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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3. 묵상글 들 (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 신앙이 주는 위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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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3.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신앙이 주는 위로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띠를 두르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확성기를 틀어놓고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을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을 갑니다. 예수를 믿으십시오!’ 열성을 가지고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들이 주님을 올바로 믿고, 전하는 방법도 예수님께서 하신 방법으로 하여 꼭 구원을 얻기를 기원합니다. 겸손한 삶의 모범이 필요합니다.
이사야는 예언자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에게 다가오고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있고 나에 대한 그들의 경외심은 사람들에게서 배운 계명일 뿐이니 나는 이 백성에게 놀라운 일을, 놀랍고 기이한 일을 계속 보이리라”(이사29,13-14). 우리는 이런 책망을 듣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마태23,16)라고 하시는 말씀은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달으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좋겠습니다. 덜 중요한 것을 더 중요한 것보다 더 중시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내신 주님 안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해야 하고 그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라고 (마태5,33-37)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취미생활이나 여가 생활의 연장이 아닙니다.
주님께 대한 열정을 긍정적으로 보면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나쁘기로 말하면 좋은 것보다 훨씬 더 나쁘기도 합니다. 열심이 지나쳐서 고약한 광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하느님을 등에 업고 자기를 내세우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짐만 지우게 됩니다. 그릇된 신심에 빠진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 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마태23,4).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율법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 사랑하고 희망합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준수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본말이 바뀌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내세워야 하지만 죄와 벌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지옥의 공포로 몰아가게 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위선자로 지목되어 야단을 맞게 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사람에게 희망을 주어야지 절망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과 자비가 없는 종교는 무의미합니다. 자비를 입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이 신앙이 주는 위로요, 희망입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것은 좋으나 진심어린 삶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우리 역시 그 화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5,20).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기에 앞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눈떠야 하겠습니다. 온갖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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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3.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활의 시작 지점에서, “산상설교”를 통하여 여덟 가지의 “행복선언”(마태 5,3-12)을 들은 바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마감하는 지점에 이르러, 일곱 가지의 “불행선언”(마태 23,13-36)을 들려줍니다.
오늘 <복음>의 <첫 번째 불행선언>에서는 그들의 그릇된 가르침과 잘못된 신앙이 사람들이 구원으로 가는 것을 막고 있음을 경고합니다. 곧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 경고합니다.
<두 번째 불행선언>에서는 그들의 그릇된 인도, 곧 그들의 행실이 사람들을 지옥으로 빠뜨리고 있음을 경고합니다. 이미 신자 된 이들을 무너뜨리는 것은 사실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고 인도하는 이들, 곧 성직자들의 잘못된 행실임을 일깨워줍니다.
<세 번째 불행선언>에서는 자신의 신앙과 경건함을 과시하고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심지어 물질적 이득을 얻기 위해 맹세를 남발하고 있는 눈먼 인도자들을 경고하십니다.
이 모두는 그들이 가치관의 혼란에 빠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무엇이 본질적인 것이고,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잃어버린 까닭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 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마태 23,17-18)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냐?”(마태 23,17.19.). 일을 잘 하는 것이냐, 일을 사랑으로 하는 것이냐? 나의 뜻을 완수하는 것이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냐? 내 자신이냐, 주님이신 하느님이냐? 하느님이 계신 곳이냐,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이냐?
그러니 먼저, 앞세워야 할 일을 선택할 수 있는 맑고 명료한 분별과 그를 따를 수 있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구하라.”(마태 6,33).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먼저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원하는 바를 행하십시오.
충고하더라도 사랑으로 충고하고, 침묵하더라도 사랑으로 침묵하십시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이 사랑 외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시고, 진정 우리에게 능력이 필요하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아는 능력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소서 하고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진리가 제 자신을 이끌게 하되, 마치 저 자신을 진리인 양 앞세우지 말게 하소서!
참으로 우리의 삶이 사랑 외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시고,
진정 우리에게 능력이 필요하다면 사랑을 아는 능력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소서!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마태 23,17)
주님!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알게 하소서.
내 뜻인지, 하느님의 뜻인지, 내 자신인지, 주님이신 하느님인지,
앞세워야 할 일을 선택할 수 있는 맑고 명료한 눈을 주소서!
먼저 그를 따를 수 있는 결단과 용기를 주소서!
무엇을 하든지, 구를 만나든지, 사랑 외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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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3.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제게 의미 있는 날입니다. 1991년 8월 23일에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오늘은 30년이 되는 날입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한국에 있는 동창 신부님들은 오늘 신학교에서 미사를 드린다고 합니다. 후배들을 위해서 작은 선물을 준비하였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애타게 기다린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앞으로도 나를 모든 악행에서 구출하시고, 하늘에 있는 당신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올해로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옥중에서 교우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런 황황시절을 당하여, 마음을 늦추지 말고 도리어 힘을 다하고 역량을 더하여, 마치 용맹한 군사가 병기를 갖추고 전장에 있음같이 하여 싸워 이길지어다. 이런 군난 때는 주의 시험을 받아, 세속과 마귀를 쳐 덕공을 크게 세울 때니, 부디 환난에 눌려 항복하는 마음으로 사주 구령사에 물러나지 말고 오히려 지나간 성인 성녀의 자취를 만만 수치하여, 성교회 영광을 더으고 천주의 착실한 군사와 의자됨을 증거하고 비록 너희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긍련하실 때를 기다리라. 할 말이 무수하되, 거처가 타당치 못하야 못한다. 모든 신자들은 천국에 만나 영원히 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 입으로 너희 입에 대여 사랑을 친구하노라.”
