산층 대중운동이 시작되었다.
국제적으로 “NGO"(비정부기구)라는 용어는 1945년 UN이 창설될 때 서구사회에 다양하게 존재했던 민간단체 대표들이 참여해 UN헌장의 인권조항(UN헌장 제10장 제71조)을 제정할 때 ‘정부간 조직’(Inter-Govermental Organization)이 아니라는 의미로 처음 사용해 공식화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랜 독재정권 시절을 거치면서 독재타도, 민주화운동 등 대정부 운동의 흐름 속에서 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대중적 민간 운동이 시작됨에 따라 대정부 개념이 강한 NGO가 시민운동의 보편적 용어로 통용된 것으로 파악된다.
최초의 일반 시민단체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89년, 이하 경실련)의 창립선언문에 NGO라는 용어가 없고 “시민운동”, “시민단체” 등의 용어만 있는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NGO라고 지칭한 것이 아니라 각종 국제NGO 대회를 개최하면서 자연스럽게 고착된 것이다. 이에 따라 사용하는 단체의 특성, 내용에 따라 NGO의 개념이 다양하게 사용되지만 일반적으로 NGO는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 공익추구, 배타성 없는 회원가입, 자원 활동의 특성을 중시한다.
NGO에 대한 정의는 학자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발제자는 “비정부, 비정파, 비영리 결사체로서 시민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참여로 결성되고, 자원주의(voluntarism)에 입각하여 공익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박상필, 2002.)라는 정의를 사용한다.
"NPO"(비영리단체)는 “NGO"보다 넓은 개념으로 영리를 목적으로 추구하지 않는 모든 조직을 의미하는 것으로 공공의 목적에 봉사하거나 조직구성원의 공동이익을 추구하는 모든 단체를 의미한다. 이에 따라 직능별 이익단체나 관변단체, 법인(사회복지, 교육, 의료 등)도 포함된다. 최근 학자들을 중심으로 사용되고 있는 "CSO"(시민사회단체)는 정부나 기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단체를 제외한 단체를 의미하는 용어이다. 그러나 정작 시민운동 현장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고 있다. “제3섹터”라는 용어도 정부, 기업이 아닌 제 3의 영역이란 의미로 사용하는데 학자들은 사용하지만 현장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경실련이 처음 출범할 때 시민운동을 중산층 대중운동이며 합법적 운동을 지향한다고 했는데, 일각에서는 이런 운동이 민주화가 완전히 이루어진 것으로 착각하고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 농민을 도외시한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계급적 약자를 대변하는 “민중운동”을 고수해야 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현실적으로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이런 차이는 기존의 운동이 집합행동론이나 계급운동론, 구조주의운동론에 입각한 것에 반해 경실련은 신사회운동론에 입각했기 때문이다.
민중운동 진영은 이후 대부분은 94년 참여연대 창립을 계기로 시민운동 영역으로 합류했고, 현재도 일부는 민중단체를 고수하고 있다. 최근에는 NGO와 민중단체들이 연대해서 활동을 많이 하게 되는데 이에 따라 NGO를 처음에는 “시민운동”이라고 했지만 최근에는 “시민사회운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 시민운동 진영에서는 “대중적 시민운동”에 대비해 “민중적 시민운동”이라는 개념이 새롭게 등장하였다.
Ⅲ. 기독교시민운동의 개념
서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기독교의 사회참여 역사는 복음이 전해진 초창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성경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성경의 가르침을 생활 현장에서 실천하도록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자연스럽게 사회참여를 시행해왔다. 사회참여와 관련한 성경의 가르침은 이웃사랑(마22:37-40),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신15:11, 마25:40), 구제(잠28:27), 희년정신(레25:10), 평등사상(엡2:14-19, 골3:11), 남녀평등(갈3:28), 양심에 의한 순종(롬13:5) 등으로 다양하다. 사회참여를 진보적 기독교의 전유물로만 생각하는 것도 올바르지 않으며, 비복음적이라는 생각은 오히려 반성경적이다.
이미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3천명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모여 작성한 “로쟌언약”에서도 복음전파와 함께 정치사회적 참여를 기독교인의 의무라고 명시하여 고백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이 대회에 80여명 가량의 대표들이 참석했지만, 군사정권 상황에서 눈치를 살피다가 89년에 이르러서야 대회에 참석했던 조종남 박사에 의해 번역해 소개되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은 다양한 사회참여를 실천했는데 보수적 기독교 진영은 상대적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구제하는 “사회복지적” 참여에 더 치중했고, 진보적 기독교는 불의한 제도를 개선하는 “정치사회적” 참여에 치중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기독교의 다양한 사회참여 형태는 일반 시민운동 방식이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독교인들은 시민으로서 공익적 활동을 위해 다양한 시민운동 영역에 참여했으며, 기독교단체나 교회에서 시행하는 사회참여 활동이라고 해도 기독교 고유의 신앙적 영역이 아닌 경우에는 대부분 비기독교인 들이나 일반 시민운동 단체와 연대해 시행했다.
발제자는 위에서 NGO는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 공익추구, 배타성 없는 회원가입, 자원 활동의 특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비정부, 비정파, 비영리 결사체로서 시민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참여로 결성되고, 자원주의(voluntarism)에 입각하여 공익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박상필, 2002.)라고 정의한다고 제시하였다. 어떤 이는 특정 종교를 표방한 단체는 종교적 선교의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NGO에서 제외해서 “종교단체”로 구분하기도 한다.
물론 어떤 기독교단체가 선교를 주목적으로 하고 이를 위한 활동을 중심으로 한다면 이는 NGO라기 보다 공교회나 선교단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또 기독교단체 중에 복음전파, 신앙성숙, 제자훈련 등의 신앙 본질적 문제를 주목적으로 하는 단체가 신앙의 실천을 위해 일부 공익적 참여를 한다고 해서 이를 NGO로 분류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회원들의 자발적 참여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의미에서는 당연히 NPO로 분류된다.
그러나 기독교단체라고 해도 위에서 제시한 정의에 입각한 공익적 활동을 주목적으로 한다면 NGO로 분류된다. 이때 단체 명칭에 기독교를 명시한 곳은 활동 방식과 내용이 NGO적이면 쉽게 기독교NGO로 평가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단체의 구분은 몇 가지 사항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정종훈 교수는 “일반적인 사회운동은 종교와 상관없이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운동인 반면 기독교 사회운동은 기독교인들이 주체가 되어 기독교적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전개하는 사회운동이다”(기독교 사회운동과 한국기독교의 과제, ‘신학논단’ 제37호, 2004.9.)라고 정의한다.
또 기윤실 총무를 역임한 권장희는 “기독교 정체성을 분명히 선언하고, 선교의 맥락에서 사회정의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단체들의 활동을 기독시민운동으로 정의한다.(기독교 시민운동의 현호아과 나아갈 방향, ‘월간 고신’ 제213호, 1999.6.) 즉, 단체 활동의 중심 정신에 기독교정신 또는 성경적 가치가 표방되고 있는가, 주요 핵심 구성원이 기독교인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활동방식이 기독교적인가 등을 충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발제자는 기독교NGO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자 한다.
