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간행된 족보
첫 번째로는 1401년에 작성된 해주 오씨의 족보를 들 수 있고,
두 번째로는 1423년의 문화 류씨의 영낙보가 있고,
세 번째로는 1454년에 만든 남양 홍씨(당홍)의 경태 갑술보가 있고,
네 번째로는 1476년의 안동 권씨 성화보가 있고,
다섯 번째로는 1478년의 여흥 민씨보가 있다.
이 중에 현존하는 족보는 오직 안동 권씨의 성화보가 전하고 있어
당시의 족보체제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체계적인 족보 형태의 최초 족보
1476년(조선 성종7년)의『안동 권씨 성화보(安東權氏 成化譜)』가
체계적인 족보 형태를 갖춘 최초의 족보이다.
이후 1565년(조선 명종20년)에는
『문화유씨 가정보(文化柳氏 嘉靖譜)』가 혈족 전부를 망라하여
간행되면서 이를 표본으로 하여
명문세족에서 앞을 다투어 족보를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7세기 이후 여러 가문으로부터 족보가 쏟아져 나오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족보가 이 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 족보의 충실한 기록과 미화
조선 초기에 간행된 족보의 대부분은
족보간행을 위해 초안을 하고 관계 자료를 충실히 보완한 뒤
간행에 착수하여 내용에 하자가 없었다.
그러나 이후의 족보들은 초안이나 관계 자료의 검토, 고증도 없이
자의적으로 기록하여 간행된 것이 많았다.
그리하여 자의적인 수식이 가하여 졌음은 물론이며 조상을 극단적으로 미화하고,
선대의 벼슬을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조작하고,
심지어 명문 집안의 족보를 사고 팔거나 훔치는 경우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대주의 사상에 젖어
시조의 유래를 중국에 두어
기자(기원전 1122년 우리나라에 왔다고 함)를 따라 우리나라에 왔다고 하거나,
중국의 인물을 고증도 없이 조상이라고 하는 식으로 족보를 꾸미기도 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중화사상에 물들은 일반적인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며
족보를 간행함으로써 자신의 가문의 격을 높이려는 마음에서 야기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