30년을 지내면서 예전에 교수 신부님께서 해 주신 말씀을 생각합니다. 신부님께서는 사제에게 필요한 덕목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기도하는 사제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신학교에서는 의무적으로 기도하지만 사제가 되면 누가 시키지 않기 때문에 더욱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책을 가까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운 지식은 곧 바닥이 드러난다고 하셨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는 교황님의 문헌을 가까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셋째, 강론을 성실히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지친 신자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강론, 고통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강론, 세상의 유혹을 이겨내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강론을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넷째,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늘 깨어있으라고 하셨던 것처럼 사제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다섯째, 건강을 잘 돌보라고 하셨습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하셨습니다. 건강을 돌보지 못하면 사목을 잘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야단치십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그들의 판단기준은 하느님의 뜻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영광과 자신들의 명예, 자신들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바오로 사도가 갔던 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갔던 그 길을 따라 갈 수 있도록 주님께 은총과 지혜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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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3.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의 중심
-그리스도 예수님-
오늘 강론 제목은 “삶의 중심-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수도생활 초창기부터 강론시 참 많이 사용했던 제목입니다. 삶의 중심을 잊었을 때, 잃었을 때 삶은 복잡 혼란해 지고 방황이 뒤따릅니다. 삶의 중심인 그리스도 예수님야 말로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임을 깨닫습니다. 삶의 중심인 그리스도께서 무지의 어둠을 밝히고 허무주의의 늪에서 우리를 구원합니다.
아주 예전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피정집 ‘자캐오의 집’에서 단체피정자들을 위한 미사때 제의방에서 입당전 인사하려 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 고상이 없어 순간 당황했던 기억입니다. 방이나 성당에 걸려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대로 삶의 중심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엊그제 자비의 집 본관의 휴게실에서 조각가 형제가 선물한 예수님의 십자가 축복식 장면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투박하고 단단한 대추나무 자연목 십자가에 부활하신 예수님 십자가가 참 잘 어울렸습니다. 이전의 이콘 십자가보다 중량감있게 자연스럽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새삼 삶의 중심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마침 어제 나눴던 ‘파스카의 꽃’이란 시를 다시 나누고 싶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 때 저절로 ‘파스카의 꽃’같은 삶이요, 믿는 이들 누구나의 간절한 소망일 것입니다.
-“사람은
꽃이다
살아 있는
죽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새롭게 폈다지는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이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삶의 중심으로 모시고 살아갈 때 늘 새롭게 폈다지는, 새롭게 시작하는 새하늘과 새땅의 은퇴가 없는 영원한 현역의 파스카의 꽃같은 삶입니다. 새벽 교황님의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어제 삼종기도후 알현시 교황님의 짧은 강론 주제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강생의 육화는 우리에게 타인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모든 형제들 하나하나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이며 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하나의 형제가 예수님의 현존이니 그대로 존엄한 품위의 인간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말씀도 우리에게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해 줍니다.
오늘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님은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일곱 차례 불행을 선언하시며 오늘은 세차례 불행이 선언되고 있습니다. 산상설교중 행복선언과는 너무 대조적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지탄을 받는 율사와 바리사이는 별종의 인간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에서 벗어날 때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사실 복음 사가가 의도하는 바는 교회내의 이런 율사와 바리사이들 같은 교회 지도자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고,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는 개종자 한 사람이라도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불행하여라”, 저주의 선언이 아니라 주님의 아픔이 배어 있는 회개를 촉구하는 선언으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을 떠날 때 무지에 눈멀어 왜곡된 심성에 분별력의 상실이 뒤따릅니다. 진실과 겸손의 자리에는 위선과 교만이 자리잡게 되고 사람은 소리없이 내적으로 무너지고 망가지게 됩니다.
정말 심각한 것은 자기도 모르는 무지의 병입니다. 무지의 모르는 사람은 알려 줘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가장 쉬운 것이 남판단하는 것이며 가장 힘든 일이 자기를 아는 일이라 합니다. 참으로 자기를 아는 것이 겸손이요 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제1독서의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의 모범인 바오로 사도와 테살로니카 교회의 신도들입니다. 테살로니카 1서의 아름다운 서두 인사말을 통해 사도는 신도들에게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새롭게 각인시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테살로니카 교회에 인사합니다.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여러분을 모두 기억하며 늘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 때 저절로 은총과 평화의 삶이요 겸손과 감사의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더불어 신망애信望愛의 풍요한 삶임을 다음 아름다운 대목이 입증합니다. 믿는 이들 공동체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노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희망의 인내를 기억합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믿음의 행위’, ‘사랑의 노고’, ‘희망의 인내’, 즉 신망애의 아름답고 품위있는 삶이겠습니다. 은총과 평화, 감사와 겸손, 신망애의 삶에 기쁨의 삶이 추가됩니다.
“여러분은 큰 환난 속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와 평화와 기쁨의 삶은 그리스도 중심의 삶의 은총이자 모든 성인들의 공통적 특징이기도 합니다. 이런 그리스도 중심의 삶에 필히 전제되는 바 끊임없는 회개임을 테살로니카 교우들이 가르쳐 줍니다. 이어 소개되는 회개의 3단계입니다.