“비정부, 비정파, 비영리 결사체로서 기독교인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참여로 결성되고, 성경적 가치에 입각하여 공익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
Ⅳ. 87년의 정치사회적 상황과 기독교
발제자가 기독교시민운동을 논하면서 87년을 기준으로 삼은 것은 위에서도 언급한 대로 87년 6월 항쟁을 기점으로 집회, 결사, 언론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합법적 시민운동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일반 NGO는 89년 경실련을 시작으로 합법적이고 대중적인 시민운동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해 갔다. 당시 경실련의 출발은 정치적 억압 상태에서 민주화 초기 단계로의 변화도 작동했지만, 기존의 민중운동단체가 한국 사회구조를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모순으로 보아 체제 변혁을 시도했던 것과 달리 자본주의 체제를 인정하면서 합법적인 공간에서 시민연대에 의한 공익실현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대중적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실련이 89년 7월 태동할 수 있도록 한 배경에는 87년 12월 창립한 기독교NGO인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의 활동과 인적 지원이 있다. 이에 따라 87년 당시의 정치사회적, 기독교적 상황을 살펴 봄으로 한국 역사와 시민사회, 기독교 속에 가지고 있는 의미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1. 87년의 정치사회적 상황
80년대 후반까지 한국사회는 두 번의 군사구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권에 의해 국가조합주의적으로 강력하게 통제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국가는 자신들의 뜻에 동조하는 자들을 내세워 계층별, 직능별 다양한 관변단체를 조직해 통치이데올로기를 강화했고, 반면 공익적 활동을 전개하는 시민사회는 집회, 결사, 언론, 출판 등의 자유를 발탁하고 불법단체로 낙인찍어 일반 대중으로부터 격리시켰다. 이런 정치적 통제가 가능했던 것은 분단 상황과 국제적인 동서냉전에 따른 반공이데올로그가 대중적 불안감을 팽창시키고, 이에 편승한 군사정권과 자본가의 결탁이 이를 통치 기제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임기 말에 있던 전두환 정권은 간접선거를 통해 군사정권을 연장하려 하였고, 인간의 기본권과 시민 권리를 제약한 헌법 개정을 외면하고 있었다. 86년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소가 조사한 “국민의식 조사연구”에 따르면 국민의 60% 가량이 정치 현실에 강한 불만족을 나타내었는데 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런 불만은 극에 달하였다.
당시 군사정권의 성장제일주의 정책은 모든 세제, 금융, 재정지출, 차관 등의 특혜를 대기업에 집중시켜 특정 재벌을 급성장 시켰고, 노동자, 농민에 대해서는 저임금, 저곡가 정책을 심화시켜 이로 인한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 현상은 심화되었다. 땅값은 10배 이상 집값은 20배 이상 폭등하였다.
이로 인해 89년 말 주택보급률은 54.4%(65년 81.3%)로 급락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상위 5%가 전체 사유지의 65.2%, 임야의 84.1%를 독식하였다. 이런 독점적인 경제소득은 사회적으로는 사치와 낭비, 향락주의를 부추겼는데 유흥업소가 만연하였고 이로 인해 인신매매가 성행하였다. 이혼율은 30% 가까이, 주요 범죄율도 70% 가량 증가하였다.
이에 민주화운동 세력을 중심으로 구성된 국민운동본부는 독재타도와 호헌철폐를 주장하며 6월 항쟁을 일으켰고, 학생 뿐 아니라 소위 넥타이 부대라고 일컬어지는 평범한 직장인들까지 가세하면서 마침내 직접선거와 헌법 개정을 이루어 내었다. 6월 항쟁은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7월, 8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6월 항쟁을 통해 이룩한 민주화의 기초와 대중적 참여는 노동자대투쟁과 연계되지 않았고 이후 노동운동은 오히려 위축되었다.
2. 87년의 기독교 상황
84년 기독교 선교 100주년을 맞이했던 기독교는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폭발적 성장을 이루며 1천만 기독교인 시대를 열고 있었다. 이런 성장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10대 교회가 모두 한국에 있을 정도로 개별교회는 대형화 되었고 자연스럽게 엄청난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이런 성장의 배경에는 70년대부터 강하게 일어나 부흥회운동과 민족복음화운동 등의 영향에 힘입고 있다.
그러나 이런 폭발적 성장은 교회적으로는 개교회중심주의, 물량주의적 목회, 사제적권위주의 등으로 나타나 사회적으로 교회 성장과 권력화 집중하면서 사회적책임에는 등한시한다는 비판에 직면하였다. 또 소위 사회적으로 성공한 기독교인들이 연일 부정부패 문제로 언론에 오르내렸고, 기독교 지도자들은 군사독재정권을 노골적으로 지지하였고, 반대급부로 정치적 경제적 특혜를 받기도 하였다. 이들은 정교분리를 내세우며 진보적 기독교의 민주화운동을 비판하고, 일반 성도들의 사회참여에 침묵을 요구하면서도, 정작 본인들은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공개적 지지를 표명하였다.
이런 성공한 기독교인들의 부정부패와 교계 지도자들의 행태에 대한 실망과 비판도 극에 달했다. 신학적으로는 교회와 세상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신앙에 매몰되었고, 이런 신앙 태도는 정치사회적 문제에 대한 무책임한 태도로 표출되었다. 이런 가운데 기독 지식인들과 청년들의 갈등은 커져 갔다.
80년대부터 기독교 지식인들과 기독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정치, 사회, 학문 등에 대해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고민하도록 하는 “기독교세계관” 공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런 공부를 한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은 87년쯤에는 불의한 정치,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하는 고민을 공유하였고 실천의 장을 찾고 있었다.
이런 고민은 ‘기독교문화연구회’, ‘대학기독신문’ 발행, 대학별 기연, IVF, 사랑의교회 청년부 등의 중심이 되어 결성된 ‘복음주의청년학생연합회’ 등의 활동으로 표면화 되었다. 이들은 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공명선거운동”을 전개하였는데 당시 선거관리위원회도 불법선거를 하던 시절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대단히 진보적 운동이었다. 그러나 대학생,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시작된 운동은 조직적 완결과 지속성을 유지하지 못하였다.
Ⅴ. 87년 이후 기독교시민운동의 역사
전언한대로 기독교가 사회운동을 전개한 것은 초창기서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것이었다. 이는 성경의 당연한 가르침이고, 예수의 사상과 삶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의 당연한 의무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다양한 기독교단체들이 사회운동을 전개하였고, 특히 YMCA(기독교청년회)나 YWCA(기독교여자청년회)는 한국에 설립된 이래 지금까지 다양한 정치사회적 공익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럼에도 발제자는 87년에 설립된 기윤실을 복음주의 기독교 시민운동의 출발로 제시하고자 한다. Y운동은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지금도 활발히 운동하고 있음에도 복음주의 기독교계 운동과 특별한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전개되어왔고, 지금도 기독교운동이라기 보다 일반 시민운동 영역으로 인식되고 있다. Y운동이 과거 진보적 기독교 운동인 KSCF 등과 연계한 일은 있으나 이 또한 학생운동이라는 부문 운동에 국한된 것이었다.
