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부 이승만 박사가 국민방위군사건, 거창사건으로 1951년 5월 7일 신성모 국방장관의 사표를 수리한 후
곧바로 부통령 김성수, 조병옥 내무장관, 장택상 국회부의장, 비서 출신 윤치영 프랑스 공사 직후 신문사 사장 등
전 분야 지도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성모를 제3대 주일 전권 수석 공사로 임명한 것은 "평화선 선포" 준비였다.
국제법의 기초와 시작은 '해양법(해양의 자유에서 시작)'으로 해양 전문가에 영국식 영어 구사,
해양제국 영국인들도 존경하는 Extra(Super) Master는 외국인에게는 응시조차 할 수 없었는데,
신성모가 담대하게 응시를 허락을 받고 당당하게 합격하여 최고 항해사 자격을 취득했다.
그래서 건국 후 국부 이승만 박사는 인도에 있는 신성모를 추적하여 귀국하도록 요청하여 1948년
10월 3일 입국하자 우익청년단체인 대한청년단 단장으로 임명이 되었고, 제독(해군 중장)의 예우를 받았다.
영국 중국 인도까지 국제 인맥이 있는 신성모가 적임자였다.
국부 이승만 박사의 프린스턴 박사학위의 '국제법' 논문도 해양의 자유와 관련이 있다.
놀라운 사실은 1910년 프린스턴 국제법 박사 논문은
1901년경 한성감옥에서 읽은 논문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승만 청년이 Outlook이라는 잡지에 예일대 총장 Theodore Dwight Woolsey
의 아들로 당시 국제법의 대가인 Theodore Salisbur Woolsey의 논문을 읽었다.
2016년 12월 20일(화) 이승만 포럼에서 특강을 할 때 잠시 소개했다.
평화선은 국제 해양법 전문가인 국부의 혜안에 신성모 공사의 비밀 실무 작품이다.
사진, 1955년 11월 25일 국부 이승만 박사의 해양대학 준공식 참석, 신성모 학장 안내. 유명한 일화가 있다.
UNKRA(UNCTAD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함) 자금으로 해양대학을 신축하기 위해 고문관으로 파견된
미 해군 스미스 대령이 최고의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면서 해양대학 신축 작업을 하는 신성모를 존경하지 않았다.
어느 날 스미스가 "학장은 무슨 해기사 면허장을 가졌어요?"하고 물었다.
신성모가 영국식 고급 영어 발음으로
"I have the Extra(Super) Master License of the British Empire"라고 대답했다.
스미스 대령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Yes(Hi, 두 개의 버전으로 전승) Sir"라면 거수 경례를 했고, 이후 만사 형통이었다.
사진, 해양대학장 시절 집무 모습.
1960년 국부 이승만 박사가 하야한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소천할 정도로 충신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가 상해 임정 초대 대통령 때에는 안창호계열과 공산당 계열이 탄핵을 추진할 때 신채호와 함께 탄핵을
주도했고, 박용만, 신숙 등과 이승만 박사가 윌슨 대통령에게 위임청원을 한 것에 대해 '성토문'을 썼던 반 이승만파였다.
그러나 영국에서 해양 국제법을 연구하면서 이승만 박사를 이해하고, 경외하기 시작했다.
역사의 교훈은 반대자였다가 지지자가 된 인재들은 대부분
충신이 되지만 지지자였다가 반대자가 된 사람들은 대부분 배신 역적이 된다!
1950년 5월 25일 뇌일혈로 동대문 이화병원에 입원, 5월 29일 국부 이승만 박사가
하와이로 요양을 다녀온다는 소식을 듣자 "훗날 역사가 말해 줄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소천했다.
바로 오늘이 그날이다.
그리고 해양대학 학교장으로 고향 의령에서 영결식이 거행되었는데, 스미스 고문관이
헌납한 "한국해양대학장 소창 신성모지묘(韓國海洋大學長 小滄 申星模之墓)"란 묘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