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능에 대하여-1탄
나는 조선왕들의 능을 거의 다 답사했다.
유네스코 인류 문화유산에 등재 되고 나서부터이다.우리는 학창시절에 서오능이나 태릉 등에 소풍을 가거나 현장학습을 갔었다. 요즘도 등산이나 걷기 아니면 산책 그리고 친구들이나 가족들 또는 직장동료들과의 야유회 등으로 본의 아니게 능을 둘러볼 기회가 생기게 된다.
그럴 때 사람들은 왕릉들을 건성으로 둘러 보게 된다
보통 사람들은 왕릉들이 거의가 다 똑같은 줄 알지만 자세히 보면 조금씩 각기 다르다.
일테면 홍살문의 태극이 어느 능은 양태극이고 또 어느 능은 삼태극으로 다르다든지 문인석과 무인석의 크기와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든지
축문을 태운 재를 묻는 예감의 모양과 형태가 다른 것 등이다.
뿐만 아니라 능마다 얽힌 미묘한 사연들을 안고 있다.
능을 아무 생각없이 바라보면 그게 그거 같고 일반인들의 무덤보다 열배 쯤 크고 웅장한 무덤일 뿐이다.따라서 아무 감흥과 재미가 없다.
능들에 대해서 사전 지식이 있으면 답사할 때 열배 쯤 져미가 있게 된다.
그래서 능을 답사하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어서
내가 능들을 답사 하며 깨닫고 알게 된 것들을 글로 써 보았다.
태조의 능은 건원릉이다.
건원릉은 특이하게도 무덤의 봉분에 억새풀이 자란다.
태조가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인 함흥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는데도
태종이 태조를 동구릉에 모셨다. 대신 함흥의 훍과 억새풀을 가져다 봉분에 뿌리고 심었다.
건원능에는 이성계 혼자 누워 있다.향처였던 신의 왕후 한씨는 개성의 제능에 누워있고 경처인 신덕왕후 강씨는 서울 성북구 정릉에 누워있다.
정릉은 원래 덕수궁 근처 정동에 있었으나 방원이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 버렸다.태조는 신덕왕후 곁에 묻히기를 원하기도 했었다.그리고 생전에 태조는 정릉에 거의 매일 들러서 찔찔 짜고는 했었다.그런 모습을 방원이가 좋아 했을 까닭이 없다.
저런 이유 말고도 신덕왕후와 태종은 철천지 원수 지간이었다.
그래서 정릉을 성북구 지금의 자리로 옮겨 버렸다. 정동에 있던 석물들은 광통교 다리 상판으로 깔아놓았다. 뭍백성들이 짖밟고 다니라고 말이다.
정종의 무덤인 후릉은 유일하게 북한 개성에 있다.
정종이 개성에서 왕노릇을 하다가 거기서 죽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릉은 답사를 못했다.
태조비 신의 왕후 한씨의 능 제릉도 개성에 있다.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에 개성에서 죽어서 그 곳에 묻혔다.
한씨는 개국 전에 죽었기 때문에 자신이 낳은 여섯 형제와
강씨가 낳은 두 아들들이
왕자의 난을 통해 서로 죽이며 피터지게 싸우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더구나 자신이 낳은 아들들끼리도 싸우고 더더구나 자신의 하늘같은 남편 하고도 싸우는 눈뜨고는 볼 수 없는 광경도 보지 못했다.
태종의 능은 강남구 세곡동
에 있는 헌릉이다.
이 능은 석물이 다른 능의 두배이다.문인석,석호 등이 두세트씩이란 뜻이다.
태종과 원경왕후는 합장릉이 아니고 쌍릉으로 조성되어 있다.
태종은 자신의 장인은 물론 처남들 넷을 싹다 죽였다. 그런 남편을 원경왕후가 죽어서도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걸 잘 알기에 아들 세종이 합장릉으로 만들순 없었을 것이다.
세종의 능은 여주에 있는 영릉이다. 원래는 세곡동에 있는 인릉자리에 묻혔었는데 흉당이라서 천장시켰다. 석물과 신도비는 땅에 묻었었는데 훗날 홍수로 인해 세상에 드러나서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에 옮겨 놓았다 .기념관 앞에 있는
신도비 글씨는 아들 안평대군의 글씨이다.
안평의 글씨는 중국 사신들도 욕심내는 명필이었단다.
재주와 덕이 많은 안평을 따르는 이들이 많았고 백성들에게도 인기가 많았었다.그런 그를 가만 놔둘 수양이 아니었다.자기자리를 넘볼가 봐서 결국 역모로 몰아 죽였다.그가 마지막 살다 끌려간 곳이 부암동 무계 정사였다.
문종의 무덤은 동구릉에 있는
현릉이다.현릉은 동원이강릉이다.오른쪽 언덕의 능이 현덕 왕후 권씨 능이다.
