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의 평등은 공정하지 않다^^
-조선일보(7/12)-
-김현숙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
정치의 계절이다. 대선 후보들이 소득 불평등 해소 방안을 놓고 갑론을박할 게 자명하다.
소득 분배에 대한 가장 전통적인 논쟁은
존 롤스(John Rawls)와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의 상반된 주장이다.
롤스는 차등의 원칙을 강조하는데, 사회에서 가장 혜택을 받지 못한
최소 수혜자 계층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 한 차등적 분배는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의 최소극대화 기준(maximin criterion)은 사회 내 소득의 불균등을 인정한다.
노직은 경제활동의 결과를 평가하는 대신 과정에 주목한다.
소득 분배의 결정 과정이 정당하면 그 결과의 불평등은 공정한 것이라고 본다.
즉 기회의 균등이 결과의 균등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능력주의(meritocracy)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를 분배하는
보상 시스템으로 노직의 철학이 능력주의에 더 가깝다.
문 정부의 기회·과정·결과에 대한 공정 논리는 정치 캠페인의 미사여구에 불과했고,
실천 의지는 허언에 가까운 내로남불 결정체였다.
더욱이 달성하고자 하는 정치 철학적 목표가 무엇인지도 헷갈리게 한다.
단어 그대로 해석된다는 전제하에 기회의 공정함에 동의한다.
누구는 입사 시험을 볼 수 있고,
누구는 시험을 볼 수 없다면 이는 기회의 공정함을 박탈하는 것이다.
청와대 비서관을 토너먼트 형식으로 뽑을 필요는 없지만,
다른 청년과 비교할 때 이 시대 청년의 삶을 대변할 경험과 역량이 부족하다면
기회가 공정한 것이 아니라 운이 좋은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과정의 공평함에 대해서 동의한다.
어떤 취준생에게는 커닝을 용인하고,
어떤 취준생에게는 엄격한 시험 룰을 적용한다면 과정의 공평함은 무너진 것이다.
문 정부의 핵심 인사들이 미리 정보를 알고 부동산 투기를 하거나
전세금을 슬쩍 올린 것은 과정의 공평함이 정권 내부로부터 일거에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종착점을 알지 못할 때 가능했던 정치 게임의 협조가 끝 시점이 드러나자
자기 살길을 찾는 죄수의 딜레마 균형으로 전환된 것뿐이다.
문제는 결과의 정의다. 기회와 과정이 절차대로 잘 이루어져도 시험 결과 합격자와 불합격자는 나온다.
결과의 정의는 그런 불평등을 수용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문 정부 정책은 그 반대다. 자사고를 무조건 없애는 것은 능력주의를 거부하는 것이다.
노동 시장에서 성과연봉제 도입을 미루고 저성과자 해고 지침을 폐기한 것은 결과의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다.
인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도 결과의 평등을 실현하고자 한 행위이다.
결국 문 정부의 공정은 결과의 평등까지 포함한 개념이고, 능력주의를 배척하는 것이다.
능력주의에 대한 지나친 반감은 시장을 통한 자원 배분을 경시하고,
시장 대신 자원 배분을 더 공평하게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 위정자를 만든다.
사회 전체의 최선을 추구하는 선한 사회 계획가(social planner)는
경제 이론에서는 가능하지만, 정치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집에 빠진 정치 독재자 집단은 더 부패한 권력 체계를 만든다. 강남 집값을 잡겠다고 전쟁하다
수도권 전체 집값을 폭등시켜 자산 불평등을 극도로 심화시키고,
그 와중에 권력 내 집단은 집값 상승의 혜택을 챙긴 게 그 증거다.
탄소 중립을 선언하면서 세계 최고 원전 기술은 홀대하고,
기술력이 모자란 풍력·태양광을 늘리는 반시장적 전원 구성도 그 증거다.
빈곤 완화는 소중한 경제적 가치다. 최빈곤층을 고려해야 한다는 롤스의 논리에 따라
기초생활보장제도를 강화할 수도 있고, 적정한 최저임금도 필요하며,
근로장려금처럼 근로 의욕을 높이는 소득 보조 고용정책도 중요하다.
그런데 소득 재분배 과정에서 고려해야 할 두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소득 재분배 시스템이 모든 시민을 안주하게 하고 일할 의욕을 상실시킨다면 그 사회에 내일은 없다.
세금이 너무 과하거나 소득의 공적 이전이 너무 후하면 누가 일을 하겠는가?
기회와 과정이 공정했다면 분배 결과는 수용되어야 한다.
다만 빈곤으로 인한 사회적 폐해를 줄이고
긍정적 외부 효과를 실현하기 위해 빈곤층을 위한 사회 안전망은 필요하다.