-‘1.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옴, 2.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김, 3.오실 예수님을 기다림’-
여전히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한 3단계 회개의 원리요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그대로 실현됩니다. 참으로 세상 우상들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와 기다리던 주님을 환대하며 섬기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무엇보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과 더불어 ‘주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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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3.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무엇이 중요한지 가르쳐 주십니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마태 23,17)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마태 23,19)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반복해서 꾸짖으십니다. 그들이 선택하고 집중하는 일이 예수님 보시기에 점점 더 본질과 멀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더 중요할까요, 성전 안의 금이 더 중요할까요? 또 제단이 더 중요할까요,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이 더 중요할까요? 어린아이도 정답을 알 수 있을 듯한 질문이지만, 영의 가치를 추구하는 이와, 재물이나 자기영광의 가치를 우위에 두는 이에게서는 다른 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지 않지만,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정답으로 둔갑시킬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가르치는 자리에 앉아 입으로는 율법의 조항을 전하면서도 마음과 행동으로는 전혀 다른 방향을 추구하는 게지요. 예수님은 그러한 위선자들에게 "불행하여라" 하고 탄식하십니다.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성전과 그 안에 사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며"(마태 23,21)
하느님께 불리우고 선택된 우리는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사람과 사물과 사건, 그리고 오가는 말에서 하느님을 찾아나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한눈에 쉬이 보이는 법이 잘 없으시니, 숙고하고 묵상하고 인내하고 기다리는 머무름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합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끝이 달이라고 여기지 않는 식별력과 지혜가 필요하지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신도들의 그러한 믿음을 칭찬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에 여러분이 우리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 하느님께 돌아서서 살아계신 참하느님을 섬기게 되었는지, ...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기다리게 되었는지"(1테살 1,9-10)
테살로니카 사람들은 사도들의 말을 경청하며 그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시선을 사도들에게 고정하지 않고 사도들 안에 현존하시면서 그들을 움직이시는 "참하느님"을 바라보았지요.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다시 오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희망하는 하늘 나라의 참시민이 된 것입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복음 환호송)
하느님께서 예수님에게 보내주신 이들은 자신들 앞에 펼쳐진, 겉만 번드르한 찰나적이고 가변적인 소리들 너머로 주님의 목소리를 포착합니다. 또 감각과 물질의 껍질들의 틈을 꿰뚫어 본질을 발견합니다. 그 본질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시고, 하느님의 뜻이며 하느님이십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냐?"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물으십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이런저런 현안들의 껍데기에 만족하거나, 두려움에 자지러져 멈추거나, 마치 그 껍질이 전부인 양 서둘러 구도의 길을 종결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정말 중요한 것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세속적 성공과 풍요로운 재물, 달콤한 명예가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전부라고 착각하지 말고, 거기에 안주하지 말고, 진짜를 찾아가는 발걸음을 계속해 나가길 기원합니다.
진짜는, 진짜는 어쩌면 고통이든 실패든 약함이든 죽음이든 우리가 끝까지 피하고픈 포장지로 싸여 올 수도 있답니다. 언제건 어디서건 무엇에서건 누구에게서건 결국 하느님을 찾아내어 그분과 하나 되길 축원합니다.
"믿음의 행위, 사랑의 노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의 인내"(1테살 1,3)
사도 바오로가 테살로니카 성도들에게 칭찬했던 이 덕행들이 부족한 죄인인 우리도 참하느님을 발견하게 해 주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더 믿고 더 사랑하고 더 희망하는 오늘 되시길, 그리하여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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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3.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마태23,13)
유다교에서 율법은 철저하게 지켜져야 할 하나의 규범, 계명이었습니다. 삶을 이해하는 길로써의 지침 또는 표지판이었습니다.
이러한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던 사람들이 바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호되게 질책을 받습니다. 율법은 잘 지켰지만, 율법의 본질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그런 위선을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기도에 대한 고민을 말했습니다.
"신부님, 기도하는 것이 너무 힘들고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
우리가 '기도의 본질'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이 바치던 기도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는 '기도의 본질'이 '기억과 머뭄'이라고 말하는 사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 기도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사제입니다.
때문에,
기도는 쉽게 바칠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쉽게 바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할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처럼 교회가 만들어 놓은 '율법과도 같은 기도'를 바치는 것에만 급급하고,
그것이 기도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도 위선자가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불러야 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하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는 새 계명을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불행한 위선자들이 되지 말고, 행복한 신자들, 행복한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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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3.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유다인의 선교와 사도 바오로의 선교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바리사이 유다인들에게 내리시는 불행 선언입니다. 그 중 두 번째 불행 선언에서는 유다교의 선교 방식이 비판적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 비판의 이유는 하느님을 믿고자 한 개종자에게 올바르게 가르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릇된 행실을 본받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로 나타나야 하고 사람을 사랑함에 있어서는 하느님을 섬기는 정성으로 해야 함을 뜻합니다. 이렇듯 강생의 신비로써 세상에 오신 신원에 걸맞게 예수님께서는 신앙을, 인간관계의 덕목과 결합시키심으로써 그리스도교는 유다교를 넘어섰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인간이 결합된 것입니다.
연중 시기에서 구약성경의 창세기로부터 탈출기와 여호수아기 그리고 룻기까지 선포되던 미사의 독서가 오늘부터 신약성경의 첫 권인 테살로니카 편지로 바뀌었습니다. 그 주인공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이어주는 대표적인 인물, 바오로입니다. 그 어느 유다인들보다도 민족적 자부심이 컸던 바오로는 구약에 담긴 율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충성심으로 선교사가 되어서 유다교보다 훨씬 나은 선교 성과를 올렸습니다. 그리스와 로마 문화권에 살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자처했던 그는 그러면서도 가는 곳마다 안식일에 유다인 회당을 찾아가서 동족 중에 함께 할 동료들을 끈질기게 찾았던 결과로 로마 16장에 언급되는 수많은 선교 협력자 유다인들을 얻어서 방대한 선교 네트워크를 만들어 그리스 로마 문화권 내에서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2천 년 동안 교회가 선교하는 동안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지 않고 차별하거나 소외시키거나 억압하고 착취하는 모든 행위들이 전부, 우상숭배의 범주 안에 속하는 이치를 잊어버린 적이 많았습니다. 인간 존중으로 드러나야 할 하느님의 영광이 그만큼 가려져 버렸습니다. 유다교가 지녔던 선교적 한계가 서방 로마 교회의 선교 전통에서도 여전히 한계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사랑으로 인간을 존중하고 인간을 존중하되 하느님을 섬기는 정성으로 행하라는 가르침과, 먼저 하느님을 믿었던 동족들과의 유대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 전략은 여전히 절실하게 필요하고 또 창의적으로 계승해야 할 만큼 유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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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3.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몇 년 전, 한 형제님이 찾아와 기도를 배우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기도하는 방법을 설명해 드리면서, 기도 중에 혹시 과거의 상처가 떠오르면 그때의 상황을 하느님께 자세히 말씀드리되, 있는 그대로, 끝까지 말씀드리라고 하였습니다. 끝까지 말하면 침묵 가운데 떠오르는 말씀이 있을 것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형제님이 찾아왔습니다.
“신부님, 답을 찾았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네가 잘되면 우리 집안이 망한다.’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살아오면서 얼마나 아팠는지요. 기도 중에 이 상처가 떠올랐어요. 제가 어릴 때 탁발승이 시주를 받은 뒤 어머니에게 그 아픈 말을 남겼답니다.