또 일반 시민운동 진영에서도 과거 다양한 사회운동이 존재했음에도 경실련을 시민운동의 출발로 보고 있는데 이는 경실련 운동의 시대적 차별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운동계에서는 시민들에 의해 민주화를 쟁취함으로 출범하게 된 경실련을 이전의 운동과 달리 합법적이고, 중산층 대중운동이라는 서구의 신사회운동의 흐름을 이어받은 새로운 운동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기윤실은 경실련이 출범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동일한 문제의식과 방법론을 가지고 태동하였고, 출범 이후 복음주의 기독교 운동을 주도해왔고,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면에서 복음주의 기독교NGO의 출발로 보는 것이다. 87년 이후 기독교시민운동의 역사는 설립기, 발전기, 전환기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설립기
설립기는 시기적으로 87년~89년이다. 기윤실은 87년 서울대에서 성경공부 모임을 하던 교수들을 중심으로 발기되었다. 당시 이를 주도했던 손봉호 교수는 철학자이며 윤리학자의 관점에서 정부의 불공정성, 권력의 부패, 무능, 그리고 시민들의 무지를 이유로 새로운 시민운동의 필요를 역설하였다. 또한 기독교의 부정부패와 이원론적 신앙을 지적하며 기독교계가 나서서 윤리운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런 주장은 당시 기독교 세계관을 공부하고 실천적 영역을 고민하고 있던 지식인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기독교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설립된 기윤실은 87년 당시 ‘공정선거감시운동’을 전개했던 기독청년학생 그룹을 자연스럽게 흡수했다.
이에 따라 기윤실은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져 보수는 불의한 정치권력에 대해 침묵, 야합, 지지하며 기독교 자체의 성장에만 몰입하고, 진보는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의 선봉에서서 활동하는 양극단의 상황에서 보수적 기독교가 사회적책임을 담당하도록 하는 기폭제 역할을 감당했다.
기윤실은 87년 당시 정치 사회적 혼란의 원인을 구조주의적 관점에서만 보지 않고, 개인의 도덕성 회복을 통해 사회 구조적 변화로 나아가야 더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한 민주주의를 구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정직, 검소, 절제, 나눔이라는 개인윤리적 가치를 중심 가치로 설정하고 주로 개인 도덕성 회복 운동을 전개한다. 초창기 활동은 주로 교회나 학교에서 강의와 세미나 등의 대중 교육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이때 참여한 대중들이 회원으로 참여하면서 급속한 팽창을 이루게 되었다.
기윤실은 초창기부터 중앙 집중적 방식을 지양하고 회원 자발 운동을 중시하며 다양한 회원모임과 분과모임을 구성하고 자생적이고 자발적 운동을 독려했는데 이런 결과 전문적 영역의 다양한 기독교NGO들의 설립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게 되었다. 개인윤리 영역의 계몽교육 운동을 전개하던 한편에서는 당시 사회적으로 부동산 폭등 등 경제 부정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된 것을 계기로 창립된 경실련에 기윤실 주요 임원들이 창립 과정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지원했고, 개방적으로 기윤실 회원들의 참여도 적극 독려해 경실련이 자리 잡는데 기여했다.
1-1 손봉호 교수의 사상
손봉호 교수의 철학은 기윤실 활동과 그가 설립과 활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수많은 기독교NGO의 정신과 활동 방향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된다. 따라서 손봉호 교수의 사상을 살펴보는 것은 기독교NGO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생각되어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도록 하겠다.
손봉호 교수의 사상은 선지자적비관주의, 금욕주의, 사회적복음주의, 정치적보호주의, 문화적 도덕주의로 말할 수 있다.
선지자적 비관주의는 세상은 어차피 타락하고 부패할 수밖에 없고 이는 기독교적으로 볼 때 예수가 재림하는 세상이 마지막 때가 되어야만 해결된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비관적 상황에서도 외치고 행동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행하는 선지자처럼 포기하지 말고 선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금욕주의는 기독교인은 검소하고 절제된 삶을 통해 남는 재산을 이웃을 위해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복음주의는 기독교 복음은 개인의 영생, 축복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 받는 이웃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정의와 사랑을 행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정치적 보호주의는 시민운동은 정치에 대해 적대적이기만 해서는 안 되고 정치가 잘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는 지원하고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경제적 이익을 위해 정부의 선한 일을 방해하는 세력에 맞서 정부가 선한 일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적 도덕주의는 문화는 예술적 영역이 있지만 현대에 와서는 상업적 목적을 음란, 폭력을 부추기고 이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 감시하고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어른은 문화적 선택의 자유가 있지만 청소년의 보호받을 권리를 위해 일정하게 자신의 문화향유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손봉호 교수의 사상은 기윤실을 비롯한 다양한 기독교NGO의 활동내용에 거의 예외 없이 나타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2 발전기
발전기는 시기적으로 90년대 10년간으로 기독교 운동이 단순한 교육운동을 넘어 다양한 사회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 시기 기윤실의 분과모임이나 회원모임이 독립해 다양한 전문분야의 기독교NGO로 분화 발전하였고, 독자적인 기독교NGO들도 만들어져 발전해 나갔다. 특별히 91년 창간한 ‘복음과상황’은 복음주의 기독교 사회운동의 저변을 확대시키고, 교회와 사회 속에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첨병의 역할을 수행했다. ‘복음과 상황’은 80년대 중반 서울대 기연이 중심이 되어 발행한 ‘대학기독신문’과 ‘기독교문화연구회’를 주도했던 분들이 로잔언약을 기치로 창립한 매체다.
이 시기 기윤실의 활동 내용과 조직분화를 살펴보는 것은 그 자체로 기독교NGO의 발전 과정과 기독교NGO가 일반 시민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펴볼 수 있게 한다. 90년대 초반 기윤실은 1만 명 이상의 회원을 확보하였고, 미주3개 지부와 국내 16개 지부를 가진 조직으로 발전하였다. 이런 성장과 더불어 90년대 초반 개인윤리적 문제를 주요 이슈로 캠페인을 중심으로 한 의식변화 운동을 전개했는데, “작은 차타기”, “학교에서 촌지 받지 않기” 등의 캠페인과 함께 ‘월드비전’(당시 선명회)과 ‘기독교환경운동연대’ 등을 도와 나눔운동과 환경운동을 확산시켜 나갔다.
특히 92년 대통령 선거를 계기로 경실련, 흥사단, YMCA 등 400여개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이하 공선협)를 창립하고 사무국을 맡아 공명선거 운동에 본격적으로 돌입하였다. 한편으로는 기독교계에 제안해 ‘공명선거실천기독교대책위원회’를 구성해 보수적 기독교계가 사회문제에 참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공선협 활동은 이지문 중위의 군부재자투표 양심선언 등을 지원하며 군부재자투표 제도를 바꾸어 냄으로 이후 선거를 통한 민주적 정권교체를 이루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90년대 중반부터는 낙태문제, 음란․폭력 문제, 청소년 문제 등 다양한 사회문제에 관여하게 되면서 개인윤리 문제에서 사회윤리 문제로 급속도로 활동이 확장되어 갔다. 낙태문제 해결을 위해 다른 교회와 기독교기관들의 연대를 이끌어내 ‘낙태반대운동연합’(94년)을 설립하였고, 스포츠신문으로 촉발된 음란․폭력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일반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연대기구인 ‘음란폭력물근절을위한대책협의회’(96년)를 설립 했다.
