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01년 토쿄의 신오쿠보역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려다 전동차에 치여 숨진 한국 청년 이수현, 병들고 가난한 남의 나라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테레사 수녀, 평생토록 그곳 원주민들을 위해 의료 봉사를 한 알베르트 슈바이처…. 우리는 이처럼 남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삶을 바친 이들에게 끝없는 존경을 표한다. 희생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희생이란 이처럼 본질적으로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는 크고 작은 희생의 미담이 끊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다윈의 또 다른 고민이었다. 철저하게 개체의 생존과 번식에 기반을 둔 그의 자연 선택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쉽지 않은 현상이 바로 자기희생, 또는 이타주의였다. 어떻게 남을 돕기 위해 자신의 생존과 번식을 희생하는 행동과 심성이 진화할 수 있을까? 다윈은 이 문제를 매우 곤혹스럽게 생각했다. 특히 개미나 벌과 같은 이른바 사회성 곤충의 군락에서 벌어지는 일개미나 일벌들의 번식희생은 다윈을 무척이나 괴롭혔던 불가사의한 생명 현상이었다.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번식을 위해서 행동하도록 진화했다는 다윈의 이론으로는 각기 다른 생명체들로 태어나 스스로 번식을 억제하고 오로지 여왕으로 하여금 홀로 번식할 수 있도록 평생 봉사하는 일개미나 일벌들의 헌신적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윈은 끝내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타주의적 행동이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개체들로 구성된 사회안에서 진화할 수 있는것에 대한 논리적 설명을 처음으로 제공한 사람은 영국의 생물학자 윌리엄 해밀턴이었다. 해밀턴의 이론은 개체 수준에서는 엄연한 이타주의적 행동이 유전자 수준에서 분석해 보면 사실상 이기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 준다. 해밀턴의 법칙에 따르면 이타적인 행동으로 얻을 수 있는 적응적 이득에 유전적 근친도를 곱한 값이 그런 행동을 하는 데 드는 비용보다 크기만 하면 그 행동은 진화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전적으로 가까운 사이일수록 당연히 이타적인 행동이 진화할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개미와 벌 사회의 암컷들은 대부분의 유성 생식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암수의 유전자가 교합하여 태어나지만, 수컷들은 모두 미수정란으로부터 탄생한다. 다시 말하면 암컷들은 암수의 유전자가 합쳐져서 태어나지만, 수컷은 오로지 암컷의 유전자로만 태어난다. 그래서 개미와 벌의 수컷은 우리처럼 염색체를 한 쌍(배수체)으로 가지고 있는게 아니라 그냥 한 벌(반수체)만 가진다.
이들은 형제자매들끼리 평균 50%의 유전자를 공유하는 배수체 생물과 달리 평균 75%의 유전자를 공유한다. 따라서 개미사회의 번식을 순전히 유전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스스로 번식을 하여 자기 유전자의 50%를 남기는 것보다 여왕개미를 도와 자매인 일개미를 낳게 하여 자기 유전자의 75%를 남기는 것이 훨씬 더 이득이 되기 때문에 스스로 번식을 포기하는 이타적 행동이 진화한 것이다. (*솔직히 나는 이 대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저자도 이런 문제를 예상했던지 특별히 '상세한 설명은 "최재천의 인간과 동물"을 참조'할 것을 권하고 있다)
2.
해밀턴의 이론에 의하면 번식이란 결국 유전자들이 자신들의 복사체들을 퍼뜨리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하버드 대학교의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영국의 작가 새뮤얼 버틀러의 표현을 빌려 "닭은 달걀이 더 많은 달걀을 얻기 위해 잠시 만들어 낸 매개체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흔히 뜰에 돌아다니는 닭들이 각자 모이도 쪼아 먹고, 때론 싸움도 하고, 짝짓기도 하고, 알을 낳고 살다가 죽는 걸 보며 닭이라는 생명의 주인은 당연히 닭이라는 개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버틀러와 윌슨의 관점에서 보면 닭은 기껏해야 몇 년 동안 알을 낳고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덧없는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그 닭을 만들어 낸 유전자는 그의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왔고 어쩌면 영원히 그의 후손으로 이어져 갈 존재이다.
해밀턴은 우리에게 유전자의 관점에서 사물을 볼 수 있는 새로운 렌즈를 제공했다. 유전자 렌즈를 통해 보는 세상은 언뜻 허무하고 냉혹해 보인다. 내가 내 삶의 주체가 아니고 내 삶의 이전에도 존재했고 내가 죽은 후에도 존재할지 모르는 내 유전자가 진정한 내 생명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면 자칫 염세주의의 나락으로 빠질 수도 있다. 내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그런데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생각했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홀연 마음이 평안해졌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나면 오히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낀다.
나는 학생들에게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어라고 권한다. 도킨스는 긴 진화의 역사를 통해 볼 때 개체는 잠시 사라지는 덧없는 존재일 뿐이고 영원히 살아남는 것은 바로 자손 대대로 물려주는 유전자라고 설명했다. 이에 도킨스는 개체를 '생존 기계(survival machine)'라 부르고, 끊임없이 복제되어 후세에 전달되는 유전자, 즉 DNA를 '불멸의 나선(immortal coil)'이라고 일컫는다. 개체의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은 수명을 다하면 사라지고 말지만 그 개체의 특성에 관한 정보는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생명, 적어도 지구라는 행성에서 생명의 역사는 유전자의 역사이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생명체들이 태어났다 사라져 갔어도 그 옛날 생명의 늪에서 우연히 탄생하여 신기하게도 자기와 똑 같은 복사체를 만들 줄 알게 된 화학 물질인 DNA와 그의 후손들은 죽지 않고 살아남아 이 엄청난 생물 다양성을 창조해 냈다. 각각의 생명체의 관점에서 보면 생명은 분명히 한계성(ephemerality)을 지니지만 수십억년 전에 태어나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DNA의 눈으로 보면 생명은 홀연 영속성을 띤다. 지구의 생명의 역사는 DNA라는 매우 성공적인 화학 물질의 일대기이다.
주:
이 글은 "다윈 지능"(최재천, 사이언스 북스, 2012)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
요약자의 생각을 곁들인 글
첫댓글 해답을 얻지 못한 채
떠날 일을 왜 하려고 덤벼 들까?
난
그게 궁금하다.
장유님
감사합니다.
건강하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