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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말씀은 열매 있는 신앙생활에 대해 은혜를 나누웠습니다. 신앙의 열매를 말할 때 성령의 9가지 열매 말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 자비와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갈5:22-25) 참으로 소중하고 귀한 영적열매입니다.
그런데 이런 신앙의 열매가 꼭 9가지뿐이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욕심이 많으셔서 9가지 열매 외에도 더 많은 열매 맺기를 원하신다고 말씀 했습니다. 요15: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더 열매 맺기를 원하시는 주님”은 기대하십니다. 우리를 향해 무엇보다 “말씀의 열매”를 기대하십니다.
함께 읽은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자세하게 다시 해석해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하기에 더 자세히 깨닫도록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여러번 말씀드렸지만 성경에서 반복된 단어는 중요하다 여기고 밑줄을 긋고 다시 묵상하며 살펴야합니다.
예수님의 사역 중에 핵심가치는 하나님나라입니다. 어떤 말씀을 전하시든지 주님말씀안에는 하나님나라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하나님나라에 대해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는데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14절) 그러므로 씨가 곧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씨에 대해 4가지 형태를 말씀 하셨는데 공통된 단어가 있습니다.
15절 말씀을 들었을 때..... 16절....말씀을 들을 때 17절....말씀으로 인하여 18절....말씀을 듣기는 하되 19절..... 말씀을 막아 20절....... 말씀을 듣고 받아..... 다시 말하면 말씀을 받는 사람들의 마음의 밭이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했습니다(마12:33) 다시 말하면 주님앞에서 내가 신앙생활을 얼마나 했는가 보다 열심히 한 만큼 얼마나 열매가 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4가지 밭 중에 네 번째 말씀의 씨가 좋은 밭에 뿌려져 결실이 분명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본문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30배 60배100배의 풍성한 결실 수치입니다.
그렇습니다. 결실은 축복입니다.........우리가 사업을 하든 사역을 하든, 농사를 짓든 기대치 이상을 얻으면 성공입니다. 더욱이 30배 60배 100배는 대단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이런 결실을 얻기 전 죄를 지은 인간은 어떤 상태였습니까? 마치 뿌리 뽑힌 나무와 같았습니다.
어제 아침 비엔나레 공원을 산책하면서 보았습니다. 최고한 30-40년 된 아름드리 편백나무 한 그루가 장마철 흙물에 훱쓸려 덩그러니 누워있는데 뿌리가 다 보이다라구요 겉으로 들어난 나무가 물기도 있고 나뭇잎도 붙어있지만 떨어져 나가면 생명이 없습니다. 그런 인간의 상태가 과거에 저와 여러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접속이 끊어진 백성은 생명이 그 안에 없고 허물과 죄로 죽어 있기에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단절인데 어찌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등장한 위대한 베드로는 예수님 만나기 전 고기 잡이 달인으로 바다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습니다. 어느 날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노련한 방법으로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열매가 없어요 베드로처럼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세상적 방법으로 물속을 다 아는 것처럼 이곳저곳 그물을 쉴새 없이 던졌습니다. 그렇게 던졌는데도 고기가 그물에 없듯이 우리 인생도 빈손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져본 솔로몬이 이렇게 말합니다. 전도서2:11......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라고 말합니다.
솔로몬은 자기의 인생의 모든 수고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런 모습이 길가나 돌밭이나 가기떨기에 씨앗처럼 우리인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열매가 있는 것 같지만 돌아보면 다 헛수고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밭에서 나타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은 헛수고와 죄악에서 벗어나 완전한 회복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참 생명과 연결되면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더 많이 맺습니다. ..... 30배 60배 100배로 열매를 맺는데 이것은 말씀의 능력으로 나타난 결과입니다.
에스겔37장에 에스겔 선지자가 보았던 환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이끌고 골짜기로 갑니다. 그곳에는 마른 뼈들이 가득했습니다. 해골 골짜기였습니다. 하나님이 물으셨습니다.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냐? 말라버린 마른 뼈들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에스겔은 말하기를 주께서 아십니다.(겔37:3) 절망한 이 백성을 주님이 아시기에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 순간 하나님이 말씀을 대언하자 뼈들이 척척 들어맞습니다. 힘줄이 생기고 살이 붙고 가죽이 덮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한 가지 ‘생기’가 아직 없습니다. 다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불어와서 살아나게 하라! 말씀하시니까 생기가 마른뼈에 들어가더니 살아서 큰 군대가 된 것 입니다.(겔37:10)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면 어떤 외부적인 장애와 방해물도 뚫고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단단한 아스팔트 바닥을 뚫고 생명의 풀이 파릇파릇 올라오듯이 말씀으로 채워진 생명력은 어느 누구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관건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하면 좋은 땅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씨는 틀림이 없는데 문제는 땅입니다.