이외에도 이 시기 많은 일반 NGO와 기독교NGO들이 기윤실의 직간접적 참여로 설립되었는데 현재 대부분의 시민단체들이 참여해 구성하고 있는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의 전신인 ‘한국시민단체협의회’(95년, 시민협)의 창립을 주도했다. 시민협의 전신은 ‘정의로운사회를 위한시민운동협의회’(92년, 정사협)인데 정사협은 92년 공선협이 창립된 이후 참여한 단체 중 노동, 여성, 문화 등 43개 단체가 연대의 유지, 지속적인 시민운동을 벌여나가자는 취지로 구성해 부정부패 감시 및 고발, 시민입법, 시민의식개혁, 각계의 자정운동 등을 전개했는데 손봉호 교수는 집행위원장, 기윤실은 실무지원으로 이 운동을 주도했다.
시민단체들과 연대해 건강한 혼례, 장사문화 등을 주 활동으로 전개하는 ‘생활개혁실천협의회’(97년)를 설립했으며, 600여명의 탈북자들이 참여하고 있는 ‘평화통일탈북인연합회’(98년)를 지원해 설립하는 등 기윤실은 주요한 일반 NGO의 역사에 기여해 왔다.
또 다양한 기독교NGO의 설립도 직간접적으로 지원했는데, 검소한 결혼문화운동을 전개한 ‘결혼문화원’(96년), 기독경영인들로 구성된 분과모임이 독립해 설립한 ‘기독경영연구원’(96년), 삼품백화점 붕괴 사고를 계기로 결성한 ‘한국기독교재난구조협의회’(96년, 한재협)를 설립해 활동하였다. 한재협은 이후 조현삼 목사(광염교회)가 이끄는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으로 발전하였다. 미디어 감시 운동을 전개하던 분과모임은 학부모들이 중심이 된 ‘학부모정보감시단’(98년)과 교사들이 중심이 된 ‘깨끗한미디어를위한교사운동’(2000년)으로 분리 독립하였다.
또 기독변호사들로 구성된 분과모임은 ‘기독변호사회’(99년, CLF)로 독립하였고, 교사들로 구성된 기윤실 교사모임은 14개 교사단체들과 연대해 ‘좋은교사운동’(99년)을 설립해 주도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외에도 ‘영락교회 저동문화교실’(99년) 설립을 지원하고,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2001년)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기독교NGO들이 개인윤리 및 사회윤리 문제에 일정한 사회적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90년대 후반 오히려 기독교계는 더 부패하고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이에 기독교NGO들은 그동안 강의나 세미나 등 교육을 통해 지적하던 교회개혁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했다. 먼저 기윤실은 ‘98년 교회개혁실천선언문’을 발표해 성직자 권위주의, 개교회주의, 기복주의 신앙, 신학교의 타락 등 교회의 부패문제를 정면으로 지적하였다.
비슷한 시기 목회자들로 구성된 ‘한국목회자연합회’도 일반 신문 광고를 통해 교회갱신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특히 기독교NGO들은 ‘깨끗한 총회를 위한 기독인연대’를 구성해 교단 총회의 금권선거, 부정부패선거의 개선을 요구하고 감시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런 활동은 합동 교단이 제비뽑기 선거제도를 도입하게 하는데 결정적 압력으로 작용하였다. 특별히 2000년 불거진 대형교회의 담임목사직 세습 문제는 기독교NGO들이 연대해 교회 부패 문제와 대항하는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는데 급기야 개교회 앞에서 시위를 하는 극단적 상황도 벌어졌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일반 언론을 통해 만 천하에 그대로 표출되었다.
1-3 전환기
기독교NGO의 전환기는 2000년대 이후 현재까지로 볼 수 있다. 이 시기를 전환기로 보는 것은 초창기 리더십들의 퇴진으로 인한 리더십 교체와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고, 기윤실 등 핵심조직의 약화, 자생조직의 활성화와 새로운 연대운동, 언론운동, 학생운동의 활성화 등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한편에서는 신학적, 정치적 상황에 따라 보수, 진보로 나뉘어졌던 기독교운동이 보수 내에서 교회개혁운동과 정치적 상황에 대한 대응방식을 두고 보수와 개혁으로 나뉘는 시기이기도 하다.
기윤실 설립을 주도하고, 무수한 기독교NGO 설립을 지원한 손봉호 교수는 2000년 들어오면서 기윤실의 모든 임직에서 사임하고 지도력 교체를 시도하였다. 손봉호 교수의 사퇴는 자연스럽게 함께했던 김인수 교수, 이만열 교수, 홍정길 목사 등의 2선 후퇴를 가져왔다. 그러나 명확치 않은 후임 지도력의 미숙은 핵심조직의 분화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기독교NGO의 영향력은 감소하였다.
기윤실은 손봉호 교수의 퇴임에 따라 손교수의 제자 그룹들로 공동리더십 체제를 유지하면서 기윤실의 NGO적 성격을 강화하고, 운동을 4가지 영역인 생활신앙운동, 문화소비자운동, 건강교회운동, 사회정의운동으로 분화하고 독자적 운동본부를 구성하고 장기적으로 분리 독립해 나갈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그러나 운동본부의 지도력, 활동 역량에 따라 차이가 발생하고 각 영역별 활동에 대한 지원과 조율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아 특정 운동만이 부각되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사회정의운동 영역이 ‘공의정치포럼’(2000년)으로 분리 독립하였고, 담임목사직 세습반대 운동을 계기로 발생한 운동방식에 대한 이견과 지도력 부재에 따른 갈등으로 건강교회운동 영역이 ‘교회개혁실천연대’(2002년)로 분화되면서 중심세력을 잃게 되었다.
이후 중심적 리더십 부재하고, 운동영역이 문화소비자운동과 건강가정 영역에 한정된 기윤실의 사회적 영향력은 급속도로 감소하였고, 이에 따라 지식인, 청년들의 참여도 극감하였다. 2000년대 이후 기윤실은 극속도로 회원 감소가 이루어졌고, 활동 동력을 상실한 지부들의 폐쇄가 줄을 이었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 몇 차례 사무처 리더십을 교체하며 새로운 운동 방향을 모색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최근에는 사회운동 영역을 포기하고, 초창기 정신인 정직, 신뢰 등을 중심 가치로 교육, 윤리 운동으로 회귀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도 기윤실은 교회 내외적인 요구에 따라 다양한 운동에 참여하고, 분화하는 것을 통해 기독교NGO 설립과 일반 시민사회를 지원했다. 기독교NGO들의 연합운동인 ‘성서한국’(2002년)을 지원하였고, 기윤실 총무로서 문화영역을 주도해온 권장희 총무가 미디어, 인터넷 중독 등의 문제를 중심으로 세운 ‘놀이미디어교육센터’(2005년), 건강가정 영역이 분리해 ‘크리스챤라이프센터’(2007년) 등이 설립되었다. 이외에도 ‘이라크평화를위한기독인연대’ 활동, ‘대학부재자투표운동’, ‘배아복제반대운동’, ‘전국대학컨닝추방운동’ 등을 전개하였고, 300여 시민사회단체들과 연대해 ‘도박산업규제및전국네트워크’(2003년)를 통해 “게임산업진흥법” 개정을 통해 “바다이야기 사태” 해결에 기여하였고, “국무총리실 산하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 설립을 통해 도박산업 규제와 도박중독자 지원 체계를 마련하였다.
2000년대에는 다양한 자생적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뉴스앤조이’, ‘새벽이슬’과 같은 언론운동이 시작되었고, 복음주의적 신앙을 바탕으로 정치사회적 활동을 전개하는 학생운동도 시도 되었다.
