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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환경이 너무 낯설면 어떤 것이 아름다운 것인지, 어떤 것이 생명을 주는 것인지도 분간하기 어렵다. 그럴 땐 경청하며 기다려야 한다. 가만히 긴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낯설다는 것은 멀다는 뜻이고, 우리가 아직은 서로 맞닿아 있지 않다는 뜻이므로. 이번 콩고로부터의 갑작스런 초대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온전한 개방, 그것뿐이었다. 그저 나는 함께 공부하던 이십 년 전 친구의 강의 초대를 받은 채, 사람들의 놀람을 뒤로하며, 아프리카의 깊이와 넓이를 만나 보기로 한 것이었다.
이란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에'처럼 콩고 공화국에 있는 내 친구의 집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처음 샌프란시스코 공항을 떠날 때만 해도, 이 글로벌한 세상에서 비행기 여러 번 갈아타는 게 무슨 대수일까 하고 여겼다. 그런데 새벽, 워싱턴 디시에서 아프리카 방향으로 떠나는 비행기를 타는 곳으로 옮겨 가면서 무언가 달라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더구나 에티오피아의 아디스 아바바 공항에 내렸을 때, 무수한 사람들의 틈 속에 겨우 자리를 얻어 앉아서, 나는 지금 무엇을 향해 초대받고 있는 건지에 대한 의문을 누를 수 없었다.
에티오피아에서 비행기를 탔는데, 어느 나라, 어느 도시인지도 모를 어느 곳에서인가 쉬었다가 다시 비행 시간만 24시간을 채워, 콩고에 도착했다. 세관 검사 전에 세수도 하고 정돈을 하고 친구를 만나고 싶었지만, 비행기에서 내린 그곳엔 아무것도 없이 빨간 흙만 보였다. 서툰 풍경에 심호흡하며, 이민국에 줄을 섰는데, 대놓고 돈을 요구했다. 무언가 삼엄한 느낌의 이 타락한 공항을 보면서, 우리나라 60년대를 생각했다. 그래 우리도 이런 때가 있었지. 그렇게 생각하니 내 맘이 관대해졌다. 그리고 십여 년 만에 만난 친구의 환한 얼굴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오랜 친구는 마치 엊그제 헤어진 것 같고, 우리는 마치 버클리인 것처럼 스스럼없이 수다를 떨며 공항에서 짐을 찾고 예수회 숙소로 왔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눈과 마음에 넣느라 바빴다. 내 맘에 깊이 들어온 전례는 장례 미사였다. 이 나라 사람들에게 무척 존경받는 누군가가 돌아가셔서, 그분의 집 마당에서 미사를 드렸다. 인상적인 것은 커다랗게 친 텐트였고, 그 지붕 아래서 사람들은 기도를 올렸다. 미사 중 뒤편에서는 서글프게 곡을 했는데, 정말 슬픔이 옮겨 오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미사 후에 어울려 부르는 춤과 노래였다. 종말적인 희망과 슬픔이 공존하는 전례를 바라보다 감동이 몰려왔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군가를 보내드리는 일은, 결국 가슴이 아픈 슬픔이지만, 이 세상 너머, 그 완전한 세상으로 넘어가는 고인을 위해 기뻐하고 춤추는 이 몸짓이 참 아름다운 작별 인사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우리 같으면, 장례미사에서 그렇게 춤을 추지는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다, 울음을 절대 보이지 않은 미국 사람들의 장례, 그리고 눈물이 허용되지만, 기쁨을 생각할 수 없는 우리의 장례 장면들이 겹쳐 보였다.
콩고의 우슬라회 수녀원에서 글로벌 자매애를 경험한다. 아름답고 섬세하게 준비된 점심, 그리고 춤과 이야기 속에서, 글로벌한 가난도 멋지게 살아 보자는 수도자로서의 약속을 이어 가기로 한다. (사진 제공 = 박정은)
강의 준비를 하다 내가 이곳에 대해 무얼 안다고, 감히 신학과 영성을 그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세계 여성의 날 기념으로 열린 여성주의 영성 강연을, 서로 이야기를 듣는 경청의 원리만 설명하고, '백인과 흑인이 하나가 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서로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그들은 불어로 주로 이야기를 하고, 나는 해석해 주는 말을 들었는데, 식민지 시대를 살아낸 여성들이 토로하는 아픔은 실로 적나라했다. 그중 한 여성은, 자신을 동물처럼 쳐다보는 백인의 시선에 대해 이야기했다. 타자의 시선에 대한 좌절과 분노였는데, 그 속에서 아프리카에 대한 편견과 상상으로 만들어진 자기의 이미지를 깨고, 고유한 아름다움을 찾는 작업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안쓰러웠다. 또한 이것이 서구인의 타자로 서 있는 여성들의 자아에 각인된 공통된 아픔이란 생각에 마음이 서늘해졌다. 한 여성은 “너는 우리보다 피부가 하얗잖아”라고 해서, 나는 “아니야, 나는 노랗지. 세상이 꼭 블랙과 화이트로 구분되는 것도 아니야. 세상엔 노랑도 있고, 빨강도 있어. 그리고 내 존재가 그냥 노랑만이 아니듯이, 너도 꼭 까망만은 아니잖아”라고 조금은 가볍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는 이들에게 또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내가 이런 것이 다 식민 후기 담론이라고 학문적으로 설명해 버리기엔 너무 아프고, 너무 깊어서, 그저 경청하면서, 더 깊은 물음표를 내 맘에 담기로 했다.
