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년 말부터 40년 초까지 약 1개월간에 걸쳐 장개석은 대규모 반격을 감행합니다.
38년 10월 25일 한구가 함락된후 중국내 일본군은 한정된 병력이 도처에서 분산되었고 39년 5월 노몽한전투에서 관동군은 소련군과의 분쟁에서 참담한 패전을 당하자 중국내 병력일부를 만주쪽으로 이동시킵니다.
게다가 장기화되는 전쟁으로 일본의 전쟁수행능력과 인력동원능력 또한 한계에 부딪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지금이 호기라고 판단한 장개석이 "종래의 수세에서 반격으로 바꿀 때는 바로 지금이다!"라며 중국군에게 전면 총공격을 명령합니다.
반격은 12월 12일을 기하여 한구방면을 중심으로 화중, 화남에서 개시되었습니다. 한구탈환을 목표로 총 65개 사단 약 50~60만명이 집결하여 대공세를 펼쳤는데 전선은 저 만리장성과 만몽지역에서부터 남으로는 베트남과 가까운 남령에 이르는 일대 반격작전이었습니다. 일본군은 효율성을 높인다는 이유로 넓은 지역에 중대, 대대단위의 소규모병력을 분산 배치한 상태였으니 도처에서 포위당해 격멸당하는등 위기에 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12월 중순 남령방면의 제 5사단도 중국군의 대공세를 받게 되었는데 중앙 직계군을 중심으로 한 총 25개 사단 약 15만 4천명에 달하는 대 병력이었습니다. 총 지휘관은 진성이었으며 백숭희, 이종인등이 지휘했으며 장개석도 직접 전선 가까이에 와서 독려했습니다. 이중에는 중포와 전차부대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10배이상의 병력에게 포위당한 일본군으로서는 개전이래 처음 당하는 대역습이었으며 제 21군 사령부에서도 제 5사단에게 남녕을 포기하고 후퇴할 것을 명령했으나 사단장 이마무라중장은 거부하고 증원군이 올때까지 버틸 것을 고집하였습니다.
중국군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그야말로 수로 밀어붙여 일본군을 맹타하여 혈전을 벌였으며 1개월간 양측의 대소교전이 1천회가 넘을 만큼 대 격전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중앙군과 군벌군 부대간의 질적 차이, 화력 및 제공권의 압도적 열세로 막대한 사상자만 낸채 전과를 내지 못한채 격퇴당하고 말았습니다.
다음해 1월 중순 제 21군 예하 제 18사단과 근위혼성여단등 약 3만의 병력이 증원오면서 하순을 기해서 반격이 개시되었습니다. 이 작전을 이른바 "빈양작전"이라 칭해졌는데 일본군은 정면과 배후에서 맹공을 가하여 전사자 293명, 전상 1281명에 대해 후퇴하는 중국군에게 전사자 1만 6천명, 포로 1198명이라는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압도적인 승리는 전황 전체에 영향을 주어 화남방면에서 전황이 심각하게 불리해지자 장개석은 한구정면에 배치된 호남성의 제 6, 제 9 전구의 22개사단을 전용하여 화남방면으로 옮깁니다. 이로 인해 공격병력의 약 1/3이 감소해 도처에서 중국군은 격퇴되어 결국 반격은 1개월만에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 작전의 실패는 중국군의 사기를 꺾었고 전투력도 예년보다 30%나 격감하게 되었고 주요 원조루트였던 남녕을 완전히 상실하여 해안가 일대를 완전히 잃음으로서 해외 원조 루트가 거의 차단되었습니다.(이후 버마-곤명을 잇는 이른바 험비루트를 뚫게 됩니다.) 장개석도 실망하여 더이상 대규모 공세는 하지 않았으며 그를 항일투쟁에 소극화하는 대신 정권유지와 반공투쟁쪽으로 옮기게 만들었습니다.
한편, 일본 또한 "무기력한 지나군"이라며 비웃고 있던 중국군이 아직도 이만한 대규모 공세 능력이 있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뒤이어 화북방면에서 시작되는 팔로군의 공세, 이른바 "백단대전"(총 115개 여단, 약 40만)으로 철도와 보급로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음으로서 전쟁에서 승리의 가능성이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후 서로간 국지적인 공세와 반격만을 되풀이할뿐 44년 대륙타통작전이 시작될때까지 중국전선은 사실상 교착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 대신으로 기적을 바라고 시작하는 것이 남방침략과 미국과의 대결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