뉴스앤조이는 기독교 신문 기자 출신들이 인터넷 매체로 시작했다가, 오프라인 신문도 발행하였고, 90년대 기독교사회운동을 주도해온 ‘복음과 상황’과 합병해 언론운동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또 총신대 운동권 출신으로 수유리 일대에 공동체 교회를 세워 다양한 지역운동과 교육운동을 전개해온 ‘마을교회팀’, ‘교회개혁실천연대’ 등과 연대해 ‘기독청년아카데미’를 설립해 청년교육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전시키고 있다.
‘새벽이슬’은 95년 한총련 연세대 사태를 계기로 96년 연세대 기독총학 설립을 계기로 97년 10개 대학에서 기독총학을 기치로 선거에 참여했던 학생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80년대 중반 서울대에서 처음 태동하고, 89년 ‘학원복음화협의회’ 설립과 지원을 계기로 전국 대학으로 확산된 기연운동에 참여한 각 대학 기연의 주요 리더들로서 기연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학생회 진출을 시도하였다.
이들은 98년 24개 기독교대학 총학생회로 구성된 ‘기독교대학총학생회연합’(기대총련)과 연대해 선교농활, 통일국토대장정 등 다양한 사회적 활동을 전개하였고, 99년에는 기독청년대학생을 위해 “새벽이슬”이란 신문(이후 잡지로 전환)을 창간해 2003년까지 전국 대학에 발행하였다. 신문 발생 기간 동안에 "스포츠투데이 반대운동”(안티스투), “담임목사직 세습반대 운동” 등 교회개혁운동의 최일선에 참여하였고, “광야교회돕기”, “가나안교회돕기” 등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을 지원했으며, “대학부재자투표운동”, “이라크평화활동” 등 사회참여운동을 전개하였다. 기대총련은 2002년 5기를 끝으로 중단되었고, 새벽이슬은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대학모임을 구성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수유리를 중심으로 한 마을교회팀들은 열린마을, 희년마을, 푸른마을 3개의 공동체 교회를 중심으로 기독청년아카데미로 발전한 ‘청년성서연구원’ 등의 교육운동, ‘생명평화연대’ 등의 지역운동, 대안교육운동 등 다양한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외에도 새로운 신학교육 운동을 전개하는 ‘현대기독교아카데미’, 장로교 통합 측 교회들이 설립한 ‘문화선교연구원’, 청년문화운동 ‘Ad zero', 높은뜻 숭의교회가 설립한 교육공간 청어람에서 이루어지는 ‘청어람아카데미’ 등 다양한 분야의 운동들이 진행되고 있다.
복음주의 사회운동을 이끌 온 서경석 목사와 김진홍 목사는 2005년 노무현 정권에 대해 좌파, 무능 정권이란 비판을 가하며 각각 정치적 지향을 전면에 내세운 단체을 설립하였다. 서경석 목사는 기독교청년운동을 이끌어온 고직한 선교사와 함께 복음주의 사회운동에 우호적인 교회들을 중심으로 '기독교사회책임‘을 설립하였다. 김진홍 목사는 소위 전향한 좌파운동권 인사들과 보수 우익적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뉴라이트전국연합’을 설립했다.
이들은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한미전시작전권 이양 반대, 한미동맹 강화, 사립학교법 개정 반대, 북한인권문제 재기, 한미FTA 체결 지지 등 다양한 정치적 이슈를 제기하며 활동에 나섰고, 한나라당의 정권교체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런 활동에 대해 소위 386세대인 기독활동가들은 비신앙적, 정치적 활동이라고 지적하며 참여를 거부하고, 반대 논쟁을 촉발하였고, 이를 계기로 새로운 연합운동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연합기구인 ‘성서한국’을 중심으로 기독교의 사회적책임을 주제로 한 연합수련회를 진행하고 있다.
87년 이후 한 흐름 속에서 기독교 시민운동을 전개해온 복음주의 기독교NGO 세력이 김진홍, 서경석 목사를 중심으로 한 보수 세력과 성서한국운동에 참여하는 세력을 중심으로 한 개혁세력으로 분화된 것이다. 물론 양쪽에 모두 참여하고 있는 중간지대도 존재한다. 개혁세력은 ‘이라크평화활동’, ‘기독교사회포럼’ 다양한 사회적 이슈에 대한 연대 활동 등 에큐메니컬 진영 기독교NGO와의 연대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최근에는 통일에 대한 열망의 확산에 따라 통일, 평화 문제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는데 ‘남북나눔운동’을 기반으로한 ‘한반도평화연구원’, 기독교활동가들이 중심이 된 ‘통일시대평화누리’, 뉴스앤조이, 복음과 상황, 기독청년아카데미가 NGO로 전환한 ‘하나누리’가 창립되었고, ‘평화한국’, ‘남북평화재단’ 등도 새롭게 설립되어 활동하고 있다.
Ⅵ. 87년 이후 기독교시민운동에 대한 평가
위에 기술한 바대로 87년 이후 기독교시민운동은 설립기, 발전기, 전환기를 거쳐 왔다. 따라서 앞으로 기독교시민운동은 과거에 대한 공과 과에 대한 평가를 통해 계승 발전시킬 것과 수정보완 할 것을 올바로 찾아낸다면 전환기를 거쳐 다시 성숙기로 접어들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다음은 발제자가 나름대로 생각하는 87년 이후 기독교시민운동에 대한 평가내용이다. 공도 있고 과도 있다.
1. 87년 이후 기독교시민운동의 장점
-기윤실의 기독시민운동의 모델 제시 : 87년 기윤실의 설립한 기윤실은 80년대 이후 한국교회 지식인과 학생선교단체을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된 기독교세계관 운동의 내용을 내용적으로 실천할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또 구조주의적 관점으로 제도개혁 운동에 매진했던 일반 시민사회운동과 달리 개인윤리에서 출발한 사회변혁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독특함을 가지고 있다.
사회운동을 전개할 때도 연대의 정신을 유지하였고, 연대함에 있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상대를 앞세우는 겸손과 비움의 정신은 일반 시민사회운동의 연합에 기여하였다. 특별히 기윤실은 다양한 기독교NGO의 설립과 일반 시민사회 연합 운동 지원, 투명한 운영, 대중적 이슈 파이팅, 회원참여운동 등을 통해 기독교NGO의 모델을 제시하였다.
-겸손하고 실력 있는 리더십 : 지난 시절 기독교NGO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신앙적 겸손함과 사회적 실력을 갖춘 리더십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최초 기윤실을 설립했던 분들은 목회자들이 아니라 교수, 의사, 변호사 등 전문인으로 교회에서는 신앙적으로 존경받고, 사회적으로는 전문 영역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평신도 지도자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기독교NGO를 처음 발기해 시작함에 따라 수많은 기독교 지식인들과 청년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을 있었으며, 사회적으로도 객관적으로 높은 평가 받고, 도덕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런 지도자들이 있었기에 이들이 각 영역에서 양산한 후배들과 각 영역에서 이들을 존경하며 따르던 전문인들이 기독교NGO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들로 인해 이후 기독교NGO가 전문적으로 분화하고 자립해 나가는데 기초가 되었다. 이후 목회자들이 참여할 때도 이런 가치와 분위기를 동조하고 지지하는 분들이 참여해 전통을 이어 갈 수 있었다.
