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6일 연중 제9주간 수요일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마르코 12,18-27)
He is not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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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 갇힌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라고 독려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들에게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며 그분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라고 강조하신다(복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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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대부분 시간의 흐름을 직선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시간을 탄생, 삶, 죽음 식으로 직선적인 구분을 합니다. 이는 한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시간이요 세상의 시간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은 인간의 시간에 얽매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직선적인 시간관념에만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시간은 다릅니다. 하느님의 시간은 절대적인 시간이요 영원한 시간입니다. 여기에는 오직 현재만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그리고 지금 우리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는 현재의 인물들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하고 말씀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과학자요 철학자인 파스칼은 어느 날 한밤중에 하느님을 강렬하게 체험합니다. 그는 자신이 체험한 것을 양피지 조각에다 적어 윗옷 안쪽에 바늘로 꿰매어 이를 죽을 때까지 몸에 지니고 살았습니다. 그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체험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불!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 확신·감격·기쁨·평화·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그리고 너의 하느님. 너의 하느님께서는 나의 하느님이 되시리라.” 하느님께는 영원한 현재만이 있습니다. 파스칼은 은총의 불을 통해서 이를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언제나 변함없이 그리고 영원히 살아 계시는 하느님, 이분을 믿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구속된 상태에서 티모테오에게 선교 사명을 위해 받은 은총의 선물을 되살릴 것을 당부하면서, 감사와 격려를 보낸다. 특히, 주님을 위해 수인이 된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복음 전파를 위해 고난에 동참할 것을 독려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에게,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고, 인간의 부활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달려 있기 때문에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일깨워 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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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죽어야 할 존재로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의 사랑과 생명 안에 머물러 행복하게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인간의 욕심이 도를 넘어 하느님과 멀어지고, 인간 스스로 죽음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당신의 무한한 자비하심으로 다시 살리시려고 몸소 사람이 되시어,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부활하셨습니다. 이 덕분에 우리 또한 부활할 수 있다는 기쁜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부활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다시 살아날 뿐 아니라, 주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그분의 자녀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며, 주님과 하나 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삶은 이미 현세에서 시작되었고, 장차 주님 품 안에서 완성될 하느님 사랑의 극치이며,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락입니다. 그렇지만 부활의 삶은 생명이신 주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면서 살아갈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
아들 없이 죽은 형에게 동생이 대를 이어 주는 풍습은 동서양에 걸쳐 발견됩니다. 그만큼 고대 사회는 남성 중심이었습니다. 더구나 이스라엘이 속한 중동 지역은 유목민 사회였습니다. 그들은 초원을 따라 끊임없이 이동하였고, 물과 풀밭이 부족하면 남의 영역을 침범하였습니다. 싸움은 일상사가 되었습니다. 자연히 남자가 필요했고 그 영향은 점점 커져 갔습니다. 사두가이들은 유다인의 지식층에 속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지적 우월감으로 접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식 없이 죽은 형을 위해 여섯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아들였다면 부활 후 어떻게 되겠는지 질문합니다. 질문 자체가 비논리적이며 유치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손함을 받아 주시며 부활에 대한 가르침을 남기셨습니다. 몸의 부활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이루어진다는 교훈입니다. 그러기에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다.”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저세상에서는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계획이 있다는 암시입니다. 부활은 인간의 지식에 속하지 않습니다. 부활은 깨달음이며 은총입니다. 순수함으로 다가갈 때에만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어설픈 지식은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거룩하게 됩시다.
-김기현신부-
오늘 독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말씀대
로 거룩히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거룩히 산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 다음과 같은 고정관념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거룩하게 사는 사람은 실오라기만큼의 도덕적인 결함도 없다. 과거에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현재는 완전한 회심으로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한 사람이다. 심지어는 가장 사소한 유혹도 느끼지 않은 채 성장한다. 물론 유혹을 받기도 하겠지만, 유혹이 그를 힘들게 하지는 못한다. 그는 모든 것에 대한 확실하고 영웅적인 해답을 알고 있다.
그의 의도는 항상 고상하고, 그의 말은 언제나 교훈적인 격언으로 가득하고, 모든 상황에 놀랄 만큼 적합한 말을 한다. 그는 문둥병자의 상처에 입을 맞춰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존경심으로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든다.”
이처럼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이 어느 정도 초자연적이고, 비인간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간적이지 않고 자신을 남들과 다른 경이의 대상으로 분리시키는 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습과 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거룩함은 더 인간적이 되는 데서, 그리고 함께 하는 모습에서 출발합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은 하느님의 지위를 모두 버리시고,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의 돌봄 속에서 성장했고, 잔칫집에 초대를 받아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셨습니다. 또 병자들과 죄인들을 연민으로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도움을 주셨고, 마귀에게 유혹을 받으시기도 했습니다. 또 복음화 되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을 보며 실망하시기도 하시고, 믿음을 고백하는 이들을 보며 감탄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인간의 모습으로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적인 모습에서 드러난 따뜻한 관심과 배려, 사랑과 용서, 그리고 기도의 삶이 예수님을 거룩하게 해 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우리도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인간적이 되어야 합니다.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 좀 더 관심을 갖고, 더 많이 공감하고, 고통을 나누며,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모습이 거룩한 삶의 출발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동네에서 자그마한 가정의를 개업한 내 친구의 병원에는 간호사가 넷인데, 그 중 한 명은 주사를 놓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간호사는 아픈 사람들에 대한 마음씀씀이 깊었습니다. 병원의 두꺼운 유리문을 힘겹게 미는 사람이 나타나면 달려가서 문 열어 모시고, 오래 기다린 환자에게는 다시 한 번 다가가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된다고 죄송하다고 합니다. 혈압측정기나 체중계 등을 이용하여 기다리는 환자들이 지루하지 않게 돕고, 아이들에게는 사탕을 나눠주고 이런 저런 말을 시켜 참을성이 없는 아이들이 답답해서 뛰거나 돌아다니는 것을 미리 막았습니다. 동네 병원은 대기실에 사람이 조금만 많아도 소란해지기 십상인데, 그 간호사 덕분에 의사는 조급해하지 않으면서 환자 하나하나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진심으로 마음 써주는 간호사와 뒷사람에 쫓기지 않고 충분히 진료해 주는 의사가 있으니 조금 기다리더라도 그 병원에 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저 간호사 없으면 우리 병원 안 된다. 주사 좀 못 놓으면 어때, 더 중요한 일을 하는데. 주사야 다른 간호사가 놓으면 되고, 정 바쁘면 내가 놔도 되는 거구. 주사 잘 놓는 간호사는 흔해도 저런 간호사는 드물다. 내가 저 친구 나간다고 할까봐 얼마나 신경을 쓰는데.” 】
오늘 하루, 내 삶의 자리에서 인간적인 배려와 따뜻함으로 주위 사람들을 대해 봅시다. 그 안에서 드러나는 사랑과 용서와 섬김의 모습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줄 겁니다.

