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8. 31. 07:50
은퇴한 지 14년이 지났는데 출근길 전철은 아직도 쑥스럽다.
여전히 익숙하지 않으니 나의 영원한 숙제인가.
알바 사무실에 출근하기 위해 08:17분 검단산행 전철을 타면
종점이 두 정거장밖에 남지 않은 텅 빈 객차라 마음이 편한데,
서울시내로 가는 전철을 타면 마음이 편하지 않으니 말이다.
오늘도 어제와 똑같은 시간에 타서 노약자석에 앉는다.
일반석에 자리가 많지만 출근하는 젊은이의 자리를 빼앗는 거
같아 배낭을 휴대할 때는 가급적 노약자석을 이용한다.
미사역을 지나 상일역에 도착하자 밀려 들어오는 승객들로 객차는
금세 꽉 차고, 내가 혹시 젊은이들의 출근에 부담을 주지는 않는지
눈치가 보여 눈을 지그시 감고 묵언수행(默言修行)을 한다.
옆에 앉은 노인이 잠시 부스럭거리더니 이어폰을 끼지 않고 유튜브를
보기 시작한다.
주변의 젊은이들은 시끄러운 소리에 당연히 눈살을 찌푸리는데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노인의 추태는 계속된다.
아침부터 기분 상할까 잔소리도 못하고 꾹 참는다.
요즘 노인들이 심심치 않게 지하철에서 폭력을 당하는데,
이 정도 상황이라면 두드려 맞아도 말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겠다.
< 부처꽃 >
09;10
남산 트래킹을 하기 위해 장충공원에 들어선다.
통계를 위한 노인 일자리에 참가한 사람들이 돌리는 예초기 소리가
날카로워 약속 장소에서 벗어나 변형된 '돌단풍'을 찍는다.
토종으론 '돌단풍'인데 원예종으로 변신했으니 어떤 이름으로 등장했을까,
찾아보니 '펜타스'로 작명이 되었다.
비 그친 남산은 평화롭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트래킹을 즐기는 사람들의 표정이 여유롭다.
09;30
전 은행장을 비롯한 옛동료 5명이 남산 숲 속으로 들어와 심호흡을 한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애국가에 나오듯이 남산엔 소나무가 많다.
1411년 경기도 장정 3000명을 동원해 100만 그루의 소나무를 심었고,
지금은 18만 그루가 남았다는데 그 18만 그루가 내뿜는 피톤치드가
대단하다.
소나무의 피톤치드가 편백나무보다 더 많이 나온다는 연구발표도
있었지만 그 피톤치드에 더해 만나서 기분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면
더 행복해지는 법이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친구와 친구의 관계는 대개 세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만나면 서로에게 활기를 주고 받는 관계요,
다른 하나는 활기찬 상태에서 만나야 즐거운 관계이며,
세 번째는 만나면 후회되고 지루하고 부담스러운 관계이다.
은행에서 본점부서는 기획과 지원, 통제와 규제 등에 대하여 일을
하기에 조금 내형성인 사람들이 많이 근무한다.
정통 영업맨 출신 민 은행장과 동료 지점장들은 영업을 하기 위해
수시로 사람을 만나는 게 직업이었기에 외향적 성격이 많아 만나도
마음이 편하다.
영업을 할 때 내향성 사람은 본인의 에너지를 쓰지만, 외향적인 사람은
오히려 사람을 만나 에너지를 얻기에 쉽게 지치지 않는다.
그래서 자주 만나 산행을 하는 일행의 얼굴만 봐도 행복해지는 모양이다.
10;30
데크 바로 옆에 수련(睡蓮)이 곱게 피었다.
사람들은 2천여종이 넘는 연꽃 중 '수련'은 물에서 피기 때문에 이름을
水蓮으로 생각을 한다.
물에서 피지 않는 연꽃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수련은 해가 지거나 흐린 날은 꽃을 오므리고 잔다고 해서
잘 수(睡) 자를 쓰는 수련(睡蓮)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육상식물 중에서도 해가 지면 꽃을 오므리고 잠을 잔다 해서 잠 귀신이라는
별명을 가진 '자귀나무'가 있고,
이밖에도 개불알꽃, 봄맞이꽃 등 많은 꽃은 해가 지거나 흐린 날 잠을
자는데 유독 이 수련과 자귀나무는 잠에 관련된 이름을 받은 거다.
