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월일 |
한국사 |
세계사 |
비고 |
1392 |
조선 건국 |
|
|
1394. 10. 28 |
한양 천도 |
|
|
1368 |
원 멸망, 명의 건국 |
| |
1441 |
측우기 제작 |
|
|
1443 |
훈민정음 창제 |
|
|
1446 |
훈민정음 반포 |
|
|
1453 |
|
비잔티움 제국 멸망 |
|
1517 |
|
루터의 종교 개혁 |
|
1536 |
|
칼뱅의 종교 개혁 |
|
1592. 4. 14 |
임진왜란 (~1598) |
|
|
1600 |
|
영국, 동인도 회사 설립 |
|
1608 |
경기도에 대동법 실시 |
|
|
1616 |
|
후금의 건국 |
|
1623. 3. 13 |
인조반정 |
|
|
1627 |
정묘호란 |
|
|
1636. 12. 9 |
병자호란 |
|
|
新善한 모둠 선정 [ 전기 조선 왕조 ] 9 大 중요 사실
우선순위 |
중요 사실 |
선정 이유 | |
1 |
1932 |
조선왕조 건국 |
고려왕조는 34왕 475년 만에 막을 내리고, 1392년 7월 군신의 추대를 받은 58세의 함경도 출신의 무장인 이성계가 신진사대부와 협력하여 무장 이성계가 왕위에 오름으로써 조선왕조는 첫발을 내딛었다. 그 후 27명의 왕이 승계하면서 519년간 지속되었다 |
2 |
1443 |
한글 창제 |
조선 세종(世宗)이 1446년(세종 28) 9월에 제정·공포한 한국의 국자(國字)를 해설한 훈민정음을 반포하였다. 조선 세종은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못한다. 이런 까닭으로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음을 안타까워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반포하였다. |
3 |
1443 ~ 1447 |
4군 6진 개척 |
1432년부터 시작하여 1433년까지 여진족의 침입이 빈번해지자 정벌 논의가 본격화 되었다. 1437년 7월에 평안도도절제사로서 약 8,000명의 군사로 다시 한 번 파저강유역의 여진족을 정벌하였다. 최윤덕과 이천의 10여년의 노력으로 여연(閭延)·자성(慈城)·무창(茂昌)·우예(虞芮)의 4군이 설치되었다. |
4 |
1554 |
비변사 설치 |
비변사란 1510년 삼포왜란을 계기로 남쪽의 왜구와 북쪽의 여진족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해 설치했던 임시군사회의기구이다. 임진왜란이후 비변사는 국가의 국방상 필요에 의해 강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의정부가 가진 국가행정의 최고 결정기능까지 비변사에 포함되게 되어 막강한 통치기구가 된다. |
5 |
1592~ 1598
|
임진왜란 |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친 왜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으로7년 만에 노량대첩을 끝으로 일본군이 퇴각하면서 전쟁이 끝났다. 경작지가 황폐화 되고 인구의 감소와 노비문서의 손실로 인한 신분제의 동요가 나타난다. 인구도 감소했으며 또한, 민심이 발생하고 많은 문화재가 손실 되었다. 조선. 명. 일본에 세 나라 모두에게 큰 영향을 주었지만, 외세의 침입을 의병과 백성의 힘으로 막았다는데 있어서도 큰 의의가 있다. |
6 |
1623 |
인조반정
|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당론(黨論)의 폐해를 통감하고 이를 초월하여 좋은 정치를 해보려고 애썼으나, 자신이 대북파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당론을 초월할 수 없었다. 광해군의 실정(失政)이 계속되어 기강이 문란을 비판하며 서인이 주도한 난이다. |
7 |
1725 |
탕평책 실시
|
당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각 당파에서 고르게 인재를 등용하던 정책으로 붕당 정치의 변질에서 오는 폐단을 막기 위해서 영조와 정조가 실시한 정책이다. 당시에는 붕당 정치가 붕당 간의 싸움이 적었던 초기와 달리 후기에는 붕당 사이에서 견제가 심해지고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
8 |
1811 |
홍경래의 난
|
홍경래의 난은 1811년 순조 때 일어난 민중의 난이다. 순/헌/철종 삼대의 세도정치로 인해 정치기강과 과거제가 문란해져서 삼정의 문란이 일어나 백성들이 힘들어졌다. 특히, 평도 (서북지방)사람들을 과거에서 뽑지 않는 등 많은 차별대우했다. 이로 인해 몰락한 양반인 홍경래 중심으로 빈농+광부+품팔이꾼으로 구성된 농민봉기가 일어난다. 훗날 크고 작은 농민봉기에 큰 영향력을 끼친다. |
9 |
1866 |
병인양요
|
조선에 들어와 있던 선교사 12명중 9명이 죽고 국내신도 8000여명이 죽은 병인박해가 계기이다. 병인박해 소식을 들은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제독이 보복원정을 오게 된다. 강화도로 쳐들어온 프랑스군은 결국 장수 양헌수가 비밀리에 강화도 도하에 성공해서 정족산성을 점령 후 물러가게 된다. 11월 10일 프랑스군이 철수하게 되지만 이때 강화도에 있던 외규장각 도서 345권과 은괴 19상자를 약탈해 간다.
|
※ 다음 발표
가. 발표자 : 김모아
나. 발표 제목 : 임진왜란 후 왜 조선통신사가 파견되었을까?
다. 발표 내용(200字내외) : 임진왜란 직후의 강화 교섭은 조선과의 교역에 사활이 걸려 있던 쓰시마 측의 요청으로 시작되었다. 임란 이후 일본은 왜 그토록 조선과 교역을 하고자 했는지, 그리고 조선이 내건 조건은 무엇인지를 통해 도출할 수 있는 삶의 원리를 공론화하고자 한다. 또한, 교역의 성사 과정에서 현대의 역사가 양국의 행동에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알아봄으로써,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인간의 존재에 대해 고찰해보는 시간이 되도록 구성했다.
광해군의 중립적 외교정치는 실리를 추구한 현실적인 정책이었습니다. 당대 조선의 정치 상황을 보면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결코 받아 드릴 수 없는 정책이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명과의 우호적인 관계만을 고수하지 않은 채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정책을 하려 시도했다는 것을 보면 광해군은 실로 개혁적인 군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는 볼 수 없겠지만, 나라를 다스린다는 데 있어 명분만 쫓아서는 이루어지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서 군주란 어떠한 행동을 해야 할까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광해군의 외교정책이 실패한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공동체 내에서 변화를 줄 수 있는 큰 문제를 결정할 때에는 모든 공동체 원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광해군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둘째, 광해군의 정책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맞아떨어져 성과를 거뒀지만, 조선의 주류 사상이었던 성리학과 맞지 않았습니다. 명분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는 광해군의 정책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광해군의 외교정책 실패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새로운 방안의 모색, 즉 개혁적인 생각도 중요하지만 공동체 안의 조화로운 범주 내에서 이루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