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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2월27일(월)맑음
저녁 강의하다. 오래 결석했던 초암보살이 나오다. 수요일은 삼일절은 공휴일. 강의 없이 하루 쉬기로 하다.
2017년2울28일(화)맑음
저녁 강의하다. 오랫동안 결석했던 荷心하심보살이 다시 나와서 기쁘다. 싯다르타가 출가할 수 밖에 없었던 내면적 상황을 이해시키려 했는데 충분한 공감을 얻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붓다의 생애를 배울 때는 배우는 사람이 싯다르타에 감정이입을 하여 그분처럼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 요구된다. 르네 지라르(1923~2015, Rene Girard 프랑스)의 욕망론을 사용하여 불교를 비판하는 기독교신학자 정일권의 <붓다와 희생양>을 검색하다. 그 책을 주문하다. 그는 붓다가 희생양이라 한다. 어떤 의미일까? 리차드 도킨스가 창조주를 맹신하는 우매함을 폭로하니 이에 대한 반동으로 기독교계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신학자가 정일권이다. 그의 무기는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과 희생양론이다. 인간은 생존경쟁을 한다. 강자를 모방한 욕망을 성취하려고 타자를 이용하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조를 지속한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의 원한과 분노를 해소시켜주기 위해 희생양을 만들어낸다. 예수는 스스로 희생양이 되어 자기를 죽임으로써 희생양을 생산하는 사회구조의 허구성과 잔인성을 만천하에 폭로하여 인간사회가 좀 더 개화되도록 해주었다. 그래서 지라르는 예수가 인류를 폭력에서 구원해주었다고 한다. 예수가 자청해서 희생양이 됨으로써 더 이상의 희생양이 필요치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반면 붓다는 사회에서 물러나 세계포기를 가르쳤고, 내면적으로 자신을 불태움으로써 해탈을 성취하였다고 불교를 이해한다. 붓다의 해탈 방식은 민중의 원한과 욕망을 내면적으로 불태워 無化무화하라고 가르침으로써 민중으로 하여금 지배계급의 통치에 순응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일면 불교역사를 보면 일리가 있기도 하다. 봉건 왕조의 후원에 의지하여 승가를 운영하였기에 왕권에 협조하고 지배기득권자들의 이익에 봉사하거나 그들과 이해관계를 공유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공과 무아, 무차별, 不二불이라는 교설을 내세움으로써 독재와 파시즘을 옹호한 역사가 있지 않은가? 그렇다. 화엄철학이 측천무후의 독재를 장엄해주었고 중국 역대황실과 신라와 고려, 일본은 화엄과 선을 통치이데올로기로 이용하였다. 더구나 일본선사들의 살불살조와 불이론이 대동아공영권을 조장하며 전쟁을 부추겼다. 이렇게 볼 때 불교에는 애초부터 폭력적인 요소가 잠재해 있던 걸까, 아니면 당대의 불교사상가들과 선사들이 불교를 나쁘게 이용한 결과인가? 어떤 불교에 어떤 요소가 폭력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남방불교의 어떤 요소, 화엄불교의 어떤 요소, 유식불교의 어떤 요소, 선불교의 어떤 요소, 티베트불교의 어떤 요소, 일본선의 어떤 요소에 반민주적이고 폭력적이고 약자의 희생을 은폐하는 요소가 들어있는가? 근본적으로 반성해보아야 한다. 불교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불교 안에도 폭력성이 깃들이어 있다는 비판은 아프게 받아드려야 한다. <붓다와 희생양>과 르네 지라르가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밤이 깊어졌다.
2017년3월1일(수)맑음
거리의 철학자 김상봉 선생의 말:
참으로 선하게 살기 위해 우리는 추수에 대한 희망 없이 선의 씨앗을 뿌리는 법을, 희망 없이 인간을 사랑하는 법을, 그리고 보상에 대한 기대 없이 세계에 해난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런 비극적 세계관 에서도 언제나 기뻐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점심 때 금성보살과 일광스님 와서 서로 CST를 해주다. 함께 점심 먹고 일광스님에게 CST시술 받다. 금성보살은 CST에 이미 조예가 깊어졌다. 일광스님과 죽향에서 차 마시고 헤어지다.
2017년3월2일(목)맑음
대견스님 오다.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다. 이사하고 처음 방문하였기에 소감을 물으니 ‘아담하고 깔끔한 분위기의 공부방’이라 하신다. 저녁에 남강 변을 걷는데 봄바람이 차다. 강 건너편으로 촉석루가 보이는 커피포트에 앉아서 짜이를 마시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다. 토스트를 시켜 저녁참으로 때우다. 돌아와 쉬다.