다시 결혼하지 않는 뜻?
-김찬선신부-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부부들에게 질문을 던질 때가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면 지금의 배우자와 다시 결혼하겠습니까?” 참으로 재미난 것은 남자는 대체로 다시 결혼하겠다고 하는데 여자는 대체로 다시 결혼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걸 두고 남자는 대체로 자기 아내에게 만족하고 여자는 자기 남편에게 불만족한 것으로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이유는 지금까지 남자가 여자보다 배우자에게 더 잘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과거 불만보다는 미래의 바람이 더 작용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다시 결혼하게 된다면 지금 남편보다 더 나은 남편을 만나고 싶다는, 그런 바람이 작용한 것이 아닐까요? 그만큼 여자가 남자보다 만남, 관계를 더 중시한다는 표시이고, 남자는 일을 더 중시하기에 웬만하면 새로운 관계를 맺기보다 현재의 관계에 만족한다는 표시일 것입니다.
그런데 기회가 되면 또 다른 질문도 해 보고 싶습니다. 다시 태어나면 결혼하겠는지 말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저는 다시 태어나도 결혼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든 저 세상에 다시 태어나든 저는 결혼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제가 여자를 혐오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자를 현재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래서 앞으로도 사랑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도, 현재도 저는 여자를 사랑하고 어쩌면 하느님의 섭리대로 남자보다 여자를 더 사랑하고 미래도 그럴 것입니다.
제가 결혼하지 않음은 더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에 매이지 않고 다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소유하고 소유되는 그런 사랑은 하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모두를 사랑하고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고 이것이 하느님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윤회와 인연으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일 것입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한 삶[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는 경전의 말씀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저 자신에게 신랄하게 자문합니다. 다 사랑한다면서 하나도 제대로 사랑하지 않는 얼치기가 아닌지.. 다 사랑한다면서 하나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랑 불능자는 아닌지..
산 이들의 하느님
-강우현 신부-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던지는 질문에 예수님은 일곱 형제의 이야기를 통해 실제 부활한 삶이 어떠한 상태인지를 들려주십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명기의 혼인법을 근거로 해서 부활이 있으면 일곱 형제와 같이 산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질문으로, 실제 부활이 있다면 무척 곤란하지 않겠느냐는 주장을 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12,24)도 모른다고 지적하시며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꼬집으십니다. 부활은 현재의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 아님을 예수님께서는 일러 주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다.” 오늘 복음은 부활이야말로 지금 살아가면서 우리가 체험하고 희망해야 하는 새로운 생활임을 말씀하십니다. 곧 현재의 생활에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가르침과 행동을 살아가는 것이 ‘부활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삶은 옛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활양식입니다. 부활한 이들의 삶은 지금 여기서 복음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 곧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을 굳게 믿으며 우리도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보다는 내일 더 가까이 하느님께로 다가서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말입니다.
혼인의 의미
-전삼용신부-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저보고 결혼하지 말고 사제가 되어 깨끗하게 살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결혼 생활이 힘드셨나봅니다. 또 요즘은 결혼해서 사시는 분들이 저보고 사제되길 잘 했다고 합니다. 결혼한 대학 친구들도 혼자 사는 제가 부럽다고 합니다.
사실 조금이라도 남은 결혼의 환상도 고해성사를 조금 듣다 보면 다 깨지게 됩니다. 고해성사를 듣다보면 부부간의 많은 이야기들을 듣게 됩니다.
얼마 전에는 중년이 된 부인이 남편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시집을 못 가고 있는 노처녀에게 이렇게 충고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결혼하지 마. 괴로운 것보다 외로운 게 나!”
바오로 사도는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결혼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고 계실까요?
예수님은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논쟁하시면서 결혼의 의미를 더 종잡을 수 없게 만드십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죽으면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그들에겐 내세가 없으니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즐기는 것이 더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모세 오경은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어려운 질문을 합니다.
모세의 법엔 형이 자녀를 두지 않고 죽으면 동생이 그 형수와 살아서 형의 대를 이어주어야 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첫째 형이 자녀를 두지 못하고 죽었고 그래서 둘째가 형수와 살게 되었는데 둘째도 자녀 없이 죽습니다. 이렇게 일곱 형제가 모두 같은 여자와 살았지만 모두 자녀가 없이 죽게 됩니다. 만약 부활이 있다면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세에 혹 결혼이 있으면 좋겠다는 우리 혼자 사는 사람들의 환상을 다 깨놓습니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내세에서는 이곳에서처럼 혼인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뒤 이어서 부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 주십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그들이 모세오경은 믿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모세 오경에서 하느님께서 불붙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시어 하신 말씀을 근거로 하느님은 이미 죽은 선조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이미 죽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하느님 안에서는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왜 다시 혼인하는 일이 없을까요? 예수님께서 불붙은 떨기나무의 예를 드신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불붙은 떨기나무는 하느님과 인간의 혼인의 상징입니다. 나무는 인성을, 불은 신성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면서도 동시에 사람으로 이 세상에 하느님을 계시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안에 신성과 인성이 서로 한 몸이 되도록 결합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체 안에 이미 한 몸이 되는 혼인의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이는 인성이 신성과 결합하여 하느님과 한 몸이 되었듯이, 세상의 것들도 하느님과 결합하여 한 몸이 된다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육체는 썩어 없어져야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에서 취하신 육체를 지니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다시 말해 신성과 한번 결합된 인성은 결코 죽지 않고 영원히 하늘나라에서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취하신 인성은 곧 교회이고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신랑이시고 우리는 교회이고 그 분의 신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면서 그 분의 육체처럼 영원한 신성을 부여받게 됩니다. 그래서 죽음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성자께서 성부와 한 몸을 이룸으로써 성부의 모든 신성을 부여받게 되시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나라에서 더 이상 혼인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와 혼인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는 이 혼인만이 존재합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의 관계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이 세상의 혼인은 바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것은 세상 창조 때부터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도록 하느님께서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느님과 혼인으로 한 몸을 이루듯, 남자와 여자가 혼인하여 한 몸을 이루어야 온전한 인간이 됩니다. 인간은 사랑하도록 창조 되었고 참 남자가 되고 참 여자가 되는 사랑이 사랑의 가장 기본입니다. 인간은 한 몸이 되는 사랑을 함으로써 비로소 참 인간이 됩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의 관계는 하늘나라에서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더 완전해집니다. 성모님이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였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그냥 보통 여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어머니였으면 영원히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남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시던 육체, 그것도 상처까지도 다 지니시고 하늘나라로 가신 것처럼 이 세상에서의 어떤 역사도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고스란히 지니고 올라갑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부부였고 사랑했던 사람들은 하늘나라에서 서로 더 완전히 사랑하고 그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 될 것입니다.
