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1: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 '남은 자')로서의 특전을 누리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이지 자신들의 행위로써 된 것이 아니다. 본절에서 바울이 이러한 사실을 밝히고 있는 이유는 당시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남은 자 사상을 오해하여 율법주의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 만일 인간편에서 한 행위가 하나님의 '택하심'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면 그것은 은혜가 될 수 없다. 사실상 율법적 행위를 근거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반 복음적인 사상이 아닐 수 없다. '되지 못하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케티 기네타이'는 '더이상...이 되지 않는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즉 율법적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면 그것은 은혜가 '되지 못한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무조건적이다. 이 무조건적인 은혜를 사람들이 믿음으로써 그 은혜에 응답할 때 택하심을 받을 수 있었으며 바로 그러한 자들이 본장 5절에서 나오는 남은 자들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스스로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는 민족적으로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
바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갔는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 그후 이스라엘 가운데 소수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택하심을 받았다고 말함으로써 그 질문을 부정으로 답했다 그리고 교회의 핵으로서 이스라엘 가운데 소수의 '남은 자'가 있음을 언급했다.
[롬 11:7]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그런즉 어떠하뇨 - 지금까지의 논리 전개의 핵심이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린게 아니라 택하심을 입은 남은 자가 있다는 데에 있다. 이제는 그 남은 자들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피고자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선택된 소수, 즉 '남은 자'에 관하여 말한 후(1-6절), 이제 대상을 바꾸어 이스라엘의 완악한 다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행위가 수단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로는 구원이 불가능했다. 구하는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제테이'는 현재 시제로 기본적으로 계속 반복되는 상태나 동작을 의미하므로 이스라엘의 구하고자 하는 태도가 반복적으로 꾸준하게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본문에서 독특한 용법이 사용되었다. 같은 문장 속에 나오는 또 다른 동사들'와 '완악하여졌다'이 시점상 나중임에도 불구하고 과거형으로 표현된 것이다. 따라서 '구하는'의 헬라어 '에피제테이'는 역사적 현재 용법으로 역사적인 사실을 생생하게 구사하기 위한 표현법이다. 결국 바울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일반적으로 '행위를 통한 칭의'를 매우 열정적이고 반복적으로 추구했음을 보여준다.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 본문의 '완악하여졌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포로데산'은 '포로오''두꺼운 가죽으로 가리다.의 단순과거 수동태로 어감이 강하다. 이에는 인간 본래의 감성이나 도덕성의 근원을 상실했다는 뜻이 포함된다. 결국 그들은 오성(悟性)이나, 참가과 거짓, 선과 악을 분간하는 양심의 기능 마저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고자 노력해왔어도 결국은 수포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의롭게 되어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본절을 통해 바울은 보여주고 있다. 택하심을 받지 못한 '남은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자들인데 그 결과로 그들은 완악하게 되었다.
[롬 11: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기록된 바...함과 같으니라 - 바울은 모세와 이사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강퍅했던 것과같이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시대에도 그 백성이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기록된 바'에 해당하는 구약성경은 신 29:4과 사 29:10에 해당하며 좀더 정확하게는 누가가 사도행전에 인용한 것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구절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나타내는 본 구절의 특성으로 봐서 유대인의 상태는 도무지 구원 섭리와는 무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대하게 하고, 하나님의 구원 섭리가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명백히 한다. 오늘날까지 - 이 말은 신 29:3에 '아드 하욤 하제'라고 되어있는데, 70인역은 이를 '헤오스 테스 헤메라 타우테스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모두 '이날까지'라는 의미인데,
바울은 '이날' '오늘날'로 변형시켜 인용하였다. 이처럼 바울이 표현을 변형시킨 이유는 말하고자 하는 것의 주안점이 과거 구약 시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울 사도 당시에 있기 때문이다. 혼미한 심령 - '혼미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뉴세오스'는 '찌르다'라는 의미를 가진 '카타뉴소'에서 나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너무 많은 자극으로 말미암아 감각이 무디어진 마비 상태를 말하고, 무의식 상태에 있는 것처럼 어리둥절해진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있었지만 즉 이 말의 참 의미는 그 말씀으로 많이 자극을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무감각해졌다는 것이다.
