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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판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정파들의 고성과 말 싸움은 계속되고 거짓의 亂場은 지속된다.
연유는 인간의 패거리 습성과 정치적,재물적 욕망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인간은 결코 충고(역사적 경험)
나 교육으로 변하지 않는다.생긴대로 유전자 대로 살기 마련이다.그 유전자는 태생적인 것도 있지만,오랜
역사와 함께한 사회적 유전자도 합류한다.따라서 인간이 인간과 사회적 관계를 이루며 살면서도 인간들에
게 큰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다.인간들이 인위적으로 형성한 집단도 이성,도덕,윤리 보다 감정,이권(재물)에
따라 수시로 입장이 바뀐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고,현실의 한국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다.
현재의 지구촌 인류는 어느곳이든 돈을 따라 춤을 춘다.정권의 주체가 바뀌었다고 前정권의 훌륭한 정책조
차 지우려고 열정적으로 억지를 부리는 것도 自派의 이익 챙기기 아니겠나.어제까지 이것이 옳다고 성원했
던 수많은 정치인과 인사들이 오늘은 저것이 옳다고 안면을 바꾸며 억지를 쓰는 현실이 있으니 얼마나 웃기
는 세상인가?이것은 그 스스로 영혼이 없다고 자백하는 것 아닌가?이러고도 도덕,윤리,인성을 말하면서 교
육과 성실한 인재육성을 말할수 있을까? 미래가 걱정된다.
2, 정조 24년(1800) 6월 28일 건강했던 정조가 갑자기 죽는다.누구에 의한 독살이라는 말도 있으나 그건 아
무도 모른다.그러자 11살의 순조가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였다.성인이 안된 순조이기에 정조가 죽은 다
음날 영조비였던 정순왕후(경주 김한구의 딸)가 수렴청정의 권한을 부여 받았다.정순왕후는 즉각 노론벽파
거두인 沈煥之를 영의정에,李時秀를 좌의정에,徐龍輔를 우의정에 앉혔다.그런 다음 정권안보 차원에서 자신
의 친정 식구인 '金觀柱,金日柱,김용주,김노충' 등을 정계에 포진시켰다.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들은 우선정조
가 무력 친위대로 설치 활용한 '장용영 약화' 작업에 착수했다.보수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개혁과 혁신을
싫어한다.지금 이대로가 따뜻하고 좋기 때문이다.장용영은 노론시파의 군사적 기반이라 벽파의 정권을 공고
히 할려면 반드시 장용영을 無力化 해야만 했다.그러나 당시 장용영은 시파의 거두 金祖淳(순조비의 父)계열
의 수중에 있어 혁파가 쉽지 않았다.아무튼 노론 벽파들은 남인과 시파들의 본부였던 文의 규장각과 武의 장
용영을 없에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즉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前 정권의 허브부터 허물고자 했던 것이다.
3, 벽파와 정순왕후는 정조의 국상에 따른 경비는 물론 호조의 재정과 노비들의 혁파로 발생한 재정손실을
장용영에게 부담케하여 그들의 기반을 일단 약화시킨 다음,순조 2년(1802년) 1월에 장용영을 없에 버렸다.
노론벽파의 핵심 계열인 경주 김씨(공홍파)와 시파의 거두 홍봉한 일파 사이는 영조 말부터 정치적 갈등이
심했다.여기에 南人들 마저 채제공 중심으로 時派에 가담함으로서 벽파의 정치적 부담은 가중 되었다.이에
노론벽파는 우선 정치적 기반이 약한 남인과 시파의 제거에 골몰했고,정순왕후 수렴청정의 때를 손꼽아 기
다렸다 시파에 대한 공격 포문을 열었다.이때 시파 공격의 선봉장으로 나선 이가 벽파의 거두 심환지 였다.