2017년3월3일(금)맑음
대견스님과 빵으로 아침을 먹다. 스님은 일찍이 대만에 유학하여 대만승가에서 수행 생활하였다. 대승불교권에서는 대만 승가가 가장 본받을 만하다고 말씀하신다. 대만승가와 한국을 대비해보면 한국불교는 승가가 해체된 지경이 아니겠느냐 하신다. 보름마다 해야 할 포살이 없어졌고, 이익을 함께 나누는 공동생활을 하지 않으니 각자도생이요, 제각각 불교다. 계율경시, 표준화된 교육체계 부재로 한국불교의 승가공동체는 지리멸렬되어, 당분간 해결방법이 없다고 진단하신다. 이런 상황에서는 힘닿는 대로 포교하며 선방에 다니고, 뜻 맞는 도반들끼리 교류하고 사는 것이 그나마 차선책이라 하신다. 평소에는 온라인으로 법주공부방 모임을 이끌며 포교하면서, 당분간은 선운사에서 수련원장 소임을 맡아달란다 하니 그럴까 생각중이라고 하신다. 대구 관오사 모임에서 볼 수 있으면 보자하고 헤어지다. 조금 후에 안동에서 아원보살이 찾아오다. 수정사 공부모임에서 만났던 보살인데 인연이 이어져 예까지 왔다. 커피를 끓여 대접하고 담화를 나누다. 평거동에서 파스타 먹고, 진양 호반을 걷다가 돌아가다.
아무도 머물 수 없고
어떤 것도 붙잡을 수 없는
그러나 항상 그대로 있을 것 같은 거기
바람 스쳐 물비늘 반짝였나?
번쩍 한순간
모든 게 사라지고 나타나고
아무 것도 남겨지지 않느니
지금 여기 벌써 거기 아니라
나, 바람처럼 왔다가 물처럼 가리
재난 영화 <판도라>를 인터넷에서 보다. 탈핵으로 가야한다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2017년3월4일(토)맑음
아미화보살 점심 공양 청으로 외식하다. 날씨가 화창하여 진양 호반을 산책하다. 진주는 자연의 혜택을 받은 吉地길지임에 틀림없다. 레이크사이드에서 아미화와 차를 마시며 진주선원의 미래를 이야기하다. 보문서적에서 축원카드 사고 죽향에서 일광스님 만나 대추차를 들다. 밤에 123.movies에서 <올드 보이> 보다. 누군가에 의해 15년 동안 감옥에 갇혔다가 나와서 복수하는 줄거리. 이런 감옥은 불법 사설감금시설인데 현실에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지, 꾸며낸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인생의 일정기간동안 아무런 이유와 사전 통보도 없이 갑작스레 감금된다면 주인공 오대수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탈출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불교수행과 관련지어 유추한다면 3년 結社결사나 死關사관, 무문관, 黑房흑방 수행 같은 것이다. 이런 수행은 자발적 감금으로 자기의 신체적 자유를 박탈함으로써 해탈을 구하려는 고행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고행이요, 세상에서 해탈하겠다고 수행하는 것도 고행이다. 고행이란 말은 같아도 얼마나 다른가. 털 오라기 하나의 차이가 하늘과 땅처럼 벌어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毫釐有差호리유차에, 天地懸隔천지현격이다. 털끝 하나의 차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차이, 그것은 무엇인가?
