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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있나이다(사 6:1-8)
“하나님은 한쪽 문을 닫을 때에는 반드시 다른 쪽 문을 열어 놓는다” 예전에 유명한 영화인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나오는 대사입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에 다가오는 그 어떤 절망적인 일이라 해도,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절망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 영화에서는 친절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어떤 시련에 빠져 여러분이 도저히 벗어날 길이 없다고 믿는 순간에도 어딘가에 길은 있습니다. 동서남북이 다 막혀 있다는 생각이 들 때 믿음의 사람은 위를 바라 봅니다.
그 때 하나님을 찾을 때요 하나님을 만날 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하셨습니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우리의 삶에는 끊임없이 크고작은 문제들이 다가옵니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한 크든 작든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문제를 안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을 광야나 커다란 바다에 비유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용한 것같은데 폭풍이 몰아치는 전야와 같이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파도가 잔잔할 날이 없듯이 개인이나 가정, 국가에도 그칠 줄 모르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어떤 청년이 성공적인 사역자를 보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언제 뵈어도 의욕적이고 소망적이시기 때문에 함께 이야기하다 보면 아무 문제없이 살아가시는 분인 것만 같습니다" 그때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형제님, 그런 소리마십시오. 가시없는 생선이 어디 있습니까? 가시를 빼고 골라먹는 지혜가 필요한 것뿐입니다" 어느 곳에나 문제는 있기 마련입니다. 오히려 너무 잔잔하면 인생에 진전이 없다고 합니다.
전에 강동석씨라는 분이 8미터밖에 안 되는 작은 요트를 타고 세계의 바다를 일주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신문기자가 언제가 가장 힘들었느냐고 물으니까 바람이 안불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요트는 기름 한 방울 없이 바람의 힘으로만 다니기 때문에 바람이 불지 않으면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일주일 동안 바람 한 점 불지 않아 1미터도 가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꼼짝없이 제자리에서 바람을 기다리며 일주일씩, 며칠씩 있어야 하는 그때가 제일 어려웠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람이 너무 불어도 힘들지만 너무 안 불어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문제를 만날 때에 너무 두려워만 하고 절망을 할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통해 새로운 삶을 찾는 그런 믿음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살아있는 물고기는 절대로 물결을 따라서 떠내려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물결을 헤치고 거슬러 올라갑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사야가 그러합니다. 남유다왕국에서 52년 동안 왕노릇하면서 천하를 호령하던 웃시야 왕이 하루 아침에 문둥병이 걸려 죽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던 중에 세 가지를 발견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발견했고, 자기를 발견했고, 자신이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 모두에게 인생의 문제 앞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는 시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이사야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자연을 통한 계시이든 특별 계시이든 하나님께서 주신 이 땅의 모든 계시는 하나님 당신을 바로 알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엡1:17은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겔 16:62)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 내가 여호와인 줄 네가 알게 하리니”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죽어가는 영혼을 살리고 일깨우기위한 하나님의 방법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축복을 주시거나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은 사람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먼저 만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되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다는 의미입니다. 일반적 관계가 아니라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내속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나를 죄에서 구원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 때 비로서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호세아, 베드로, 바울 모두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비로서 자기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되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지 사명을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모두가 평안하거나 안일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난과 실패와 역경과 인생의 한계에 부닥쳤을 때 그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얍복강 앞에서 죽음의 위기를 당할 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베드로는 밤새도록 빈그물을 끌어올리고 돌아서려는 그 아침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본문의 이사야가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 것도 웃시야 왕의 죽음을 통해 큰 충격을 받았을 때입니다. 인생의 위기가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본문1절에 보면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라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웃시야 왕은 16세에 왕이 된 사람입니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하였기에 특별한 방법도 기교도 모르는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고 겸손하던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 52년 동안 왕노릇을 하면서 나라가 부강해졌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부강해지자 점점 마음에 교만이 들어왔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다가 결국은 왕이었지만 문둥병에 걸려 비참한 인생을 끝내고 말았습니다. 망해져 가던 나라가 이토록 부강하게 된 것은 모두가 나의 지혜요, 나의 힘이요, 나의 능력이라고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했습니다.