이렇게 부부는 바로 그리스도와 교회가 혼인의 신비를 통해 서로 한 몸이 되는 모델을 이 세상에 계시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봉헌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의 혼인이 있음을 증거하는 사람들이고, 결혼하여 사는 사람들은 그 혼인이 어떤 것인지 계시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부부관계가 어떠한 것이 되어야하겠습니까? 바로 그리스도와 교회가 한 몸이 되는 것을 닮아가야 하겠습니다.
<<짧은 묵상>>
사람에겐 두 가지 상반되는 본성이 공존합니다. 행복해지고 싶기도 하고 행복하기를 원치 않기도 합니다. 사랑하기를 원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를 원하지 않기도 합니다.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기도 하고 혼자 있고 싶기도 합니다. 모든 상반되는 본성이 우리 안에 공존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어떤 본성이든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옥에 간 사람들은 반드시 이런 질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너는 왜 영원한 천상의 행복을 거부하였느냐?”
그러면 이렇게 항변할 것입니다.
“세상에 행복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고, 또 세상에 지옥에 오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도 사랑하고 싶고 사랑 받고도 싶은데 왜 이 미움만 있는 지옥에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대답하실 것입니다.
“물론 그런 마음도 있었겠지만 네가 더 강하게 원했던 것은 사랑이 아니라 미움이고 행복이 아니라 절망과 고통이었다.”
사람들은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안 좋은 것들을 바라고 선택하기도 합니다. 오늘 바리사이 사람들은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믿어도 부활은 믿지 않습니다. 만약 부활이 있다면 이혼하거나 여러 사람과 결혼한 사람들은 가족 관계가 복잡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질책하십니다. 그러나 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은 그들이 왜 부활이 있기를 원치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맘대로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심판이 있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렇게 결국 이 세상만 원하고 영원한 하느님 나라는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본인들도 모르게 참 사랑과 행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심판 때 누구나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사람은 그것을 이룰 것이고 외롭게 고통 받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주 단순한 선택이지만 80%의 사람들은 미움과 고통을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바라는 대로 될 것입니다.
사랑하면 행복하다는 것을 알지만 미워하고 싶기에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미워하기를 원치 않으셔서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쩔 수 없는 것은 없습니다. 원하면 그대로 됩니다. 미워하는 것도 지옥에 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결국 조금씩 내가 그것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결국 지금 행복하고 안 하고는 자신이 선택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참으로 행복하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참으로 행복하기를 원합시다. 먼저 영원한 생명을 찾읍시다. 행복을 포기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지금 이 순간부터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맞보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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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수영을 마치고서 체중계에 올라가는 순간 너무나도 큰 기쁨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글쎄 80Kg이하로 내려가지 않던 제 체중이 글쎄 79.8Kg으로 변해 있는 것이 아닙니까? ‘드디어 나도 70Kg 대의 몸무게이구나.’하면서 정말로 신이 났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고, 하는 일마다 다 잘 되는 것 같습니다.
그로부터 2~3일이 지났습니다. 그날도 수영을 마치고 체중계에 올라갔지요. 이럴 수가 있습니까? 80.4Kg이었습니다. 기분이 상당히 안 좋았습니다. 다시 80Kg 대의 몸무게가 되었으니까요. 그래서일까요? 하루 종일 기분이 안 좋았고, 하는 일마다 다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날 저녁에 묵상을 하면서 이러한 생각이 듭니다. 사실 79.8Kg과 80.4Kg의 차이는 딱 600g에 불과합니다. 고기 한 근의 무게 차이일 뿐인데, 이것이 하루 종일 기분 좋고 나쁘고를 결정하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결국 중요한 것은 그 무게 차이가 아니라, 지금의 상황을 어떤 식으로 받아 들이냐 라는 내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긍정적인 마음이냐, 부정적인 마음이냐에 따라서 나에게 다가오는 행복의 차이가 결정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당연히 긍정적인 마음이 나에게 행복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긍정적인 마음을 갖기란 참으로 어렵지요. 괜히 안 좋은 일만 있을 것 같고, 괜히 나쁜 결과만 내게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끊임없이 나쁜 가정을 내세우게 되고, 그 나쁜 가정이 실제 현실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좀 황당한 질문을 던집니다. 모세의 법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자식 없이 아내만 두고 죽으면 형제들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하면서, 칠형제의 이야기를 전해주지요. 사실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부활했을 때 누가 그 여자의 아내냐고 하면서, 부활이란 없다는 것을 예수님께 주장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지요.
이들은 예수님께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는 옳고 남은 틀리다는 생각, 그래서 어떻게든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하다보니 이렇게 자가당착에 빠지는 결과를 갖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 역시 이러한 모습에 빠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나를 내세우려고 하면 할수록, 다른 사람을 누르고 그 위에 올라서려는 욕심을 가득 채울수록, 긍정적인 마음보다는 부정적인 마음을 더 앞세울수록, 우리들은 더욱 더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이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는 하느님나라로부터도 멀어진다는 말이 됩니다.
이제는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신 겸손의 덕을 간직해야 합니다. 또한 부정적인 마음보다는 긍정적인 마음을 간직해서 행복의 길로 들어서야 할 것입니다.
이 길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고, 우리들이 가야 할 길입니다.
긍정적인 마음을 간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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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와 같이 된다는 것 -조용상 신부-
사두가이들이 예수께 짐짓 아는 척하는 질문을 하다가 망신을 당하는 이야기가 오늘 복음에 등장한다. 당시 사두가이들 대부분이 귀족이거나 사제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는 것이라는 예수님의 핀잔은 그들에게는 치욕적인 대답이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대표격인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이 번번이 예수님께 KO패 당하는 것을 보다 못한 사두가이들은 머리를 싸매고 예수님을 꼼짝 못하게 할 질문을 만들어 온 것인데 말이다. 사실 사두가이들이 질문한 내용을 보면 아무리 수혼법을 철저히 지키는 유다인에게조차 현실성이 없는 극단적인 예를 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들에게 대답하시면서 부활 이후의 모습에 대해 언급하시는데, 부활을 희망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귀가 솔깃해지는 대목이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사실 우리의 감정은 어떠한가? 천사들과 같아진다는 말은 매우 흥미롭게 들리지만,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다는 말은 좀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가?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이중성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천사들과 같이 순수한 영적 존재가 되어 인간으로서 가지는 한계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세속적인 재미와 쾌락 역시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욕심일 뿐이다. 그 두 가지를 모두 차지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마치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오늘 복음을 들으면서 죽음 이후의 부활을 갈망하는 우리 그리스도인 각자가 ‘정말 나는 천사와 같은 삶을 진정으로 원하는 것일까?’`하고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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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양승국신부-
<진정으로 살아있다는 것은>
우리 형제들이 애지중지하는 귀염둥이 강아지 한 마리가 있는데, 이름이 ‘삼식이’입니다. 그런데 이 녀석이 며칠째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고 있어 다들 걱정이 태산입니다.