그때부터 어머니를 비롯한 집안 어른들은 집안이 망한다는 말을 자주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스님을 원망하며 하느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스님 때문에 집안 어른들까지 저만 보면 그 이야기를 해서 제가 평생 얼마나 아팠는지 몰라요.’ 하느님께 매달리면서 방 안을 떼굴떼굴 구르며 울다 보니, 어느 순간 불타는 가시덤불 앞에 선 모세가 보였습니다. 그 가시나무가 불에 타 없어지지 않으면서 불꽃이 일듯, 제 아픔도 가시나무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픔은 불꽃으로 저를 힘들게 하였지만, 모세가 하느님을 만난 것처럼 저 또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 아픈 가시 때문에 그동안 얼마나 조심하고, 또 얼마나 하느님을 찾으며 살았는지요!”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자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하느님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인도하는 너희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하느님이 아닌 세상 것을 중심에 두는 눈먼 자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이 말씀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지도자와 단체장 등 나름 ‘열심히 활동하는 신자’인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닐는지요. 날마다 성찰하며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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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3.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오늘과 내일의 복음 말씀은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해 가장 무서운 말씀이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13.15절)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일곱 번이나 차례로 당할 화를 지적하신다. ‘불행하여라!’는 말씀은 진노일 뿐 아니라 비애가 곁들여 있는 말씀으로 이것은 의로운 분노이고 하느님의 뜻에 완고하게 눈을 감고 자기 편한대로 하느님을 이용하는 자에 대한 서글픈 사랑의 심정에서 나오는 분노이다.
위선자라는 말은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내면의 상상과 감정은 겉과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의식을 경건하게 준수한다든지 정교하게 꾸며진 기도문, 성구를 적은 것을 옷 속에 넣는다든지 옷 술을 달고 다닌다든지 한다. 또한 규칙과 규례를 소상하게 준수하지만, 마음속으로 이웃을 이해하거나 동정하거나 사랑하거나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교만함과 거만함과 자기만족이 가득 차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불행한 이유는 무엇보다 먼저 하늘 나라의 문을 자기 스스로의 못된 행위로 닫아 놓고서는 자신은 못 들어가고 들어가려는 다른 사람들까지도 가로막는 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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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3.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마태 23, 17)
가을은
우리 내면을
향하여 온다.
모든 은총은
우리자신을
돌아보는 데서
시작된다.
참된 삶은
위선을
멈추는 것이다.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향한
정직한 신뢰이다.
하느님을
향한 신뢰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참된 회개로
참된 신뢰가
주어진다.
신앙의 깊이는
회개의 깊이이다.
회개는
위선을 치유하는
것이며 더 중요한
내면을 다시 찾는
길이다.
모순과 위선
독선과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주님께
고백한다.
올바른 신앙은
회개를 통한
내면의
결단이다.
교만은
하느님
자비를 결코
이길 수 없다.
하느님 자비는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놀라운
은총이다.
하느님 관계가
하느님의 자비가
더 중요하다.
오는 가을은
우리 삶에서
더 중요한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교만과
어리석음으로
눈먼 우리들을
다시 깨워
새롭게 하신다.
더 중요한 것을
깨닫게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는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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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3.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불행하여라, 위선자들아!>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마태 23,13).”
이 말씀을, 산상설교에 있는 ‘빛’에 관한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3-16).”
이 말씀은 예수님의 ‘명령(계명)’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빛’으로서 사는 것은 모든 신앙인의 본분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라는 말씀에서 ‘등대’가 연상됩니다.
신앙인의 충실한 신앙생활은 세상 사람들을 하느님에게로, 또 하느님 나라로
인도해 주는 등대와 같습니다.
만일에 자기의 신앙을 감추거나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등대가 제 구실을 하지 않아서 세상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가 아닌 곳으로
보내는 일과 같고, 하느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는 일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들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사람들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아닌 곳’은, 멸망이 기다리는 곳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마태 23,15).”
이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소금’에 관한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기 위해서, 또 부패를 막기 위해서 사용합니다.
만일에 소금이 음식의 부패를 막기는커녕 더 부패하게 만드는 독약으로
작용한다면, 그것은 소금이 아니고, 그런 것은 빨리 제거해야 합니다.
선교활동은 하느님을 모르는 채로 살고 있는 사람들을 하느님에게로 인도하는
‘소금과 같은 일’을 하는 활동입니다.
(멸망에서 건져서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선교활동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지옥의 자식’만
생긴다면, 그것은 선교활동이 아니라 죄를 짓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선교활동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신앙인답게 살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활동을 하려면 우선 먼저 회개부터 해야 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는 또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사실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고,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성전과 그 안에
사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며,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마태 23,16-22).”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느님을 두고 맹세할 일이 있으면
하느님 대신에 성전이나 제단이나 하늘을 두고 맹세했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하느님을 두고 맹세한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면서 맹세한 것이
아니니까 그 맹세는 안 지켜도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 주장은 자기들이 한 맹세를 무효화시키려는 꼼수입니다.)
그러면서도 성전의 금이나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하느님에게 속한 거룩한 물건을 두고 한 맹세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 주장은 그냥 궤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아예 맹세하지 마라.” 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3-37).”
(진실만을 말하는 사람은,
자기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맹세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헤로데의 맹세는 대표적인 거짓 맹세입니다.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마르 6,22-23).”
여기서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라는 말은,
“만일에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천벌을 받아도 좋다.” 라는 뜻입니다.
헤로데는 ‘내 왕국’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은 로마 황제의 왕국입니다.
그래서 그의 약속과 맹세는 거짓말입니다.
(자기 왕국이라고 해도, 지킬 수 없는 약속이고 맹세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조금 뒤에 거기 서 있던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당신도 그들과 한패임이
틀림없소. 당신의 말씨를 들으니 분명하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베드로는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기 시작하며,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였다. 그러자 곧 닭이 울었다(마태 26,73-74).”
