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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허수아비, 활을 쏘다☆]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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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 활을 쏘다]
전현숙 시집 / 도서출판 문화의 힘(2014.10.30) / 값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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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 활을 쏘다
전현숙
하고 많은 것 중에
하필, 사랑
어디 겨눌 것이 없어서
모질고 독한
그것을 맞췄더냐
참고 바라보다 대신
아파하고 죽어도 좋다
생각하는 사이 이미
다른 모습으로
시선을 두는 것인데
그 숱한 과녁 중에 어찌
눈 귀 막고 가슴을 열어
키운 게 그것이랴
버릴레야 버릴 수 없고
지닐래야 지닐 수 없는
홀로 가는 허수아비가
나부끼는 만장의 깃대에
죽어서도 사록
살아서도 죽는 것을
매었구나, 사랑
대못이 박혔던 자리
전현숙
내 죄의 몫이 이리도 깊어
단단히 박혀서도 견디지 못하고
조금식 허물어지는 거다
허물어지며 헐거워지며
그대와의 간격을 넓혀
시간의 무늬를 내는 거다
속살 내어주며 옹골지게 잡아도
주름 골골이 바람 일렁이듯
생의 무게에 벌어진
그 자리에 우리가 있는 거다
단절에서 희망을 찾다
전현숙
마을로 향하는 길이 눈에 덮였다
처음부터 처음이었던
작은 개울의 흐름이 멎고
우체부의 방문도 끊겼다
전화벨이 묻는 안부
우리는 단절을 통해서만 편안해지나 보다
마을은 마을일 뿐 그리운 사람 없는데
열리지 않는 길 끝에 누군가
있을 것 같다
눈이 녹는 날 그 누군가가
올 것 같다
처음인 마지막으로
흙은 알고 있다
전현숙
땅에 누워보면 안다
왜 흙에서 나와 흙으로 가는지
작은 몸짓 하얗게 피워 울대를 세우고
굽혀온 세월에 푸르게 덮이는 노래
아픔 없이 피 흘리는 낙화로
땅을 적시는 눈물이 별이 되는 밤
하늘은 온통 주홍빛이다
흙은 알고 있다
왜 외로울 때 땅을 굽어보는지
또 눕고 싶은 지
닫힌 입에는 그리움이 있다
전현숙
진한 커피를 내려놓고 맛보다 먼저 향을 맡는다
종일 흙을 깔고 변씨 할머니는 잡초와 함께 산다 뽑아도 뽑아도 줄지 않는 억센 힘줄을 잡으며 객처에서 자리잡은 자식을 생각한다 ‘그려 사람도 이렇게 사는 거여 어디 정해 놓은 자리가 있간 뿌리 내리면 사는 거지 명절이고 제사 때 못 오면 어뗘 지 식솔 거느리고 저만 잘 살믄 되지’ 모처럼 자동차 소리에 들뜬 마을은 변씨 할머니의 가슴에 내려앉고 뽑힌 잡초의 자리만큼 비어가는 마음은 깊어지는데 귀향길 교통체증이 심하다는 소식만 윙윙거린다 “아직 못 오고 있는 거여 길이 막힌 다잖여 지는 오고 싶지 안컸는감 그려도 어민디” 대문 밖 텃밭에서 온종일 풀을 뽑는 그녀의 닫힌 입에서는 향내가 난다
우리 동네 노인들
전현숙
시간의 끈에사 풀릴 즈음의 사람은
자연과 하나이다
우리동네 노인들은
풀이 되어 풀을 뽑고
흙이 되어 곡식을 키우고
나무가 되어 그늘을 만든다
가끔은 구르지 않는 바위가 되어
떠나지 못한 땅에서 하늘의 꿈을 꾼다
자연이 된 몸이 시간을 만들고
관절에서 울리는 소리와 통증으로
삶을 기록한다
농부일기보다도 일기예보보다도
정확한 몸짓이
시간의 촉수가 된다.