무엇을 주던 게눈 감추듯이 후다닥 먹어치우던 녀석이었는데, 초스피드로 자기 몫을 다 먹어버리고, 엄마 몫까지 빼앗아 먹던 녀석이었는데, 벌써 사흘째 저리 식음을 전폐하고 있으니, 형제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뭘 가져다줘도 시큰둥한 표정으로 관심이 없습니다. 집안에 들어가 나오지도 않습니다. 가까운 동물병원에 가서 여러 가지 검사를 했지만 특별한 병명도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은 큰 병원으로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보려고 했습니다.
어젯밤 자러갈 때는 은근히 걱정되더군요. 저렇게 아무것도 먹지 못했는데,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내일까지는 살아있어야 하는데...그래야 큰 병원이라도 가볼 텐데...
드디어 아침이 밝았습니다. 묵상이 끝나자마자 삼식이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삼식아! 불렀습니다. 집안에 드러누워 있었지만 살며시 고개를 쳐들었습니다. 힘이 별로 없었지만 꼬리도 흔들었습니다. 얼마나 고맙던지요.
이 아침 우리가 자리를 털고 다시 깨어났다는 것, 이 순간 아직 우리가 숨 쉬고 있다는 것, 그것은 보통 큰 축복이 아닙니다.
숨결이 끊어진 생명체를 보셨습니까? 목숨을 다한 동물을 보셨습니까? 뻣뻣합니다. 끔찍합니다. 참혹합니다. 악취가 새어나옵니다. 거기에 더 이상 아름다움은 없습니다. 사랑도 없습니다. 희망도 없습니다.
아직 살아있다는 것은 가능성으로 충만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롭게 아침을 맞이했다는 것은 새 출발의 희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아직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산 이들을 위한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이 아침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리라 확신합니다.
“새 생명을 너희에게 선물로 주노라. 어제를 잊고 새롭게 살아가거라. 죄로 얼룩진 과거는 내게 모두 맡기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거라.”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아, 그 어떤 모습이든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사랑받기 충분하단다. 살아있는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은 내 기쁨이고 내 희망이며 내 행복이란다.”
숨 쉬고 있다고, 목숨 붙어있다고, 다 살아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정으로 살아있기 위해서는 참으로 살아야 합니다. 참으로 산다는 것은 죽어야 가능합니다. 매일 매 순간 죽어야 가능합니다.
알량한 내 자존심에 죽고, 평생 따라다니던 죄책감에 죽고, 어두웠던 지난 방황의 날들에 죽고, 오랜 상처에 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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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 -김찬선신부-
바오로 사도는 모든 서간의 시작을 자신이 누구인지 소개하는 말로써 시작합니다. 나는 누구인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이 自意識, 自己正體性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기를 교사라 생각하는 사람은 일적인 정체성이 가장 강한 사람으로서 가르치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학생들과의 관계를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늘 사장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직위적 정체성이 가장 강한 사람으로서 직분과 직위를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누구의 엄마로 소개하는 사람은 관계적 정체성이 가장 강한 사람으로서 자식과의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일적인 정체성이 강한 사람인가, 직위적인 정체성이 강한 사람인가, 아니면 관계적인 정체성이 강한 사람인가? 관계적인 정체성이 강한 사람이라도 인간관계를 더 중요시하는 사람인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사람인가? 그래서 누구의 엄마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딸인가?
바오로 사도의 정체성은 확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자기정체성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나 사도가 된 것도 자기가 선택해서 된 것이 아니고 자기가 잘나서 뽑힌 것도 아니고 오로지 하느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뜻과 계획에 따라 당신의 은총으로 자기를 부르셨기에 된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티모테오에게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며 이 은총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임을 얘기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행실과 업적 이전에 은총을 주시고 우리의 존재 이전에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잘 해서 은총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은총을 주셔서 우리가 무엇을 잘 하는 것이며 뽑힐 만한 자이기에 부르신 것이 아니라 부르심에 합당하도록 우리를 내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늘 티모테오서의 말씀처럼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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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하느님 나라의 거리는? -오상선신부-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오늘 주님으로부터 이러한 말씀을 들은 율법학자는 얼마나 기뻤을까?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는 자... 나는 하느님 나라에 얼마나 가까이 와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하느님 나라는 한마디로 사랑의 나라이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며 그 중요성을 깨달아 알고 실천하는 사람에게 하느님 나라는 가까이 와 있다는 말씀이리라. 그도 그럴 것이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신 분이시기에 하느님의 나라에서 그분을 맞대면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통해서가 아니면 안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얼마나 사랑의 사람이냐에 따라서 하느님 나라가 나에게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 결정된다.
나는 사랑의 사람인가? 나는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심은 이러한 목표를 갖고 사랑해야 조금이라도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씀으로 들린다.
나는 이웃을 정말 사랑하고 있는가? 나처럼, 내가 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처럼... 아니다. 하지만 그런 목표를 지니고 이웃을 사랑하려고 해야 조금이라도 이웃을 정말 사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는 루가 복음에서는 이 이야기 다음에 곧바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나온다. 이러한 사랑이 말이 아니라 실천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 이 이야기는 부자 청년의 비유를 생각나게 한다. 부자 청년도 바로 이 계명을 어려서부터 충실히 지켜왔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지적하시면서 "가서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그렇다! 사랑은 끝이 없다. 이만하면 되었다고 할 수가 없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끊임없이 실천해야 할 과제일 뿐이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 또한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까이에 와 있음을 실감하게 되리라.