2017년3월5일(일)흐림
문아보살 진주선원 방문하여 예경 드리고 점심 공양 같이 하다. 오후에 해성과 명성보살과 함께 엠비시네에서 영화 <사일런스> 관람하다. 제수이트 신부 페레이라와 로드리고가 일본에 선교하러왔다가 에도 幕府막부의 혹독한 박해 때 죽음에 처한 신도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배교背敎(apostasy)를 택한다. 생명을 구하기 위한 배교가 신을 배신한 것이 아닌 오히려 예수의 사랑을 실천한 것이 아니겠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실화를 배경으로 연출된 마르틴 스콜세이지(Martin Scorsese, 1942~) 감독 작품이다. 원작은 엔도 슈샤크(遠藤周作, 1923~1996, 일본 소설가)의 <침묵>이다. 인간에겐 종교란 무엇인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앙이란 무엇인가? 서양인들이 믿던 Deus가 일본인 들이 믿는 天主와 같은가, 아니면 정교한 오해인가? 왜 제수이트Jesuit는 목숨을 걸고서 까지 선교를 하려했던가? 그들은 자신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서양제국주의 침략의 앞잡이 역할을 한 것인가? 그들은 자신의 믿는 Deus가 보편적인 진리임을 증거 하기 위해 전통종교로서 불교가 뿌리내린 일본민중에게 퍼뜨렸다. 이것은 선의의 행동인가, 키톨릭 중심주의적 선교전략인가? 중세 일본민중이 믿었던 天主와 天國은 과연 예수가 말했던 진정한 의미의 그것이었던가? 아니면 봉건적 수탈의 현실을 벗어나려는 탈출구로서 天主와 天國을 희구한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이는 대중이 만들어낸 집단무의적인 환상이요, 기독교신화에 부풀려진 ‘영혼의 구원’이란 열광이다. 목숨을 버리면서 선교사업에 투신했던 젊은 신부들은 기독교적인 환상에 사로잡힌 희생자들인가, 아니면 성스러운 순교자인가? 그 둘은 깊게 섞여있어 분간하기 힘들다. 영화의 주제는 깊고도 둔중하다. ‘예수의 마지막 유혹(니코스 카잔차키스 원작)’을 영화화했던 감독답게 스콜세이지는 종교적 심오함이 배인 미장센으로 관객의 마음을 깊고도 잔잔하게 울린다. 비인도적이고 처참한 박해에 대해 Deus는 왜 침묵하고 계신가? 그분의 침묵은 어떤 의미인가? Deus가 절대선으로 존재한다면 악은 왜 존재하는가? 내가 만약 페레이라 신부처럼 배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면 배교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기성교단에서는 배교자라 낙인찍힐지라도 그는 진정 신의 사랑을 실천했으며, 예수의 마음을 가졌다고 느낀다. Deus는 자기 자신을 죽임으로써 자기의 사랑을 증명하지 않았던가? 이것이 ‘신의 자기 비움’이 아니었던가? 그런 의미에서 주인공으로 나오는 두 신부의 배교는 말 그대로 배교가 아니라 진정한 교敎로 돌아감(還歸眞敎)이요, 신의 사랑을 한 순간 체험했다 하리라. 이 경우 배교란 제도권 종교의 울타리를 넘는 탈종교이다. 그것은 머리가 아니라 죽음이란 막다른 벼랑 끝에서 열려진 가슴에서 벼락처럼 찾아온 ‘눈 뜸’이다. 페레이라(Cristóvão Ferreira,1580~1650, 포르투갈 출신, 나중에 사와노 추안(沢野忠庵택야충암)으로 개명) 신부와 로드리고(Sebastião Rodrigues, 포르투갈 출신, 오카모토 산에몬(岡本三右衛門)으로 개명) 신부는 일본인으로 귀화하여 일본여자와 결혼하고 불교를 공부하여 죽을 때까지 일본인으로 살았다. 그들의 종교경험(신앙과 배교, 외면적, 내면적 전향)을 종교 간의 대화에서 다루면 좋을 소재가 된다. 배교한 그들은 과연 어떤 신을 버렸는가, 또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버릴 수 없는 어떤 신적인 신앙의 대상을 내면에 간직하고 있었다면 그건 무엇인가? 그것을 심층종교와 표층종교의 차이(오강남 교수의 말)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가? 그것을 언어로 표현했을 때 간단히 Deus 혹은 靈性 혹은 佛性이란 말로 나타낼 수 있겠는가? 깊은 성찰이 요구된다.
