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의 시인들 | 정진경
늘 첫 번째인 문장 외
그녀가 사는 세상에서 시가 사라졌다 시인이 존재하지 않는 그 세상에서 비평가는 백수로 살고 있다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논평이 무의미해진 문장들이 책 속에서 순백의 몸으로 빛나고 있는, 그녀가 여섯 번이나 완독한 소설은 이나모리 가즈오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다
세상과 부딪치는 순간의 울음만 가득한
치매에 걸린 몸, 그녀는 진공관이다
한 문장을 읽으면 오히려 의미가 삭제되는, 그녀에게 문장이란 의미이면서 의미가 사라지는 여백이다, ‘인간의 삶 속에는 철학적 진리가 있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을 여섯 번이나 읽었지만 책장만 넘기면 지워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의 문장들은 일곱 번째 미로로 들어선다
그녀에게는 늘 첫 번째인 문장,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의미이면서 무의미한 진공관의 몸, 그녀에게는 전달되지 못하고 통통통 튀고 있는 공명음, 어떻게 살아야 할지의 철학적 진리가 또다시 첫걸음을 딛는다
--------------------------------------
유연한 등뼈의 생존 전략
조선 창업을 찬송하려고 지은 용비어천가
고서古書가 변형된 형태, 말(言)이 유연한 착지를 한다
누군가를 찬송하는 각종 언론의 말들 유체에는
훈민정음 정신은 없고, 중국 고사로 의미를 전달하던 노련한 언술만 살아 있다
착지에 능한 고양이 본능을 닮은 그들
대중을 유연하게 사냥하는 말은 누구를 위한 질주일까
180〬 회전을 하며 품격 있는 자세로 착지를 하는
그들은
230개의 척추뼈로 진화해오기까지의 고양이 유변학
뼈들을 쪼개며 살아온 시간 고행을 알고 있을까
먹이를 주는 주인에게조차 도도한 고양이 태도가
훈민정음의 정신인 것을
사랑스러운 행동과 자태로 사람을 매혹시키는 비법이
훈민정음 자체의 우수성인 것을
그들은 간파하고 흉내를 내는 것일까
180〬 로 회전하는 유연한 등뼈의 생존 전략
백성을 위한 글로 조선의 창업을 찬송하던 용비어천가가
백성이 없는 말로 누군가를 찬송하는 형태로 변이되고 있다
--------------------------------
정진경
2000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사이버 페미니스트』, 『잔혹한 연애사』, 『여우비 간다』 등이 있다. 평론집 『가면적 세계와의 불화』와 연구서로 『후각의 시학』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