재위기간이 짧고 업적도 별로 없는 왕이다.
인기도 없어서 참배객들도 외면 한다.
단종의 능은 영월에 있는 장릉이다.유일하게 경기도가 아닌 강원도에 묻혀 있다. 단종이 영월의 청령포로 귀양갔다가 거기서 사사되었기 때문이다.
단종이 마신 사약은 금부도사 왕방연이 들고 갔었다.
그는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강가에 앉아서 시를 지었다.
천만리 머나먼길
고운님 여의옵고
강가에 앉았으니
저물도 내맘같아
울어 밤길 예놋다.
영월의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은 엄흥도가 수습 해서 그 곳에 묻었다.목숨을 건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단종비 정순왕후는 먼발치 (청계천영도교)에서 눈물로 마지막 작별을 하고 정업원에 들어가 염색일로 생계를 꾸려가며 살다가 죽었다.
정순왕후의 능은 남양주군에 있는 사능이다.
세조의 능은 광릉에 있는 광릉이다. 광릉은 동원 이강릉이다.왼쪽릉이 세조릉이고 오른쪽 능이 정희왕후 능이다.
광릉 부터는 유택이 석실이 아니고 회격실로 되어 있다.석실로 하면 비용이 많이 든다.
십톤짜리 돌을 십여개를 땅속에서 캐어 운반하다보면 사람들이 많이 죽고 다치곤 했었다.그래서 저런 험한 일은 주로 비구승들이 했었다.저런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회격실로 하라고 세조가 유언을 남긴 후 부터 조선왕릉의 유택은 회격실로 하게 되었다.
세조는 자신의 능으로 부터 백리 안에 숲을 조성하여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는유언을 남겼단다.
그 결과 광릉 숲이 생기게 되었다.
자기가 죽인 사람들이 하도 많아 그 들 후손들이 자신의 무덤에 해코지 할까봐서 그랬단다.
광릉숲에는 딱따구리의 한 종류인 천연 기념물 크낙새도 산다.
예종의 능은 서오릉에 있는 창릉이다.
창릉은 동원이강릉이다.
오른쪽언덕의 능이 안순왕후 한씨 능이다.
예종은 재위기간이 2년이다.
그 짧은 기간에
예종은 남이 장군을 역모로 몰아 죽였다.
창릉은 특이하게 혼유석의 고석이 북고리모양이 새겨져 있다.다른 능은 도깨비 모양이다.
성종의 릉은 강남구 선정릉에 있는 선릉이다.
선릉은 동원 이강릉이다.
오른쪽 언덕의 능이 정현왕후 윤씨 능이다.이 선능은 임진 왜란 때 왜군에 의해 파헤쳐 졌었다.
그 때 보물이 나오지 않자 유골을 태워서 한강에 뿌려졌다. 따라서 선릉은 가묘이다.
예종의 조강지처 장순왕후 한씨와 성종의 조강지처 공혜 왕후 한씨는 한명회의 딸로 친자매 지간이다.
저 두 자매왕후는 남편 곁이 아닌 파주 삼릉에 묻혀 있다.
연산군의 묘는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폐군이라서 능이 아닌 묘라서 억수로 초라하다.자업자득이다.
연산의 묘는 강화도 앞 교동도에서 이장했다.
연산은 위리 안치되었다가
홧병으로 죽었다.
세자 환도 위리안치 되었는데
탈출 했다가 사사 되었다.
교동도에는 연산의 흔적이 아무것도 없었다.
거창군부인 신씨묘도 남편묘
옆에 있다.
중종의 능은 강남구 선정릉의 정릉이다.정릉은 단릉이다.
원래 서삼릉에있는 회릉에 둘째 왕비 장경왕후랑 같이 있었는데 문정왕후가 이 곳으로 천장시켰다.문정왕후 자기가 중종 옆에 묻히려고 그랬는데 결국 문정왕후는 태릉에 묻혀 있다.
인왕산 치마바위 전설의 주인공 중종의 조강지처 단경왕후는 고양시 장흥의 온릉에 묻혀 있다.
중종의 넷째부인 창빈 순흥안씨는 동작동 국립현충원 안에 있다. 이 분이 바로 선조의 할머니시다.
선조의 아버지는 중종의 여덟번 째 아들 덕흥군이다.덕흥군은 자신의 어머니묘를 천하명당인 동작동 (지금의 국립묘지)으로 이장시켰다.
그 명당덕인지 셋째 아들 하성군이 방계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삼촌 명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덤으로
덕흥군은 조선조 최초 대원군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 순종까지 대대손손 덕흥대원군의 자손들이 조선과 대한제국이 망할 때까지 왕과 황제를 이어 갔다.
저 모두가 동작동 국립 현충원에 있는 중종의 첩 창빈 순흥안씨의 묘가 명당이기 때문이라는게 풍수가들의 주장이란다.
봉은사는 선릉과 정릉의 원찰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