-복음주의에 입각한 사회참여의 길 제시 : 87년 이후 기독교NGO 활동은 80년대부터 시작된 기독교세계관 운동으로 복음주의에 입각한 사회참여에 대해 고민하는 지식인, 청년들에게 실천의 장을 제공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특히 기독교NGO는 당시 사회운동권이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수단방법을 뛰어넘어 제도변혁의 결과에 집중하고, 극단적 폭력사태까지 야기되었던 상황에서 비폭력 무저항의 기독교적 방법론으로 사회참여 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에 따라 교회 중심으로 생활하며 정치사회적 문제를 외면했던 많은 기독인들이 기독교세계관을 공부하고, 사회적 실천에 참여하도록 자극하였고, 이를 통해 일반 사회운동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징검다리 역할도 수행했다.
-일반 시민사회에 미친 선한 영향력 : 기독교NGO는 교회라는 틀에서만 갖혀있지 않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의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였다. 특별히 겸손함을 기반으로한 연대정신을 통해 정치적 상황과 이념적으로 흩어져 있는 일반 시민사회가 연합하도록 자극하고 실질적으로 이끌어 많은 연대기구들이 탄생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런 연대를 통한 활동은 단순히 연대 속에 기독교 영역을 담당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정신을 기반으로 연대 방향과 내용을 선도하는 적극적인 것이었다.
-보수와 진보의 연대 확산 : 2000년대 이후 기독교NGO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보수와 진보 영역의 연대가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학생운동 영역에서 먼저 시작되었는데 복음주의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새벽이슬’은 대학 내 학생선교단체들과 연대하면서도 여러 사회적 이슈에 대해 진보진영인 KSCF, EYC, 한기연 등과 연대하였다. 이들의 노력은 대학 내 기연에 KSCF가 가입하도록 하는데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 양 진영의 신학적 담론과 사회적 활동을 기사화한 ‘뉴스앤조이’의 열린 공간과, 보수적 신학교에서 학생운동을 경험했던 이유로 보수와 진보 양쪽과 연대가 되는 수유리 마을교회팀들도 가교 역할이 되었다.
또 교회개혁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신학적 문제가 아닌 세습, 재정비리, 부정부패 등의 문제에 대한 공통된 인식은 연대의 주요 이슈가 되었다. 보수와 진보의 연대가 가능해진 원인 중에는 정치 민주화도 들 수 있다.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는 찬성이나 반대냐 하는 양극단에 서야했고, 이 양극단에 서면서 특혜와 핍박을 경험한 윗세대들은 서로에 대한 불신이 깊었다. 그러나 민주화 세대인 활동가 그룹은 특별히 불신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차이를 굳이 드러내지 않는다면 사회적 이슈에 대한 공동대응은 얼마든지 가능하게 된 것이다.
2. 87년 이후 기독교시민운동의 단점
-상대적으로 개인윤리운동에 치중 : 복음주의 기독교NGO는 개인윤리에 입각한 사회변혁으로의 나아감이라는 좋은 정신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 통일운동 등 정치사회적으로 중요한 사항에 대해 등한시 한 면이 없지 않다. 또 10여년 이상 개인윤리 운동에 집중하였고, 이로 인해 많은 회원과 조직을 갖추고도 정치사회적 제도 변혁운동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면도 있다.
-교회개혁운동의 조직적 활동 미흡 : 교회개혁운동을 위해 성명을 발표하고, 포럼을 열기도 하고, 개교회 앞에서 시위를 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성직자와 교회조직의 극단적 부정부패를 바로잡기 위한 사회법의 활용, 제도변화 등의 적극적 활동에는 미흡했다. 최근 교회와 성직자의 부정부패가 더욱 심화되어가고, 이로 인한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 실추로 인해 기독교인구가 감소하는 현상을 볼 때 신학적 논의와 선언적 지침을 제시하는 것에서 나아가 더욱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이 필요했다고 생각된다. 이런 활동을 어렵게 한데는 기독교NGO가 교회의 지원을 받고 있고, 또 문제를 일으키는 해당 교회나 조직의 리더십들과 기독교NGO의 리더십들 간에 인간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것도 제약 요인이라 판단된다.
- 리더십 이양 실패로 인한 혼선 :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손봉호 교수 등 1세대의 후퇴는 한국교회와 일반 시민사회 진영이 권력욕으로 인해 리더십 이양 과정에서 보인 여러 실패 사례를 볼 때 신선하고 긍정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후임자의 리더십이 명확치 않은 상황에서의 리더십 이양은 오히려 혼란과 분열을 가져온 측면도 있다. 손봉호 교수는 퇴임하면서 제자그룹의 전문인들에게 대표직을 이양했는데 이들은 학문적 측면에서는 손봉호 교수를 능가할 정도로 실력이 있지만, 조직 운영, 사회적 의제 결정 등 사회 실천적 측면에서는 부족하였다.
이로 인해 기윤실은 상부 리더십이 분명치 않은 가운데 사무처 중심으로 이류를 선정하고 운동을 전개함에 따라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는데 한계를 드러냈고, 대표적 지도자의 부재로 인해 후원 및 회원 감소에 직면했다. 이에 따라 기윤실 운동과 역사를 같이 해 오지 않은 분, 심지어 기윤실 운동을 일정하게 비판적으로 대해오던 분을 리더로 모셔오면서 운동 방향 자체에 혼란이 오기도 했다. 또한 손봉호 교수 등 1세대가 물러났음에도 대체할 리더십이 부재함에 따라 다시 손봉호 교수 등의 이름을 빌려 기대었다. 이는 내세워진 이름과 실재 리더 하는 이름이 다름에 따른 내용 부실로 이어졌다.
현재까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손봉호 교수 등의 후퇴가 한 5년 정도만 늦쳐지고, 그 사이 후임리더십을 명확하게 세웠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런 리더십 이양의 실패는 상부 그룹에서만 발생한 것이 아니라 사무처 단위에서도 발생하였다. 20대에 간사로 들어와 10년 이상 활동한 간사들은 이제 40대에 접어들었다. 사무처는 40대의 나이에 실무자로 일하는데 한계가 있고, 전문영역을 분화해 나가는 상황에 직면했는데 문제는 30대의 중간실무자들이 훈련 양성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리더십의 공백이 발생하였다.
-계획성 없는 조직분화에 따른 영향력 약화 : 기윤실은 발전기인 90년대 들어 회원모임이나 전문모임을 중심으로 다양한 기독교NGO로 분리 독립하였다. 이는 한편으로 보면 중앙집권적이고 문어발식 사업을 전개하지 않는 장점을 가지고 있으나 한편으로 보면 일정한 규모를 가지고 있어야 실질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또 조직을 분화하면 적극적이고 유기적으로 연대하는 체제를 유지해야 하는데 이 또한 등한시해서 분화하고 일정 시간이 지나 새로운 리더십이나 실무자들이 들어오면 전혀 관계없는 단체가 되었다. 조직은 기본적으로 자체 성장의 동력이 강하게 작동한다. 조직을 분화하면 분화된 조직이 자체적으로 성장하려는 욕구를 갖기 때문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원래 조직과의 연대가 인위적으로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이탈되는 것이다.