오후 세 시
전현숙
여기서도
너를
부르지 못하고
발길을 돌린다
오후 세 시에
쥐똥나무 꽃향기에
멀미가 난다
꽃
전현숙
잠시 앉은 쉼자리
흔적 하나
부딪힘에도
호젓한 적막
누구도 모르는
씨앗 떨구는 자리
사랑일 이유이다
솜방망이꽃
전현숙
길섶에 핀 작은 꽃 솜방망이
가만가만 숨 쉬다
햇살 키재기로
머리에 봄을 이는 땅꼬마
언 땅을 녹여낸 실핏줄 기운으로
하얗게 퍼지는 앉은뱅이 꽃
조근조근한 몸짓으로 바람 어우르다
조막손 펼치며 하품하는 꽃
봄꽃 흐드러지던 날
전현숙
마음이 몸을 놓고
휘청거릴 때
사정없이 후려치는
빛싸래기
혼절할 슬픔으로
올려다본 하늘
아 아! 환장하겠네
속 뒤집혀 죽어 버리겠네
개화
전현숙
슬프다 했니?
실핏줄 터져 눈물 흐르니?
아니, 흐르지 못하고 맴돌다
칠위산 어둠에 갇혀 비명 지르는
그런
그런 것이니?
모든 생명의 피톨이 한곳으로 쏠려
뭉개져 이루는
그것
바로 그것 아니니?
쉽게 피는 꽃은 없더구나
달밤
전현숙
말간 침묵에
그대 거두고
고운 숨결 모두어
소지로 올리니
뜨락 가득 흩어지는
님의 미소
백치 된 사랑
전현숙
그래도 우리가 모르는 것
가슴에 풀씨를 숨긴 사람이
숲이 되는 것
숨이 되는 것
역
전현숙
오는 사람 없어도
기다린다
떠나는 사람 없이도
이별을 한다
오고 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바람의 힘줄에 끌리듯
그리움 한 줄 끌어낸다
바람 부는밤
전현숙
바람의 울음에
새벽잠을 놓는다
섧지 않은 삶이 어디 있을까
어둠을 흔들며
눈 뜬 설움을
못내 풀어내고야 마는
소리
밤 내내 분주하던 생쥐도
몸을 숨기는 냉기 서린 어둠
숨죽인 고요 속에서
바람이 운다
아픈 기억에서 얻은 언어
전현숙
슬픔의 속살 헤집어 흐르는
눈물강이다
사방을 조이는 어둠의 심장에
투명한 언어를 직조하는
천형의 물레질
몇 번을 돌려야
너를 놓을 수 있을까
손금에 맺히는 피
강이 되면
너를 씻어낼 수 있을까
누구의 기억에도 머물지 못한
가슴 뜯으며 삭혀내는 말
꽃 진 자리에 움 돋으니
전현숙
슬퍼할 일 없다
시간은 흐르고
꽃은 피고 지는 것
물 흐르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부대끼고 찢기다 보면
성남 상처 아물어 움을 틔운다
움 속에 잎이 있고
꽃이 있고 세상이 있다
예정된 미래
잘못 펼쳐진 삶에
무시로 흘린 눈물이
강을 이루어 산을 적셔도
생명은 탄생의 자리를 마련한다
꽃 진 자리에 움 돋으니
가을이 쓰는 詩
전현숙
찬 이슬 내리는
어둠 속에서
우린 태곳적 전설로
남모르는 사랑을 앓고 왔나니
설렘을 잠재우고
격랑의 걸음 멈추면
수줍은 이성 속에
얼굴 붉히는 새벽이 오기까지
사랑이여
속살 벌겋게 달구는 이름이여
그대 조용히
싸늘하게 식어갈 마음을 안고
저 광야로 떠나다오
활활 타오르는 광야의 불을 찾아
따스함으로
한 가닥 우리 마음을 안았던
그 다정함으로
한 편 한 편 詩를 지어
내 잠을 못 이루는 밤을 위한
조곡이라 해다오
더는 오지 않을 새벽이라도
어둡고 습한 슬픔을 털고
가장 먼저 웃는 연인이리니
흔적지우기 2
전현숙
이렇게 해서 한 세월이 접히면 꽃 같은 이들은 그게 삶이라 하겠지 베란다의 난들이 무관심에 마르고 거꾸로 매달린 장미 사랑을 애타게 구걸하는데 열망은 부서져 먼지로 날리고, 날마다 비질을 해대며 걸레를 삶고 헹구는 반복의 일상에 입혀지는 흔적들
어딘가 어떤 형식의 또 다른 생활이 잇을 거라고 성냥개비로 집을 짓듯 하나하나 쌓아가는 몸놀림 앞에 위증된 삶의 깃발은 더 나은 내일을 말해주지 못하고 자꾸만 고꾸라지는 저 아득한 환멸. 부서지는 환상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흥건히 젖은 등줄기의 땀을 닦지 못하는 건 나아닌지. 쉴 참마저 아끼고 달려온 시간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생의 눈부심과 처절함 앞에 이름을 묻는 질문에 나약한 시선이 초점을 잃어가는 것이 삶이라고 수십 송이 장미에서 날리던 향기의 기억과 환희만이 삶을 지탱해 준 힘이라고 믿기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았지.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기 전