웃시야 왕이 성전에 들어갔다가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서 백성들을 축복하며 분향을 하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는 내가 천하를 호령하는 왕인데 저 하찮은 제사장들도 성소에 들어가는데 내가 못들어 가겠나 하고 성소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 때 제사장들과 신하들이 울며 그를 말렸습니다. 여기는 거룩한 곳으로 구별하여 제사장만이 들어가는 곳이라고 만류했지만 웃시야 왕은 교만에 눈이 어두워져서 들어가지 말아야 할 성소에 들어가서 분향을 하고 돌아서는데 온몸에 문둥병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비참하게 인생을 끝맺었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왕도 하나님께서 손을 떼고 떠나시니까 하루 아침에 죽음으로 끝맺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이사야는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앞에 제단 뿔을 잡고 기도하던 중에 하늘의 신령한 광경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때 이사야의 영안이 열렸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천군 천사들이 하나님 보좌에 둘러서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사야는 웃시야의 충격적인 죽음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당면한 문제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이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 민족이 현재 처해 있는 여러가지 경제적 어려움도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렘 33:6에 보면 하나님께로 돌아와 너희가 부르짖으면"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고 했습니다. 이 성읍이 어디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있던 그 땅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바로 우리가 살고있는 삶의 현장을 하나님께서 치료해주시고 고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이든 간에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오히려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 55:6은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만한 그때,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그때는 우리가 잘 되고 편안하고 안일한 자리에 있을 때가 아니라 고난과 역경으로 곤고하고 길을 찾지 못해 불안과 두려움에서 떨고 있을 때입니다. 바로 그때가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처럼 여러분들도 이 어려운 역사의 한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과 은혜가 가득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이사야는 자기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가장 먼저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사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나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알면 나는 그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알게 되면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뜨거운 사랑을 받은 나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역사의 통치자이신 것을 알게 되면 나는 그의 백성이며 그의 종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선지자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신령한 모습을 보는 순간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난 날 어둠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하나님의 빛이 마음에 비춰올 때에 자신의 추한 모습을 깨닫게 됩니다. 죄인됨을 깨닫고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문 5절에서 그는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하고 통곡하면서 울고 있습니다.
가장 큰 은혜는 영적인 눈을 떠서 나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의 허물을 보기에 앞서 나의 허물을 볼 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가정에 문제가 생기고, 교회에 문제가 생기고, 사회에 문제가 생겼을 때, 모두가 나 때문이라고 하는 책임의식을 갖는 것이 바로 은혜받은 사람의 지혜입니다. 너 때문이라고 하는 곳에서는 전혀 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는 자기 입술이 부정한 것을 발견합니다. 죄인된 자신을 보았습니다.
때묻고 망하게 된 자기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동안 죄악이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가로막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도 이런 발견이 있어야 합니다. 앉은뱅이 같은 나의 신앙의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혈기많은 자기를 발견해야 합니다. 신앙의 나태해진 나의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열매없는 자신의 모습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사야는 썩어져 가는 자기 심령의 부정한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망하였다고 가슴을 치며 울었습니다. 남의 가슴을 치지 않고 자기 가슴을 치며 울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우리 사회 문제도 모두가 너 때문이라고 남을 향해서 손가락질 하는 데에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 때문에"라고 한 손가락으로 남을 정죄할 때 나머지 네 손가락은 항상 자기를 향해 정죄하고 있습니다. 남을 저주하고, 남을 흉보고, 남을 욕하는 그 시간에 자기는 더 많은 피해와 손해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먼저 보는 것이 은혜입니다. 자기를 발견하면 인생의 문제는 해결됩니다.
영적으로 보면 병 중에 가장 무서운 병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남만 비판하는 병입니다. 빨리 발견하면 고칠 수 있는데도 병든 줄 모르고 살아가다가 고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마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자기의 부정하고 죄된 모습을 발견하고 자기의 가슴을 치며 허물을 깨닫고 애통하면서 하나님 앞에 울 때에 이사야의 입술에 불이 임했습니다. 이 불은 은혜의 불이요, 성령의 불이요, 능력의 불이었습니다. 이 불이 모든 허물과 죄악을 다 사해주었습니다. 이 불이 주님을 위해 살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큰 은혜는 바로 나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의사는 정확하게 진단하는 의사입니다. 병의 원인을 모르고 치료하는 의사가 있다면 어리석은 의사입니다. 그런데 병의 실상을 정확하게 진단한다면 치료법도 분명하게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면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 서야 할 자기 위치를 발견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바로 깨달을 때에 이사야의 입술에 불이 임했던 것같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이사야는 그 시대에 해야 할 사명을 발견하였습니다.