이런 속성에 따라 전문가 모임의 분화는 해당 전문 인력의 빠져나가고, 사람의 분화는 재정의 분화로 이어졌다. 또 분화된 모임에 새로운 구성원들이 들어와 기존에 유지되어온 일관된 정신을 희미해지고, 자체적인 사업내용을 구성하면서 때로는 같은 사안에 대해 대립적 입장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는 경실련이나 참여연대 등 일반 시민사회를 주도하는 NGO들이 수만 명의 회원과 수십 명의 실무자, 다양한 지역조직, 분과모임 등을 그대로 유지하며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비해 비효율적인 선택이다. 분화된 기독교NGO들은 조직 유지에 힘을 모으면서 사회적 의제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했고, 또 사회적 지명도가 약해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결국 계획성 없이 상황에 따라 진행된 조직분화는 기독교NGO의 사회적 영향력만 약화시키는 결과에 봉착한 것이다.
- 정치적 상황에 따른 보수진영 기독교NGO의 분화 : 90년대를 함께 해온 기독교시민운동의 지도자들이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 대한 평가와 정치적 입장에 따라 분화된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김진홍 목사의 뉴라이트 운동, 서경석 목사의 기독교사회책임은 기독교세계관을 중심으로 함께 해온 기독교시민운동을 보수와 개혁으로 나뉘었고, 세대간, 계층 간 갈등 구조를 증폭시켰다. 이로 인해 기독청년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는데 그나마 보수와 진보로 나뉜 기독교계가 또 다시 분열하게 된 것이다. 김진홍 목사와 서경석 목사의 정치적 운동은 그동안 기독교계가 주도해온 합법, 투명, 공정을 기치로한 공명선거운동의 정신을 훼손하고 있으며, 교회를 특정 정치단체나 특정인을 지지하는 정치운동에 동원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동안 한기총을 위시한 보수우익과 차별성을 가지고 복음주의 시민운동 영역을 유지해온 전통을 훼손해 기독교운동을 보수우익와 동일시하게 만들고 있다. 이는 정의의 문제를 고민하던 청년들이 기독교NGO를 통해 자부심을 회복하고 교회를 찾았던 역사를 거꾸로 돌려 청년들을 교회에서 갈등하게 하고, 교회로 나아오지 못하게 하고 있다. 나아가 기독교NGO 공정성, 투명성, 도덕성을 바탕으로 사회적으로 행사하던 거룩한 영향력이 상실해 가고 있는 것이다.
Ⅶ. 기독교시민운동의 발전방향 제안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의 종교인구 변화추세를 보면 다른 모든 종교인구가 증가했는데, 개신교 인구만이 감소했다. 그 원인을 보수적 교회에서는 전도와 선교에 매진하지 않아서라고 진단하고 있으나, 70-80년대의 부흥회, 민족복음화운동과 90년대의 총력을 다한 해외선교를 감안할 때 이는 잘못된 진단이다. 기독교 인구의 감소는 기독교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되는데 한기총 등에서는 그 이유를 기독교가 사회복지적 나눔을 많이 실행하고 있음에도 조직적인 언론홍보에 실패해 이미지가 실추된 것이라고 판단하고 ‘한국교회언론대책위’ 같은 기구를 꾸려 우리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를 열심히 홍보하고 있다. 물론 한국교회가 다른 종교나 사회단체에 비해 월등히 사회복지적 나눔을 실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비판을 받는다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오히려 일반 사회가 기독교에 대해 실망하는 것은 빛과 소금이 되어야할 성직자와 교회가 성직의 세습, 성직자의 성추행, 교회의 땅 투기, 재정의 불투명성 등 부정부패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런데 한기총이나 한국교회언론대책위 등은 대형교회와 목회자의 비리를 폭로한 언론사를 집중비난하거나 심지어 수천 명의 교인들을 동원해 무력(?) 시위를 불사하고 있다. 더구나 민주화에 의해 국민의 지지를 받고 합법적으로 선출된 정권에 대해 좌파, 친북 정권이라 칭하면서 힐난하면서도 수만 명의 성도들을 모아놓고 기도회를 개최하면서 성조기를 흔들며 미국을 찬양하고, 미국이 시행한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기독교NGO도 중심을 잃고 보수, 진보에서 보수, 개혁, 진보로 나뉘어 정치적 이해관계, 이념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발제자는 다음과 같이 앞으로 기독교NGO의 현상을 진단하고 발전방향에 대해 제언 한다.
-교회개혁을 위한 적극적 운동 필요 : 2002년 기윤실에서 분리 독립한 교회개혁실천연대는 교육, 기자회견, 성명서 발표, 기자회견, 개교회 및 기독교기관에 대한 항의 시위 등 다양한 방법으로 교회개혁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개혁연대는 민주적 정관 갖기 운동, 재정투명화 운동 등 제도개혁 방향도 제시하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부패 문제는 대형교회와 단체를 중심으로 내부적으로 자정 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대담하고 급속도록 확산되고 있다.
더구나 이런 교회와 단체들이 정치, 경제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정치사회적 문제에까지 개입하면서 사회적 인식은 더욱 후퇴하고 있다. 발제자가 볼 때 이런 모든 부패를 가능하도록 구조적인 힘을 제공하는 곳을 한기총과 국민일보이다. 기독교NGO들은 보수, 진보를 넘어 적극적으로 연대해 한기총과 국민일보의 문제점을 부각시키고 해체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판단되며, 담임목사직을 포함한 다양한 교회 세습, 매매 행위에 대해 더욱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NGO의 정치적 참여에 따른 교회의 세속화, 급속한 쇠락 : 과거 군사독재 정권 시절 모든 사회운동이 불법화 되어 무력화될 때 선지자적 자세를 가지고 진보진영 교회와 기독교NGO들이 운동의 전면에서 싸웠다. 그러나 민주화 된 이후에 일반 시민사회는 무한한 자유를 누리고 있고, 권력의 5부라고 일컬을 정도로 실질적 힘을 가지고 정부와 기업을 감시, 견제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과거에 불의한 정권에 대해 침묵, 야합, 지지 보수진영 교회와 기독교NGO들이 나서 정권을 규탄하고 정치적 참여를 힘을 쏟는 것은 그 자체로 세속적이다.
그러나 특정한 정치세력이나 특정인에 대한 교회와 기독교NGO의 절대적 지지는 결국정치 자체의 비도덕성으로 인해 부메랑이 되어 교회를 급속히 세속화 시키고, 쇠락 시킬 것이다. 기독교NGO는 금년 대선, 내년 총선을 맞이하여 그동안 해왔던 합법성, 투명성, 공정성의 정신에 입각한 공명선거정신에 따라 중심을 잡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선거와 관련해 집단적으로 또는 교회를 동원해 특정세력을 지지해야 한다는 유혹을 물리치고, 오히려 교회와 기독교단체를 이용해 벌어지는 불법, 탈법적인 선거운동 행태에 대해 시정을 요구하고 과감하게 관련 기관에 고발하는 등의 적극적 대응을 해야 한다.
-기독교NGO의 구조조정 필요 : 현재 활동하고 있는 기독교NGO 중에는 활동 목적과 내용에 충실하지 못할 정도로 형식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곳들이 많이 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볼 때 이미 경쟁력을 상실했거나 운영능력이 없는 곳들인데, 인맥에 따른 교회 묻지마 후원으로 인해 망하지 않고 유지되고 있는 경우가 있다. 문을 닫아야 할 곳은 닫아야 한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해 문을 닫아야 할 곳이 유지 되는 것으로 인해 참여하고 있는 전문 인력들이 비슷비슷한 몇 곳의 단체에 이름을 올리고 비효율적인 회의에 참여하느라 정작 생산적인 활동에 제약을 받는다. 분화하고 나눔으로 인해 영향력을 상실한 측면도 있다. 실질적으로 운동이 가능하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다시 통폐합 할 곳은 통폐합해서 한정된 인력과 물질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도록 구조조정 해야 한다.