산에서 산다는 것은
전현숙
산에 살다 보면 안다
가슴이 바다보다 넓다는 것을
기다림 없이도 사람을 모으고
외로움 없이도 고독해진다
같이해야 할 무엇이 없다는 것은
댓잎에 걸린 천 개의 달을 따는 일이다
산에서 산다는 것은
서늘한 달그림자를 가슴에 담는 일이다
비우며 단단해지는 대나무를 닮아
바다가 되는 일이다
심심한 행복 1
전현숙
시간을 나누지 않다
조리리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놀고 싶으면 논다
심심하면 산으로 간다
그리우면 노래를 한다
사람들이
무엇하며 사느냐고 묻는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는 일이 없다
그래도 하루는 지난다
꽃 머리에 저녁노을이 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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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보름달
소원을 빈다
내 소원은
단 하나
순한 돼지로 살다
죽어서도 웃는 것
오랜만에 내 언어들의 집을 짓는다.
무기력한 열병 속에서도 놓지 못한
시어들이 슬픔과 분노와 고독을 융화
시켜 제 몫의 자리를 잡는다.
참 살맛나는 세상이다.
이제 조용한 설렘으로 고마운 분들
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2014년 가을에
전 현 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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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숙 詩集 [※허수아비, 활을 쏘다※]
[ 해설 ] -
삶, 꽃, 그리움의 시학
안 현 심(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면서
엘리어트T.S.Eliot는 “시의 정의는 오류의 역사”라고 말했다. 그만큼 시에 대한 정의는 어렵고 광범위해서 누구도 그 실체를 함축적으로 정의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시에 대한 정의는 계속되어야 하고, 창작도 계속 이루어져야 한다. 선대의 이론가들이 말한 것처럼 시는 그 자체로서 생명력을 지니고, 인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시는 창작자의 표현 기술에 따라 생명력이 좌지우지된다. 이성의 조작을 통해 내면에서 끓고 있는 감정에다 질서를 부여했을 때, 시는 비로소 확실한 존재로 탄생한다. 모든 사람이 시인의 자질을 지니고 있지만, 시인이 될 수 없는 것은 그 표현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도 삶의 과정에서 시인이 느끼고 경험한 것들을 향유했거나, 또 향유할 수 있기 때문에 시인이 형상화한 작품세계에 공감하면서 교훈 혹은 미적 쾌락을 얻게 된다.
전현숙은 서정시인이다. 서정시는 일차적으로 자아만족적인 기능을 지닌다. 그 역시 일차적으로는 자아충족으로서 시를 썼을 것이다. 하지만 나아가 자신의 시에 많은 사람이 공감해주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소망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지 천착해가기로 한다.