(베드로 사도는 자기의 말이 거짓말이고, 자기의 맹세가 거짓 맹세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곧바로 회개했기 때문에 그 ‘큰 죄’에서 벗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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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3.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내적인 죄로 더러워지지 않았다면, 물 한 방울 없이도 하느님 앞에서 완벽하게 깨끗할 수 있습니다!
엄청나게 자라난 잡목과 잡풀들로 마치 밀림처럼 변한 골짜기를 예초하다가 뜻밖의 선물을 발견했습니다. 인정사정없이 예초기를 돌리던 어느 순간, 울창한 숲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던 어여쁜 배롱나무 군락을 만난 것입니다.
비록 잡목들에 가려 크게 성장하지는 않았지만, 족히 스무 그루가 넘는 진홍빛 꽃이 어여쁜 배롱나무들이 거기서 묵묵히 자라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 입에서는 ‘이게 웬 횡재냐?’하는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습니다. 누군지 모르지만 십 수 년 전 그곳에 땀을 뻘뻘 흘리며 어린 묘목을 심었을 선배 회원의 노고가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진귀한 보물들은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해서 그렇지, 멀리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우리 선배들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예수님도, 하느님 나라도, 영원한 생명의 씨앗도 우리 가까이에 숨겨져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위선과 허세로 따지면 둘째가면 서러워할 두 그룹,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신랄하게 꾸짖고 계십니다. 그 강도가 너무 센 나머지 걱정될 정도입니다.
위선자들! 어리석고 눈먼 인도자들! 야단맞고 있는 입장에서 볼 때 치를 떨고 이를 갈 정도로 강한 질책입니다. 매사에 진실하신 예수님이셨기에 이중적인 처신과 위선적인 삶을 그리도 강경하게 질타하시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우리 안에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보여준 볼썽사나운 위선과 이중성이 잔뜩 들어있지는 않은지 늘 성찰, 또 성찰해야겠습니다.
함께 살아가다보면 다른 사람들 눈은 다 속여도 동고동락하는 가족들, 공동체 형제들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우리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이 가장 정확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바깥에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큰 존경과 인정, 칭송과 사랑을 받는다 할지라도, 가장 가까운 가족들, 공동체 형제들에게 반대의 모습을 보인다면, 우리는 다름 아닌 위선으로 가득한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이 분명합니다.
이중성의 극복의 중요성에 대한 교부들의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내적인 죄로 더러워지지 않았다면, 물 한 방울 없이도 하느님 앞에서 완벽하게 깨끗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죄를 지었다면, 바다와 세상의 모든 강물에서 몸을 씻는다 해도 하느님께서 보실 때 더러움으로 시커멓습니다. 중요한 것은 물로 씻어야 하는 그릇이 아니라 기도로 씻어야 하는 양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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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3.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가르치는 대로 살지 못하면 사는 대로 가르치게 된다. 그 결과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교리를 올바로 가르쳐야 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도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드는지 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눈먼 인도자들로서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라고 가르칩니다.
또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그들이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집보다 하느님의 집을 만드는 돈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가르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르침까지 바꿔버리는 그들을 이렇게 비판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그런데 돈을 좋아해야 한다는 식으로 가르쳤던 그들은 계속 번영했을까요?
나라가 망하게 되었습니다. 장기적으로 볼 때는 자신이 가르친 그대로 그것을 배운 사람들에게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고 김성수 목사의 강의에 나온 사례입니다. 영국에서 이런 살인사건이 있었습니다. 남편을 사별하고 그 설움을 자녀를 통해 극복하려고 했던 한 엄마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외아들을 무시 받지 않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안 되면 경쟁자를 밟고서라도 무엇이든 1등을 하라고 교육하였습니다. 아들은 고등학교를 수석 졸업하였고 영국 옥스퍼드는 물론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도 합격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합격 통지서를 받던 날 저녁 어머니는 아들과 그의 여자 친구 문제로 큰 싸움을 벌였습니다. 어머니는 공부를 마친 후 더 좋은 환경의 여자 친구를 사귈 수 있으니 당장 헤어지라고 했고, 화가 난 아들은 어머니를 야구방망이로 때려 숨지게 하였습니다. 왜 어머니를 죽였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난 어머니로부터 무조건 1등을 하도록 강요받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나의 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쟁취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나는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나의 꿈을 막는 자는 누구도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나의 꿈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장애물이 어머니일지라도 내 앞에서 치워버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내 꿈을 막는 어머니를 죽여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누구나 이렇게 자신이 사는 방식으로 가르치고 그 가르침을 받은 이에게 그 방식대로 대우받게 됩니다.
돈을 좋아하게 만드는 교육이 ‘진화론’입니다. 우리나라는 신앙인들이 많은 것 같지만 실상은 세속적 복을 청하는 기복신앙이 강합니다. 자녀 성공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배우고 성장한 아이들은 부모를 잘 봉양할까요?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은 세계 최하위입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돈만 아는 모기처럼 키웠다면 그 자녀들은 부모들의 노후도 걱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부모의 재산을 노리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는 어떨까요? 그동안 고수해오던 ‘십일조’ 교리가 현대 교리서에서 사라졌습니다. 십일조는 ‘삼구’(세속-육신-마귀)의 교리와 함께 사라진 것입니다. 돈에 대한 욕심과 싸워야 한다고 가르쳐야 하는데 어쩌면 교회 지도자 중에서도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그런 거북한 교리를 뺀 것입니다. 이제 신자들은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도 모르고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선악과와 같은 십일조를 바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떨까요? 교회가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신자가 많은 성당도 성당을 크게 짓느라 보수하느라 돈이 없습니다. 이웃을 도울 돈도 없고 매년 재정 걱정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에 그런 대가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십일조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는데 왜 교회가 그 교리를 교리서와 교회법에서 빼버린 것일까요? 물론 조심스러운 추측입니다만, 어쩌면 교회 지도자들이 점점 더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되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가르치는 대로 본인이 살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이 사는 대로 가르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과 더불어 20세기 현대에 들어와서 없어지거나 무뎌진 교리들이 너무 많습니다. 지옥에 대해 말하는 것을 꺼리고, 사람이 새로 태어나면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것도 말하기 조심스러우며, 심지어 예비자 교리서에서 교회가 어떻게 탄생하는지의 교리도 사라졌습니다. 우리 삼위일체 신앙고백에서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는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느님의 본성이 사랑이신데 한 분이실 수 있을까요? 혼자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점점 더 오류로 흐를 것입니다. 교회가 이 흐름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세상과 반대로 돈과 쾌락과 교만과 맞서도록 교육해야 합니다. 이것은 명확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 잘못된 교리를 배울 때 하늘 나라의 문은 그 사람에게 잠깁니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성경보다 먼저 ‘정통교리’를 배워야 합니다. 성경은 자신이 아는 교리대로 해석되는 것입니다. 소공동체나 교회 모임에서 성경은 공부하되 교리서는 어렵다고 뒤로 물려놓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발전이 없는 신앙이 됩니다. 유다인들이 성경을 공부한다고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아니면 신천지가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해서 올바른 신앙을 가지게 됩니까?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것은 정통교리이고 교회는 그 정통교리에서 벗어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가르침은 다 자기가 사는 삶을 정당화한 이론에 불과합니다. 그 이론으로 자기를 먼저 가르쳐서 그렇게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에서 벗어나지 맙시다. 교회가 진리의 기둥입니다.