잠이라,
요즘 나의 잠자는 습관이 조금씩 변해간다.
주택은행 인사부에 근무할 때는 스트레스로 불면증이 심했지만,
지점으로 나와 신나게 영업을 하다 보니 불면증은 사라졌다.
나는 평소 10시 취침, 새벽 4시 기상이 기본이다.
군대생활, 사회생활을 하면서 깨지지 않은 습관이 조금씩 무너져간다.
자면서 단 한 번도 깨지 않던 내가 요즘은 일주일에 1~2일 정도는
중간에 깨서 소변을 본다.
꾸준한 관리로 전립선 비대증도 없고 정상인데 나이 탓인가?
자기 전에 마시는 물 한 컵을 줄여야 하나.
수면시간을 따져보니 6시간이 채 되지 않는 거다.
전문가는 25세 이상이라면 하루 7~8시간 수면을 권장한다.
숙면(熟眠)의 조건은 머릿속과 뱃속의 비움인데, 생각이 많고 물까지
한잔을 마시는 채움을 하기에 권장시간을 채우기 힘든 모양이다.
11;40
부처꽃을 찍고,
편안한 길을 오를 때 왼쪽 숲 속에 흰꽃이 보인다.
'옥잠화'냐고 묻는데 하얀색이 너무 강렬해 '일월비비추'라고 답을 하면서
검색을 해보니 옥잠화가 맞다.
요즘 들어 자주 보던 야생화 도감을 멀리했다.
나의 자만심으로 인해 기억 회로가 고장 난 모양이다.
핑계를 댈 수가 없다.
황반변성으로 눈이 쉽게 피곤해진다는 이유도 있지만 게을러진 게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기억이 고장났다는 건 게으름의 복수라고 생각한다.
자연에는 비슷비슷한 꽃과 나무가 많다.
그중
비비추와 옥잠화, 산국과 감국, 쑥부쟁이와 벌개미취, 여로와 박새,
창포와 꽃창포, 창포와 붓꽃, 궁궁이와 갯기름나물, 기름새와 억새,
정향나무와 개회나무, 곰취와 동의나물, 단풍취와 단풍나무,
냉초와 산꼬리풀, 전호와 누룩치,
섬개회나무와 수수꽃다리나무, 나비와 나방, 바랭이와 왕바랭이,
쑥부쟁이와 구절초, 구절초와 샤스타 테이지, 칠엽수와 마로니에
열매가 구분하기 어렵다.
남산타워 오르막길에서 만난 칠엽수 열매를 마로니에 열매로 착오를
하고,
이밖에도 가마우지와 쇠가마우지, 백로도 쇠백로, 중백로, 중대백로,
대백로 등 크기로 이름을 부르는데 영 자신이 없다.
며칠 전에는 고대 기둥의 형식으로 이오니아식, 도리아식, 코린트식 중
이오니아식과 도리아식을 혼동했는데,
다행히 우리나라 기둥의 배흘림, 민흘림 형식에 대하여는 제대로 설명을
했다.
나이가 들며 기억의 창고에 저장된 기억을 빼내 오면서 자주 오류를 범한다.
책을 점점 멀리하는 게으름에 대한 복수인 모양이다.
12;00
오늘같이 습도가 적어 시원한 날,
인천 계양산, 용문산, 천마산까지도 보이는데 정작 잠자리와
교앙(驕昻)스럽게 울어대는 매미를 만나지 못했다.
지난여름 많이 내린 비로 잠자리의 유충이 다 사라진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나풀거리며 춤을 추는 나비도 만나지 못했다.
우주의 만물을 만들었다는 조화옹(造化翁)이 심술을 부리는 걸까.
이상기후로 벌이 많이 사라졌다는데 잠자리, 매미까지 보이지
않고 자연이 인간에게 복수를 한다는 생각이 드니 마음이 심란하다.
기상예보보다 두시간 빨리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망가진 기억 회로를 복구하기 위해 서가에서 식물도감을 꺼내
책상 위에 상시 배치하여야겠다.
2022. 8. 31.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