2. 역설의 형상화
시 형상화의 기교적 측면에서 역설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인생 자체가 역설적이며 아이러니하다면, 그러한 삶이 반영되는 시에서 역설적 표현은 아주 자연스럽다. 표면상으로는 역설이 모순되거나 불합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양면적 가치를 대조시키고 초월․ 극복함으로써 내면적으로 시적 진실을 획득하는 것이 역설이다.
① 우리 사이에 벽이 생기면
그것을 뚫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침묵뿐이라고
당신은 말하였습니다
② 우리 이렇게 가다가
영원히 만나지 못할지 모른다고
따스한 눈빛 마주칠
공간 하나 만들자고
목소리 떨리던 날
삶은 충분히 아름다웠습니다
③ 침묵만이 소리가 되어 넘나드는
삭정이 가슴 타던 날들
우리 사이에 벽이 생기면
혼절할 슬픔에 대신할
길을 하나 내자 했습니다
-「미로 찾기」전문
시「미로 찾기는 한 연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필자가 임의대로 ①,②,③부분으로 나누었다. ①부분에서 “우리 사이에 벽이 생기면”이라는 상황 설정은 순탄치 않은 인간관계를 나타낸다. ‘벽’이 상징하는 이미지는 ‘단절’이다. 양방향으로 소통하며 서로를 인식해야 하지만, 피치 못할 벽이 생긴다면 “그것을 뚫을 수 있는 것은/오직 침묵뿐이라고/당신”이 말한다. 둘 사이에 벽이 생겼을 때 그것을 허물 수 있는 것은 대화뿐이다. 그런데도 침묵만이 벽을 허물소 있다고 형상화한 부분에서 역설이 발생한다. 이러한 역설은 논리적으로는 맞지 않지만 시적 진실을 형상화하기에는 최적의 표현이 될 수 있다.
②부분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래오래 벽을 두고 침묵하다가 다시는 못 만날지도 모르니 따스한 눈빛 나눌 공간 하나 마련하자고 말하던 날, 삶이 충분히 아름다웠다고 형상화한 부분이 그것이다. 보편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들이라면 벽을 허물지 못한 채 다른 타협안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어떻게 아름답다고 말하겠는가. 이처럼 과학적․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은 말을 즐겨 사용하는 사람이 시인이다.
③부분에서는 ①,②에서 절제하던 슬픔이 실체를 드러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긴 침묵이 오히려 소리가 되어 벽을 넘나드는 나날, 혼절할 만큼 큰 슬픔을 대신해줄 길 하나 내자고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말한다. 여기서 ‘따스한 눈빛 나눌 공간’과 ‘혼절할 슬픔을 대신해 줄 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고뇌의 궁극에서 시인이 찾아낸 안타까운 삶의 출구가 아닐까 짐작해볼 뿐이다.
누군가
단 하루만 사랑해도 된다면
그냥, 그냥 말없음으로
바라만 보겠습니다
…중략…
어쩌다 누가
얼굴을 그리하시면
난, 난, 나는
하얀 백지만 내밀겠습니다
-「언중유희․2」부분
시「언중유희」역시 역설적 형상화로써 구조되어 있다. 그것은 사랑하고 싶은 누군가에게 단 하루의 사랑을 허락받았는데도 “그냥, 그냥 말없음으로/바람만 보”겠다는 형상화가 그것이다. 제2연에서는 누군가가 얼굴을 그려도 좋다고 허락했지만, 하얀 백지만 내밀겠다고 반어적으로 표현한다. 얼굴을 그려도 좋다는 것은 사랑해도 좋다는 또 다른 말일 것이다. 누군가를 연모하면서도 아니라고 말하는 역설적 표현은 낯설게 두드러짐으로써 시의 주제를 명료하게 해준다. 시제에서 암시하듯 진실을 거스르는 듯한 이러한 표현들은 마치 언중유희言中遊戱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닌 척 시치미를 떼고, 거짓말하는 듯한 형상화가 신선한 충격을 담보하면서 진실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준다.