둘째, 신체 조건이나 부모의 경제력 등 태어날 때
주어지는 운이나 한계 등이 사람의 능력이나 기회에 큰 영향을 미친다.
초기 조건이 좋지 않은 계층에게 더 좋은 교육 기회를 제공하여
출발선이 같아질 수 있도록 기회의 평등을 최대한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
청년수당이나 기본소득·자산 같은 현금 살포 정책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을 통해 경제적 지위를 바꿀 수 있는 계층 이동 사다리가 재건되어야 한다.
다음 정부는 결과의 평등에 매달려 무분별하게 시장에 개입한 문 정부의 포장만 요란했던 공정 논리와 결별하길 바란다.
^^한국 대통령, 興亡의 감각 갖고 역사 앞에 겸손해야^^
-조선일보(7/10)-
-강천석 논설고문-
세계를 호령하던 반도체 覇權 국가 일본의 황혼
우리가 남 따라잡고 앞섰다면
남도 우리를 앞설 수 있다는 이치 잊지 말아야
며칠 전 삼성전자는 올해 2분기 매출 63조원·영업이익 12조5000억원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그걸 보고 그 전전날 일본 신문 기사가 떠올랐다.
‘일본 반도체 산업 부활 전략을 듣는다’라는 제목을 단 인터뷰 기사였다.
반도체 산업 재생(再生) 전략을 지휘하고 있는 기업 쪽 사령탑 두 명이 나섰다.
일본은 4월 미⋅일 정상회담에서 반도체 공급처 다변화와
자국(自國) 내 생산기지 확보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미국과 손잡고 대만과 제휴를 강화한다는 후속 대책도 내놨다.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일본은 최첨단 반도체를 만드는 기반 자체가 허물어졌다.
한국·미국·중국은 일본과 투자 규모 단위가 다르다.
당장 정부 투자를 몇 조(兆) 엔(円) 단위로 늘려야 한다.
지금으론 한국 삼성전자·대만 TSMC·미국 인텔과 경쟁이 되지 않는다.
인재(人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20년 퇴보를 만회하려면 최소 10년이 걸린다.
대만 TSMC와 제휴를 통해 기술을 습득(習得) 할 기회부터 확보해야 한다”
씹으면 몇 가지 뒷맛이 남는다.
우선 1990년대 초까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렸던 일본 반도체 산업의 현황이다.
30년 전 일본은 자신이 무적(無敵)이라 믿었고 세계도 그걸 의심치 않았다.
기자도 그 시절 현장에서 일본 반도체 산업의 영화(榮華)를 지켜봤다.
1990년 1월 네덜란드 필립스사(社) 사장이 일본을 방문했다.
필립스가 소유하던 반도체 제조기기(器機) 회사를 매각하기 위해서다.
당시 반도체를 만드는 설비 제조 회사의 세계 톱(top) 10 가운데 1위부터 9위까지가 일본 기업이었다.
필립스가 하나 쥐고 있던 그 회사를 일본 시장에 내놓은 것이다.
지금 일본에는 반도체 전성시대를 받쳐주던 대리석 기둥 몇 개가
잡초 무성한 빈터에 서 옛 영광을 들려줄 따름이다.
허리 역할을 하던 기술 인력은 반도체에 대한
관심이 더 높은 나라·보수가 더 많은 나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제 대(代) 마저 끊겼다. 한국 원전(原電) 산업의 10년 후가 이럴 것이다.
묘하게 걸리는 대목이 있다. 일본 정부의 투자 규모와 역할 확대를 주문하면서
비교 대상으로 한국·중국·미국을 차례로 들고,
일본 기업 경쟁 상대로 한국 삼성전자·대만 TSMC·미국 인텔 순(順)으로 꼽았다.
한국 정부는 삼성전자 공장에 송전선 하나 제대로 연결해 주지 않았다.
삼성의 최고 의사 결정권자는 4년 내내 수사와 재판을 받다 두 번째로 감옥에 갇혔다.
한국 정부는 상(床) 차려지면 숟가락 들고 생색을 냈다.
세계 파운드리(반도체 수탁(受託) 생산) 시장 점유율은
대만 TSMC가 54%, 삼성전자가 18%가량이다.
그런데도 과녁은 삼성전자다. 이유가 있다.
중국 견제의 반도체 전략에서 미국과 일본은 겉은 물론 속계산까지 일치하는 동맹이다.
미국 대통령이 한국 기업 대표를 불러일으켜 생큐(thank you) 했다 해서
큰 그림의 구도가 단번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 그림 속에서 대만과 TSMC는 미국·일본의 우군(友軍)이다.
