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9일, 서울 지하철 6호선 기관사 황아무개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가족에게 출근인사를 하고 집을 나선 황 씨는 회사에 가는 대신 아파트옥상에서 몸을 던졌다. 황 씨는 삶을 마감하기 얼마 전 가족에게는 "회사 가는 것이 힘들다"고, 동료들에게는 "차에 타는 것이 힘겹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가족과 동료들은 '기관사를 천직으로 알고 15년간 성실히 일한 사람'으로 황 씨를 기억한다. 그런 황 씨가 변한 건 지난해 10월 사고를 겪으면서다. 한 승객의 가방이 황 씨가 운행하는 열차의 출입문에 낀 사고였다. 다행히 승객이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황 씨는 이 일로 회사에서 심하게 질책을 당했다. 이를 계기로 황 씨는 이전과 달리 강박증과 심한 우울증 증세를 보이고 공황장애로 힘들어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유족과 서울도시철도공사 노동조합은 이번 비극이 황 씨 개인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기관사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운행해야 하는 구조, 그리고 "기관사에게 모든 책임을 몰아 매도하는 조직 문화"가 비극의 배후에 있다는 주장이다.
수많은 기관사가 생전의 황 기관사와 마찬가지로 과도한 압박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런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비극은 계속될 것이라고 이들은 경고한다. 황 씨처럼 공황장애로 괴로워하다 스스로 삶을 마감한 기관사가 2012년 한 해에만 3명이나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이는 지하철 기관사의 노동 조건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수많은 시민의 안전과도 직결된 사안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민의 발'을 안전 운행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기관사들의 고충에 눈감는다면,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들도 언제든 위험에 빠질 수 있다.
<프레시안>은 지하 터널을 누비는 지하철 기관사들의 현실을 짚는 기획을 마련했다. 그 첫 번째는 고(故) 황 기관사가 일한 지하철 6호선의 운전실 동승 취재다. 취재에 협조해준 기관사가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기에 기관사의 실명, 취재 당일 운행 노선 등은 밝히지 않는다. <편집자>
"기관사는 사람이 치여 죽은 자리를 다 안다"
"기관사는요, 사람이 치여 죽은 자리를 다 알아요. 매일 그 자리를 지나가는 거죠. 방금 OO역 지났는데, 여기에서도 사고가 있었죠. 기관사가 운전실 밖으로 나갔는데, 선배(기관사)가 치였어요. 돌아가셨죠. 이를테면 이 역에 잊기 힘든 기억이 생긴 거예요."
좁고 검은 터널이 이어졌다. 서울시민 수백만 명이 매일 이 터널을 달린다. 퇴근길 6호선의 운행을 책임지는 기관사 박철민 씨(가명)가 '마스콘'(주제어기, Master Controller)을 쥔 채 기자에게 말했다. 박 씨의 가슴에는 검은색 '근조' 리본이 달려 있었다. 그의 얼굴에 푸르고 흰 터널 벽 형광등이 환등기 영상처럼 지나갔다.
낮인지 밤인지, 시계를 보지 않고서는 모른다고 한다. 새벽 '주박지'에서 첫차가 나갈 때, 사람들이 우산을 들고 타면 '지금 비가 오는구나' 생각한다고 박 씨는 설명했다. 박 씨는 이날 오후 5시쯤 출근했다. '야간 근무'다. 기자는 6호선의 한 역에서 박 씨가 운행하는 지하철 운전실에 동승했다. 직장인들이 잠시나마 지하철 승객이 되는 퇴근 시간대였다.
"외로울 것 같다고요? 그런 생각은 하면 안 돼요.(웃음) 노선이 길잖아요. 처음에는 저도 앉아서 쓸데없이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그런 생각, 안 하려고 합니다."
열차가 눈앞에 뻗어 있는 좁고 검은 구멍을 가르면 쉭쉭 소리가 터널 벽과 차체 사이를 빠져나와 귀를 때렸다. 선로 이음새 위를 덜컹거리고 지나갈 때마다 차체는 카랑카랑 소리를 내며 파르르 떨었다. 운전실은 한 평도 안 되는 좁은 공간(2.68㎡, 약 0.81평). 전조등도 켜지 않고, 터널 벽 형광등과 붉고 푸른계기판 불빛에 의존하며 박 씨는 능숙하게 고갯짓을 하고 손짓을 했다.
출발한 뒤 제한 속도를 지키며 3~4분 남짓 달리자 또 '목적지'가 나왔다. 40센티미터 정도만 벗어나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1초, 1센티미터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열차를 부린 박 씨는 출입문 개폐 버튼에 손을 올리고, 오른쪽 전방에 붙어 있는 화면 속 뒤로 길게 뻗은 스크린도어 주변을 꼼꼼히 응시했다. "출입문 닫습니다." 방송이 나간 후 박 씨는 '지적 확인'을 했다. 출입문을 닫고, 전방 신호를 손으로 지적해가며 일일이 확인한 후 자동 운행 버튼을 눌렀다.