자신은 술에 취하면서 자녀들에게는 술에 취하지 말라고 가르칠 수 없는 것처럼 교리를 만드는 지도자들이 자아와 세상과 싸우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적어도 신자들에게 그렇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삼구와 싸우지 않고 타협하며 사는 지도자가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으면 눈먼 인도자가 됩니다. 결국, 진화론적 가르침으로 교리가 기울게 된다면 그 교리를 배운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교회까지 공격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눈먼 인도자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과 같은 운명을 맞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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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3.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당에 와서 신자들이 공동체를 이루는 이유는
사람 사이의 인기나 권력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대상인 하느님을 배우고 깨닫기 위함이며
신앙생활을 인도하며 이끌어주는 가운데
공동체원들이 서로 사랑과 봉사를 통해 성장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 공동체는 독특합니다.
완벽한 사람이 아님을 깨달은 겸손한 이들의 모임이며
각자가 가진 재능을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위해 내어 주며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활용합니다.
다만 우리가 가진 연약함은
유혹으로 초대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여정을 돕는다는 이유로
여러 규정과 규칙, 제도와 체계를 만들다 보면
자칫 하느님이 아닌 사람 사이의 관계에 머물게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인기에 연연할 수 있고
사람들 사이에 권력이나 이득을 얻고자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이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다 보면
우리 공동체는 하느님이 아닌 세상을 향하게 됩니다.
눈먼 인도자가 가득 해지는 것이죠.
신앙인은 참된 행복을 발견한 이들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참 생명을 얻었기에
하느님과 함께 그분을 통해서 삶의 참 의미를 살아가는
행복한 신앙인입니다.
그러나 이런 본질을 잊고 세상을 향하게 되면,
하느님이 아닌 규칙과 힘에만 의존하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유혹에서 벗어나도록 이끄십니다.
행복한 신앙인이 아닌 불행한 위선자가 되는 것
우리가 선택한 참된 삶의 의미가 아닌
언젠가 없어질 세상에 매여버리는 것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마저 죄와 유혹으로 초대하는 것
이 모두 우리가 빠질 수 있는 유혹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를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나는 하늘나라로 함께 나오고 있는지
아니면 하늘나라의 문을 잠그고 있는지,
나의 시선이 하느님을 향하고 있는지
아니면 세상을 향하고 있는지 성찰하는 가운데
불행이 아닌 참된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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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3.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cpbc TV. 매일미사
https://youtu.be/RC_XuhH11FU 27:29
2021. 8. 23.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이승화 시몬 신부 (서울대교구 목동 본당 부주임)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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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3.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제1독서(1테살1,1~5.11ㄴ~12)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 때문에 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크게 자라나고 저마다 서로에게 베푸는 여러분 모두의 사랑이 더욱더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3)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이 그 모든 박해와 환난을 겪으면서도 보여 준 인내와 믿음 때문에, 하느님의 여러 교회에서 여러분을 자랑합니다.(4)
이는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징표로, 여러분이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5)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 때문에 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크게 자라나고 저마다 서로에게 베푸는 여러분 모두의 사랑이 더욱더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3)
테살로니카 1서 1장 1, 2절에서 송,수신자 표기 및 축복의 기도를 한 사도 바오로는 1장 3, 4절에서 테살로니카 교회 성도들의 신앙으로 인하여 자신의 감사와 자랑을 기록하고 있다.
원문에서 이러한 감사와 자랑의 내용의 서두에 나오는 본문을 직역하면, '우리는 여러분을 위하여 하느님께 늘 감사해야만 한다.' (We ought always to give thanks to the God)이다.
이렇게 강한 당위의 의미를 지니는 것은 '우리가 ~해야만 한다'로 번역된 동사 '오페일로멘'(opheilomen)의 원형 '오페일로'(opheilo)가 본래 지불해야만 하는 돈을 빚지고 있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이기 때문이다(마태18,23; 루카7,41).
즉 이 단어는 어떤 일을 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다는 매우 강한 의미를 지닌다(로마15,27).
사도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2장 13절에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여 자기가 테살로니카 성도들을 위해 하느님께 항상 감사해야만 한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에게 있어 감사를 하나의 의미로 여겼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사도 바오로가 그들에게 어떤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즉 이것은 그들에게 대한 의무가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의무이며, 테살로니카 성도들의 신앙이 계속하여 아름답게 성장해 가는 것과 환난 가운데에서도 믿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것으로 인해 그 교회의 개척자인 자신이 하느님을 향해 감사하는 것을 하나의 당연한 의무로 여겼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견고하게 성장하게 된 원동력이 하느님께 있음을 알았기에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을 향한 감사를 강조했던 것이다.
'여러분의 믿음이 크게 자라나고 저마다 서로에게 베푸는 여러분 모두의 사랑이 더욱더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호티'(hoti)로 시작하는 본문은 테살로니카 교회로 인하여 늘 하느님께 감사한다는 본절 상반절의 이유를 나타낸다.