나는 여기서 알리샤와 마누엘라라는 소녀들과 친구가 되었는데, 그들의 꼬불꼬불한 머리를 만져 주고, 그들이 즐겁게 내 머리를 땋아 주었을 때, 이 순간에 느낀 정감이 어떤 신학적 담론보다 깊이 사람을 만나는 순간 같아 은혜로웠다. 그리고 나는 자기 머리를 좋아하는 여자를 본 적이 없다고 이야기해 주면서, 나중에 한국에 오면 내가 매직 파마 하는 곳에 꼭 데려다 주기로 약속했다. 나도 내 고수 머리가 싫고, 이 소녀들은 킹키한 머리가 싫고, 또 누군가는 그들의 직모가 싫어 파마를 하는 거라고 생각하니, 머리를 함께 매만지며 하는 신학(doing theology)으로 세상의 모든 여성은 하나가 될 수도 있다는 엉뚱한 생각이 든다.
좀 더 이 나라를 배우고 싶어져서 혼자 박물관을 물어 물어 찾아갔는데, 그들의 문화 자료들은 유럽에 거의 탈탈 털리고, 소중한 몇 점의 실물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시간이 좀 지나서 많은 학생들이 현장 수업을 하러 모여들고 있었다. 교복을 입은 아이들은 핸드폰으로 서로 사진을 찍으면서 즐거운 모습이었다. 이 나라의 무언가 산만하면서도 활기찬 모습은 바로 이 젊음 덕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들이 자라면, 이 나라는 또 얼마나 멋있게 될까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면서 하늘나라는 이런 곳에서 더 많이 느껴진다는 생각을 했다. 여전히 사랑스런 아이들은 내게 다가와서 영어를 해 보고, 여성들은 너는 어떻게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살아남았느냐고 묻는다.
루붐바시 국립 박물관을 가 보니, 유구한 역사 속에 빛나야 할 유산들은 다 도둑맞았고, 우연히 사색하는 사람의 조그만 동상을 만나다. 명상 속에서 그의 손은 밖으로 향했는데, 경청의 미학을 가르쳐 주는 듯하다. ⓒ박정은
그리고 내 친구 투쌍 신부는 하느님께 사로 잡혀서 하늘나라를 그린다. 숲을 개간해서 농지로 만들 생각을 하는 그를 따라, 그곳 주민들과 야생 속으로 들어갔는데, 주민들은 그런 나를 사려 깊게 도와주었다. 내 키를 넘는 풀섶을 지나며, 이곳에 나무를 심고, 동물을 키우고, 소시지 공장을 세워 동네 사람들을 돕고 싶어 하는 내 친구 눈은 꿈으로 빛났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 예수님을 생각했다. 내가 이곳에서 한 여러 차례의 강연들은 그저 신학자로서 한 공부의 결과물일 뿐,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들의 경청이 귀하다. 그러니 이제 나는 이 낯선 땅에서, 어디로 마음을 더 열어야 하는 거냐고 주님께 여쭈어야 할 시간이다. 아무도 없는 예수회 경당에 앉아, 숨을 내쉴 때, 문득 사랑의 찬가 속으로 들어오라는 말이 내 맘속에 들린다. 가난한 것, 불편한 것, 그리고 환대의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이곳. 땀 냄새, 흙의 냄새, 그리고 빼앗긴 땅의 냄새가 넘쳐나는 이곳. 그 속에서 아프리카를 희망의 자리라고 이야기하는 건, 다 빼앗긴 후에 새롭게 시작되는 생명력 때문이란 생각을 한다. 아프리카, 내가 감히 무어라 네게 말할 순 없지만, 너는 헐벗고 아파서, 새 생명의 땅이 되는 거라고 고백해 본다. 난 그저 그 희망의 신학에 내 발을 살짝 담그고, 새로운 그리고 오랜 우정들에 의지하여, 함께 그물 한 코를 짤 수 있다면 기쁘겠다. 그래서 아프리카를 떠나며 혼자 에디트 삐아프의 노래, '사랑의 찬가' 구절들을 되지도 않는 불어로 띄엄띄엄 불러 본다.
Tant qu’mon corps fremira sous tes mains(사랑이 내 아침에 넘쳐나는 한)
Peu amor, puisque tu ma’aimes(내 몸이 네 손 아래에서 떨리는 한)
J’iris jusqu’au out du monde(나는 세상의 끝으로 갈 것입니다)
Dans le bleu de toute l’immensite(거대한 푸른 하늘 속에서)
Dan le ciel, plus de probleme(아무 문제도 없는 하늘 속에서)
Dies reunit ceut qui s’aiment(신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어 줘요)
하느님과 사랑에 빠진 한 수도자는 한키가 넘는 풀숲 속에서, 농장을 보고, 과일 나무를 꿈꾸며, 아이들이 공부할 학교를 그리고 있다. 그래서 거친 풀숲이 갑자기 아름답게 보인다. ⓒ박정은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상처받은 인간다움에게: 나, 너 그리고 우리의 인문학"을 펴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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