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삽니까?”
세상에서 가장 답변하기 어려운 순간이 있다면 바로 누군가로부터 이 질문을 받았을 때가 아닐까.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명곡 중 하나인 ‘밤안개’를 부른 원로 여가수 현미의 노래 중에 ‘왜 사느냐고 묻거든’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다. ‘왜 사느냐고 묻거든 못 다한 사랑 때문이라고……, 나는 행복해 참 사랑을 아니까…….’라는 진지한 가사가 인상적이다. 순수한 사랑의 간절함과 열정이 굵고 낮은 그녀 특유의 목소리에서 배어 나온다.
애창곡이 된 이 노래를 부를 때와 ‘왜 사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의 느낌이나 임하는 방식은 다르다. 노래는 이미 정해진 리듬에 맞춰 혼자서 읊조리면 된다. 무대 위에 서서 감정을 담아 호소력 있게 불러야 하는 직업가수가 아닌 이상 그저 마음 편하게 소리 내어 부르면 그뿐이다. 반대로 질문에 대한 답변은 그야말로 부담감과 난감함이 동시에 쓰나미처럼 몰려온다.
5년 전의 일이다. 인생 2막을 잘 펼쳐가고 있는 시니어 10인을 만나 던진 공통된 질문 중 하나가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이었다. 누구 한 사람도 기다렸다는 듯 거침없이 답변을 한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뭐라고 말하기 어려우니까 순간 미소를 지으면서 다음에 일러주겠다는 식이었다. 인터뷰 후 이메일이나 전화로 답을 전해왔다. 책이 나오고 나서야 나는 아주 무례한 질문을 했다는 후회와 미안함을 동시에 가져야 했다. 그 누구일지라도 즉답을 내놓기에는 아주 어려운 질문을 마치 ‘1 더하기 2는 뭡니까?’라는 식으로 밀어붙였으니 말이다. 만일 지금 출판사나 잡지사로부터 유명인이든 거리에서 만난 사람이든 열 명에게 같은 질문을 하여 답을 받아 원고를 써달라는 주문을 받는다면 주저없이 자신 없다는 입장을 분명하게 전할 것이다. 누가 내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일 테니까. 아니 화가 날지도 모른다. 그 어려운 대답을 어떻게 자판기에서 커피 빼내듯이 대응할 수 있겠는가.
‘왜 사느냐?’를 풀어 말하면 ‘당신에게 인생은 무엇인가?’, ‘당신은 무엇을 추구하고 사는가?’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 세상 누구 한 사람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 살아가면서 ‘나는 누구이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사람에 따라서 그가 처한 환경과 여건에 따라서 답은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당장 하루 세 끼 해결이 힘든 사람이라면, 병실에 누워서 병마와 사투를 벌이는 환자라면 이 질문은 사치나 다름없는 것이다.
친구나 지인들에게 이 질문을 했다고 치자. 더러는 농담처럼 “마지못해 그냥 살아.”라고 하는 이들고 있겠지만 ‘자식 때문에’, ‘아직은 할 일이 많아서’,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을 이루고 싶어서‘ 등등 제각각일 것이다. 그나마 편한 관계이기에 조금은 쉽게 그 시점에서의 가슴 속 진심을 얘기할 수는 있을 것이다. 다만 사뭇 진지하게 특별한 답변을 해주길 바라면서 질문을 던졌다면 상대에게 시간을 줄 필요가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에 대한 답을 내놓길 꺼려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스스로 왜 사는지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을 정리할 충분한 시간이 없었다는 얘기다. 그만큼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정신없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젊은 시절부터 자신의 목표가 뚜렷하여 그것만을 추구하면서 달려오고 있었거나 나름대로 20년 후, 30년 후 자신의 미래를 확실하게 그려놓고 달려가는 사람이라면 답변은 좀 빠르고 쉽게 나올 것이다.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소중하고 의미와 가치가 있는 일임엔 분명하다. 다만 처한 환경과 생각의 차이에 따라서 살아가는 이유는 제각각 다를 수밖에 없으며, 누구의 대답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설령 정확한 목표를 앞세워 사는 이유를 확고하게 정의를 내려놓고 살아가는 사람일지라도 어느 한 순간 인생의 변화가 오면 그 정의는 또 달라질 수 있다. 자신의 건강이나 직업 그리고 생활에서의 큰 사건이나 사고가 찾아온다거나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녀나 배우자, 부모에게서 큰 일이 발생하면 ‘왜 사느냐’에 대한 답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다가오는 나이듦 또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수정하게 만들기도 한다. 청소년기와 20, 30대 젊은 시절의 가치관이나 목표가 다르고, 젊은 시절과 중년 시절 또한 다르며, 노년기 역시 달라진다. 이는 우리네 삶이 10년, 20년에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현시대를 100세 시대라고 한다. 여기서 100이라는 숫자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을 말할 뿐, 100세까지의 건강한 육체와 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는 예기는 아니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사람에 따라서 다를 수는 있겠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나이는 병약한 이들에게는 80세 전후일 것이고, 건강한 이들이라면 90세 전후에 끝난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 삶의 주인공이 내가 되어야 하는 인생 2막을 위한 첫 준비단계로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왜 사느냐고 묻거든’에 대한 나만의 답을 구하는 일이다.
무엇 때문에 사는 걸까? 빠르게는 중년의 초입이라고 하는 40대에서 구해야 한다. 늦어도 60세가 되기 전에는 반드시 정의를 내려야 한다. 인생의 절반을 넘어서 시니어인생을 멋지고 후회없이 살고 싶다면 그 방향과 방법을 안내해 줄 나만의 한 줄 문장이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살아있는 동안에 한 번은 꼭 해야 할 것들(박창수, 새론북스, 2017)’에서 옮겨 적음. (2019.04.13. 화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