<나에게 하느님 나라는 얼마나 가까이 있나?>
이 질문을 오늘의 화두로 삼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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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그 이후의 세계에 대한 믿음 -문성호 신부-
사람들은 대개 일상생활을 하면서 죽음이라는 문제를 떠올리려 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자신의 죽음의 문제를 실존적으로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게 흔치 않습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가까운 가족이나 친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보게 되면 누구나 한번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음 이후의 삶, 살아있는 우리들로서 인지적 차원의 지식은 있지만 체험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살아있는 우리 중에 그 어느 누구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십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형이 자손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의 대를 이어주어야 한다는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대를 이어주어야 한다는 형수취수혼제가 용납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그 제도를 들먹이며 칠 형제가 있었는데 첫째가 아내를 얻어 결혼하여 자식없이 죽어서 둘째가 형수를 아내로 맞았지만 그도 자식없이 죽고 셋째도 그러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그 일곱 형제가 모두 자식없이 죽고 마침내 그 여자도 죽었는데 부활 후 살아나면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난감한 질문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후의 부활의 삶은 현세의 삶이 단순한 연장이 아니라고 지적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다음에는 장가드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처럼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누군가 죽게 되면 남은 가족들이 누구에게 종속되고 누구에게 재산을 물려줄 것인가가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모두가 하느님께만 속하기 때문에 세상과 완전히 다른 질서 속에서 살게 된다는 사실을 예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하느님은 죽은 자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느님임을 천명하십니다. 죽은 사람들의 문제는 죽은 사람들에게 맡기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일에 신경을 쓰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두가이파 사람처럼 일상에서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문제에 하느님을 끌어들이면서 그 문제를 하느님의 뜻을 빌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많은 이들이 기도할 때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하는 청원기도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집안이 건강하게 해달라는 간구나 혹은 남편의 사업이나 승진을 위한 기도, 자식들의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기도, 등등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도의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의 현세욕구를 채우기 위해 하느님을 이름을 빌리는 경우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하게 이야기하면 하느님을 이름을 빌어서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삶 속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생활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겪는 일상의 삶 가운데 살아 계십니다. 우리가 행하는 하루 하루의 일과 속에서 함께 하시고 이웃들의 고통 가운데 현존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이름을 빌려 현세의 욕망을 채우는 사람이 아니라 참으로 그분의 뜻에 온전히 내맡기며 살아갈 수 있는 신앙인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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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을 통해 보이는 또 다른 세상 -신문갑 신부-
마르코가 전해주는 오늘 복음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의 눈과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곧 우리의 삶이 이 세상에 얽매여 있는지, 아니면 하늘 나라를 향하여 열려 있는지에 대해 묻는 듯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파 사람 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사실 이들은 큰 문제를 하나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넘어서는 것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후세계도, 천사나 악령의 존재도, 우리가 믿고 있는 부활도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부와 장수를 누리고 아쉬움 없이, 불편함 없이 살다가 죽는 것이 하느님의 축복의 전부라고 믿었습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이러한 생각은 지금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의 생각과도 비슷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바라지만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축복에 더 마음이 끌리고 우리도 모르게 하느님께서 주시려는 더 좋은 것보다는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이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습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오늘 예수님께 와서 부활을 믿는 이들을 조롱거리로 만들려는 심산으로 질문을 던집니다. "일곱 형제가 다 한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부활 때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 예수께서는 이러한 질문을 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는 성서의 모세의 떨기나무 대목을 들어 부활의 증거를 알려 주십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살아계신 하느님임을 보여 주심으로써 부활을 웃음거리로 만들려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의도를 물리치십니다. 더불어 예수님께서는 몸소 당신의 부활을 통해 보이는 이 세상을 넘어 또 다른 세상이 있음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눈과 마음을 이 세상을 넘어 더 먼 곳을 향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 초대에 응하기 위해서는 단 한가지 곧 주님을 참으로 부활과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이 필요할 뿐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너는 부활이요 생명인 나를 믿느냐?“ 주님의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지 묵상하며 확신을 가지고 주님께 굳은 믿음의 대답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이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여러분! 보이는 이 세상에만 모든 희망을 두려는 유혹을 이겨내고 우리의 눈과 마음을 하느님께서 주시려는 더 큰 은총에 둘 수 있도록 기도하며 오늘 하루를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남은 하루도 주님의 은총 속에서 평화로운 날이 되기를 기도하며 묵상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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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욱 신부-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유대 사회 안에서 부유함과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계급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식민지배마저도 평화와 국가적인 복지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생각하여 로마의 식민통치에 찬성하고 협조하는 세력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종교적, 민족적 주체성보다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기득권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더 큰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 백성들과 항상 함께 하시며 사람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고 있는 예수님이 사두가이파들의 눈에 가시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만을 경전으로 인정하고 다른 성경은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모세오경에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부활에 대한 사상을 부정하였는데 오늘 복음에서는 그러한 부활에 대한 교리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시도하고 있습니다. 수혼법에 따라 맏이의 아내였던 형수와 나머지 여섯 동생들이 모두 결혼을 하게 되었다면 부활 후에 그 여자가 과연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 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는 인간은 부활 후에 천사들과 같이 되어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살아간다고 하시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죽음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부활시키시는 하느님, 복음의 표현대로 하면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사두가이파들을 반박하고 계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위해서 어떠한 목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목적은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지만 지금 나의 현재의 삶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목적을 가지고 있으나 현재부터 그 목적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그 목적이 이루어 질 수 없기 때문에 미래의 목적이 현재의 나를 움직여서 삶의 자세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두가이파들처럼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그들이 가질 수 있는 목적에 한계가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삶을 부정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유일한 목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현세의 삶일 뿐입니다. 지금 내가 어떻게 잘 먹고 잘 사느냐, 극단적으로 말하면 다른 사람의 고통은 외면하더라도 지금 내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느냐 만이 문제시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부활이라는 목적을 갖고 있는 사람은 현세의 삶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만 얽매이지 않습니다. 지금 나의 삶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가장 큰 목적을 얻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현세에만 머물지 않고 하느님이라는 더 크고 위대한 가치를 찾고 그분의 뜻을 내 삶 안에서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주셨으며”, 자신이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스승으로 임명”되었다고 굳게 확신하고 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명이 비록 고난에 빠지게 하더라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부활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그것을 희망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바오로 사도의 끈임없이 주님을 향해 걸어가는 삶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과 희망,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이 가장 큰 목적은 우리를 지금 이 순간에도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내 삶의 자세와 방향이 항상 하느님을 향해 있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부활에 대한 희망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 안에서 잘 드러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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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 -김영수신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 손을 바라보아서는 손가락을 쳐든 사람의 의도를 깨닫지 못합니다. 진리를 가르쳐주는 수많은 일들과 표징들은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를 향해 인도하는 이정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를 가리키는 표상들에 얽매여 진리를 보지 못하고 맙니다. 진리를 알아들으려면 진실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진실하지 못하면 진리를 알아들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진리를 왜곡하게 되어 헛된 생각과 말과 행위로 세상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바라보지 않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볼 줄 압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존재 방식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에 하루를 맡기십시오. 지혜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죽음 너머의 세상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은 믿음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의심합니다. 살아생전의 예수님께서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확신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친히 부활하시어 죽은 다음의 삶을 보증해 주셨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장이라면 우리 삶의 방식은 달라질 것입니다. 세상은 말할 수 없이 어지러워질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의 삶을 즐기고자 온갖 폭력과 음모가 판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세상에 정의가 있고, 법이 있고, 도덕 윤리가 살아 있는 것은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삶이 있다는 사람들의 신념 때문입니다. 억울한 일, 부끄러운 일, 힘든 일 모두를 견디어 낼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힘은 바로 부활이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새벽을 열며
연세가 지긋하신 수사님이 수도원 정원에서 흙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그 수도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교만한 젊은 수도자가 그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는 이 젊은 수도자에게 어떤 깨우침을 주기 위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단단한 흙 위에다 물을 좀 부어주겠나?”