"예전에는 터널에 형광등도 잘 안 켰어요. 하나 건너 하나 켜서 지금보다 더 어두웠죠. 절전이 목적이라고도 하고…. 5호선 같은 경우는 한강도 땅 밑으로 가요. 해저터널인데, 지날 때마다 불안감이 생기죠. 군데군데 금 간 곳도 보여요. 농담으로 기관사들은 '한강 밑을 가다가 터널이 무너지면 다 죽는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해요. 시절이 좋을 때는 지하철에 승무원이 네 명씩 탔대요. 앞 운전실에 두 명, 뒤 운전실에 두 명. 그런데 서울도시철도는 태어날 때부터 1인 승무제였어요. 운전실에서 단 한 명이 전철을 움직여요. 기관사 한 명이 출발지부터 종착역까지 운행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거죠."
▲ 7호선 지하철 운전실에 앉아 있는 기관사(자료 사진) ⓒ연합뉴스
사람 잡는 '1인 승무제'
1990년 6월 서울 지하철 5호선이 착공된 후 1994년 1월 15일, 서울메트로(1·2·3·4호선 운행)와 별도로 서울특별시도시철도공사가 탄생했다. 박 씨는 "공사가 왜 두 개인지 잘 이해가 안 간다. 하는 일은 거의 똑같다"고 말했다. 새로 탄생한 도시철도공사는 처음부터 '1인 승무제'를 채택했다. '2인 승무제'를 고수하고 있는 서울메트로와 달리 한 명의 기관사가 모든 돌발 상황에 대응해야 하는 시스템이다. 자동화기술의 발전과 같은 이유들이 붙었지만,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인건비를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로 이해했다. 그러나 이는 기관사 한 명에게 극한의 스트레스를 집중시키는 근무 방식이다.
크고 작은 고장은 일상다반사다. 간혹 승객이 문에 끼이거나 하는 문제도 발생한다. 그런 상황으로 연착이 되거나 승객들의 '항의'가 들어오면, 그 책임은 모두 기관사가 져야 한다. 그렇게 되면 기관사의 근무 평가는 악화되고, 기관사가 속한 조의 성적도 낮아진다. 각종 불이익을 감내해야 한다. 기관사들은 자신들 중 30% 정도가 '사상 사고'를 경험한다고 한다. 이 경우 근무 평점도 평점이지만, 기관사 본인은 극도의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박 씨가 운행하는 전철은 어두운 터널 속을 1시간 정도 달려 종착역에 도착했다. 모든 승객이 내렸다. 복잡한 신호 체계를 몸으로 체득한 듯 보이는 박 씨는 기지로 향하는 전철을 능숙하게 다뤘다. 기지는 종착역에서 약 10분 거리에 있다. 기지에서 근무 관련 서류를 작성한 후 박 씨가 캔 커피를 뽑아서 마신 시간은 저녁 8시 20분 무렵. 해가 떨어진 지는 오래이고, 바람은 유달리 차가웠다.
종착역에서 다음 운행 열차를 받기로 한 시각은 오후 9시 10분. 50분 정도 시간이 남았지만, 기지에서 종착역까지 승무원 전용 '운행차'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 15분 정도를 빼면 종착역에서 출발하는 기차 운전대를 잡기 전에 30~40분 정도 쉬는 셈이다. 박 씨는 가슴에 검은색 '근조' 리본을 단 동료 기관사들 몇 명과 안부 인사를 나눴다.
"며칠 전 일어난 회기역 사고(1월 24일 발생) 얘기 들었어요?" "네" "뉴스 보고 화가 났어요. 미친 것 아냐? 사람이 치여 죽었는데, 그 기관사를 구로역까지 운행시켰다는 것 아녜요…. '빠릿빠릿하게' 했으면 청량리쯤에서 바꿔줄 수도 있었을 텐데."
대화가 이어지는 와중에도 박 씨는 '승객들이 불편하더라도, 당장 운행을 중단시키고 다른 기관사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당시 회기역 플랫폼에서 청량리역 방면으로 150미터 떨어진 선로에 웬 남자가 앉아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기관사는 사고를 낸 후, 시신이 수습되자 곧바로 운행에 투입됐다고 했다. 정신적 충격에 빠진 기관사에게 사고 후 1시간 동안 운행을 맡긴 것이다. 박 씨는 "한번 사고가 나면 기관사들은 선로나 플랫폼에서 뭔가가 튀어나올 것 같은 착시에 빠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박 씨는 말을 끊고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플랫폼에 박 씨와 앉아 얘기를 나눴다. 어두운 운전실에 앉아 빨갛고 파란 계기판을 보며 운행을 할 때보다는 그의 표정이 밝아 보였다. "어두운 곳에서 소음에 갇혀 장시간 일하는 직업이다 보니 '징크스' 같은 것도 있을 것 같다"고 질문을 던지자 박 씨가 입을 열었다.