여기에서 사도 바오로는 감사의 근거로 테살로니카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을 들고 있는데, 이 두 가지는 그리스도인의 본질을 나타내는 가장 근본적인 신앙의 요소이다(1테살3,6).
믿음은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뢰를 나타내는 수직적 신앙의 태도요, 사랑은 하느님께 대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믿음이 성도 및 타인에 대해 나타나는 수평적 신앙의 표현이다.
한편, '크게 자라나고'라는 의미로 번역된 '휘페라욱사네이'(hyperauxeanei)의 원형 '휘페라욱사노'(hyperauxano)는 '~을 초과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전치사 '휘페르'(hyper)와 '자라다', '번성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아욱사노'(auxano)의 합성어로서 '지나치게 증가하다', '엄청나게 자라다'(grow exceedingly)라는 강한 의미를 지닌다.
신약 성경에서 이곳에만 쓰인 이 단어는 테살로니카 성도들의 믿음을 바라보는 사도 바오로의 벅찬 마음을 읽을 수 있게 한다.
그들은 사도 바오로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급속도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 동사는 현재 직설법 시제로 쓰였는데, 이것은 그러한 성장이 멈추지 않고 계속 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정체함이 없이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믿음, 그것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며, 하느님 말씀의 봉사자로 하여금 감사를 자라나게 하는 요인이다.
또한, '더욱더 커지고 있기'로 번역된 '플레오나제이'(pleonazei)의 원형 '플레오나조'(pleonazo)는 남아돌 정도로 풍성한 상태에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동사이다.
사도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1서에서 바로 이 단어를 사용하여 테살로니카 성도들의 사랑의 풍요를 위해서 중재 기도를 했었는데(1테살3,12), 이 기도가 응답되었음이 본절에 나타나고 있다.
더군다나 이 동사 역시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현재 직설법 사제로 쓰여서 성도 서로에 대한 사랑의 풍성함이 그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이 그 모든 박해와 환난을 겪으면서도 보여 준 인내와 믿음 때문에, 하느님의 여러 교회에서 여러분을 자랑합니다' (4)
테살로니카 1서 1장 3절에서 테살로니카 교인들의 신앙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하였던 사도 바오로가 1장 4절에서는 박해와 환난 중에서도 믿음으로 인내하는 것에 대하여 감사하며 모든 교회에 자랑하고 있음을 밝힌다.
특히 본문은 당시 테살로니카 교회가 처해 있던 상황이 어떠한 지를 잘 말해준다.
테살로니카 1서 1장 6절에서도 이와 유사한 진술이 있는데, 약 2, 3개월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첫번째 서신을 썼던 때와 다름없이 그들이 환난 가운데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박해'에 해당하는 '디오그모이스'(diogmois)의 원형 '디오그모스'(diogmos)는 원래 사냥개가 사냥감을 뒤쫓는 모습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사냥개가 표적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쫓아가는 것처럼, 적대자들은 테살로니카 교회를 집요하게 박해하였던 것이다.
또한 '환난'으로 번역된 '틀립세신'(thlipsesin)의 원형 '틀립시스'(thlipsis)는 외적 고통과 더불어 내적 압박감까지 포함하는 고난을 말하는 단어이다.
본문에서 '디오그모스'와 '틀립시스'는 의미상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동의어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의어를 반복하는 것은 그들이 당한 곤경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어려움이 테살로니카 교인들에게 지속되고 있다는 데 있다.
이것은 '겪으면서도 보여준'에 해당하는 '하이스 아네케스테'(hais anechesthe)를 통해 알 수 있다.
'하이스'(hais; that)는 관계대명사로서 앞의 명사를 수식하며, '아네케스테'는 '아네코'(anecho)의 현재 직설법으로 계속해서 참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여기서 '아네코'는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을 용납함으로써 참는 것을 의미하는데(에페4,2) 이것은 테살로니카 교인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나는 박해(핍박)와 환난을 하느님의 허락하에 벌어지는 일들로 해석하고 묵묵히 참았음을 암시한다.
사람들은 원래 자신이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외부로부터 압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면 참기 힘든 법이어서 폭력으로 맞서거나 분노와 적개심을 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테살로니카 교인들은 전혀 이와같이 대응하지 않고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하느님의 섭리를 생각하며 오직 인내와 믿음으로 대처하는 성숙한 신앙을 가졌던 것이다.
여기서 '인내'에 해당하는 '휘포모네스'의 원형 '휘포모네'(hypomone)는 '~아래에'라는 의미의 '휘포'(hypo)와 '머물러 있다'라는 의미의 '메노'(men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문자적으로 무겁게 내리 누르는 무거운 짐이나 고통 아래에서 굳건하게 머물러 견디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도 마지못해 견디는 수동적인 뉘앙스가 아닌,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도로 견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테살로니카 1서 1장 3절에서는 이것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 때문에 견딜수 있는 인내라고 표현했다.
또한 '믿음'에 해당하는 '피스테오스'(pisteos)의 원형 '피스티스'(pistis)는 하느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마음의 태도를 의미한다.
이들의 '믿음'은 평화로울 때 뿐 아니라 환난 가운데서도 변함없는 '믿음'이었음이 본절에서 이 단어가 '인내'란 단어와 함께 사용되었다는 데서 잘 드러난다.
'하느님의 여러 교회에서 여러분을 자랑합니다'
원문에는 '여러'에 해당하는 표현이 없어서 직역하면 '하느님의 그 교회들 안에서' ('엔 타이스 엑클레시아 투 테우'; en tais ekklesiais tu theu)이다.
여기서 '그 교회들'(tais ekklesiais)은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지칭한다. 지금의 그리스의 북쪽(마케도니아)와 남쪽(아카이아)을 말한다.