우리 모두가 좋은 땅이 되려고 하면 반드시 세 종류의 밭을 피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길가 밭입니다. 15절......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말씀을 듣는 순간 완악한 마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혀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무관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자기의 것으로 꽉 차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돌짝 밭입니다. 16-17절......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돌짝 밭은 뿌리가 얕습니다. 말씀을 받지만 가볍게 받고 말씀 깊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일에 분주하기 때문에 말씀에 대한 진지함이 없습니다.
세 번째는 가시떨기 밭입니다. 18-19절....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신앙생활을 잘하여 열매를 맺지만 여전히 세상과 연결된 끈을 끊지 못합니다. 세상미련이 많습니다. 생명의 씨를 뿌렸지만 꽃도 피고 열매도 맺지만 그만 시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마지막 20절.....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내 것으로 소화하고 아멘으로 받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라면 사랑하고 봉사하라면 봉사하고 섬기라면 두말하지 않고 섬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4가지 말씀을 받는 마음의 밭을 통해 무엇을 깨닫게 하여 주고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누구의 설교를 들었느냐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마음으로 말씀을 들었느냐가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13장 2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라고 말씀합니다.
무엇보다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은 머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을 말합니다. 깨달음은 심령 더욱 깊은 곳을 건드립니다. 단순히 지적인 작용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평소에‘죄’에 대한 인식은 있었지만 심각한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는 가운데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에 있는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오면 내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면 짐승과 같다고 했습니다(시49:20)..... 깨달음이 없으면 사는 대로 삽니다...... 겉으로 착하고 좋은 사람처럼 보여도 진리에 대해서 거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착함은 굉장히 위선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말씀을 깨닫고 은혜를 받았다면 말씀을 따라 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은 어렵습니다. 다 지키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말씀을 따라 살고 싶어집니다.
결실은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삶을 살아갈 때 서서히 맺게 됩니다.
물질주의가 가득찬 세상을 보다가 넘어진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모습을 보며 가슴을 치고 통곡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이면 충분히 세상을 이기고 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면 충분합니다....... 돈에 생명을 걸지 말고 말씀에 생명을 거는 사람입니다.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말씀합니다.
베드로에 대해 서두에 말씀 들었지만 예수님은 낙심한 베드로에게 깊은대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셨어요 베드로는 생소한 말씀이지만 말씀을 의지하여 그물을 내려 순종했더니 그물이 찟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나는 죄인입니다. 고백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결과입니다.
어떤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자기나라에 찾아오는 외국인에게 세관원이 이렇게 묻는다고 합니다. "혹 ,총이나 마약이나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 신고하셨다가 돌아가실 때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것들은 너무 위험한 물건들이라서 우리 나라에서는 개인이 소지할 수 없습니다" 총이나 마약이나 성경은 대단히 위험한 물건입니다. 그것들은 '죽이는' 일을 합니다. 총은 사람의 육신을 죽입니다. 마약은 사람의 정신을 죽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욕심을 죽이고, 자아를 죽입니다. 그렇게 주의사항을 주었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총이나 마약이나 성경의 원래의 목적은 죽이는게 아니라 '살리는 데' 목적이 있는 물건들입니다. 총은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도구이고, 응급환자를 살리는 일엔 아주 소량의 마약이 필요합니다........ 그중에 영혼을 살리는 성경은 죄로 인하여 죽었던 사람에게 예수님 안에서 새 생명을 얻게 하여 더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서울에 어떤 큰 교회는 주일 예배를 마치면 사찰 집사님이 라면상자를 들고 본당 안을 돌아다니며 놓고 간 성경을 한 주일에 두 상자씩이나 수거를 한답니다. 이상하게도 이 귀중한 성경책에 사람들은 자기의 이름을 써 넣지 않고 잃어버려도 찾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그렇지요? 성경이 너무 흔해서 일까요? 핸드폰을 구입하면 가게주인이 묻습니다. 잃어버릴 수 있으니 보험을 들어놓으면 좋습니다. 말합니다. 내가 보는 성경책 푸대접하다가는 나중에 성경을 통해 푸대접 당 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좋은 밭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성도여러분!! 예배의 핵심인 말씀을 받고 계시는데 오늘은 무슨 말씀을 하실까? 기대하며 교회에 나오셨지요? 왜 그런 말씀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오셨습니까? 세상속에는 답이없어요 그리고 세상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녹녹하지 않기에 말씀을 받아 위로 받지 않으면 세상을 이길 수 없다는 그런 마음으로 교회에 나오지요 그런 성도는 마음이 좋은 밭이 되었기에 30 60 100배의 결실로 주님은 허락하실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그리스도인은 말씀과의 관계에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말씀을 가까이하는 것이 주님께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말씀이신 하나님과 가까워지면 모든 것이 회복됩니다....... 회복의 절정이 일어날 때 열매가 자연스럽게 30배 60배 100의 결실이 말씀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믿고 말씀에 우선 순위에 두고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