또 다른 시「닫힌 입에는 그리움이 있다」에서는 추석이 되었는데도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는 자식의 입장을 넋두리하듯 변명하는 변 씨 할머니가 등장한다. 하루 종일 잡초를 뽑으며 행여 남들이 뭐라고 할까봐 자식의 입장을 대변하는 할머니의 입에서 쓴 내가 나겠지만, “대문 밖 텃밭에서 온종일 풀을 뽑는 그녀의 닫힌 입에서는 향내가 난다”라고 형상화되고 있다. 그러고 보면 할머니의 넋두리는 할머니의 마음을 헤아린 시인의 넋두리인 셈이다.
인용한 작품 외에도 전현숙의 시에는 역설적 말하기가 많이 도입되고 있다. 역설적 말하기는 시적 화자의 내면을 숨기는 데 최적의 장치가 된다. 곧이곧대로 말했을 때보다 강렬한 뉘앙스로 시인의 절실함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매우 슬퍼하면서도 슬프지 않다고 시치미를 뗌으로써 시인은 체면을 유지하고, 독자는 더욱 슬픈 내면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이 역설적 기법이다.
3. 사랑, 그 아름다운 에너지
인간의 감정에서 사랑을 빼버리면 피돌기가 멈추어 버린 삭정이에 불과하다. 신을 경외하는 마음, 부모의 희생적인 사랑, 이성에 대한 육체적인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애를 베풀고, 남을 배려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인간의 수많은 감정 중에서 사랑은 가장 포괄적이면서 긍정적인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그 첫 번째가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아가페적 사랑은 신이 인간에게 베푸는 사랑처럼 그 깊이나 높이, 넓이, 길이를 측량하거나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량하다. 두 번째는 필로아적인 사랑, 즉 철학적인 사랑이다. 끊임없이 뭔가를 추구하고 갈망하지만 결코 채워지지 않는 이성적인 사랑이다. 세 번째는 에로스적인 사랑, 즉 과학적인 사랑이다. 이성간의 육체적 사랑이 이에 해당하는데, 이것은 남녀가 50% 대 50%로 균등하게 평행을 이룰 때 자연스럽게 성립된다.
살면서 한번쯤
누군가의 가슴 아픈 사람이 되어
푸른 설렘 하얗게 피우는
가시 돋친 꽃이어도 좋겠네
환한 미소로도
수줍은 눈맞춤으로도
온전한 그대 담을 수 없어
향기 폭탄 터트리는
죽기 전 한번쯤
누군가의 쓰린 가슴에 안겨
철 지난 미련에 수혈을 하며
붉게 영그는 꽃이어도 좋겠네
-「찔레꽃․ 1」전문
「찔레꽃․ 1」은 에로스적인 사랑을 형상화한 시이다. 에로스적인 사랑은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사랑이다. 내가 준 만큼 받고 싶어 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관심의 끈이 늦추어지면 노여워하게 되는 사랑이다.
“살면서 한번쯤/누군가의 가슴 아픈 사람이 되어/푸른 설렘 하얗게 피우는/가시 돋친 꽃이어도 좋겠네”라고 한 형상화에는 에로스적 사랑이 빗나간 안타까움과 혜량할 수 없는 한恨이 함의되어 있다. 가시 돋친 꽃은 ‘한을 품은 여인’을 은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비극적 사랑을 즐기는 카타르시스가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두 번째 연에서는 환희로운 사랑의 노래가 구현된다. “환한 미소로도/수줍은 눈 맞춤으로도/온전한 그대 담을 수 없어/향기 폭탄 터트”린다는 형상화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형상화는 현실상황이 아니라 시적 화자가 꿈꾸는 이상세계에 불과하다. 첫 연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시적 화자는 이루어질 수 없는, 가슴 아픈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연에서는 이미 지나가버린 사랑이지만, “철 지난 미련에 수혈을 하며/붉게 영그는 꽃이어도 좋겠네”라고 노래한다. ‘붉게 영그는 꽃’은 찔레꽃의 열매를 지칭한다. 찔레꽃이 하얗게 피고 열매를 맺는 과정을 묘사한 듯하지만, 결국은 찔레꽃의 한 살이에 시인의 내면을 투영시킨 셈이다. 시가 세계를 자아화하는 문학형식이라고 할 때 찔레꽃은 세계가 될 것이고, 시인은 찔레꽃이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내면세계를 드러낸다.