그리고 '하느님의'로 번역된 '투 테우'(tu theu)란 소유격의 표현은 교회에 대한 소유권이 하느님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16장 16절에서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라는 표현도 썼다.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교회의 소유권을 지닌 분으로 지칭하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도 삼위일체 하느님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으며,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의 소유권이 삼위일체 하느님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끝으로 사도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교인들에 대한 좋은 소문이 각처에 퍼져나갔던 사실을 충분히 알면서도(1테살1,8) 다른 교회의 발전과 성숙을 독려하는 차원에서 친히 그들에 대해 자랑하며 다녔다.
'이는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징표로, 여러분이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5)
테살로니카 2서에서 1장 1~4절의 도입부에 이어 이제 본절인 1장 5절부터 3장 15절까지가 본 서신의 본론 부분이다.
본론의 첫 단락은 1장 5~12절로서 환난받은 테살로니카 성도들을 위한 격려와 중재기도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서도 1장 5~10절에서는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징표'로서의 성도의 환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박해(핍박)와 환난에 처해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있는 테살로니카 성도들에게 적지않은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징표'를 영어로 번역하면 'All this is evidence that God's judgement is right'이다. '이 모든것은 하느님의 심판이 옳다는 증거이다'라는 뜻이다.
테살로니카 교인들이 하느님과 영생의 복음적 가치관 때문에 박해와 환난 중에서도 인내와 믿음을 보여준 것에 대해서 먼훗날 하느님께서 심판 때에 그들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 주실 거라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그 다음 구절인 '여러분이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에 더 잘 나와있다.
본문에서 '합당한 사람이 되게'에 해당하는 '카탁시오테나이'(kataxiothenai)의 원형 '카탁시오오'(kataxioo)는 법적 용어로서 '적합하다고 간주하다', '합당하다고 여기다'라는 의미이다.
본문에서 수동태로 사용되었는데, 합당히 여기는 주체가 바로 하느님이심을 암시한다.
그리고 본절에 표현된 '하느님의 나라'(tes basileias tu theu)는 하느님의 통치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곳이며, 예수 재림시 완성될 나라이다.
따라서 본문은 고난을 이긴 성도들이 최후 심판 이후 하느님 나라의 완성사에 하느님의 영광의 나라로 들어가기에 적합한 자로 간주되어진다는 의미이다.
'사실 여러분은 그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라고 번역된 '휘페르 헤스 카이 파스케테' (hyper hes kai paschete ; for which you are suffering)에서 본동사 '파스케테(paschete)는 현재 직설법 동사로서 성도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 것이 변치않는 진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관계 대명사 '헤스'(hes; which)는 '하느님 나라'를 지칭한다. 성도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고난을 받는 존재인데, 이것은 고난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의무라는 소극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더 나아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능동적으로 고난을 받는다는 의미까지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여러분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에 해당하는 '파스케테'(paschete)가 능동태로 쓰였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것은 성도의 고난이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더욱 빛낸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사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무슨 큰 뜻을 위해 지금 고난을 받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면, 그 고난은 우리에게 희망의 인내와 믿음의 역사(役事)를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받는 고난이 우리를 구원하실 하느님과 그 나라를 위해, 또한 하느님을 믿는 독특한 신앙 때문에 일어나는 것임을 알때, 우리는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며 그 고난을 믿음으로 인내하고 극복할 수 있으며, 고난 가운데서도 낙담하지 않는 믿음의 역사(役事)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복음(마태23,13~22)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13~14)
마태오 복음 23장 1~12절은 예수님께서 군중들과 제자들을 향하여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로 대표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본받지 말라고 경계하신 내용이 실려 있다.
이제 이어지는 마태오 복음 23장 13~36절에는 예수님께서 보다 직접적으로 이들이 범한 죄악을 구체적으로 열거하시며 저주를 선언하시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 저주의 선언은 7가지나 되며, 점차 그 강도를 더해 점층법적 구조로 발전하고 있다.
먼저 '불행하여라'로 번역된 '우아이'(uai; woe)는 슬픔과 분노, 절망을 나타내는 의성적 감탄사이다(잠언23,29; 1사무4,7; 1열왕13,30; 이사1,4; 예레10,19).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해 심한 분노의 감정을 느끼고 계셨으며, 혹독한 심판과 저주의 메시지를 던지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우아이'(uai)라는 감탄사에는 분노와 저주의 감정만이 담긴 것이 아니라, 슬픔과 애통의 감정도 역시 담겨져 있다.
한편,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저주받은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위선에 있다. '위선자'에 해당하는 '휘포크리타이'(hypokritai; hypocrites)의 원형 '휘포크리테스'(hypokrites)는 고대 희랍 극장에서 자주 쓰이던 단어로서 '배우', '연기자'라는 의미의 명사이다.
그런데 이러한 원래적인 의미에서부터 이 단어가 '가장(假裝)하는 자', '위선적인 자'등의 부정적인 의미로 발전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 23장 13~36절에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여섯 번이나 '휘포크리테스'(hypokrites)로 지칭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행하는 거의 모든 종교적인 행위들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신앙심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만 경건한 체하는 위선과 다른 사람들의 눈에 거룩하고 경건하게 보이려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인위적으로 행하는 것들임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말이다.
마태오 복음 23장 13절 후반부와 14절은 위선적인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일곱 가지 저주 선언의 구체적인 이유 가운데 첫번째 죄목이다.
이들의 위선과 가장이라는 것은 겉과 속이 다른 모습 뿐만 아니라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는 것도 포함된다.
그리고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고, 들어가려는 이들마저도 못 들어가게 하는 것은 그들이 율법의 본질을 왜곡하고 조상들의 전통을 율법보다 더 권위있는 것으로 가르침으로써 본말을 전도시켰기 때문이다.
'너희가 ~잠가'로 번역된 '클레이에테'(kleiete; you shut)는 '문을 닫다'는 의미를 지닌 원형 동사 '클레이오'(kleio)의 현재 시제이다. 시제가 현재라는 사실은 그들의 그러한 행동이 관행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것은 또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천국문을 닫는 일에 '항상 매달려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갖게 한다.
그들은 하느님의 율법을 그릇되이 해석하고 가르쳐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율법의 정신에서 떠난 삶을 살도록 만들었으며, 또한 자신들도 천국의 입구에서 멀어지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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