"주박지라고 있어요. 첫차가 양 끝 기지에서 출발하면 중간에 있는 역에서는 한 시간쯤 후에 첫차를 받잖아요. 그래서 중간에서 출발하는 첫차들이 있어요. 주박 근무자들은 터널에서 잠을 자고 새벽에 첫차를 몰아야 하죠. 기차가 출발하는 곳이 주박지예요. 주박지에는 도저히 뭐가 있을 것 같지 않은 터널 구석에 작은 문이 있고, 침실이 있어요. 주박 근무는 보통 저녁 9~10시쯤 시작하는데, 새벽 1시쯤 막차 운행이 끝나면 그날 주박 근무 기관사들은 주박지로 걸어 들어가 잠을 청하죠. (새벽) 4시 반이 되면 일어나서 첫차를 몰게 되는데, 3시간 정도 쉬는 시간이 있잖아요? (하지만) 자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저도 주박 근무 들어가면 무서워서 잠을 안 자요. 잠깐 피곤해서 눈을 붙이게 되더라도 불은 절대 끄지 않아요. 주박지가, 6호선 라인만 따지면 11개 있죠. 야근하는 인원이 40명 정도라고 하면 그중 11명은 주박지로 들어가는 거예요. 주박지에서 귀신 봤다는 사람도 있고 거기에서 자다가 가위에 눌리는 사람도 있어요. 주박지 근무만 오면 휴가를 내는 사람도 많죠. 새벽 도시의 지하 터널에 있는 조그만 방에 들어가 침대에 앉아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주박지 안에서 불을 절대 끄지 않는 것, 그게 제 '징크스'라면 '징크스'죠."
▲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들. ⓒ연합뉴스
"기관사 동료들의 연이은 자살…이젠 나도 나를 못 믿겠다"
열차 시간이 가까워지자 박 씨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차를 타기 전에는 무조건 화장실에 갑니다. 뭐가 안 나와도 갑니다. 버릇이에요." 그는 아침을 거르는 게 습관이 됐다고 덧붙였다.
"제일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운행 중에 배가 아플 때 어떻게 하느냐는 것인데, 소변기를 들고 탄다든지 하는 얘기들도 있지만 운행 중에 배가 아프면 고통보다도 공포심이 들어요. 땀에 흠뻑 젖어서 두 시간 동안 화장실도 못 간 채 참고 운행을 마쳤던 기관사 얘기도 있죠."
열차가 도착했다. 시간은 정확했다. 회차하는 차량이라 기지에 들어가지 않고 곧바로 박 씨가 교대해 운행하게 된다. 전철에 올라타니, 미처 못 내린 할아버지 한 분이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었다. 박 씨는 "조금만 기다리세요. 조금 있다가 출발하기 전에 반대편 문을 열어드릴 테니 내리세요"라고 친절히 일러두었다.
박 씨는 마치 터널 속의 터널 같은 지하철의 긴 객차 속을 뚫고 걸어가 반대편 운전실에 들어간 뒤 문을 걸어 잠갔다. 새로 운행을 시작해야 한다. 비상 상황일 때 마이크가 작동하지 않으면 곤란하기 때문에 마이크 테스트와 안내 방송 테스트를 하느라 창문을 잠깐 열었다. 창밖에 귀를 기울이던 그는 문을 닫았다. 1분 후면 출발한다. 출발하기 전, "운전할 때는 이런 말을 하면 안 된다"며 박 씨가 '우울한 얘기'를 마지막으로 꺼냈다.
"예전에 한 기관사 선배가 이런 얘길 입버릇처럼 했어요. '야 니네 버튼 누르고 다니다가 그냥 가는 수가 있다.' 농담처럼 하는 얘기죠. 그 선배가 어느 날 휴가를 내더니 고향 여수 바닷가에 가서 투신 자살을 했어요. (1월 19일 세상을 떠난) 황아무개 기관사는 애가 셋이에요. 큰애가 아홉 살, 둘째가 네 살, 막내가 한 살이에요. 그런데, 자살을…. 작년에 스스로 목숨을 던졌던 이아무개 기관사는 원래 기관사 출신도 아니에요. 전직을 해서 온 사람이에요. 기관사 중 좀 문제가 있는 사람은 다른 곳으로 전직을 시키는데, 기관사가 승무직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면, 다른 직군에서 기관사로 또 와야 하잖아요. 그렇게 온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도 자살을 하는 것을 보고 '야, 전직한 사람도 그러는구나' 하고 충격을 받았죠.
황 씨가 정말 그런 사람이 아닌데…, 자살을 하는 것을 보고, 다른 동료 기관사가 혹시나 해서 병원에 가봤대요. 전혀 몰랐는데, 원래 자기 몸은 자기가 알잖아요, 그 기관사, 병원에서 공황장애 진단 받고 바로 입원을 했어요.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정신장애로 입원한 상황. 이해하세요? 그런 걸 겪으니, 이젠 나도 나를 못 믿겠어요. 내 내면에 뭐가 있는지…. 내가 모르는 다른 영역이 있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