TSMC가 1987년 설립돼 걸음마를 떼던 시절 일감을 몰아준 것도 일본이다.
반도체 정치는 비정(非情)하다. 적대 국가는 물론이고 우방 국가도 예외가 없다.
중국이 첫 견제 대상으로 오른 것도 아니다. 일본은 35년 전 미국의 폭격을 맞았다.
1986년 미국은 일본을 압박해 미국과 다른 지역으로 수출하는
일본 반도체 가격 감시를 의무화하는 협정을 맺었다.
이 한방으로 일본의 반도체 패권(覇權)은 금이 갔고,
높아진 수출 가격의 틈을 비집고 한국 반도체는 세계로 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얼마 전 대통령은 일본의 반도체 관련
소재·부품·장비 수출 금지를 극복했다는 자축연(自祝宴)을 열었다.
일본의 수출 금지는 일본 내에서도 자해(自害) 행위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우리는 위기 극복의 성공 공식을 찾아내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향해 전진했다”고 감격스러워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면 세계 흐름을 더 진중(鎭重)하게 읽어야 한다.
일본 반도체 쇠망사(衰亡史)에는 목숨 있는 것에 죽음이 따르듯
모든 권세(權勢)에는 끝이 있다는 성자필쇠(盛者必衰)의 교훈이 담겨 있다.
이런 흥망(興亡)의 감각은 우리가 누군가를 따라잡고 앞서나갔다면
뒤에 오는 나라도 우리를 따라잡고 앞서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겸손을 잃지 않도록 해준다.
대한민국 대통령 되겠다는 사람이 두 다스 가깝지만
이런 흥망의 감각과 역사 앞에서 겸손한 자세는 찾기 어렵다.
^^[사설] 자영업자들 “민노총 8000명은 놔두고 3명은 막나”^^
-조선일보(7/10)-
코로나 확진자가 계속 급증하면서 정부가 12일부터
수도권 사회적 거리 두기를 최고 단계인 4단계로 올렸다.
9일 0시 기준 새 확진자는 1316명으로, 전날(1275명)에 이어 이틀 연속 최다 기록을 이어갔다.
방역 당국은 9일 “이번엔 과거 유행보다 더 많은 환자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고
당장 오늘도 어제보다 (확진자가) 증가하는 양상”이라고 했다.
정부가 내놓은 4단계 거리 두기 방안은 그동안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12일부터 오후 6시 이후 ‘3인 이상 모임’이 불가능해졌다.
초유의 ‘사실상 6시 통금’이 현실화한 셈이다.
결혼식·장례식에도 8촌 이내 혈족과 4촌 이내 인척 등 친족만 참석 가능하다.
종교 활동도 비대면으로만 가능하다.
접종 완료자는 모임 인원에서 제외한 백신 인센티브도 사라졌다.
심지어 헬스장 러닝머신은 빨리 걷는 수준인 시속 6㎞ 이하로 작동해야 하고
줌바 에어로빅 음악은 120bpm으로 제한하는 내용도 들어 있다.
사실상 영업 제한을 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자영업자들은
“지난주 민노총 8000명 집회도 했는데,
이제 와서 3명 모임까지 막느냐”고 분노한다고 한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강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국민의 이해를 얻을 만큼
정부가 할 일을 제대로 했느냐는 데는 도저히 고개를 끄덕거릴 수 없다.
이번 4차 대유행은 정부의 안이한 상황 판단에다
변이 바이러스 확산, 백신 부족 사태까지 겹치면서 발생한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델타 변이가 확산하는데도
정부는 6월의 일시적 백신 접종 성과에 취해 있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최근 잇따라 발표한 백신 인센티브 도입, 거리 두기 완화 예고,
소비 진작 정책 등은 ‘이제 코로나 사태가 거의 끝났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지기에 충분했다.
정부부터 긴장감이 풀어졌으니 전체적 경각심이 해이해지고 대규모 확산으로 이어진 것이다.
결국은 코로나 상황을 끝낼 수 있는 것은 백신 접종뿐이다.
그런데 지금 백신 보릿고개여서 맞고 싶어도 맞을 수가 없다.
한때 백신을 하루 85만여 명까지 접종했지만 요즘은 10만명 안팎에 그치고 있다.
확진자는 날로 늘어나는데 백신 접종 속도는 오히려 후퇴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55~59세 연령층이 접종을 시작하는 26일까지는
백신 수급 상황이 나아지기를 기대하기 어렵다니 할 말을 잊는다.
정부가 국민에게 고통을 요구하는 것 외에 제대로 하는 일이 뭐가 있느냐는 지적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