에로스적 사랑은 인간의 삶을 이끌어가는 동력이다. 90세, 100세가 되어도 실현만 하지 못할 뿐, 인간을 존재하게 만드는 자양분으로써 작용한다. 때문에 시인들은 동서고금을 통해 에로스적인 사랑의 노래를 읊어왔다. 내면에서 일렁이는 사랑의 욕구를 시라는 형식을 통해 노래하면서 슬픔과 안타까움을 자가 치유해왔다고 할 수 있다.
뭔가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잡초처럼 돋아나는 음울한 미소에
습관을 깔아뭉개고 앉은
타락 예수들 사이에서
고통 없는 삶을 조롱하는
자존이 방생되어
20세기의 허물 뒤에 숨은
십자가의 성자는
어둠을 내려놓은 뒷골목에 방뇨하며
희망을 말하고 있다
사랑과 자비가 선택한
거룩한 이름 노숙자
외면당한 자유인
그 곁에 한 여인이 울고 있다
성모마리아, 아들을 낳은 여인
-「노숙자 쉼터에는」전문
시「노숙자 쉼터에는」에 등장하는 ‘타락 예수들’, ‘십자가의 성자’, ‘거룩한 이름 노숙자’, ‘외면당한 자유인’ 등의 호칭은 노숙자를 아가페적 사랑의 시선으로 보듬었을 때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이 시는 고통 없는 삶을 조롱하면서 뒷골목에 방뇨하는 행위조차 타락한 예수들만이 할 수 있다는 긍정적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종교적 논리에 의하면, 하느님은 잘하는 자, 잘못하는 자 모두를 감싸 안을 뿐 아니라, 인간세상의 규범을 어긴 자들까지도 단죄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로써 인간을 끌어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랑과 자비’는 아가페적인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이 작품은 21세기의 기술문명이 낳은 부조리를 질타하기도 한다. ‘습관을 깔아뭉개고 앉은’, ‘20세기 허물 뒤에 숨은’, ‘외면당한 자유인’ 등의 형상화가 그것이다. 인간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 정해놓은 굴레를 돌고 돌지만, 그들은 습관을 과감하게 깔아뭉갰다. 20세기 물질문명의 폐해는 자유의지가 강한 그들을 뒷골목으로 내몬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몰려서도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안고 눈물을 흘리던 성모마리아는 그들을 위해서도 눈물을 멈추지 않는다. 아기페적인 사랑의 경지에서는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로 환치될 수 있기 때문에 노숙자들에게도 예수와 대등한 위치를 부여한 것이다.
이 시의 세계로 미루어보건대 전현숙은 대승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가족이기주의, 편파적인 사고를 지니지 않은 채 인간 전반의 삶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자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노숙자들을 이토록 적실하게 꿰뚫어볼 수 없기 때문이다.
4. 삶, 꽃, 그리움의 시학
전현숙은 이번 시집의 주제를 ‘삶, 꽃, 그리움’으로 분류해놓고 있다. 시가 우리의 삶을 율어로 표현한 문학양식이라고 할 때 이러한 분류는 타당성을 획득한다. 시는 곧 인간의 ‘삶’을 형상화한 산물이요, ‘꽃’은 삶의 과정에서 정서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인자이며, ‘그리움’ 또한 죽는 날까지 인간 내면의 색채를 견인해가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문학 양식은 인간의 삶을 떠나서 결코 존재하지 못한다. 소설이든, 수필이든, 시이든 자신이 경험한 내용이거나 자신 밖〔세계〕의 현상 혹은 그 현상에 대한 생각이 표현된 양식이 문학이다. ‘찔레꽃’의 한 살이를 노래한 듯하지만, 결국 인간 삶의 단면이 채색된 것이 시작품이다.