젊은 수사는 단단한 흙 위에 물을 부었지요. 하지만 단단하게 뭉친 흙 위에 부은 물은 옆으로 모두 흘러가고 맙니다. 그러자 이 나이 많은 수사님은 옆에 있는 망치를 들어서 흙덩어리를 잘게 깨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부서진 흙을 모아놓고 젊은 수사에게 다시 한 번 물을 부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이번에는 어땠을까요? 물은 흙 속으로 잘 스며들었겠지요. 이 모습을 보여주면서 나이 든 수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야 흙 속에 물이 잘 스며드는구먼. 여기에 씨가 뿌려진다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거야. 이처럼 우리 마음 역시 깨어져야 한다네. 그래야 하느님께서 깨진 마음에 물을 주시고, 씨가 떨어져 꽃이 피고 열매를 맺힐 수가 있는 것이지.”
교만한 마음에는 하느님께서 함께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측에서 먼저 우리를 깨뜨리시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두가이파 사람들도 이렇게 교만한 마음으로 가득한 사람이었지요. 그들은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하면서, 죽은 이들의 부활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사흘 만에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에요. 바로 예수님 의견에 반대하기 위해 그들은 ‘칠 형제 모두의 아내가 되었던 그 여인은 부활 후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질문을 통해서 부활이 없다는 말 같지도 않은 주장을 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교만으로 딱딱하게 굳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보니 예수님의 어떤 말씀도, 또한 예수님의 어떤 행동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나의 마음은 과연 어떤 상태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잘게 부수어진 고은 흙과 같은 마음일까요? 아니면 그 어떤 말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돌처럼 딱딱하게 뭉쳐버린 흙과 같은 마음일까요?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에게만 해당하는 하느님이라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그 시대에 그리고 그 사람 각자 각자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인 동시에 바로 지금 나의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나의 하느님’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요? 자신이 없다면, 아직도 내 마음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굳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하느님께 기도합시다. 잘게 부수어 달라고…….
반대를 위한 억지를 부리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하루 하루의 삶이 부활의 삶이 될 수 있다면 -이봉하수사-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의 핵심은 ‘부활’입니다. 언젠가는 다시 부활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지상에서의 삶을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예수님의 뒤를 이어 부활하리라는 믿음이 있기에 오늘도 충실히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에게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복음 안에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모세가 정해준 법을 예로 들며 질문을 던지지만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느님이다’라고. 그렇습니다. 부활도 천국도 산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부활과 천국을 살지 못한다면 어떻게 죽음 이후의 부활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부활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부활에 대한 신앙을 주신 것입니다. 일상 안에서 매 순간 죽고 부활해야 합니다. 죽지 않고서는 결코 부활할 수 없습니다. 그럼 일상 안에서 어떻게 죽어야 할까요? 이는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세속적인 생각과 말과 행동의 죽음을 말합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일상 안에서 부활의 결과는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그중에 하나는 기쁨입니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박경수 신부--
◆가정에서 낳고 성장하여 사회의 구성원이 되고, 사랑으로 서로 만난 두 남녀가 혼인을 통해 이루는 새로운 가정은 단순한 남녀의 결합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출산·양육과 교육 등을 이루는 인간의 가장 기초가 되는 공동체이자 최초의 학교입니다. 곧 지상의 삶은 가정에서 시작되며, 가정을 통하여 자손과 세대를 이어갑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부활을 믿지 않는 이들은 예수님께 “인간이 죽었다가 부활하여 누리게 되는 천상의 삶에서도 가정의 역할이 있을까?”라는 의문을제기합니다. 예수님은 천상의 삶에 대해 분명히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라고 하십니다. 육신이 결합하여 자녀를 낳고 세대를 이어가며 사회에서 살아남도록 교육을 통해 삶의 지혜를 전달해야 하는 일이 없으니 결혼도 교육도 없고, 가족 단위의 공동체가 해야 할 역할이 딱히 발견되지 않기에 비로소 “천사들과 같아진다”는 말씀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양승국신부-
<저물어가는 하루가 너무나 아쉽습니다>
시시각각으로 꺼져만 가는 어린 생명의 끝을 붙잡고 통곡하는 한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거의 제정신이 아닌 어머니의 얼굴은 바라보기도 힘들 정도였습니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라는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더 이상 해볼 도리가 없다고, 그쯤 했으면 할 도리 다 한 것이라고, 이제 그만 포기하라고 그렇게 타일러도 소용없습니다. 단 하루라도 더 붙들고 싶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끝까지 기대의 끈을 놓지 않으십니다.
가만히 돌아보면 이 세상에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어찌 그리도 많은지 모릅니다. 안타까움 중에 가장 큰 안타까움은 어린 생명이 꺼져가는 것이겠지요? 청춘의 나이에, 활활 타올라야할 절정기에 이 세상과 작별하는 일이겠지요.
사실 더 큰 안타까움이야 남아있는 분들의 몫입니다. 먼저 가신 분들보다 몇 백배 더 큰 허전함으로, 상실감으로 한 평생 가슴 시릴 분들도 많습니다. 밤마다 베갯머리를 눈물로 적시는 분들, 떠난 분들의 빈자리로 평생 마음이 허전할 분들, 화장실에 가서 수돗물 세게 틀어놓고 남몰래 통곡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예고도 없이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가신 분들과의 인연을 돌이켜보며 떠난다는 것은 무엇이며, 남아있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생과 사, 남음과 떠남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사실 우리 역시 언제까지 남아있을지 전혀 예측 못할 일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루하루 살얼음판위를 걷고 있습니다. 이승과 저승 그 사이에 난 가파른 골짜기를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습니다.
결국 먼저 떠난 분들, 다 하느님께서 계획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아있는 우리에게도 뭔가 하느님의 계획이 있을 것입니다.
남아 있는 우리에게 정녕 중요한 일이 무엇일까요? 사별의 충격에 늘 애통해하면서, 늘 가슴아파하면서, 늘 괴로워하면서 한평생 살아갈 것을 하느님도, 먼저 떠나신 분들도 절대 원치 않을 것입니다.
먼저 떠난 분들의 안타까움, 아쉬움, 섭섭함, 허전함을 우리의 사랑으로 채워나가는 것, 그것이 남아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떠난 분들이 못다 이룬 사랑을 우리가 대신 실천하는 일. 그분들이 못다 이룬 꿈을 우리가 대신 실현시키는 일, 그분들이 채 못 누린 행복을 우리가 대신 누리는 일,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망자(亡者)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일 것입니다.
하루가 죽음처럼 고달플지라도 절대로 힘들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세상살이가 너무 힘겹다고, 사는 것이 너무 지루하다고 투덜대지도 마십시오.