여기서 노론벽파들과 심환지는 남인들의 천주교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다.유교국가 강상과 다른 이단성
을 구실로 공격을 시작하자 천주교도가 많은 남인들과 시파의 입장에서는 실로 치명적이 아닐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벽파의 의뢰를 받은 수렴청정의 대왕대비(정순왕후)가 배후 인물들을 철저히 수사하고 배후
인물들을 가차없이 처벌하도록 명함으로서 시파의 처지는 정말 어려워졌다.이 당시 동양에 들어와 조금씩
포교를 하면서 영역을 넓히던 천주교는 대륙,반도,열도 3지역 모두 불법이었다.이유는 유교강상(국법)과
달리하는 교리(신주와 제사 철폐)로 선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4, 당시의 수사 책임자는 대사간 睦萬中 이었다.목만중은 당색은 남인 이었지만 채제공 일파와는 사이가 좋
지 않았다.때문에 천주교도 '이가환(이승훈의 숙부,광주부윤),이승훈(최초의 천주교도 24살에 진사시 합격),
정약용(실학자,부승지 병조참판),정약전(병조정랑,황사영의 처남),정약종(정약용의 3째형),洪樂敏,李基讓,
權哲身' 등을 성토하여 지금까지 없었던 살벌한 형벌을 가했다.이것이 역사에서 말하는 辛酉박해(1801)인
것이다.이때 남인 중심의 실학자이자 규장각 검서관들도 많이 퇴출 되었다.신유년 여름이 되자 정치적 성격
을 분명하게 드러내여 왕실의 일족들도 신유박해의 여독을 피해 갈수가 없게 되었다.여기에 은언군 집안이
휩쓸려 넘어갔다.은언군의 맏아들인 李湛(이담)은 홍국영의 여동생인 元嬪의 양자로 삼았던 적이 있다.아무
튼 신유박해(1801)때 은언군의 처와 며느리 송씨가 조선의 蘇州 신부였던 주문모 신부에게 남경(한성)에서
영세를 받은 사실이 발각되어,즉시 賜死(사약을 내려 자살케 하는 것)되고 말았다.더하여 순조 1년(1801)10
월에 '黃嗣永의 帛書事件' 까지 터졌다.황사영은 노론벽파에 의해 봄부터 시작된 천주교 박해에 대한 전말과
대응책을 비단에 적어 몰래 구베아 신부에게 보내려 했던 것이다.구베아는 동양의 오랜 전통인 신주 모시기
와 조상의 제사를 반대했던 신부였다.
5, 황사영(공조판서 황준의 손자)은 동지인 黃沁과 玉千禧를 만나 천주교의 장래를 논의하고 백서를 프랑스
신부에게 전달하려는 계획을 밝혔다.그러나 이백서에는 국가안보와 관련해서 중요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었
다.즉 반도가 아닌 대륙 조선에 천주교회를 세우게 하고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수 있는 방안으로,淸 황제가
조선의 이씨 조정에 강압을 넣어 외국 선교사들의 왕래를 허락하게 하는 것과 동시에,조선을 淸의 한省으로
편입시켜 감독케 해달라는 내용까지 들어가 있었다.심지어 신앙의 자유를 위해 서양의 군대(5~6만명)을 동
원해 조선의 이씨조정을 정벌해 달라는 내용도 있었다.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봉건왕조 국가체제에서 황사영
과 그의 천주교 동지들은 기존의 왕조국가에서 살면서 죽을려고 환장을 했던 것이다.황사영의 황당한 백서
를 접한 노론 벽파조정은 관련자의 처형은 물론 천주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단행했다.정계의 인물이
라 할지라도 천주교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으면 모두가 박해를 피할수 없었다.이 과정에서 이가환,정약용
등 남인의 거물급 인재들과 실학자들이 禍를 당함으로서 이후 영남의 남인들은 정계에서 종적을 감췄다.이
후 부단한 노력(6차례의 영남만인소 등)이 있었으나 재기의 결실을 보지 못했다.
6, 이무렵 왕실에서는 순조비의 간택 문제가 현안이되고 있었다.그러나 순조는 이미 정조 생전에 김조순의
딸과 정혼한 상태였다.벽파들이 온몸으로 이를 막으려 했으나 정순왕후 대비는 정조의 결정을 정면으로 뒤
집는 행위는 왕실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로 간주하자 벽파들도 어쩔수 없었다.현실적으로 安東(경북 안동이
아닌,안전한 동국의 뜻) 김씨는 역대로 벼슬과 학문이 대단한 집안 이었고,군사적 기반(국가 수준의 사병을
보유한 토호)도 상당한 수준이었다.이는 안동의 토호세력 김조순 집안 자체가 부유한 토지소유자로 당대를
호령하는 권력자 였다는 뜻이다.벽파들이 김조순의 장용영을 혁파하기 위해 맹격을 가했지만 결정적으로
완전하게 제압을 하지 못했다.이는 정순왕후 대비가 김조순을 '장용영 대장겸 병조판서로 임명한 것에서도
알수가 있는 것이다.즉 안동의 토호들과 김씨 세력들을 무시할수 없었다.김조순은 자신에 대한 선왕 정조의
권위를 이용할줄 아는 노련한 정치가 였다.그가 노론벽파 정권하에서도 장용영,총융청의 군문대장과 병판,
예판,이판,비변사제조,대제학 등 여러 요직을 지낼수 있었던 배경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7, 1802년 10월 우여곡절 끝에 김조순의 딸이 순조의 왕비로 책봉됨에 따라 바야흐로 안동의 김씨 세력들의
세도시대가 개막된다.당시 조정은 노론벽파들에 의해 신진의 훌륭한 인재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어 인물 난
이 심각했다.특히 노론 시파와 남인들로 실학에 밝았던 규장각의 각신들과 검서관들이 퇴출 됨으로 인해 벽
파의 소수 가문이 요직을 독점했으며 정치는 크게 퇴보했다.여기에 관리들의 苛斂誅求와 자연재해가 겹치면
서 인민들의 생활은 말 그대로 塗炭(도탄)의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개혁의 정조(해=태양)가 죽고 시대의 변화
를 인지하지 못하는 무지와 무능의 벽파 보수들이 정권을 잡자(순조시대),어둠의 보복(복수)이 시작된 것이
다.이러자 수많은 인재들이 퇴출되어 나라의 발전은 다시 뒤걸음질 치고 정치는 엉망진창이 되었다.바로 이
런 현상은 21세기 한국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입으로만 국민과 백성을 말하고 파는 정상배들은 진정으로 나라와 국민들을 걱정한 적이
없다.그들은 먼저 그들 욕심을 챙기기에 분주하다.역사가 말하주 듯 광해군의 개혁은 토호로 자파(북인)의 수
박(李爾瞻 등)들과 보수(인조와 서인)들의 합작 쿠테타로 실패했지만,광해군 보다는 정치를 잘해 보겠다고 쿠
테타로 정권을 잡은 인조와 서인들은 시대를 잘못 읽어 청나라에 무릎을 꿇었다.이후 정조의 개혁도 왕을 急
死시켜 무지하고 무능한 노론 벽파들이 집권하자 역사를 후퇴시켰다.과연 지금과 다를까?현실의 한국도 실력
있는 자주파들이 핍박을 받고 무지 무능의 외세 의존파들이 활개를 치고있다.