삶이 누구에게나 관련되는 문제라면, 꽃은 다분히 주관적이다. 전현숙 시인이 꽃에 관심을 두었다는 것은 꽃을 그만큼 좋아하고, 꽃이 삶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의미이다. 시인은 도시문명을 멀리하고 자연과 가까이 살고 있다. 그러다보니 주변에 지천으로 널린 것이 꽃이다. 사람을 만나기보다 꽃을 관찰하고 교감하는 날들이 많았을 터이다. 이러한 까닭이 그의 작품에 꽃이 중요한 항목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시인이 내세운 또 다른 항목이 그리움인데, 그리움을 사전적으로 해석하면 ‘보고 싶어 애타는 마음’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시인은 무엇이 보고 싶었을까. 우리는 그 대상을 자칫 ‘사람’이라고 잘못 단정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지적인 욕구에 대한 갈망, 이상세계에 이르고 싶은 소망이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감정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그리워한다는 것은 결핍을 보완해줄 수 있는 대상을 갈망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리움은 유한한 인간에게 숙명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
원시시대에는 인간도 사물과 같이 즉자卽者적인 존재였다. 그러던 것이 물질문명이 발달하면서 외부 세계에 자신을 비춰 판단하는 대자對者적인 존재가 되었다. 대자적인 존재는 불안과 결핍에 시달리면서 즉자적인 존재로의 회귀를 꿈꾼다. 인간의 그러한 태도가 자연으로의 회귀를 갈망하는 모습이다. 자연은 늘 그 자리에서 즉자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꾸밈도 없고, 모자람도 없이 만족한 상태의 자연, 시인이 보고 싶어 하는 대상 역시 그러한 세계이다. 자연과 가까이 살고 있지만, 완전히 합일될 수 없는 결핍의 감정이 그리움의 원천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5. 나가면서
네트워크 망을 벗어던지고 자연 속으로 잦아든 시인 전현숙, 오랜만의 조우라서 몹시 반가웠는데, 난데없이 시집 해설을 맡아달란다. 몇 년 만에 목소리 들려주면서 겨우 한다는 소리가 이것인가. 반가운 만큼 실망감도 컸다. “에이, 이 사람아, 그런 부탁은 다른 사람한테나 하고, 꽃 얘기, 새 얘기, 나무 얘기나 들려주지 그러나”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를 읽어갈 수밖에 없었다.
자연과 한 몸이 되어 자연스럽게 사는 이도 시 쓰기는 버릴 수 없나보다. 시를 정독하면서 다시 한 번 숙고해본다. 모두 내려놓은 자가 최후의 보루로 끼고 있는 것 ‘시란 무엇이며, 시인들은 왜 시를 쓰는가?’ 무병巫病에 걸려서 내림굿을 하고 무당으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처럼 시로써 내면을 분출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 그가 바로 시인이다.
어차피 자연스러워지고자 결단을 내렸으니 시 또한 최대한 자연스러워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시, 그의 목소리를 통해 나왔을 때만이 빛을 발하는 시를 기대해본다.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정서는 피폐해지고 극심한 결핍으로 불안감만 증폭된다. 이러한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시를 쓰지만, 자아충족 단계를 넘어 동시대 사람들이 깊이 공감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전현숙의 시가 그러한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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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자연과 한 몸이 되어 자연스럽게 사는 이도 시 쓰기는 버릴 수 없나보다. 시를 정독하면서 다시 한 번 숙고해본다. 모두 내려놓은 자가 최후의 보루로 끼고 있는 것 ‘시란 무엇이며, 시인들은 왜 시를 쓰는가?’ 무병巫病에 걸려서 내림굿을 하고 무당으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처럼 시로써 내면을 분출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 그가 바로 시인이다.
- 안 현 심. 시인, 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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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현숙 시인∥
∙ 1986년 초 <동시대>로 활동을 시작하여
∙ 《시와 시론》추천
∙ 첫시집『그대 내 살가슴에 불벌떼를 풀어놓고』
∙ 제 2시집 『머묾을 위하여』
∙ 詩想문학, 호서문학, 문학시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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