이 세상에는 단 하루의 삶이라도 연장시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분들도 부지기수이기 때문입니다. 단 1%의 가능성 앞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적을 갈구하고 있는 분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습관적으로 맞이하는 아침, 보통 아침이 아닙니다. 너무나 소중한 황금 같은 아침입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아직 우리가 이 땅에 두발을 딛고 서 있다는 것, 사실 축복 중의 축복이며, 눈물겨운 환희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는 가장 큰 선물이며 가장 감동적인 사건입니다.
우리가 이 아침, 지저귀는 새소리와 함께 다시금 눈떴다는 것, 커튼을 젖힐 수 있다는 것, 창문을 활짝 열수 있다는 것, 참으로 크신 주님 은총의 결과입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먼저 떠난 분들은 이제 자비로운 하느님 손에 맡겨졌습니다. 그분의 따뜻한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계실 것입니다. 더 이상 울며 애통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 자비에 맡겨드리는 일, 끊임없이 하느님 자비를 청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이제 시선을 우리의 오늘에 돌려야 할 때입니다. 하느님은 바로 살아있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이 땅 위에서 살아 숨 쉬는 우리, 아직 부족하기에 죄도 짓고 방황도 하는 우리, 그러나 아직 살아있기에, 다시 말해서 주님 은총의 손길 안에 있기에, 감사하며, 기뻐하며, 행복해하며 그렇게 살 일입니다.
저물어가는 하루가 너무나 아쉽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전해야 했었는데,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좀 더 실천했어야 했는데, 좀 더 행복하게 살아야 했었는데...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는 것은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2티모 1,1-3.6-12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복 음 : 마르 12,18-27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여러분들은 영원한 생명을 믿으십니까? 죽고 난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있으신지요?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믿지요. 죽은 후에 하느님의 심판에 따라서 천국과 지옥과 연옥의 삶이 있음을 믿고 또 그 믿음대로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신자 모두가 그런 생각으로 사는가 하면 그것은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입으로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행동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믿는 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 있지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내가 정말 영원한 생명을 믿고 지향하며 사는 사람인지 아니면 입으로면 믿는다고 하는 사람인지를 한 번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두가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생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이었지요. 이 사람들은 모세오경만을 믿을 뿐 영혼 불멸이나 육신의 부활, 또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대단히 현세적이었지요. 때문에 이 세상에서만 잘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안락한 삶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기득권을 유지하고 치부를 위해서 침략군인 시리아군이나 로마군과 결탁하여 이권을 유지하고 동족을 착취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지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오늘 예수님께 와서 묻고 있습니다.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만 두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이렇게 일곱이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마르12,19-23)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부활 때 어떻게 되겠느냐고 묻는 그 자체가 모순이지요.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불순한 계략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진리도 진실도 찾아볼 수 없었던 그들은 얼마되지 않아서 역사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가고 말았지요. 이렇게 사두가이들은 하느님을 믿는다고 모두 다 영생을 믿고 또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문제는 천주교 신자들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교(儒敎)라고 들어보셨습니까? 공자를 시조(始祖)로 하는 중국의 대표적 사상으로 ?교(敎)?라고 이야기하기에는 무리가 있지요. 인(仁)과 예(禮) 사상이 발전하여 동아시아 나라의 일상 생활 윤리 양식에 깊이 영향을 끼친 이 사상에는 죽은 후의 영원한 생명에 관한 영생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현세적인 가르침을 주는 이 유교를 우리는 종교라고는 잘 이야기하지 않지요.
그럼 유교는 어떠한 형식으로 영생을 희망할까요? 유교의 중심은 제사와 후손에 있습니다. 유교에서는 제사를 굉장히 중요시하지요. 또 자식을 중요시하는데 자식 중에서도 아들에 큰 비중을 두지요. 남자아이를 낳아 대를 잇는 것으로 영생을 확인하려들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조상님과 제사를 지내는 본인과 후손, 이렇게 3대가 한자리에 모이는 것을 말합니다. 유교의 제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이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인 셈입니다. 그래서 유교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제사는 참으로 중요한 예식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식이 없어서 제사를 드리지 못한다는 것은 조상으로부터 이어온 생명력이 끊기는 것으로 조상 볼 면목이 없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첩을 얻어서라도 아들을 낳으려고 애를 썼지요.
또한 제사를 드리려면 반드시 남자가 있어야 합니다. 여자는 자격이 없지요. 그 생명에 다른 씨가 들어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문의 혈통은 남자들로 이어졌고 지켜졌습니다. 따라서 아들에 대한 집착은 영생과 관계되어 강할 수밖에 없었지요. 자기의 영생이 그 자식으로서 확인된다고 믿었기에 모든 재산을 제사를 주관하는 자식인 장자에게 몰아주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천주교 신자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영생을 믿는 우리는 자식에 집착하지도, 또 제사에 집착할 필요도 없으며 모든 재산을 장자에게 물려줄 책임도 없습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이지요. 우리에게는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야 할 책임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에 맞갖게 살고, 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요? 자식을 잘 키우고 대를 잘 이어가는 것일까요? 아니지요. 그것은 너무나도 유교적 발상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가난한 사람들과 얼마나 나누면서 사는가, 바로 이것이 영원한 삶을 믿고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의 기준이지요. 이제 확연해집니다. 강론 서두에 저는 여러분들께 물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믿으십니까??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한 자녀 교육과 자식에게 좀더 많은 재산을 몰아주는 데만 모든 힘을 다 쏟으며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영생을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고 있다면 차라리 유교 신자라고 말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두가이들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지요. 영생을 믿고 또 희망한다면 그에 맞게 살아갈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보지 않았느냐??(마르12,25-26)
죽은 후의 영원한 삶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지요. 그렇습니다. 부활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천사들처럼 될 것이고, 죽은 이들의 부활은 하느님 나라를 증언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행동은 믿지 않는 자들의 것이라면 지금부터라도 바로잡아야 합니다.