8절에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라고 하는 불붙는 고백이 나옵니다. 언제 이런 사명의 불이 붙었습니까? 바로 그의 입술에 불이 임할 때였습니다. 은혜의 불이 그의 가슴 속에 타오를 때에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이사야는 그 시대에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악과 어둠이 깊어가고 절망과 좌절에 빠져있는 이 백성, 이 시대를 향해 누구를 보내야 하며 누가 우리를 위해서 갈 것인가 하고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자기의 향락과 쾌락이 아니라 정말로 그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 생명들을 건지기 위해 내가 여기 있으니 나를 보내 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 만물은 모두가 생명의 근원이 있고 나름대로의 사명이 있습니다. 물고기는 물이 근원이라 물을 떠나면 죽습니다. 나무는 흙이 근원이라 생명을 흙에다 두고 뿌리를 내려야 삽니다. 인간은 땅을 밟고 있지만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야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사명이 있습니다. 꽃나무는 꽃피는 사명이 있고 과일나무는 열매 맺는 사명이 있습니다. 학생은 학생의 사명이 있고 선생은 가르치는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에게는 성도의 사명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명에 붙들려 기도하기를 (행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따라 살아야 합니까?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나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발견해야 합니다. 사명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사명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깨달은 사람은 인생을 허무하게 살지 않고 값지게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불이 이사야에게 임할 때에 그는 서슴치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고 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행 27장에서 유라굴로의 무서운 풍랑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바울을 살려 주신 것은 바울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바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역사 속에서 해야 할 사명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이 남아 있기 때문에 살리신 것입니다.
서울 명동 성당 성 바오로 수도원에서 가톨릭 대상을 받은 최경락씨(70세가량)는 구태여 말하자면 거지이지만 아무도 그를 거지라고 부르지 못합니다. 그는 세상의 온갖 부자들보다 더 큰 사랑의 마음과 실천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과 생년월일조차 분명하지 않은 그의 호적은 살아있는 것으로 등록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가장 뜨거운 사랑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일제의 징용에서 돌아온 후 충북 음성군 금왕면 변두리의 다리 밑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그 자신도 징용에서 당한 폭행으로 정신 기능이 온전하지 못했지만 다리 밑에 모여 있는 절름발이, 맹인 등 자신보다 더욱 불행한 걸인들을 위하여 35년 동안 동냥밥을 얻어다 먹이고 그들의 병수발을 했습니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얻어먹을 수 없는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신념으로 자기보다 불행한 그들의 보호자 노릇을 해 왔습니다. 그 후 이 마을의 천주교회에 부임한 오웅진 신부는 이 위대한 걸인의 모습에서 큰 충격과 감명을 받아 결국은 현재의 음성 꽃동네로 발전하였습니다.
1986년 10월 30일 농촌운동가 채규철이 김해의 대한축산 양계장을 견학하고 부산 사회관에서의 강연을 위해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일행을 태운 버스가 하단 근방을 지나자 차가 갑자기 꺾여지더니 공중에서 몇 바퀴를 굴렀습니다. 차안에 있던 시너통이 펑 소리를 내며 폭발과 동시에 불이 붙어 차 안은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채규철은 살아야겠다는 의식만으로 차창 밖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그는 모래 언덕에 앉아 붙은 불을 손으로 털다가 다시 차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미처 나오지 못하고 발버둥치는 친구들을 끄집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친구들을 구한 후 언덕 위를 기어오르는 중 차창의 파편이 날아와 그의 오른쪽 시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근처의 농민들이 그를 헌 가마니에 눕혀 지나가는 차를 세웠으나 좀처럼 태워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잡은 택시 안에서 그는 갑자기 리빙스턴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사람은 그의 사명을 다하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그는 갑자기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과 죽음은 하늘에 달려 있으며 이 세상에서 할 일이 있으면 사는 것이고, 없으면 미련 없이 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나를 이 땅에 살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건강이 있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나에게 건강을 주셨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게 지혜가 있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 나에게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시간이 많아서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시간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고 있음은 다른 사람보다 내가 의롭고 잘나서가 아닙니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남았기 때문에 살고 있는 것이고, 또 살 가치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사야처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하는 불붙는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되겠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이 어려운 시대에도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런 사람을 책임져 주십니다.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때, 인생의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을 발견하고 내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을 찾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입니다. 내가 이땅에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꼭 내게 유익해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이기에 내 삶이 힘들고 어려워도 내게 맡겨주신 귀한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내가 살아있는 이유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저 아무런 이유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주신 사명앞에 “주님 내가 여기있나이다”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부르신 부름의 사명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