우리 불교에도 두 신부가 직면했던 본질적인 질문은 던져야 한다. 불교는 무엇을 믿는가? 무엇을 믿지 않는가? 아는 만큼 믿어지고, 믿는 만큼 알아진다고 할 때 앎과 믿음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불교에는 붓다의 은혜(기독교의 신의 은총에 해당하는)는 없는가, 있다면 어떻게 나타나며 어떻게 받는가? 불교역사에 다른 종교인들을 개종시키려고 폭력을 쓴 적이 있는가? 불교역사에 국가적, 집단적 폭력을 일으켰거나, 방조하거나 협조하거나 방관한 일은 없는가? 기리시단(吉利支丹, キリシタン,가톨릭 신자라는 뜻의 포르투갈 발음)이 탄압받고 박해받은 때 일본불자와 스님들의 태도는 불교적이었던가? 최소한 스님들과 불자들은 에도정부가 휘두르는 박해를 부추기거나 협조하지 않았어야 한다. 불살생의 원칙을 적용하여 그들을 박해하지 않도록 권력자들에게 조언하거나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어야 한다. 그리고 박해가 일어났을 때 자비를 행하여 구조하거나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어야 했다. 그러나 일본불교는 천주박해를 용인하며 방관했거나 협조했다. 일본불교는 부처님의 자비를 망각했고 자비를 실천하지 않았다. 그래서 폭력을 방조하고 옹호했다는 불명예스런 전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것이 일본불교만의 일인가, 아니면 다른 불교국가에서도 이런 일이 번번이 일어났던가? 조선말 천주박해 때 불자들이 했던 일을 돌이켜 보자. 당시 불교교세는 형편없이 열악했던 탓으로 기득권세력에 붙어 박해를 부추겼거나 앞장설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박해가 있었는지도 아마 몰랐거나 알아도 속수무책이거나 무관심했을 수 있다. 스님들이 박해를 피해 天眞庵천진암으로 숨어든 천주교도들을 숨겨주고 보호해준 일이 있었다. 이는 한국불교가 초기천주교단에 보여준 인정人情의 좋은 예이다. 그러나 현재 천주교단은 이 사건에 대한 인식이 아주 희박하고 오히려 배은망덕하게도 스님들의 희생에 대해서는 언급도 없이 천진암을 자기네의 순교성지로서 장악하려 하고 있다.
붓다는 폭력을 배격하고 불살생을 필수덕목으로 가르쳤지만 현실 불교에서는 불살생의 덕목을 버리고 폭력을 용인하거나 부추겼던 역사가 있다. 이것을 가슴 깊이 반성해야 한다. 불교는 자비이지만 불교도라고 항상 자비로운 것은 아니다. 불교는 항상 선인가? 아니다. 어떤 불교를 말하는지 다시 물어야한다. 불자는 항상 자비인가? 아니다. 불자는 불교적으로 사는지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불교적으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항상 깨어있을 수 있다.
2017년3월6일(월)맑음
저녁에 강의하다. 오랫동안 안 보이던 초월蕉月보살 나오다. MT 준비를 위해 회장단과 홍보팀과 이야기를 나누다.
2017년3월7일(화)맑음
아침 창밖을 보니 눈발이 날린다. 아니, 봄인데 눈이 왠 말? 꽃샘추위를 노래한 한시를 찾아보다. 저녁 강의하다.
남기일(居村 南基日)의 춘한(春寒,꽃샘추위)
殘寒忽襲來, 잔한홀습래 늦추위가 기습적으로 찾아드니
春氣乍遒遐; 춘기사주하 봄기운이 잠시 기세가 꺾이네,
退節春走妒, 퇴절춘주투 물러서는 계절은 봄을 질투하지만
南梅旣着花. 남매기착화 남쪽 매화는 이미 피어있는 걸.
*乍:잠깐 사 *遒:굳셀 주, 닥칠 주 *妒:질투할 투 妬와 같음
황준량(黃俊良, 1517~1563,조선 중기 문신)의 춘한즉사(春寒卽事,봄추위에 짓다)
寒鎖春天雪擁林, 한쇄춘천설옹림 추위가 봄 하늘을 가두고 눈이 숲을 에워싸니
滿山花卉閉芳心; 만산화훼폐방심 산에 가득한 꽃나무는 향긋한 꽃술을 닫아 버렸네,
方知陽氣先溪柳, 방지양기선계류 봄기운은 냇가 버들부터 먼저 찾음을 이제야 알겠거니
已弄風條欲嫩金. 이롱풍조욕눈금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에 연한 황금빛이 퍼지려고 하네.
*嫩:어릴 눈
두보(杜甫, 712~770)의 춘야희우(春夜喜雨,봄날 밤에 내리는 기쁜 비)
好雨知時節, 호우지시절 착한 비는 내려야 할 때를 아는지라
當春乃發生; 당춘내발생 봄이 오자 바로 물기 머금는다,
隨風潛入夜, 수풍잠입야 바람 따라 몰래 밤으로 스며든 비는
潤物細無聲; 윤물세무성 만물을 골고루 적시느라 소리조차 없구나,
野徑雲俱黑, 야경운구흑 들로 난 길은 낮은 구름 깔려 어두운데
江船火獨明; 강선화독명 강가에 고기잡이 배 불빛만 홀로 밝다
曉看紅濕處, 효간홍습처 새벽녘에 붉고 윤기 나는 곳 둘러보니
花重錦官城. 화중금관성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금관성일세.
첫댓글 불교적으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묻고 또 묻겠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