자식에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오. 사랑을 넘어선 집착은 영생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입니다. 요즘 부모들은 지나치게 집착하고 그 결과 서로가 불행해져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현세에 집착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믿으며 하느님을 향하여 살아가면 자식에 있어서도, 재산에 있어서도, 심지어는 죽음 앞에서도 자유로울 것입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믿고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에 맞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신자답게 산다는 것,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는 것은 그에 맞추어 준비하며 살아가는 책임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많은 순교자들, 동정녀들, 수도자들은 자식도, 가정도 없었습니다.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만을 희망했고 또 실제로도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지요. 영원을 믿지 않는 유교 신자들로서는 결혼도 안 하고 자식도 없이 사는 것은 상상 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일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것이 100여 년에 걸친 우리나라의 천주교 박해 사건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이해하지 못하고 제사와 혈통만을 중시하던 유교 사대부들의 끈질긴 반대로 수많은 순교자들이 소중한 목숨을 바쳐야 했지요.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고 하면서 유교 신자처럼 산다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들의 사고 속에는 그런 유교적인 요소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별 의식 없이 살아가고 있지요.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자식 농사가 얼마나 잘 되고 재산을 얼마나 많이 쌓아 놓았느냐로 말해지는 것이 아니지요. 오직 하느님 안에 빛나는 것은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난한 이웃과 함께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른다는 나의 신앙 행위가 실생활에서 어떻게 표출되고 있는지 돌아보는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존재방식 : 순수현재
-박상대 신부-
어제 복음에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헤로데 당원들이 예수께 와서,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로마황제에게 주민세(인두세)를 바쳐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물었다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라"(17절)는 놀랄만한 명답(名答)을 듣고 물러갔다. 오늘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께서 와서 구약의 수혼법(嫂婚法)을 부활과 관련지어 질문을 던진다. 그들의 질문은 구약의 수혼법(창세 38,8; 신명 25,5-10)에 근거를 둔 것이긴 하다. 수혼법에 의하면 남편이 죽게될 경우 가장 가까운 형제로부터 친척까지(룻기 4,1-8) 미망인과 결혼해야하고, 이렇게 하여 낳은 첫 아들은 고인의 아들로 인정하여 이스라엘 가문에서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제도를 말한다. 그러나 칠 형제가 모두 맏형의 부인을 두고 자식 없이 살다 죽었다면, 부활 때 그 여인은 일곱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질문은 너무 과장된 가공(架空)의 질문이라 하겠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이 질문은 사실상 두 가지 측면을 의도하고 있다. 하나는 그 시대에 통하던 부활사상을 우습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된다면 예수까지 난처하게 만들 심상이었다.
우선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신약성서에서 "사두가이파 사람"은 94번 등장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보다 훨씬 드물게, 모두 14번 등장하는데, 마르코와 루가복음에 각각 1번(마르 12,18; 루가 20,27), 마태오복음에 7번, 그리고 사도행전에 5번 등장한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정확한 기원을 알기 위해서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통치하기 시작했던 기원전 333년까지 거슬러가야 한다. 알렉산더 대왕은 침공한 모든 곳에 헬레니즘 문화를 퍼뜨린 장본인으로 유명하다. 이때부터 기원전 63년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던 때까지의 과정에서 지도층의 유다인들은 크게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에세네파, 열혈당원(젤롯당원), 꿈란공동체 등으로 분리된다. 비록 여러 번 나라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였지만 야훼신앙과 율법준수에 대한 정신은 누구보다 강했던 유다인들이다. 헬레니즘 문화와 이교도의 신과 여신의 숭배를 강요하던 희랍의 프톨로메오 왕가와 셀레우쿠스 왕가의 통치는 약탈과 박해로 이어지고, 결국은 유다인들의 무력(武力)저항을 불러오게 되고, 하스모네 가문의 마따니아가 선봉에 선다. 마따니아의 저항운동은 "하시딤"(경건한 자, 율법에 충실한 자들) 무리와 결탁하면서 막강한 힘을 얻게 되었고, 그의 아들 유다(마카베오)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유다는 마카베오항쟁을 일으켜 셀레우쿠스 군대를 무찌르고 기원전 164년 12월에 예루살렘성전을 재건하고, 그 후 해마다 성전봉헌 축제(하누카)를 지낸다. 이를 계기로 종교적인 상황은 호전되었지만 정치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문제는 유다의 동생 요나단에 와서 벌어진다. 그와 그 일가는 헬레니즘 세력과 오히려 결탁, 협정 등을 통하여 유다를 통치하는 실세로 둔갑하였고, 다윗 시대 이후로 사독 가문이 맡아왔던 대사제장직을 겸하는 탐욕을 부렸던 것이다. 이에 "하시딤" 무리들이 결별을 선언하고 "분리된 자", "의로운 자"로 자처하는 율법 경건주의자들이 바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며, "경건한 자"로 자처하는 "에세네파" 사람이다. 후자는 속세를 떠나 사해 근처에 모여 꿈란 공동체를 이루었다. 나머지는 끝까지 무력으로 종교와 정치의 자유를 꾀하려는 열혈당원에 속한다. 결별을 선언한 자들이 모두 떠나고 남은 무리들이 바로 하스모네 가문의 후손들인 사두가이파 사람들인 셈이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당시의 대사제장직을 독차지하고 최고의회 산헤드린의 구성원으로서 당대 최대의 권력을 누리는 자들로서 율법에 대하여 상당히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들은 단지 모세에게서 비롯된 율법, 즉 모세오경의 권위만을 인정하고 구전(口傳)된 율법이나 계율, 조상의 전통은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모세오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기원전 2세기경부터 싹튼 부활사상을 믿지 않았으며, 천사의 존재, 사후(死後)의 상벌, 묵시론적인 사변과 같은 새로운 개념들을 철저하게 부정하였다.(사도 23,8) 원래 기득권은 변화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법이다. 사실 이스라엘은 예수의 출현으로 적지 않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변화와 개혁을 추구하고 날로 많은 추종자를 얻어 가는 예수를 위험한 인물로 간주하여 배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두가이파의 가공할 질문에 예수께는 성서와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그들의 무지를 먼저 탓하신다. 구약의 수혼법과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가 그런 오류를 빚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어서 두 가지 의도를 내포한 답변을 시도하신다. 첫째는 육체부활의 의미를 밝히시는 것이고, 둘째는 하느님께서 죽은 이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의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아무래도 세상에 빗대어 천국을 상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육체의 부활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할 때 육신도 함께 부활한다면, 그 육신이 어떤 모양일지는 지금의 육신의 틀을 벗어나 생각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무지하게 더울 때, 시원한 곳을 천국이라는 생각, 무지하게 배고플 때 한 술의 밥이 천국이라는 생각, 사막에서는 오아시스가, 유목민들에게는 어렵게 찾아낸 푸른 풀밭이 천국과도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육신의 부활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차원임을 분명히 하신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과 발현에서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는 차원이다. 예수께서는 모세에게 하신 하느님의 계시말씀(출애 3,6)을 새롭게 해석하여 이 계시가 이미 부활사상을 내포하고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신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이사악의 하느님이요, 야곱의 하느님이다"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늘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눈에는 아브라함도 이사악도 야곱도 모두 죽었다. 인간이 죽어야 하는 이유는 태어났기 때문이다. 즉 시작이 있기 때문에 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반면에 하느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시니 늘 영원하시다. 이를 계시신학적 언어로 "순수현재"(pura praesentia)라고 한다. 순수현재란 하느님의 존재방식으로 과거와 미래가 없는 늘 순수한 현재(現在)의 상태로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그가 죽었던, 살았던, 살 것이든, 늘 살아 계신 하느님이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