보지 못할 눈 - '눈'이란 육체적인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으로 분별력을 의미한다. 눈은 우리 몸의 감각 기관 중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사람들은 눈으로 외부 세계의 거의 모든 부분을 인지한다. 그러므로 눈이 멀었다는 말은 진리를 분별하는 영적인 능력이 결정적으로 상실됐다는 말이다. 듣지 못할 귀 - 바울은 믿음이란 들음에서 생겨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들음이란 믿음에 이르는 통로이며 인간에게 허락된 유일한 수단이다. 하나님이...주셨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도켄 호 데오스'는 유대인들의 심령이 혼미해지고 눈과 귀가 멀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그렇게 된 데에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는 것이다.
[롬 11:9]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또 다윗이 가로되 - 본절은 시 69:22의 인용이다. 사도 바울은 어순이나 표현에는 약간의 변형을 취했으나 그 의미는 변질시키지 않았다. 바울은 '그들의 목전에'라는 구절은 빼고 '덫으로'(카이 에이스 데란)라는 말을 삽입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말을 '올무'(에이스 파기다)라는 말 뒤에 놓음으로써 '올무'의 뜻을 보다 분명하게 강조시키고 있다.
밥상 - 밥(음식)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이다. '밥상' 위에 있는 음식을 먹음으로 연명해 나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밥상'은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밥상'은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밥상'은 단순한 '밥상'이 아니라 '그들의 밥상'이다. 즉 유대인들에게 베풀어진 '밥상'이다.
따라서 이 '밥상'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베풀어 주신 '생명의 밥상' 곧 구원을 상징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 '밥상'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으로서 유대인의 땅 나사렛에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에게 베풀어진 이 '밥상'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총인 '밥상' 곧 예수 그리스도가 오히려 그들에게 올무가 되고 '거치는 것'이 되었다.
올무와 덫과 - '올무'의 헬라어 '에이스 파기다'는 새나 짐승을 잡는 올가미를 나타내는 고대 단어이다. '덫'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 데란'은 야생 짐승의 사냥을 나타내는 고대 단어였으나 후에는 덫을 뜻하게 되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70인역과 비교하면 '에이스 데란'이 첨가되었다. 바울은 의도적으로 비슷한 단어를 반복적으로 열거함으로써 그 누구도 그 올무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 '거치는 것'의 헬라어 '에이스 스칸달론'은 덫 혹은 올무의 의미를 갖는다. 또한 이 단어는 앞 구절의 두 단어와 상호 보완적이며 서로를 설명하는 말로서 이 말들이 뜻하는 것은 모든 유혹과 멸망의 방법을 의미하고 있다. 즉 유대인들의 파멸은 피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여 말한 것이다.
한편 '보응'은 70인역에는 없는 말이지만 중요한 맥락은 놓치지 않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직접 벌하셨다는 뜻과 유대인들의 어리석고 강퍅해진 그대로 하나님께서 버려 두셨으므로 버려둔 그 자체가 보응이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되게 하옵소서' 헬라어 문법에 있어서 명령형이지만, 하나님께 간구하는 투이다.
이 간구는 '보응' 뿐만 아니라 앞에 서술된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에도 연결된다. 바울이 이 글을 인용한 것은 8절의 내용 즉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한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는 말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다.
[롬 11:10]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 '저희 눈은'이란 말은 8절의 '보지 못할 눈'을 연상케 하는데, 8절에서와는 달리 귀와 심령이 빠지고 '눈'만이 언급되고 있다. 본문에서 바울은 시 69:23을 그대로 인용했다. 8절에서 '눈'과 '귀'를 열거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눈'만을 이야기한 것은 눈이 몸에 있어서 그만큼 중요한 기관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눈은 몸의 등불이며 눈이 나쁘면 온 뭄이 어두울 것이라고 눈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흐려'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코티스데 토산'은 '스코티조'('어둡게 하다')의 단순과거 수동태 명령법으로 심각하게 저주하는 표현이다 여기에서의 눈은 육체의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능력을 말한다.
바울은 이러한 시편 기자의 표현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이 받고 있는 현재적 심판에 적용했다. 이처럼 영적으로 어두운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오히려 자연양심)을 가진 이방인 보다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더 이해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도 깨달을 수 없게 되었으니, 그것은 곧 최대의 불행이었다.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 등이 굽는 것은 노예들이 상전 앞에서 두려움을 갖게 될 때 취하게 되는 행동이다. 이스라엘이 완악해져서 복음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한 이러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율법의 종들이었으며 율법 선생 곧 랍비들에게 얽매어 있는 노예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율법의 하나님 앞에서 자유함이 없이 두려움에 거하는 존재들이었다. 이와 같은 징벌은 그들이 메시야를 거부했기 때문에 받는 피할 수 없는 형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