8, 농본주의 사회에 있어 자본가는 당연히 토지를 많이 가진 대토호 들이었다.또 봉건왕조 시대의 왕이란 대지
주란 성격을 가지고 있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主上(君上)' 이라고 했던 것이다.지금으로 말하면 왕이 권력의
3권을 모두 가지고 휘두르는 것이다.臣民의 생사여탈권을 왕이 가지고 있는 것이나 마찮가지 였다.많은 신민은
왕의 노예나 다름 없었다.따라서 왕에게 대든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것과 다르지 않다.정조의 개혁에서 보듯
이 개혁의 본산이었던 규장각과 장용영의 설치와 운영도 결국은 당시의 전통적 보수로 토지와 재산을 많이 가
지고 있었던 노론의 벽파들의 도움과 용인하에 세워져 운영 되었다는 사실이다.세상에 꽁짜는 없다.개혁에도
많은 돈이 들어간다.부분적으로 시파와 남인들의 등용과 개입은 있었지만 정조의 치세도 영조처럼 노론의 벽파
와 시파에 의존해 정국을 운영했다.지금의 정치가들이 재벌과 錢主(자본)에 의존하는 것과 같다.단지 왕권강화
의 개혁을 위해 노론의 돈 위에서 다른 문화인 실학(관념이 아닌 기술적 개혁)을 접목하고자 남인의 인재를 기용
했다.그러나 이 조차도 노론벽파 시대로 정권이 바뀌자 과거로 되 돌아간 것이다.현 자본주의 하에서 민주주의
란 것도 결국은 돈이 없으면 운영되지 않는다.그래서 오나가나 돈 돈 하는 것이다.
9, 한국의 어느 ㅇ 이란 정치 지도자가 수시로 내뿜는 '自由' 란 말도 '자본의 자유이자 자본가' 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지 국민들이나 서민들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서민이자 임금노동자란 단어의 뜻에는 이미 경제적 자
유가 없다는 뜻이 들어가 있다.국민 100만 명의 서명으로 탄원을 올려도 안되는 개선책도 재벌이나 부자 10명이
회합을 통해 결론을 지으면 이는 곧바로 정부의 정책으로 채택되는 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이다.어떤 정부든 정치
가와 관료들은 자본의 집행위원회및 그들의 인형에 불과하다.여기에 세계화와 지구촌 단일화란 말은 세상의 정
치와 경제를 자본가들이 직접 움직이고 경영한다는 뜻이 들어가 있다.그래서 세상이 떠는 것이다.이 긴세월의
어디 쯤에서 우리도 외환위기(1999)와 금융위기(2008~2009)를 맞아 휘청 거렸다.
한국의 현정부가 미래의 비젼을 제시하지 못한체 전전긍긍 하는 이유는 그들 다수가 無知,無能 하기 때문이다.또
모르면 제대로 할일도 없다.특히 인터넷, IT,디지털,무인시대로 회자되는 현시대에 인간들이 할일이 과연 그얼마
나 있을 것인가?그래서 궁여지책으로 하는일이 겨우 前 정부 때리기나 업적 지우기에서 골몰하면서 뭔가를 하는
척 하는 것이다.즉 방향타 없이 표류하면서 허우적 거리는 것이다.이런 형국은 개혁의 광해군을 몰아내고 쿠테타
에 성공한 보수의 서인들과 인조가 이괄의 난으로 도망간 숨는 시기의 혼란과 같고,개혁의 정조가 급사하고 순조
가 즉위한 때 노론벽파들에 의한 과거 부수기(규장각과 장용영 혁파)의 맹목적 소란이나 다를바 없다.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