-정치사회적 제도개혁을 위한 활동 및 단체 필요 : 현재 보수적 기독교NGO 들은 대부분 개인윤리에 입각한 의식개혁운동이나 교육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20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정치사회적 제도개혁 운동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단체나 없다는 것은 비극적인 상황이라 하겠다. 불의한 제도를 개선하고, 공의로운 제도를 입안하는 운동이 필요하다. 제도 하나 바꾸고 제도 하나 만드는 것이 얼마나 많은 억압받고,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지는 설명의 필요가 없을 것이다. 기독교NGO 진영에는 이를 수행한 좋은 전문 인력들이 많이 있다. 지금이라도 정치사회적 제도개혁을 적극적으로 수행할 기독교NGO를 설립해야 한다.
-기독교NGO 내의 세대 갈등 심화 : 현재 기독교NGO 내에서 실무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들은 소위 386 세대들로서 기독교세계관을 공부하고 사회참여를 고민하다가, 기윤실 등 기독교NGO 활동을 통해 사회참여의 장으로 나온 사람들이다. 그런데 2000년 이후 발생한 담임목사직 세습문제, 탄핵문제, 이라크 파병 문제, 한기총 시청 앞 집회 문제 등 교회, 사회적 주요 이슈를 두고, 내용과 활동 방법에 있어 단체를 설립하고 이끌어온 리더 그룹과 실무자들 간에 세대 갈등이 발생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정치권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미국,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차이가 발생한다. 이런 세대 갈등은 리더 그룹의 의사결정과 지원을 받아 실무적 실행을 하는 실무자 간의 불협화음으로 나타나 결국 기독교NGO의 활동을 위축시키고 있다.
이런 갈등은 비단 세대 간 뿐 아니라 리더그룹들 중에도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이해관계에 따라 나타나기도 한다. 그동안 개인윤리를 중심으로 운동을 전개할 때는 갈등의 표출될 이유가 별로 없었으나 정치사회적 상황이 격변하면서 갈등이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옳다고 믿는바 대로, 행동하고자 하는 대로 나뉘는 것은 기독교NGO 전체를 위해서나 사회적 영향력을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다. 리더그룹은 자신들의 가르침을 통해 성장한 실무자들을 신뢰하고, 실무자들은 리더그룹들의 생각을 존중해 함께 해야 한다. 복음 안에서 한 형제이고 더구나 복음주의 신학과 기독교세계관 내용을 공유하고 있는데 협력할 수 없다면 나아가 진보적 기독교나 일반 시민사회와의 연대도 요원할 수밖에 없다.
-실천의 장 마련 필요 : 최근 기독교NGO 진영에 다양한 교육운동이 활성화 되고 있다. 다양한 아카데미를 통해 수백 명씩의 청년들이 사회적 인식이 넓어진다. 문제는 사회적 인식이 넓어진 청년들이 참여할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과 세계관적 이론은 형성이 되었는데 실천의 장이 없다는 것은 비극이다. 따라서 기독교NGO들은 적극적으로 사회적 이슈에 반응하며 의식화된 청년들의 참여공간을 확대하고 조직화해야 한다.
-보수와 진보진영의 적극적 연대의 확대 필요 : 보수진영 기독교NGO는 실천 경험의 부족하고, 진보적 기독교NGO는 회원 참여 구조가 빈약하다. 일반 사회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 내의 보수와 진보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모두가 기독교이다. 앞으로 교회개혁운동, 윤리운동, 제도적 운동 등의 다양한 영역에서 보수, 진보를 넘은 다양한 연대 운동이 더욱 활성화 되어야 한다.
-체계적인 기독교NGO 운동가 양성 필요 : 지난 20여 년 동안 기독교NGO가 이만큼 성장하고 사회적 영향력을 미쳐온 것은 좋을 리더들과 함께 헌신된 실무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길게는 20여년 짧게는 몇 년간 박봉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하나님나라에 헌신하며 활동가로 살아온 사람들에 대해 활동가적 전문성을 인정하고 지원할 필요가 있다. 또 좋은 사회운동가 양성을 위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최근 대학 과목이나 전공에 NGO 관련 내용이 증가하고 있는 기독교NGO 운동가 양성을 위해 기독교대학과 연계한 과정도 개설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펀드를 조성해 기독교NGO 운동가의 임금을 현실화하고, 재교육을 지원하는 것도 마련해야 한다. 한 걸음 더 사회 여론을 이끌어가는 그룹인 정치가, 사회운동가, 언론인을 특화해 지원하고 교육해 양성하는 것도 시도해 볼 수 있다.
-대학생NGO 운동의 필요성 : 역사적으로 대학가에서 학생들을 동원하고 조직적 활동에 참여시킨 그룹은 일반 사회운동권과 기독교 선교단체이다. 학생운동권은 총학생회를 기반으로 반독재투쟁과 민주화 쟁취를 중심으로 학생대중을 선도하였다. 학생선교단체는 개인복음과 제자화운동을 중심으로 70, 80년대를 지나면서 크게 성장하였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학생선교단체는 정체되고 있으며, 정치적 상황 변화와 전반적인 시민의식의 향상은 복음주의 청년학생들의 사회참여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다.
그동안 사회참여를 담당하는 복음주의 진영이 없음에 따라 학생선교단체 내에서 사회참여와 관련한 소모임을 만들어 일부 담당해 왔으나 전문성과 효율성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대학생NGO를 대학별로 건설한다면 기독학생들의 참여의 폭도 넓힐 수 있고, 기독교NGO의 활성화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일반 시민운동 진영도 학생운동권의 위축과 맞물려 인력수습, 자원봉사자 확보 등의 어려움에 직면하면서 대학 내 모임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단체 명칭에 기독교를 표방하는 것의 비효율성 : 기독교NGO는 그동안 기독성, 하나님에 대한 영광을 나타냄 등을 이유로 단체 명칭에 기독교를 붙여왔다. 이런 명칭은 교회 내에서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개인윤리적 운동이나 의식교육 운동을 전개할 때는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정치사회적 제도변혁 운동을 할 때는 효율적이지 않다. 제도를 결정하는 정부나 국회의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는 특정종교 그룹으로 종교적 편향성을 전제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같은 내용이라도 객관적으로 전달되지 않고, 형평성 차원에서 볼 때 기독교의 입장을 들으면 다른 종교의 입장을 들어야 함으로 의견수렴 때 다른 시민사회와 동등하게 채택되지 못한다.
기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유럽이나 미국 등에서도 많은 단체들이 기독교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있고, 특별히 문제 발생이 적은 나눔운동 영역에서도 기독교 용어를 사용하는 곳은 많지 않다. 다종교 사회인 점도 고려해야 한다. 또 우리도 실수할 수 있다는 생각할 때 실수했을 때 비난과 비판이 우리에게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회에 돌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단체 명칭에 기독교를 붙이는 것은 적절치 않다. 우리의 모든 삶이 선교를 목적으로 하고 있으나 직접적 전도나 선교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보편적 명칭을 붙이는 것이 사회적 활동에 더 효율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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